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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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10/24 19:19

며칠 간 피똥싸면서 한 요약과제 =_= 사실 매일 붙잡고 있진 않았고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만... 원문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하기 부담스러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제출 전날 피토하며 겨우 끝 마치게 되었다. 요약의 질이 높다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일단 텍스트를 내가 풀어서 한 번 써봄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해 안되는 소리는 거의 다 뺐으니... 흑. 어서 번역본이나 나와라.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by Judith Butler
1장 ‘An Account of Oneself’의 요약


  행동하는 것에 대한 탐구, 즉 도덕 철학은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는가? 오늘날 도덕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도덕적인 탐구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아도르노는 “도덕적 탐구는 언제나 공동체의 삶에서 도덕의 행동 규범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의문에 부쳐질 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집단에토스는 언제나 보수적이며, 여러 난관과 불연속적인 것들을 억압하는 허위의 통일성을 강제한다. 그렇기에 집단에토스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을 때에만(이때 집단에토스는 인용부호 “”를 달고 등장한다) 그래서 이 보수적인 에토스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 때에만, 도덕적인 질문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부호를 단 “집단에토스”는 이제 자신의 집단성 혹은 공통성이라는 가상(假想)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도구화한다. 또한 “집단에토스”는 일단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하면 폭력이 되어버린다. 폭력으로서 “집단에토스”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현재에 강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빛을 가리운다. 여기서 도덕성은 폭력적인 “에토스”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출현한다.

  아도르노는 폭력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이 출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정식화도 제공한다. 즉, 폭력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에 대한 요청에 대한 맥락에서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이란 것이 개인을 포함하지 못하기에 “보편”에 대한 요청이 곧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게 되는 경우, “보편”은 곧 폭력이자 개인과 상관없이 단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현존하는 사회 조건을 무시하는 “에토스”는 폭력이 된다. 이런 “에토스”가 특수성에 반응하지 못하고,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개인들에게 전유될 수 없을 때, “에토스”는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개정하기 위한 경합의 장소가 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보편적인 것(예컨대 사회적 조건, 도덕규범 등)과 특수한 것(예컨대 ‘나’) 사이의 어긋남과 불일치는 언제나 도덕적 질문을 위한 장소이다. 아도르노에게 도덕성은 어디까지나 경합에 열려 있는 일련의 보편 규칙을 개인들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렇게 개인의 자리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시켜 초연한 존재로 다루는 실수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점을 잊지 않는다. 물론 ‘나’ 없이는 도덕성이 존재할 수 없지만, ‘나’는 자신을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도덕규범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 혹은 도덕규범은, ‘나’를 인과적으로 생산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나’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는 ‘나’를 초과하고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에 이미 항상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가 도덕규범에 순응해야한다거나, 도덕규범과 궁극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나’를 이해함에 있어 그러한 도덕규범 혹은 “에토스”의 발생적 근원과 사회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에토스”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사회이론은 언제나 ‘나’가 생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할 때, ‘나’는 언제나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히 인식론적 질문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체가 규범들을 전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주체의 존재론적 장을 제공할 수 있는 규범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과연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주체가 될 수 없는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규범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까? 사회적 존재론의 영역에서 주체가 스스로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과정에 규범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을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Scenes of Address)

  여기서는 주체가 도덕성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주체의 생산에 있어 도덕성이 갖는 힘에 대해서 고려해볼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반추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상처 받고 고통 받을 때에만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나 고통 겪는 사람들의 옹호자들은,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를 질문한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은 기억을 만든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양식은 자아가 곧 고통의 원인이므로 특정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특정한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다름 아닌 어떤 기성의 권위이다. 정의와 처벌의 체계로서 권위는 우리를 호명하며, 우리는 그 권위에게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써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 행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게 된다. 요컨대, 니체에게 설명가능성/책임성(accountability)은 기성 권위의 위협과 비난을 받은 뒤에야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니체식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는 아니다. “너”를 알고 이해하려는 욕망과 처벌이 아닌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고 서술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마주할 때에만 설명을 시작한다.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해 나에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 즉 “그게 너였어?”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만, 우리는 설명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자아를 설명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서사(narrative)의 형식을 취하며, 말이 되도록 사건의 이행과정을 설명할 능력 뿐 아니라 서사의 목소리와 권위에도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침묵할 수도 있다. 침묵은 나에게 던져진 질문의 형식과 또 질문을 던진 사람에 대해 그리고 질문자가 호소하는 권위의 정당성을 의문에 던지거나, 혹은 침묵 속에서 질문자가 끼어들 수 없는 자율성의 영역을 보존함으로써 장면 안에 존재하던 관계를 바꾸어 낸다. 이렇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에 대해 진술을 거부하는 행위가 갖는 여러 차원의 의미는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scenes of address)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니체는 이러한 ‘대화’의 장면, 즉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을 완전히 고려하지는 않았다. 니체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사법적 체계의 처벌 위협에서만 도덕적 질문이 만들어지고 설명이 시작될 뿐이다. 이러한 위협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도덕 뿐 아니라 영혼의 국면까지 생산한다. 니체는 이러한 사법적 체계와 처벌 위협의 도덕체계에 귀속되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구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공격과 같은 범위에 걸쳐 있고, 삶의 근원으로서 공격을 금지하면 삶 자체도 금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고통을 입히더라도, 니체에게 이러한 공격과 고통은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분이며 심지어 일종의 생명력을 구성하기도 하므로 쉽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덕성은 차라리 부정적인 의미까지 갖는다.

  푸코는 감옥의 훈육 권력에 대해 설명한 바 있지만, 반성적 주체의 출현에 있어서 처벌 장면을 일반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푸코는 도덕과 ‘양심의 가책’이 어떻게 니체 식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말년의 푸코에게 주체란 일군의 코드와 규정, 혹은 규범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는데, 주체는 (1) 자기의 구성을 제작(poiesis)의 종류로 드러낼 뿐 아니라, (2) 자기제작(self-making)을 더 넓은 비판의 맥락에서 움직이도록 한다. 즉 푸코의 자기제작은 무로부터(ex nihilo) 급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떤 규범에 대한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의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는 늘 자기 자신의 형성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늘 윤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과정을 지지하는 “주체화의 양식”과 “자아의 금욕주의” 같은 자기활동성의 형식들이 도덕적 행위를 구성한다. 또한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실천 과정에 있어서 ‘비판’은 주체가 속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지평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아의 미학에 관여함으로써 “진리의 정치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의 과정 안에서 주체의 탈종속화를 보장”한다.

  푸코는 도덕을 니체처럼 창조적인 충동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니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도덕이 창안적(inventive)이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푸코에게도 주체화/종속화라는 푸코의 설명에서 보듯이 “나”는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생성될 수 있지만, 이러한 생성 과정은 니체처럼 자신을 꾸짖고 자책하는 심리적인 행위성의 결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아가 어떤 외부의 질문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만들고 형성하는가하는 문제는 열린 질문까지는 아니어도 또 하나의 도전이다. 요컨대, 도덕규범이 필연적으로 주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주체가 이러한 규범을 자유로이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방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택할 수 없었던 조건들과 갈등하고 투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만 도덕/윤리적인 주체는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형성과 행위의 구성 맥락이 완전히 자기에 정초해 있지 않다면, 그래서 주체가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하고 자기 스스로도 완전하게 인식해낼 수 없다면, 이러한 주체에게 행위에 따른 개인적·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주체는 윤리적 고려와 인간의 행위성 자체를 훼손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을 불가능한 기획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불투명성은 어쩌면 주체가 관계적 존재, 즉 관계성의 근본적인 형태를 요구하며 관계의 맥락에서 형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불투명하다면, 또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가 윤리적 책임감의 현장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에 대해 불투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주체는 윤리적으로 속박되고 이 속박을 유지한다고 말이다.


푸코적 주체(Foucaultian Subjects)

  푸코에게 자아구성의 문제에서 자기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진리체제(regime of truth)이다. 진리체제의 용어는 어떤 존재의 형식을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의 여부를 사전에 결정하면서, 주체의 본 모습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진리체제가 제공하는 규범은 자기제작에 따르는 일군의 결정에 틀과 참조점을 제공하면서 협상에 열려 있을 뿐, 우리를 결정론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코의 핵심은 우리와 진리체제의 규범이 언제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 외에도, 진리체제와 맺는 모든 관계가 곧 나와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다. 따라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자기 반성적 차원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진리체제는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를 실현하고 통치하지만, 이 통치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제작의 과정 속에서 항상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체제에 대한 의문은 진리체제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즉 진리체제를 문제 삼는 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이며, 이는 곧 나 자신에 대해 설명(account)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가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은 때로 자신의 존재조건과 관련을 맺는 진리체제와 자신을 동시에 의문에 던지면서 주체로서 인정불가능성을 감행하는 것이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인정가능한 주체인지에 대해 의문에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와 타인들이 진리체제 내부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규범은 나-너(타자)라는 이자 관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규범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총체성이나 불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정의 실천 속에서, 타자의, 혹은 타자라고 하는 인정불가능성이 발생시키는 인정의 붕괴와 파열이 진리체제의 규범적 지평을 문제 삼는 경우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보지 못한 점이지만) 다른 이를 인정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 즉 현존하는 진리체제에서는 언제나 충족될 수 없고 실패하는 상호 인정에 대한 욕망과 투쟁은, 진리체제의 규범들을 비판적으로 심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진리체제를 열어놓는 것은 진리체제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정욕망 속에서 진리체제 속의 나를 문제 삼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곧 미덕의 신호이자 윤리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진리체제에 대한 논의를 일인칭 관점을 택한 윤리적인 질문의 맥락에서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이자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을 단순한 형태로 직접 던지게 되면, 나는 사회적인 규범성의 영역 뿐 아니라 권력의 문제 틀에도 즉각 포획된다. 장면 속에 “나”와 “너”가 존재하더라도, 규범적인 프레임이 이 출현과 조우에 필수적이라면 규범은 나의 행위를 규제할 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만나는 장면의 출현도 좌우하게 된다. 또한 윤리의 영역은 사회적인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은 방향을 쉽게 상실한다. 이런 경우 만약 “나”가 “너”에게 인정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는 나 자신의 사적 근거에서 인정을 제공하지 않게 된다. “나”는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규범에 종속되며, 따라서 “나”는 어디까지나 규범의 행위성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가 규범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정도만큼 “나”는 규범에게 사용된다. “나”는 “너”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결국 내가 규범과의 싸움에 휘말려들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규범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포스트 헤겔적인 질문(Post-Hegelian Queries)

  헤겔이 지적하듯 인정은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동시에 나는 인정을 받게 되며, 또한 내가 인정을 제공한 형식도 잠재적으로 나에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두 주체 사이에서 인정이 가능해질 때 암묵적인 상호성의 조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정(recognition)은 헤겔이 지적하듯이 나와 타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호적인 행동에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구조적 동일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alterity)과의 만남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타자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헤겔적인 타자는 언제나 외부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탈-아적(ecstatic)이며, 따라서 나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에서 나 자신을 나의 밖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를 말하고 “나”를 알고 또한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일인칭 관점이 탈구되는 일인칭 너머의 관점에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나도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이며, 따라서 나 자신으로 귀환하는 여정의 최후의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겪는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되며, 따라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에는 과연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이 존재한다. 이렇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조건은 우리가 우리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 밖의 외부적 매개, 즉 규범이나 관습의 힘에 의해서만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헤겔적인 인정의 주체는 이렇듯 불가피하게 상실과 엑스타시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교환은 교환에 참여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규범의 언어와 관습, 그리고 침전에 의해 조건화되고 매개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묘사하는 인정투쟁은 다름 아니라 이자 관계가 사회적 삶을 이해하기 위한 참조점이 되기엔 부적합하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이자 관계에 대한 천착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그 무엇, 예컨대 ‘인륜성(Sittlichkeit)’이다. 다시 말해, 이자 관계의 교환은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어떤 규범을 향한다. 또한 인정의 무대에 서기 전에 서로를 인지하고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로를 독해할 수 있는 시각적 틀, 즉 이자 관계를 초월하는 규범 안에 들어갔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타자는 시각 장의 규범성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나의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내적 능력’을 통해서 나에게 인정을 수여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반응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시각 장의 규범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시각 장의 규범성은 타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인식론적인 장일 뿐 아니라 또한 권력의 작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개인의 얼굴은 쉽게 읽히고 다른 이들은 쉽게 읽히지 못하게 되는 걸까?


“너는 누구인가?”("Who Are You?")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정에 대한 사회이론은 주체의 인지가능성에 있어 비개인적인 규범이 작동한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실제 일상에서 우리는 주로 가까운 이들과의 생생한 교환 속에서 규범과 접촉하고 타자를 만나며, 우리가 누구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카바레로는 이러한 인정의 질문이 마치 사람됨의 그릇에 특정한 내용을 채워야 되는 것인 양 우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카바레로가 보기엔 질문을 던질 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 자체가 이 질문의 함의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한다.

  상호 인정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질문은 직접적인 질문으로, 이는 타자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타자관은 타자의 독특함과 대체불가능성을 가정하면서, 헤겔식의 상호 인정 모델이나 타인에 대해 더 일반적으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제한한다. 또한 이 질문에 함의된 ‘누구’라는 것은 이타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누구’냐는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처럼 도덕적 책임의 귀속과 설명가능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알려질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카바레로는 타자에 노출되는 존재로서, 그리고 취약한 존재로서, 또한 서로의 독특성(singularity) 안에서, 어떻게 이 필연적이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만남을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살핀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갇혀서 오직 나에게만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너”를 위해, 그리고 “너”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 속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나”가 말을 걸 “너”가 없다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너”와 연관해서만 “나”를 지칭할 수 있고, “너”가 없다면 “나”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성을 삭제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헤겔이 논의하는 바 이자 관계에서 사회적 인정이론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논의이다. 카바레로는 오히려 사회적인 것을 이자 관계에 정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카바레로는 그래서 “너”를 무시하고 “나”의 권리만을 칭송하는 모든 개인주의적 유파는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타락과 “너”의 우연성을 회피하는 대신 “우리”라는 집단적인 대명사를 특권화하면서 내부의 도덕에 천착하는 유파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쓴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너희들은 가능한 우리 편이며, 그들은 적대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나는 꼴사납고 너는 물론 불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너”라는 타자를 만날 때 “나” 자신을 드러냄으로써만 나 스스로의 독특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신체성에서 나온 삶의 특질이므로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적 영역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독특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카바레로가 보기에 자신의 사회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공성의 일부분이다. 또한 카바레로는 “나”의 독특함도 타자에게 드러나지만, 타자의 독특함도 “나”에게 드러난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것 때문에, 즉 우리의 독특성 때문에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독특성을, 나 스스로가 만남의 장면에서 드러났음을, “나”와 “너”가 서로의 독특성 때문에 묶여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가능하게 만들고자 할 때 사용하는 규범은 완전히 내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규범이 출현하는 시간은 내 삶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규범은 나의 생과 나의 죽음에 무관심하며, 나와 다른 시간에 존재하기에 나의 시간을 가로막기도 한다. 푸코는 이렇게 적는다. “담론은 삶이 아니며, 담론의 시간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담론으로서 제시하는 “나”에 대한 설명은 살아 있는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의 말은 내가 그 말을 할 때 탈취되어, 내 삶의 시간과 같지 않은 담론의 시간에 차단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규범의 무관심이나 방향상실 같은 것이 나의 생존을 추동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은 담론을 통해 회복되거나 확장될 수 없지만, 이는 불가지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불가피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나”의 것으로서의 “나”의 관점이 차단되고 탈취되는 것은 무엇이 인정할만한 설명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규범의 작동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규범에 어느 정도 순응하거나 협상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에서 설명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것에서 몰수되는 경우에만 완성될 수 있다. 오직 탈취 속에서만 “나”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을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서사는 “나”의 것이 아닌 무엇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만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를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의 독특함과 서사적 권위는 이렇게 규범의 관점과 시간에 어느 정도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다만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태를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그것은 지시체의 회복 불가능성과 폐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불가능성은 서사를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라캉이 얘기하듯, “허구적 방향”에서 서사를 생산한다. 이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차 반복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개연성 있는 판형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 여러 판형 중에 어느 것만이 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또한 내 서사의 조건, 내 서사의 주제에 종속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에 몸이라는 지시체가 있다. 몸은 내가 가리키고 지시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다시 말해 심지어 내 몸이 어디에 갔었고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함에도 완전히 서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몸이 있다. 따라서 몸이 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온전한 회상이 박탈당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을 정리하자면, 나의 독특성을 설립하는 서술 불가능한 (1)드러남(exposure)이 있으며, 내 삶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거듭하여 인상/자국을 형성하는 회복 불가능한 (2)일차적 관계(primary relations)들이 있다. 따라서 나의 (3)부분적인 불투명성(partial opacity)을 확립하는 역사가 존재한다. 여기서 (4)규범(norms)의 존재를 고려해야하는데, 규범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촉진하지만, 내가 지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독특성의 역사를 확립하려는 순간 나를 대체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탈취 현상은 내가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설명함으로써 내 설명의 서사구조가 (5)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structure of address)에 의해 대치된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구성적 통약불가능성(constitutive incommensurability)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나의 이야기가 뒤늦게야 도착하도록 만들고, 내가 서술하려고 하는 삶의 구성적 출발점과 전제조건의 어느 정도를 놓쳐버리는 방식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서사가 갑작스러운 사건 가운데(in media res)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의 손실을 회복하고 재구성한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기원을 픽션으로 만들고 우화로 만든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내고, 이 새로운 형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과거의 삶을 가진 “나”에 서사적인 “나”를 덧붙인다. 이러한 서사적인 “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계속 이야기에 효과적으로 더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서사적 관점에서 다시 나타나고, 또한 이렇게 더해지는 서사적 “나”는 문제가 되는 서사에 관점을 정박할 수 있는 순간에도 완전히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나에 대한 설명은 내가 정확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종속되어 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사적 재구성에 대한 나의 노력은 영원한 개정의 과정이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언제나 나에게 있으며, 또 나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윤리적인 실패로 간주해야 할까? 내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완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윤리가 소멸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투명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언어와 ‘너’에게 더욱 단단하게 묶어줄 관계성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윤리는 “자아”의 조건이 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눈멀게 하는 어떤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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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9/21 16:35

EBS 지식채널ⓔ - [버튼을 누르지 않은 이유] 스크랩




"피실험자들이 실험자가 내리는 명령에 반항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인성이 아무리 정의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시민들이 만약 옳지 않은 권위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그들 역시 인간의 야만성과 비인간적인 태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탠리 밀그램 (이 실험의 호스트)


심리학개론 수업 들으면 종종 언급되는 이 '유명한' 실험이 얼마나 올바른지 얼마나 적합성이 있는건지 얼마나 현실적용성이 있는 건지 하는 문제들은 일단은 (이 실험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니) 차치해두자. 어쨌든 스탠리 밀그램의 결론은 나름대로 유의미한 것 같다.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나온다는 라이히의 분석처럼.

그러나 밀그램이 "권위자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권위자와의 관계를 단절"해도 '안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절"하는 건 엄청난 영웅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나의 양심에 비추어보았을 때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권위자의 권위와 '나'를 분리시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단절" 행위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불이익들을 감수하는 일들은 오로지 개인에게 맡겨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단절"은 권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권위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권위를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곧 '배신'이기 때문이다. '배신'. 그로인해 '배신자'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왜소한 개인에게 일종의 주홍글자의 낙인으로 부여된다. ㅡ물론 예컨대 '장기수' 같은 경우에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한겨레신문사에서 나온 <배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서점에서 살짝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예전에 '삼성'의 내부를 낱낱이 고발했던 한 변호사의 글, 그리고 정신의학 전공의의 글을 읽었다. 이중 후자의 글은 재밌게 잘 보았다. '배신'이라는 말의 심리학이랄까. '신뢰'란 건 어쨌거나 정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ㅡ한번 '배신'이라는 말로 낙인이 찍히면, 그리고 그것이 널리 한 커뮤니티에 일종의 서사적 권위를 지닌 채 전달이 된다면, '매장' 당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양치기 소년 우화, 박쥐 우화 등등도 우리에게 '신뢰'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배신'의 위험성을 가르쳐주는 '교훈적'인 역할을 하지 않던가.

게다가 이런 식의 '매장'은 단지 '마을'이나 무슨무슨 모임,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 같은 소규모 커뮤니티 뿐 아니라, 소위 '지식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교수의 비리(?)를 언론에 전달했던 한 국문과 대학원생이 완전히 그 커뮤니티에서 축출당했던 (그리고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를) 것처럼. 사람 모인데면 뭐 사실 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배신>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글에는 이런 식의 질문이 나온다. 한 번 배신했다고 알려진 사람을 과연 당신이 속한 곳에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그래서 결속력 있고 지속성 있는 (제도화 된) 시민 단체, 시민 운동 내지는 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제도-장치로는 보호될 수 없는, 그런 "단절" 된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더 중요하게는, 집단적 "단절"을 위해서. 급진주의 정치를 표방하며 (제도화 된) 시민단체의 '보수성' 내지는 심각한 '한계' 등을 비웃는 것은 쉬운일 이지만, 그런 식으로 빈정대고 비꼬기'만 하는' 건 역시 자위는 할 수 있지만 큰 도움은 안되는 일이다. 그것은 잡스러운 냉소주의적 좌파 에고이스트로 가는 길이다. 우리에게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것도 안정적인, 소속감을 주는, 그런 '커뮤니티'. '저항적(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이라면 더 좋고...

읭? 근데 왜 글의 결론이 이렇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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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8/02/09 23:43

문득 문득 생각이 나던 것인데, 어쨌든 한국에서 최근 몇 년간 증가하고 있는 '깨끗한 것'에 대한 집단 강박은 소름끼치는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핸드워시 제품 같은 항균제품의 판매량 증가, 혹은 흡연에 대한 신경증적인 거부 같은 현상들, 정리하자면 세균, 냄새, 박테리아, 추한 것, 이 모든 것들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려는 최근의 현상은, 어떤 무엇의 알레고리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깨끗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호오(好惡)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깨끗한 것에 대해 강박을 가진 사람들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더러운 것에 대해서 잠재적으로나마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세균이 득실득실하고 비위생적이며 거리의 '미관'을 해친다고 선전함으로써 노점상 철거를 정당화하는 논리도 이와 연결될 수 있다. 또한 '노인 냄새' 난다고 노인들을 실버타운 따위의 '미화된' 장소로 게토화하는 것이라든지, 심지어는 이주자들에 대해서도 더럽다는(잠재적 범죄자 취급, 피부색에 대한 혐오, 다른 냄새에 대한 거부 등)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의 차별을 다른 의미로 정당화 할 수 있게 된다ㅡ외국인에 대한 전통적인 편견을 정당화해주는 기제는 냄새였다. 더러운 것에 대한 의미망이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존재한다면, 무엇이 더러운 것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결국 사회적 의미-투쟁으로 연결될 것이다. 거기서 정치가 발생하는 것이고.

이런게 더 무서운 것은, 그냥 각 개인-자아들이 그냥 싫으면 싫다는, 아주 평범할 수 있고 사소할 수 있는 그런 이유로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엔 논리적이라거나 이성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법칙인가. 싫다는 데 뭐 어떻게 할 것인가. 더럽다는 데 뭘 어쩔 것인가. 혐오스럽다는 데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도 잘 컨트롤 할 수 없는) '신체'가 거부한다는데. 참 뻔뻔한 변명들로 느껴지지만, 이런 말들 속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차라리 예전에 "~가 정상적이잖아", "~가 당연하잖아" 하는 식으로 정당화되는 차별 의식은 공박할 수나 있었지...

게다가 오늘날엔 개인의 취향에 대해서 거의 신격화된 존중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싫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식이든 접근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제는 그런 접근들을 '폭력'이라고 의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사람들이 자아의 경계벽을 강하게 쌓여 간다는 점,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나누는 이 구분법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점, 깨끗한 것에 대한 강박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앞으로도 국민-민족국가는 이어질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파국의 시나리오 밖에 쓸 수 없다...


덧) 막상 써 놓고 나니 좀 오버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어쨌거나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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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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