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혜영 소설가의 신간 장편을 읽었다. 예전에 출간된 작품은 읽기가 힘들었는데 이번 작품은 재밌게 잘 읽힌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인 <토끼의 묘>를 읽고 부터 갑자기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계속 후속작을 기다려봐도 좋을 것 같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상하지만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공간의 이미지가 잘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별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묘사도 충분한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작품이 원래 노린 효과인가?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와 '메시지'는 남지만, 구체적인 세계를 그려내기 어렵다. 그렇게 읽는 도중에 나 스스로가 어딘가 떠버린 느낌이어서 작품을 '체험'할수가 없다. 소설이 어쨌든 작가의 주관으로 그려낸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해도, 깜빡 나의 현실인 것인양 혹은 내가 처해야 하는 상황인양 '체험'하는 경우가 정말 가끔 있는데…. 이건 유명한 외국 소설을 읽고 난 느낌과 비슷하다. 아무리 대문호의 작품이라고 해도 필름 이론에서 말하는 '이야기 세계(diegesis)'를 내가 구체적으로 그릴 수가 없으면 그냥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책 하나 읽고 서가에 꽂아둔 결과 밖에 안되는 것이다.
#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워낙 사람을 안보고 살아서 그런지, 요즘에는 사람들마다 스스로 쳐놓은 벽이 더 자주 더 많이 보인다. 벽의 종류도 여럿이고 높이와 두께도 제각기다. 벽이 예전에는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 더 또렷하게, 더 완고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건 내 또래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나이를 하나둘 먹어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점점 더 경계하기 시작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보는 눈이 달라진 탓일까. 어쨌든 또렷히 보이는 벽 탓에 이제는 좀 더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게 된 것 같다. 어차피 영원한 관계는 없다. 지금까지도 많은 관계를 잃었다. 그래도 결국엔 잃을 걸 잘 알지만, 아직은 좀 더 던지고 싶은데…. 근데 이런 종류의 느낌이 항상 그렇듯, 결국엔 나 혼자만 벽을 치고 있다는 사실.
# 나는 아직도 감정의 구분이 명확히 안되는데, 이런 사실은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도 지지받지도 못했다. 가까운 이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늘 내 감정을 명확하게 구분하라고 주문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나는 그게 정말 안된다. 감정을 명확히 한다는 건 제 욕구를 사회적 요구에 맞추고 그에 따라 관계의 질서 역시 조절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감정에 명확해지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늘 내가 힘들다. 자기들도 잘 구분하지 못하면서, 왜 자꾸 그런 일에 공을 들이는 것이며 나에게도 왜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는 정유미의 캐릭터가 가장 좋았다. 정유미의 행동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되려 나쁘다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나는 영화에서 정유미가 감정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화속 그녀는 어찌보면 다소 우유부단하고 선을 긋지 않아 애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독점적 이성애주의(모든 행위를 모노가미적 섹스주의로 환원하는)에 맞지 않는(그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관계 패턴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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