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독서노트 / 2010/07/11 12:32
근대 서구의 '미적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의 과학과 미학에 그 연원을 둔다. 근대 과학의 이식론은 그때까지 사물에 부여되었던 의미들을 벗겨내고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18세기 후반의 낭만주의에서는 계몽주의의 전도가 일어난다. 대상에 미적 태도를 견지하고, 미적으로 평가하는 자세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루는 인식적 관심, 다른 하나는 선인가 악인가를 다루는 도덕적 관심, 마지막으로 쾌인가 불쾌인가 하는 취미 판단. 칸트는 세 가지 판단이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역이 분명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세 범주의 혼용 속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괄호 넣기"라는 개념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에서부터 연유한 것으로, '무관심'을 그 기본으로 한다. 즉 사물의 어떤 측면엔 관심을 잠시 꺼두고, 특정한 인식론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주관의 능동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미는 감각적 쾌적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무관심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방기하는 데서 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것은 칸트의 숭고론인데, 숭고라는 미적 판단은 감성적 유한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무한함에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숭고는 이성적 무한성을 자기와 대립하는 대상에서 찾는 '자기소외'이다. 여기서 얼핏 보기엔 불쾌한 대상에 대응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주관적 능동성이 적극적으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적 태도는  역사 속에서 구구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를 심미주의적인 태도라고 한다면, 인류학·민속학이라고 하는 쌍 개념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식민주의·제국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새디스틱한 지배로 간주되는 식민주의·제국주의는 미적 태도에서 자신의 최고조에 달한다. 타자를 오로지 미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심미주의자는 일견 반식민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주의의 실현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그 기원을 은폐하며,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괄호에 넣은 것들을 타자 그 자체나 타자에 대한 동경과 혼동한다. 파시즘 같은 경우도 일견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을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괄호를 벗기고 다시 괄호를 씌우는 비평적 과정이다. 페미니즘, 게이 이론은 통상의 남성 독자들이 괄호 속에 언제나 넣어두었던 것들, 그리고 괄호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괄호를 벗길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괄호를 벗긴다는 것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을 잠시 괄호에 넣고 다시금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럴 때에도 비판은 소거되지 않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8/02/04 21:47

<대학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을 전부 옮겨둔다. 출처는 모두 www.snunews.com


1. 슬라보예 지젝

more..

2. 주디스 버틀러

more..

3. 조르지오 아감벤

more..

4. 알랭 바디우

more..

5. 가라타니 고진

more..

6. 페터 슬로터다이크

more..

7. 안토니오 네그리

more..

8. 비토리오 회슬레

more..

9. 장 뤽 낭시

more..

10. 자크 랑시에르

more..

11. 정리

more..



이 "21세기의 사유들"이라는 거창한 기획을 한 학기 내내 쭉 지켜보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대체 이 기획을 '왜 했나' 싶기도 하다. 때로 재미도 있었지만. 확실히 이 기획은 어떤 지적 편중을 반영하고 있다. 탈식민주의는 아예 빠져있기도 하고. 그리고 뭐 하나 제대로 전달하기엔 턱 없이 모자란 분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난 왜 옮겨놨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자 대상이 불명확하다. 글들의 수준과는 별개로, 각 사상가에 대한 '인트로덕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글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읽어도 그냥 뭐 아 그렇군 싶은 글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 나열된 사상가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만족 시키지 못하는 것 같고, 여기 나열된 사상가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냥 "응?" 싶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정리 인터뷰에서 로쟈님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10인 중 유럽 계열 8인이고 미국 1인이라는 서구 편중성은 어쩌면 좋을까. 또 남성 9인, 여성 1인이라는 젠더 편중성은 어쩌면 좋을까. 가야트리 스피박, 다나 해러웨이, 줄리아 크리스테바, 로지 브라이도티 등 걸출한 "여성(따옴표를 마구쳐도 좋다)" 학자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게일 루빈이나 샹탈 무페, (지금은 고인이지만) 모니크 위티크도 중요한 사람들이고... 그러고보면 선출기준은 그냥 "유명세"였을까?


어쨌든 대학원에 가게 되면 "학술적"이면서도, 주류 아카데믹에 대해서는 보다 "논쟁적"이고 "도전적"인 담론을 생산하고 소개할 수 있는 학보를 만들면 어떨까? 했던 생각이 점점 굳어진다. 한 1년 반 전 정도부터 생각하고는 있는데, 예상 외로 하자고 낚시질 좀 하면 덥석 물어버릴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아 재밌을 것 같애 +_+ ㅎㅎㅎ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07/10/01 00:43

언어에 관한 '현대적 이해'(특히 서구 철학계의)는, 더 이상 언어를 합리적인 의사소통이나 정보교환의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화행speech act 이론은 물론이요, 라캉주의자들의 언어 이해, 그리고 수많은 현대 이론가들은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거부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언어는 권력 관계를 확인하고 확립하는 어떤 수단으로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언어는 세계 속에서 작용함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수단이자 논리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언어 사용과 용법, 유통, 그리고 의미의 고정과 변화 등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통적인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 세계관 내에서 타자로 기입된 동성애, 장애인, 여성, 환경, 동물 등의 '비-인간 주체'들에 대한 혐오 발화hate speech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혐오 발화는 단지 특정 개인이 특정 개인에게 향하는 '장난질' 정도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맥락에서 권력 관계를 구성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이 된다(물론 그것을 '탈정치화'하는 일종의 폭력gewalt를 수반하지만).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되거나 가정된 특정 집단에 봉사하는 지배 헤게모니 전술의 일상적인 실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혐오 발화에 대한 일차적인 대처 방식은,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PC)운동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방식이다. 각 개인들의 '도덕 의식'에 호소하면서, 보다 더 올바른 호칭, 보다 더 올바른 사고를 주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PC적 접근 방식은 '쿨'의 정서와 맞물리면 놀라운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특정 혐오 발화를 하는 것은 '쿨'하지 않은 구시대적인 구닥다리 같은 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자유주의적 담론의 힘이 증가하고 젊은 세대 특유의 '쿨'이 유래없이 커지면서 동성애가 대중 문화 속에서 쿨하게 소비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호모 포비아적 발언 또한 더 이상 '쿨'하지 않게 인식된다. 심지어 어떤 '쿨'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이섹슈얼bisexual'이 되는 것이 장려되기도 한다. 또한 여성 혐오적 발언은 더 이상 (적어도)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서는 유통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한 발언을 하는 주체는 이제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근데 땅박씨는 예외상태다; 젠장).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PC 운동의 궁극적인 성과는, 아마도 '법 체계'의 정비일 것이다(여기서부터는 자유도덕주의자들의 영역을 넘어선다). 오늘날 모든 개인의 도덕 수준을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혐오 발화를 하지 못하도록 법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혐오 발화를 차단함과 동시에 처벌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윤리 21>에서 읽을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윤리(도덕)적 접근 방식과는 전연 다른 접근 방식이다.

여기서 1942년에 있었던 "채플린스키chaplinsky" 사건을 중요하게 상기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모욕을 주는insulting 특정한 '표현'들을 금지하는 것이 그 유명한 미국 자유주의적 헌법의 "수정헌법 1조"에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다. 여기서 "fighting words"라는 말이 등장한다. 법원은 "fighting words"의 발화가, 이 말words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위'를 유도하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수많은 논란을 증폭시킨 판결이기도 했지만, 어떤 법적 접근에 대한 사고의 clue를 주는 것이기도 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법정 판결에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은 무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이러한 '법적 접근'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한다. 자꾸 미국의 예를 들어오게 되어서 난감하지만(미국 같이 갈등을 정치-투쟁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호소하는 '소송 사회'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도 마찬가지로 흘러가는 거 같거든),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1992년에 있었던 사건(통칭 R.A.V사건으로 알려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인종주의자가 한 '흑인' 가정의 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워버렸다. 이는 그 소도시의 조례 법규에 따르면 일종의 '혐오 범죄hate crime'으로 규정되어 '경범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소도시의 규칙 자체가 '인종', '종교', '민족' 등의 "특정한 영역"만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정치성향', '동성애' 등 다른 영역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중립성을 벗어나고 있기에 위헌이라는 무척이나 뻔뻔스러운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그 중립성을 위장해 또다른 혐오 발화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법' 자체의 특성상 얼마든 이러한 법적 접근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라캉주의적 독해 또한 이러한 '법 체계'의 정비 자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법'언어는 일종의 '금지'의 언어다. 이러한 금지는 또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만큼 더 강력한 숨겨진 법의 이면, 즉 '초자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금지는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강한 금지는 더 강한 위반의 욕망을 낳는다. 법을 받아들이는 주체들은 법의 명령을 수용하지만, 은연 중에 법의 이면의 초자아까지도 인식하게 된다. 초자아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외설적으로 귀환한다. 법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 내에서도 결코 문제점들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는 더 교묘해짐과 동시에 법 체계가 지속적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는 이러한 문제점을 잘 예시한다(마치 법이 자기 증식을 위해 '사건'과 위반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살인에 대한 법의 과중한 처벌은 살인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이 과중해질수록, '살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외설적인 초자아적 위반의 욕망이 자라나기 마련이다. 혐오 발화에 대한 법적 접근도 마찬가지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까? 혐오 발화에 대한 금지는 오히려 인종주의자들 성차별주의자들 동성애혐오자들의 외설적인 초자아적 욕망을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혐오 발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objet a)"이 있다는(욕망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권력 구조를 유지함과 동시에 강건하게 만든다는) 주체들의 인식을 오히려 강화하지는 않을까?


----------

이렇듯 혐오 발화에 대한 PC적 접근, 법적 접근 모델은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나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혐오 발화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여기에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난점이 있을 수 있다. "주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 구조주의적 관점은 "그렇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개인은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은 구조의 꼭두각시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 개인을 그렇게 만든 구조의 잘못이지 그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구조주의적 접근이 무효한 것은 아니다만, 순전히 이렇게 접근해버리면 운동이고 정치고 뭐고 다 힘이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대개 논리적 난국 aporia에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쉽게 융합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 즉 개인의 순전한 잘못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개인이 '선택'한 것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이런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개인의 '선택'이라는 어휘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역사적 선험 historical a priori 으로 경험되는 조건들(누가 선택을 '선택'할 수 있고 누가 왜 불가능한가?)은 물론, 오늘날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수용성과 친화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Free Speech", 혹은 거의 신격화된 "언론과 출판의 자유"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자유'라는 말도 오늘날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중추가 아니던가?)

이러한 구조주의적 접근과 유사한 방식으로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화에 대한 이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버틀러는 유통되고 있는 혐오 발화들은, 각 개인들이 만들어 냈다기 보다는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는 인종주의적 표현의 코퍼스corpus에서 인용cite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즉 혐오 발화를 한 주체는 그러한 코퍼스의 인용의 효과이자 결과일 따름이며, 따라서 혐오 발화자는 그 말의 주체이자 저자author가 될 수 없다. 이러한 독해에서는 어떤 발화자를 '저자'로 가정하는 것은 단지 효과이자 결과에 불가능 한 것을 '실체화' 하는 일종의 위장이자 가정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렇게 끝내버리면 나의 사랑 버틀러가 '바보짓'한 것이 된다. 조금 뒤에 덧붙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혐오 발화와 동시에 구조주의적 난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중 하나는 가라타니 고진식의 칸트 윤리적 접근 방식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책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그에게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도덕성을 오직 '자유'(이 말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하겠지만)의 관점에서만 도덕을 찾았으며, 이 '자유'야 말로 유일한 의무 즉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이다. "자유를 의지(意志)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칸트 윤리적 의무이므로 따라서 이러한 자유를 누리지 않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않은 것이 된다. 여기서는 자유주의-구조주의적인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읽어낼 수 있다. (칸트가 아니라 고진의 칸트인듯?) 그러나 이러한 가라타니 고진식의 도덕-윤리적 접근 방식은 어딘가 김이 샌다. 다 줄이고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윤리를 고민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칸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혐오 발화를 했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위와 사고에 대해서 끊임없이 '개개인들이' 성찰하면 문제는 끝나는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의 혐오 발화에 대한 분석에 기반한 방법들을 개발해 내려고 한다. 물론 버틀러의 분석에 따르면 혐오 발화자들은 혐오 발화들의 '코퍼스corpus'에서 그 말들을 인용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은 "인용할 수 있는citable 발화이면서 동시에 인용을 초과하는 흥분하기 쉬운ex-citable 발화"이기 때문에 "모든 발화들은 화자의 통제를 벗어나"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버틀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적극적인 시도를 모색한다. 버틀러는 법적 접근을 매우 싫어하고 회의懷疑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모욕을 입힌 주체의 행위를 추적하고 사회적 모욕을 협상하는 장소로서의 특권을 법정에 부여하는 것은, 주체를 발화의 출발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론이 정확히 어떻게 모욕을 생산하는가에 대한 분석을 중단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버틀러의 질문에 요약되어 있다.
 
또한 버틀러는 윤리-도덕적인 접근 자체를 차라리 선호하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도 일종의 도덕적인 '검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회의를 보낸다. 검열은 단지 '권력'에 호소한다는 문제점을 야기할 뿐 아니라 복잡한 언어와 법, 그리고 담론의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버틀러는 오히려 어떤 '해체론적'인 입장에 기반해서 그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으로는 혐오 발화들에 대한 담론적인, 일종의 전복적인 '재인용', '재의미작용'으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혐오 발화들에는 일련의 취약성과 수정가능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만약 텍스트가 화행speech act적인 것이고 실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행할 수 있으며, 그 이전 행위에 반하게 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발화'는 외상적인 중핵(라캉적인 objet a)을 갖고 있으며(그러니까 excitable speech), 이 외상적 중핵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일종의 '반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여기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 다른 접근으로는 호사가들에 의해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 학파'로 분류되는 레나타 살레클의 것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6장). 살레클은 라캉주의적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혐오 발화와 인권의 문제를 함께 사고한다. 살레클은 버틀러와 일단 비슷한 분석틀을 갖고 있다. 살레클에게 혐오 발화들은 "통제될 수 있는 동시에 통제될 수 없"으며,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도 없다". 그러나 혐오 발화들은 일종의 외상적인 중핵을 건드리는 발화들이며, 그 외상적 중핵은 라캉적인 '실재'를 건드리는 것이다. '실재'를 건드리고 자극하는 것은 각 주체들의 고통과 공포를 자극하기에 일종의 '폭력'이 된다(성폭력sexual harassment에 관해 지젝을 포함한 몇몇 라캉주의자들의 독해도 이와 유사하다). 살레클은 일단 이 혐오 발화를 해결하기 위해 헤겔의 용어를 차용해서 윤리적인 접근을 검토한다.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륜성Sittlichkeit("습속들의 체계, 윤리적 삶의 체계")은 "공동체를 한 데 묶어주는" 것이자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칙이 된다. 이는 법률과의 관계에서도 "우연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독립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법률에 대한 대중들의 복종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레클이 보기에 이는 어떤 도덕적인 습속, 즉 헤겔적인 인륜성적 접근 방식으로는 '보편적인' 해결이 어렵다. 물론 법적 접근 또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법령', '인륜성' 모두 국가와 공동체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르게 체험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영역은 모두 투쟁의 영역이다. "누가 보편자를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그리고 또한 누가 모욕적인 말을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끊임없는 투쟁"인 것이다. 여기서 "인권"의 중요성(물론 통속적인 인권 독해와는 조금 다른) 이 대두된다. 살레클이 보기에 "전체주의적 체제조차도 폭력을 적법화하려는 의도에서일지언정 인권과 자유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떤 인권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장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그리고 바라건대 민주적인 의미를 획득할 유일한 길"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즉 혐오 발화를 정신분석학적 윤리, 그리고 최근 대두되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인 독해에 기반해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뉴 레프트 리뷰>에 기고된 <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에서 보여준 지젝의 '인권'에 대한 독해와도 유사하다. 지젝은 랑시에르의 독해를 끌고 오면서, "인권을 정치투쟁의 우연적 영역과 별개의 비역사적인 '본질주의적' 피안으로, 역사로부터 면제된 보편적인 '천부적 인간권리'로 설정해서는 안되지만, 인권을 시민의 정치화라는 구체적인 역사과정에서 생겨난 사물화된 물신으로 간단히 도외시해서도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인권'은 전 정치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본래적인 정치화의 적실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언급하며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 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만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정치성의 정치학"과 협상 논리에 기반한 '행정-통치'로 정치를 환원하는 최근의 경향에 반대하는 지젝의 입장에 기반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언급할 기회가...)


물론 여기서 언급한 방식들은 나름의 적합성을 가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확신이 없다. 그래도 나에게 있어 혐오 발화는 끊임없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 문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있고. 어흑. 어려워..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 관여(double engagement)  (0) 2007/10/14
Agalma를 제거하기  (0) 2007/10/02
혐오 발화(hate speech)  (2) 2007/10/01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글쓰기  (0) 2007/09/26
Natural Woman  (0) 2007/08/29
Posted by 소이연
스크랩 / 2007/05/27 10:32

문학과사회
2007년 <문학과사회> 여름호는 특집으로 [다시, 진보란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글들이 꽤 좋은 것 같다). 그 중에서 서동진씨의 글 <문화의 타자, 정치>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고진이『트랜스크리틱』이후 생산의 입장,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벗어나 유통의 입장, 소비자/시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개조하자고 주장하며 그것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가장 유효한 입장이라 역설할 때, 우리가 그를 미심쩍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그는 유통의 입장에서 가능한 정치, 즉 경제의 입장에서 도출된 정치를 생각하자고 강변한다. (문학과사회 07년 여름호, p.280)"

나는 서동진씨가 그러한 가라타니 고진의 입장을 일컬어 "경제주의" 라고 칭하는 것에 동의하며, 이번 글의 상당 부분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문득 궁금해진 건, 가라타니 고진이 왜 이런 입장을 취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을 제법 괜찮은 책으로 읽었고, <트랜스 크리틱>정도와 <근대 문학의 종언>을 약간 맛만 본 정도여서 그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한 독자로서의 애정이 있었는데, 서동진씨의 글을 통해 그의 입장을 듣고나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기 때문이다. (난 경제환원주의가 싫다..)

그러던 중에 로쟈님의 서재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그런 입장에 대한 인터뷰를 발견해서 옮겨 둔다. 상당히 긴 분량이라 여기에 두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로쟈님의 말처럼 시간차를 고려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인터뷰를 읽다보니 역시 미심쩍은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 하다(그의 '분석'엔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그의 '대안'엔 동의하기 힘들었다. "이미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로쟈님의 코멘트를 보고 맘 아프긴 했지만).


 

인터뷰 보기


원문은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1122953
Posted by 소이연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2.0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