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최근의 홍상수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 보다는, 언제나 (우선)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느껴왔던 것 같다. 먼저 홍상수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비애의 원인은 아마도 우리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독한 속물성과 진부함일 것이다. 홍상수의 인물들은 속물성과 진부함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마치 우리의 삶이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런 삶의 모습을 여느 영화들처럼 드라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폭로해버리는데, 과연 비애를 느끼지 않을리 없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는 세계의 속물성을 힐난하거나 부정하면서 반대로 '진정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속물성을 비난하는 진정성은 언제나 속물성의 이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홍상수의 영화는 세계의 스노비즘, 스노보크라시(스놉들이 지배하는 사회세계)를 가로지른다.
홍상수 영화가 주는 웃음의 원인도 사실 비애의 원인과 유사하다. 기실 홍상수의 인물들의 대사는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들의 '인용'이며 동시에 '과장'이다. 인물들은 언제나 서로에 대해 혹은 자신의 서사를 이야기하는데, 그 대사들은 언제나 위화감을 줄 정도로 지독하게 진부하며 또한 과장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유명한 명품 대사나 아니면 일반적인 일상어를 짜깁기하고 부풀린 수준의 클리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 대사들은 모두 오늘날의 스노비즘의 법칙을 관통하는 '직관'적인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크린에 폭로된 스노비즘은 이제 그 순간부터 스노비즘이 아니게 된다. 오늘날 스노비즘의 핵심은 "내면의 보존"이기 때문이다. 스놉들은 외면으로 드러나는 속물적인 사회적 실천과는 달리, 내면에는 '진정한' 개인적 자아를 기필코 보존하려 든다. 스놉 누구에게나 내면의 진정한 자아는 진귀하고 세계에 단 하나 뿐인 보물이다. 그것이 없으면 단순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스놉들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피곤해 한다면, 그건 서로의 내면이 자기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스놉이되 근대적 자아들의 특징인 (신에 의지하지 않는) 자기-성찰적인 내면이 없다. 그렇기에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수법인 독백도 홍상수 영화에서는 지독히 진부화되거나 무의미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그들은 언제나 욕구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그렇기에 홍상수 영화의 스놉들은 감정이입이나 공감 같은 적극적인 '관여'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웃음과 비애를 동시에 유발하는 '관조'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나는 이를 감히 "관조의 윤리"라고도 불러보고 싶다. 그렇기에 홍상수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피로하거나 슬프거나 우울해지지도 않고, 동시에 한껏 웃고 나와서 미래에 대한 삶의 희망 따위를 얻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나는 지금 삶에 대해서만큼은 무조건 '관여'하는 것이 아닌 '관조'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게 된다.
내 삶의 문제에 대해 더 '관여'하려 들면 들수록, 오히려 문제가 심각해지거나 몰락의 징조만이 뚜렷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관여'는 때로 지젝이 말한 가짜 행위(false activity)로 우리를 이끈다. 이는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실제로 자아를 성찰하지 않기 위해서 자아 성찰이라는 말을 즐겨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차라리 한 걸음 뒤의 수동성에게로 물러나 '관조'하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그러나 '관조'는 아무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홍상수의 영화는 위로가 된다. 아마도 그것만이 내가 홍상수 영화를 챙겨 보고 기대하는 이유일 것이다.
덧) 이렇게 스노비즘을 관통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의 역할은 때로 도드라진다. 다시 말해, 홍상수가 폭로하는 스노비즘은 남성-스노비즘에 가까운 것이다. 홍상수에게서 젠더 정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었을 뿐이다.
덧2) 난 이번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주제인 '우연'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판정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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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에 대해 나이 어린 혜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사산 후 겨우 몸이 회복된 혜화는 집에 멀쩡히 살아 가던 혜화의 동생 혜수(어미 개)와 강아지들을 모두 누군가에게 팔아 버린다. 그러나 혜수는 팔려나가길 거부하며 집에 틀어 박히고, 혜수를 끌고 가려는 사람들과 혜수 사이에 일단의 소동이 벌어진다. 자기가 팔아버리고도 방 구석에 눌러 앉아 차마 헤어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던 혜화의 귀에 죄의식이 불가피한 소음으로 들이닥친다. 결국 혜수는 혜화의 손에 억세게 붙들려 목줄을 매인 채 질질 끌려 사라져야만 했다. 압도적인 상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혜화에게 모든 따뜻한 것들은 제거되어야 했으며, 관계들은 소멸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당시 혜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저질러져야만 했다. 그것은 제 삶의 몰락에 대한 복수, 제 삶의 감각을 찾기 위한 절박한 발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혜화의 복수와 발악은 결국 혜화 스스로를 다시 한 번 타격한다. 시간이 흘러 홀로 남은 그날 밤, 혜화는 손톱을 자르다가 손톱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버리고, 찢겨진 피부 사이로 붉은 피가 스미어 나오는 걸 슬픈 눈으로 지켜 본다. 우연히 팔려 나가지 못한 흰색 강아지는 갑자기 짐 더미 사이에서 기어나와, 그런 혜화에게 와서 낑낑대며 몸을 부빈다(그리고 또 버려진다).
이렇게 혜화가 당해버린 일, 그리고 혜화가 저질러야만 했던 일들은 시간이 몇 년이 흘러도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 억압되지만, 그런 억압은 제 사슬을 끊고 일상에 불쑥불쑥 출현하고 혜화의 삶을 끌어가는 미지의 힘, 곧 증상(symptom)이 된다. 그렇게 수 년 간 혜화는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애도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제의적인 삶을 산다. 제의적인 삶은 그 삶의 원인이 된 상처를 반복하지만, 제의만으로는 그 원본은 결코 재생되지 않은 채 억압된다(그러므로 이 영화를 '모성'으로 이해하는 독법은 그야말로 엉터리다). 억압된 삶의 상흔은 증상이 되고, 증상은 곧 삶이 된다(영화는 왜 혜화가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우리는 혜화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네일 아티스트로 살고 싶었던 혜화는 그 대신 동물 병원에서 애견을 돌보고, 재개발 촌에 버려진 개들을 병원에 데려와 치료하며, 사별한 싱글 수의사의 유난히 가슴에 집착하고 엄마를 원하는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본다. 혜화는 손톱을 자르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 둔다(그리고 한수는 그런 혜화의 손톱 중에 피가 묻은 손톱을 발견한다). 혜화는 낡고 허름한 집에서 어딘가 일그러져 있고 망가져 있는 강아지들과 함께 산다. 과거의 영향력, 상처의 그림자, 몰락 이후의 삶에 대한 희미한 스포트라이트, 희박한 삶의 감각들. 혜화는 제 살을 자르면서, 또 저에게 다가와 몸을 부비는 것들을 지켜보면서 삶에 대한 (가짜)감각을 획득한다. 실로 창상(創傷) 같은 삶이다.
그러나 혜화의 삶은 또 다른 타격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한다.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믿었던 한수가 '다리를 절며' 등장해서는, 죽었다고 믿었던 자신들의 아기가 입양되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혜수의 아이였(다고 믿었)던 강아지는 철거촌을 유유히 떠도는 다 큰 흰색 개가 되었고, 무슨 일인지 탈장이 되었으며, 이를 치료하려는 혜화의 앞에 등장해서는 언제나 혜화를 놀리듯 미끄러지며 사라진다. 잠깐 동안 마음을 품었던 싱글 수의사는 옛 첫 사랑과 결혼하기로 한다. 혜화의 엄마는 치매에 걸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내려야만 했던 몇 가지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 말을 한풀이 하듯 되풀이 한다(마치 그 일이 증상으로 남아 그 이후 당신의 삶을 모두 결정해버렸던 것인양). 게다가 한수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이건 차라리 유령이 아닌가?) 혜화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등장해서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끈질기게 따라 붙어 아기의 생존과 생활을 전한다. 혜화가 찾아 헤매던 혜수의 아이였(다고 믿었)던 강아지는, 혜화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인물인 개장수에게 붙들려 사라진다(고 믿어진다). 혜화는 이렇게 닥친 일들 앞에서 또 다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혜화의 삶은 또 다시 흔들리고 또 다시 붕괴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거부할 수 있던 단순한 조짐이었던 것들이 혜화를 이끌어서 차츰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억압해두었던 증상의 기원들이 차례차례 혜화의 삶 전면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런 타격들을 혜화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혜화는 이런 (재)타격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혜화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영화 엔딩 스포일러 때문에 급 진행) 모든 성장드라마는 언제나 타격 이후의 삶을 다룬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들이 가한 타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타격 이후의 삶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곧 성장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것은 사랑의 붕괴일수도 있고 소중한 타자의 상실일수도 있으며 갑작스러운 대재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타격 때문에 만들어진 증상은 자신의 삶 자체도 성장도 아니(어야 한)다. 증상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를 통해 깨져야 하고, 삶은 한 번 더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성장해야만 한다. 성장은 곧 이후-의 삶이다. 타격을 거듭 입은 혜화는 거칠게 차오르는 삶의 기억과 숨결들을 누르면서 차츰 진실과 타격들을 끌어 안아간다. 영화는 마치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듯이, 혹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일종의 필연성으로서 혜화가 해야만 했던 또한 할 수밖에 없었던 행위의 과정을 그려낸다. 혜화는 서사의 플롯을 통해 스스로가 압도되어야만 했던 현실들을 받아들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증상을 타격하고 진실을 선택한다. 마침내 최종적인 진실을 선택한 혜화는 한수를 지나쳐 운전해 가다가 순간 멈춰서서 거울에 비친 한수를 바라보고는, 후진으로 기어를 바꾸어 넣는다. 그리고 엔딩곡,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가 흘러 나온다(<앵콜요청금지>의 재배치, 재해석, 새로운 의미).
그렇게 <혜화, 동>은 (한수가 아니라) 혜화의 성장 드라마로 끝이 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삶은 압도적인 힘에 의한 상실과 타격을 조우하면서(encounter) 붕괴하고 몰락한다. 조우 이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삶은 어디까지나 증상으로서의 삶이다. 증상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삶-이후를 방해한다. 그러나 증상은 과거의 조우를 다시 만나면서 그 조우를 다시 끌어 안을때(re-encounter) 비로소 타격을 입고 진실이 될 수 있다. 진실은 곧 조우의 조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진실을 받아들인 삶, 그러므로 진실 이후의 삶. 그것은 곧 윤리이며 따라서 <혜화, 동>은 곧 한편의 잘 만든 서사-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성장이다. <혜화, 동>의 영어 제목이 're-encounter'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할 것이다.
덧) 정말이지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행복했다. 한동안 영화에 회의를 많이 느끼고 오직 친구가 만든 영화만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여전한 가능성을 보아서 다시 한 번 행복했다.
덧2) 이 영화를 감각이 예민한 '남성'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눈에 도식적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영화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체스 경기를 녹화해서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이 진부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의 디테일과 영화적인 암시와 비유들을 직시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하고, 해석해야 할 것은 해석해야 하며, 아픈 것은 부정하지 말고 제대로 아파하고, 애도해야 할 것은 끝까지 애도해야 한다. 또한 <꽃비>는 제주 4.3 항쟁이라는 사건을 단지 현대사의 한 비극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만 4.3 항쟁의 아픈 기억을 훼손하지 않고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그러나 영화는 인물간의 관계와 서사의 진행을 모두 남성 정치의 맥락으로 치환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서사는 노골적으로 젠더화된다. 다소 어설픈 남성 학원물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3 항쟁을 직접 겪어 실어증에 걸린 서연의 어머니와 서연은 영화 내내 침묵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행위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단지 남성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받을 뿐이다. 특히 서연은 중요한 순간에 하얀 옷을 입고 '청순한'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서연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대신 노래를 흥얼거린다(사이렌의 경우처럼, 여성의 노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공포 아니면 매혹, 혹은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연은 늘 도진과 민구에게 다투지 않을 것을 주문하지만, 민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도진과 동일은 서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례로 성폭행한다.
이렇게 정치적 폭력을 <성애화eroticize>해서 성폭력의 문제로 치환하는 건, 언제나 남성 정치의 몫이었다. 예컨대 탈식민시대에 제국주의에게 강탈당한 민족-국가의 영토는 '어머니 영토'로 재현되고, 소위 민족-국민의 수난은 제국주의 남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한 남성적 복수의 판본은 (상대방 남성에 대한 직접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 대한 성애화된 폭력이다. ('fucking USA' 같은 노래를 생각해보자.) <꽃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성화된 범주에 대한 남성 주체의 맹목적인 사랑은 곧 성폭력으로 연결된다. 사랑-증오-(성)폭력은 같은 스펙트럼 위에 있다.
이런 식의 비유는 남성만이 진정한 역사적/세계적 행위자라고 간주하며, 남성 범주에 대응하는 여성이라는 타자 범주를 '생산'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의미화한다(물론 이는 남성 정치의 맥락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또한 이는 남성 정치를 <성애화>하고 사적인 욕망으로 축소시키며, 이를 <낭만화>한다. 이는 실재하는 폭력을 은폐하며, 그 결과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역사와 정치를 그런 케케묵은 위험한 비유를 동원해서 기억할 것인가. 우리는 영화의 포스터에 쓰인 "너 때문에 싸우는 거야"라는 말의 무서운 폭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당신들이, 당신들의 욕망으로 싸우는 거다. "너 때문에" 싸운 거라면, '사랑'의 스펙트럼 위에서 발생한 성폭력의 원인도 "너" 때문인가? 당신들의 싸움에 타자를 동원하지 말고, 또한 폭력을 낭만화하지 말라. (그러나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처럼, 타자가 없다면 싸움이 있을수나 있을까. 입이나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민주주의자이자 문명인을 자처하는 시대에)
그래서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속물'이며, 그들의 대사와 행동은 놀라우리만치 '상투'적이다. 그의 영화에서 흔히 지식인이나 전문가로 간주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속물성은 그들이 참가한 게임의 장에서 쉽게 비루한 맨얼굴을 드러내고야 만다. 또한 그의 영화에는 커플들(현재 커플이거나 커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줄곧 내뱉는 "사랑한다"는 고백조차도 어딘가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정말 예쁘냐'고 묻는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 분)의 애인 연주(예지원 분)에게 중식은 계속 예쁘다, 정말 예쁘다고 얘기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어떤 긴장과 상투성을 읽어낼 수 있다. '너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할 때 조차도 마찬가지다. '진정성'을 탈수기에 넣고 탈탈 짜내버린 우리 시대는, '연애'에서 유일한 진정성의 근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므로 섹스와 연애 이야기가 모든 낭만성과 진정성을 흡수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홍상수 감독은 연애 관계에서조차 진정성을 기꺼이 제거해 버린다.
우리의 탈진정성의 시대에 대적하고 대립하는 유일하는 사유가 있다면, 아마도 '실존주의'일 것이다. 그래서 이 감독에게 실존주의는 대척점에 있는 사유가 아닐까,생각해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하하>에서는 실존주의가 직접 언급된다. 중식은 시인 후배 정호에게, 너는 너무 어리다며, 너의 우울과 사유는 가짜라며, 너는 실존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물론 중식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들은 이게 모두 중식의 허세라는 사실을 잘 안다). 진정성, 낭만성은 어린 것, 가짜인 것,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그러나 <하하하>는 11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다. 물론 이전 영화들도 그랬다. 인물 관계 서사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일관되게 재미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홍상수 감독이 이 상투성을 잘 알고 있으며 재미있게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상투성과 탈진정성은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이기에 오히려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모든 창작자들이 상투성으로부터 예술의 영역을 지킬 방법을 고민하는 견결한 국경수비대라면, 홍상수 감독은 이들과는 달리 국경을 슬며시 열어둘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번 영화 <하하하>에서는 인물과 관계의 상투성이 밝은 유머로 승화된다. 홍상수 감독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그의 영화에 독창적인 방식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전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들은 한결같이 불편한 '수컷'사람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그런 불편함마저 제거해버리고 그들의 일상적이고 근본적인 찌질함을 과장해서 보여준다. 또한 인물들의 상투성도 이전 영화에 비해 훨씬 더 과장된다. 말과 행동과 '수'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웃을 수 있다. 즐겁다.
이제 홍상수 감독은 어쩌면 구름 위에 올라탄 '배추도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감독의 외모도 그렇게 변하지 않았나? ㅎㅎ). 탈진정성 시대에 게임 판 위에서 제 눈 앞 한길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배추도사는 이들이 정말 귀엽지 아니하냐며 '하하하' 웃어 제낀다. 탈진정성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어쩌면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귀여움일 것이다. 이번 씨네21은 홍상수 감독 특집이었다. 진지하게 쓴 긴 글이 많이 실렸다. 나는 이번 씨네21을 보며 정말 많이 웃었는데,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온 나도 배추도사님과 같이 구름 위에서 귀엽기 짝이 없는 필진들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홍상수 감독에게는 어쩌면 게임판 위의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악의는 없다.
물론 배추도사가 옳은(좋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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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기를 꼼짝 없이 '학생 정체성'에 저당잡혀야 하는 입장에서, '학교교육'은 제니가 이야기하듯, 한없이 "지루한" 것이다. 제니가 보기에 데이빗은 정규 대학과정을 이수하지 않았지만, 교양있고 재미있고 품격있는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다. 데이빗은 돈이 많은데다가 미술과 음악에 대해 잘 알며,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다. 데이빗은 고급 레스토랑, 미술품 경매장, 콘서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에 반해 제니의 아버지는 옥스포드를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한 보수적인 하위 중간 계급 출신 속물이며, 학교에서 제니를 담당하는 교사는 제니가 보기엔 캠브리지를 나왔음에도 '지루한 학교에서 아이들이나 가르치며 가사 노동이나 하는' 그저 그런 교사 인생일 뿐이다. 물론 제니의 담당교사는 제니가 보기에도 멋있고 아름답지만, 제니에게 있어 담당교사는 캠브리지를 나와도 여성에게 '허락된' 삶은 '그 정도'일 수밖에 없다는 영국사회 현실의 상징이 된다. 그렇게 옥스포드는 "인생 대학" 앞에서 힘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제니는 옥스포드를 가지 않고 대신 데이빗이 다니는 "인생 대학"에 가서ㅡ혹은 바로 데이빗과 함께/데이빗의 후광 아래 그 "인생 대학"에 가야만ㅡ, 옥스포드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어떤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고 느낀다. 제니에게 그 고급문화는 매력적이고 근사한 것이다. 그리고 하위 중간 계급인 제니의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다. (물론 데이빗과 그의 통장 잔고가 허락하는 한이겠지만)
한편 <언 에듀케이션>은 '학교교육'이 "지루하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봤을 때 '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니가 데이빗에게 청혼을 받아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를 만류하던 교장과 담당 교사조차도 학교가 지루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폭로된다. 교장조차도 사실 우리는 너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게 없으며, 학교는 단지 퍼블릭 서비스일 뿐이라고 언급한다. 학교에 한 명 쯤은 있는 명문대 지망생인 제니는 그렇게 학교를 나간다. 한국처럼 대학이 서열화 된 영국의 양대 명문 대학인 캠브리지를 나온 담임 교사도, 제니가 원하는 그 "인생 대학"의 '교육' 앞에서는, 그리고 제니의 말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고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언 에듀케이션>은 이 '학교교육'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생 대학"에서 한편의 소녀 성장 드라마를 상연한 뒤, 제니는 결국 씁쓸함을 안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목표는 다시 옥스포드가 된다. 제니는 교장을 만난 뒤 담당 교사를 찾아간다. 그렇게 찾아간 담당 교사의 집은 러블리하고 책과 그림이 있으며 페이퍼백도 엽서도 있다. 여전히 멋있는 담당교사는 돌아온 제니의 말을 듣고 "노련해지고 현명해(old and wise)"진 것 같다고 말하지만, 제니는 "노련해지긴 했으나 그리 현명하지는 못하다(I feel old, but not very wise)"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니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담당교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 말을 들으니 기쁘다"고 대답한다. (이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은데 언어가 부족해서... 어쨌건 이 선생님 진짜 멋있어 이런 선생님들보면 진짜 임용고사 준비해야나 싶어진다) 이제 제니는 비록 지루하고 무용한 '학교'를 다녀야 하지만, 그래도 이 멋있는 교사와의 관계에서, 더욱 현명하고 주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 에듀케이션>은 교육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다. 교육의 한쪽에는 '학교제도'가 있고, 그 밖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인생 대학"이 있다. 영화는 그런 것에 본격적으로 가치 평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제니가 처해 있으며 (얼마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일 뿐이다. 그러나 <언 에듀케이션>은 그 모든 것 보다도, 사실은 제니가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가 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요컨대 결국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니 스스로의 성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제니는 성장에는 "지름길(short-cut)"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언 에듀케이션>이 제시하는 '교육'은, 이러한 제니의 성장을 돕는 것이자, 또 제니 스스로의 성장이다. '교육(an education)'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장이어야 한다.
덧) <언 에듀케이션>은 이렇게 한 편의 웰메이드 성장 영화지만, 한편으로 흥미로운 정보도 많이 제공한다. 1960년대 영국의 인종주의(유태인과 흑인을 대하는 주류 백인의 태도와 그들이 가진 이미지)에 대해서, 옥스브리지라는 양대 대학교가 영국의 맥락에서 어떤 위상을 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영국의 교육제도와 문화에 대해서, 영국의 하위 중간 계급 남성의 정체성(제니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 남성 정체성이 어떤 맥락에서 갈등을 겪으며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 계층화된 '계급 문화'에 대해서, 그 계급 문화가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상처와 자국을 남기는지에 대해서, 소년과 소년의 성장에 대해서, 또 한편으로 더 중요하게는 젠더 시스템 등등에 대해서도. 이 모든 것들을 생략한 채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영화의 서사를 비난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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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작년이랑 작년은 별로 흥미가는 영화도 없었지만 어줍잖은 의무감 비슷한 걸로 영화제에 갔었던 기억이다(이건 진짜 부끄러운 일; 이 블로그에는 그때 당시에 쓴 완전 창피한 글도 있다). 그런데 그건 영화제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인 나의 매너리즘 탓이었다.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권태로운 눈동자엔 모든 게 권태로워 보이는 것이다. 이번에도 사실 약간은 의무감에 예매를 했지만, 그 결과는 역시, 문제는 갈수록 풍성해지고 세련되지며 외연이 넓어지는 영화제 문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서울에 가면서 챙겨 갔던 책은, 다름아니라 사놓고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벨 훅스의 <벨 훅스, 경계넘기를 가르치기>였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짬나는 대로 술술 읽었던 이 책 덕에 몇년 간 정체되었던 내 문제가 뭐였는지를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을 5개의 'ing'로 얘기하자면, encouraging, empowering, inspiring, fascinating, easy-going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 ㅎㅎ 'easy-going'하다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수 있을 것 같아 첨언하자면, 절대 내용이 쉽다는게 아니라 문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철학적 계보를 후광으로 하는 복잡한 개념어(이 책을 이해하려면 칸트/헤겔이나 프로이트부터 읽어라!!)를 동원하지 않고, 경험과 직관적인 언어를 써서 날카롭지만 또 따뜻하고 설득력있게 글을 이어나간다. 진짜 멋있어! 최고야!!
올해 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다가올 그날(The Day Will Come)>은 정말 멋진 영화였다. 줄거리나 세세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건 그만두고, 인상 깊었던 부분(인지 뭔지) 2가지만. (거칠게 말하는 거니 이상하다 싶어도 패스패스해주세요.)
하나는 흔히 말하는 '모성'에 대한 것이다. 흔히 모성은 자연(타고난 것)으로 간주되지만, 여성주의에서 말해주는 상식은 모성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으며 사회와 경험 속에서 '학습'하고 실현하는 그 무엇이다. 또한 사라 러딕이 <모성적 사유>에서 말했듯, '모성(motherhood)'은 '어머니 역할(mothering)'과 구분되는 것이다. '어머니 역할'은 모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보살핌' 혹은 '양육'에 관한 지침이나 실천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 러딕에게 '어머니 역할'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에게 할당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그 구분법에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모성'과 '어머니 역할'이라는 구분법에 다른 차원(?)을 개입시킬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거칠기 짝이 없지만, 일단 각 개념에 '공식적' 차원과 '비공식적'차원을 고려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해를 막기 위해 언급하자면 공식적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고 탈정치적이며 모두에게 동의되는 올바른 개념이기에 '공식적'이라는게 아니라 다분히 지금의 문화적인 코드를 반영한 것이며, 비공식적이라는 말도 안 중요하기 때문에 비공식적이라는게 아니다.)
'공식적인 모성'은 교훈과 이념화를 지향하며 널리 유통되는 이념이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인 서사나 이야기로 존재한다. 예컨대 고대로 올라가 어머니 자연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러 아이가 자동차에 깔렸을 때 번쩍 차를 들어올린 슈퍼 엄마의 이야기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공식적인 모성'은, 모성은 위대하고 자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사회적 상식이되며, 대체로 억압적이다(엄마들은 모두 위대한 모성을, 혹은 최소한 모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공식적인 모성'은 일종의 판타지이지만, 전쟁, 군대, 징병제, 남성성(남성들은 '모성'을 쉽게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애착관계가 있다)을 깊은 곳에서부터 유지하고 지탱하는, 정말 중요한 형식이다. 천안함 참사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들도 상처를 봉합하는데 다시금 '모성'을 동원하고 있다. '비공식적 모성'은 자기에게 소중한 타인, 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자신이 낳았든 낳지 않았든, 혹은 어떤 관계에서 아이가 생겼든)에게 갖게 되기 쉬운 강한 애착이다. 차라리 생물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아이의 현존보다는 부재와 상실에서 더 잘 드러난다. 아이의 부재와 상실에는 엄청나게 강한 에너지를 지닌 상실감과 슬픔이 찾아온다. 단지 마음이 슬픈게 아니라, 몸이 반응한다. 사랑은 자기와 관계를 맺을 아이를 만나는 순간에(혹은 그 이전에도) 즉각 시작할 수 있지만(물론 사랑의 실천에는 온갖 우여곡절이 있지만), 그러나/그렇기 때문에 상실의 애도에는 정말 오랜 기간이 걸린다.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공식적인 모성'보다는 훨씬 역사적인 맥락화가 가능하며 유동적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하는 일종의 규범이다. 이를테면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아이의 생애주기에 따라 어머니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준다. 언론과 온갖 전문가들, 혹은 엄마의 엄마나 친구들 등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라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한다고 조언하는게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이다. 태교는 모짜르트나 영어 회화로 해야한다는 식의 조언부터, 아이의 대학 입학과 결혼 대상자 선택, 혹은 그 이후에도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온갖 조언들로 가득차 있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하지는 않지만,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혹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진 것으로 취급된다). '비공식적인 어머니 역할'은 '공식적인 어머니 역할'과 얼마나 조응하든 상관없이, 양육하는 개인의 역사나 습관, 혹은 욕망이 반영되어 실제로 실천되는 '어머니 역할'이다. 이는 만고불변이며 보편적인 게 아니라, 개인의 것이며 따라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는 개인의 상황 등에 따라 '어머니'로서의 양육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도 함의한다.
이렇게 나눈 것에다가 사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아마도 독일의 적군파? <바더 마인호프>가 생각나는 군)도 고려해야하는데, 그것까지 하면 진짜 나도 병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으니 그만두어야 할 듯. 여하간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구분법이 떠올랐고, 이 구분법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주인공인 알리스와 주디스의 관계, 그리고 주디스와 주디스가 새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키워드가 되었다(그래서 영화에 몰입하지를 못했다 흑흑). 관계 뿐 아니라 관계의 변화하는 측면까지도. 아아.
하나가 너무 길었는데, 여하간 다른 하나는, 이 '모성'을 둘러싼 이해에 성차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잉 일반화(over-generalization)의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성차가 무조건 실재한다는 게 아니다. 여하튼 영화에서는 알리스ㅡ주디스가 과거 독일에서 낳은 딸ㅡ와 프란신ㅡ프랑스에서 만난 새 남편과의 관계에서 낳은 딸ㅡ이 주디스를 대하는 방식과, 주디스가 프랑스에서 만난 새 남편과 그 아들이 주디스를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영화 내에서 여성 인물과 남성 인물의 태도가 다르다는 얘기다. 영화의 초반과 중반에는 알리스, 프란신, 남편, 아들이 모두 주디스를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각각 '날 버린 매몰찬 생물학적 어머니', '날 이해 못하고 화만 잘내는 꼰대 엄마', '과거를 잘 알진 못하지만 일 잘하고 사랑스러운 아내',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날 사랑하는 엄마'로 이해한다. 이들에게 주디스는 어쨌든 개인사와 의지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단지 엄마이자 아내이다.
그러나 알리스가 찾아온 뒤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주디스는 엄마이자 아내로 '묶어두기'엔 <지나치게> 많은 역사와 사연을 가진 개인임이 차츰 밝혀진다. 남편과 아들은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주디스에게 진실의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된 진실 앞에서 주디스를 괴물로 바라본다. 진실이 밝혀지자, 그들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사람은 분명히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들은 이에 묘하게도 배신감을 느낀다(대체 무엇을 믿었고 배신당했다는 것일까?). 그러나 프란신은 주디스가 과거에 은행을 털었다는 사실을 알자 그에 배신감을 느끼기는 커녕 "엄마가? 은행을? 멋진데(cool)!"으로 응수한다. 프란신은 영화 내내 한번도 주디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디스가 떠나는 장면에서 남편과 아들이 배신감에 휩싸여 주디스를 냉큼 보내는 반면, 프란신은 주디스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잡아두려고 한다. 알리스도 차츰 주디스와 관계를 조율하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주디스를 '날 버린 엄마'가 아니라, 역사 속의 행위자였던, 정치의식과 신념을 가졌던 한 명의 타인이자 개인임을 인정하고 타협하기에 이른다.
<아시아 단편 경선1>도 봤는데, 다섯 개의 단편 영화가 모두 좋았다. 투표는 <파마>에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거짓말>을 찍을까 했는데, 이 영화는 정말 웰메이드였지만 20대 중후반의 감수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결정은 <파마>로. <파마>는 길지 않은 상영시간에 결혼이주 여성이 한국에서 겪을 수 있는 일, 혹은 한국이 결혼이주 여성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매우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언어의 문제, 일반적인 한국 가족 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강압적인 위계질서, 소위 '못 사는 나라'에 대한 한국적인 환상(경멸 섞인 동정심), '미혼 남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처방 등에서 시작해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과 감각에 이르기까지, 정말 섬세하고 넓게 다루면서도, 유머감각까지 갖춘 영화였다. 정말 멋지다능!
오늘 본 영화는 <아시아 스펙트럼 : 인도네시아, 포스트 98>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4개의 단편 영화 중에 마지막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일단은 모두 좋았다. 좋았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보았다는게 아니고, 정말 불편한 마음으로 봤다. 그 중에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이주 노동과 성매매(성노동)를 각각 다룬 <위태로운 삶 : 홍콩의 연인들>, <위태로운 삶 : 중국인 묘지> 2편이 기억에 남는다.
예전에 어떤 논문을 읽으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여성 노동력 이주가 심해서 인도네시아 내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내용을 본 적 있다. 물론 이 '사회적 문제'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인도네시아 남성들이나 인도네시아 국가의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남성의 기준에서 보자면 너무 많은 여성들이 해외로 나가는 탓에 인도네시아 본토의 남성들이 성욕을 못풀고 결혼을 못하게 되었기에 '문제'가 되며(물론 여기엔 계급문제도 끼여든다), 국가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구학적인 '재생산' 문제가 달려있기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여성노동자들의 이주가 해결되어야 할 '사회적 문제'로 취급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농촌 노총각'이 재력과 공권력을 투입해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가 되었듯이(심지어 내가 사는 지역의 관공서에서는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일 년치 예산에 '국제 결혼' 지원 예산도 포함하고 있다).
그 논문의 저자는 유명한 인류학자기는 해도 페미니스트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숫자가 차츰 적어지면서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지고 있다고 본다(기존의 여남 관계가 도대체 얼마나 좋고 조화로웠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 본 영화를 보면 그리 좋았던 과거는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도네시아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점점 더 왜곡되고 있다고도 지적한다. 즉, 결혼 같은 '정상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성매매나 성착취가 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지적에 대해서도 귀담아둘 필요는 있지만, 오늘 본 두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서 먼저 제대로 인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다가올 그날>에 대해 너무 길게 써서 탈진해버렸다. 뒤에 영화들도 이에 못지 않게 할 얘기가 많은데... 난 이제 자야하므로 그냥 내 마음 속에 남겨두자 하하
덧) 티켓 끊는데서 우연히 들은 어이없는 대화. 남자애 - "와, ㅇㅅ영화제라더니 스텝들도 전부 여자네." 여자애 - "응, 그렇네" 남자애 - "(선심이라도 쓰듯) 그래, 오늘만큼은 여자의 날이다! 하하!" 아 제발 쫌 -_-;;; 당장 이런 애랑은 헤어지라고 할수도 없고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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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클래스의 정규학기만을 다룬다. 영화는 방학이나 방과 후의 학교 밖 풍경은 전연 다루지 않는다. 또한 아이들이 학교 밖에서는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며 학교 안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전혀 다루지 않는 건 물론이고, 마랭 선생의 학교 밖 일상도 아예 다루지 않는다. 그리하여 <클래스>는 말 그대로, 한 '클래스'에서 교사와 아이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만을, 가장 '보통'의 수준에서 다루고 있다. 형식적으로도 공립학교에서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는 '보통'은 이런 것이다. 정규 수업시간에, 교사와 학생으로서 만나는 것 외에는, 서로에게 무지하고 또 무심하다. 한명의 개인대 개인으로 만나기 보다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역할지위로서 만날 뿐이다. 1년간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입지만, 어디까지나 교사와 학생이므로 지킬 선을 지키며 각자에게 의무로 주어진 학기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보통'은 그런 것이다. 심지어 이 영화는 공립 보통학교를 배경으로 하며(한국의 평준화 학교를 연상시킨다), 프랑스의 인종 비율까지도 학생 집단의 구성에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보통'의 교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심지어 마랭과 갈등하는 학생들은 '보통'의 편견이 그렇듯,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용어를 쓰자면 '유색인종' 아이들, 혹은 비코커시언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등장하는 교사들도 모두 나름대로 전형성을 갖는다. '보통' 학교에 이런 교사들이 '보통' 있지 않냐는 듯이 말이다. 규칙은 규칙이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고 주장하는 교사(그래서 퇴학 조치도 당연하다), 아이들의 태도에 분노하는 교사, 아이들을 냉소적으로 보는 교사, 아이들 고유의 성격이나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와 행동으로만 평가하는 대다수의 교사들. 물론 마랭 선생은 이런 가장 '보통'의 교사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특별한 교사로 등장한다. 마랭은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으로 수업을 못하거나 어이없게 말꼬리를 잡혀도 쉽게 분노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아이들을 납득시키고 설득하려고 노력하며, 수업 중에 자기가 틀린게 있으면 곧바로 인정하고, 또 교실에서 평등한 토론 문화를 만들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데다, 학교에서 강제하는 규율이 교사와 학생 관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정말이지 보기 드문 훌륭한 교사로 등장한다.
또 영화에서 다루는 감정의 결은 의외로 세밀해서,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쓴 사람이 실제로 교사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교사 마랭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그 소설가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 때 교사가 상처받는지, 또 아이들이 어떤 점에서 상처를 쉽게 받는지, 또 그게 어떤 식으로 봉합이 되고 봉합되지 않는지를 섬세하게 다룬다. 아이들이 웃음짓는 순간, 또 교사에게 화를 내고 실망하는 순간도 잘 잡아낸다. 또한 아이들을 너무 손쉽게 평가하고 규율로만 다스리려 하는 다른 대다수 교사들 앞에서, 자기가 담임을 맡은 아이들을 변호하고 싶어지는 그 마음까지도 너무나 와닿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클래스>는 가장 상식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 상식일 뿐 -_-) 교사와 학생들의 아웅다웅 치고 받는 일상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클래스>는 아이들이 단지 '학생' 정체성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분명히 아이들은 학생이기 이전에 하나하나가 타인들이다. 여느 누구와 똑같이 존중해야 하는, 각각 한 명의 개인이자 타인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마랭은 평소에는 아이들이 단지 공부하고(지적 학습) 규율에 따르는(정의적 학습) 것을 익히는 '학생'들이 아니라, 한 명의 타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랭은 그 사실을 인지만 하고 있을뿐, 실제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한계를 보인다(이것은 제도의 효과 탓인가?). 그래서 마랭은 자기가 아이들과의 게임에서 불리해질때가 되면, 자기는 누가 뭐래도 교사이며 원래 '꼬꼬마 아이들'인 너희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예컨대 아이들은 마랭이 스스로의 권위를 깎아 내릴 수 있는 '말 실수'(과연 이것이 단지 말 실수인가?)를 한 것에 대해 정당하게 항변하지만, 집단으로 '대드는' 아이들에게 감정이 상한 마랭은 그것을 묵살하고 무시한다. 그리고 발언의 문제성은 애써 무시된다.
마랭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 스스로도 거리를 두곤 했던 교장과 동료 교사들을 위시한 학교 제도의 후광 덕이다. 아이들을 규율과 사회화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개별적 욕구를 지닌 인격체로 취급하는건, 안타깝게도 교사 마랭의 선택과 변덕에 달려있다. 아이들과 관계를 잘 맺는건 교사의 도덕적/윤리적 의무라기 보다는 마랭 개인의 자의식적 선택으로 비춰진다. 그래서 마랭은 자기가 불리한 순간엔, 그 강력한 학교 제도나 교사 연대와 별 트러블 없이 쉽게 공모한다. 이 제도 속에서 아이들은 하나의 타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자유의지와 재량권에 따라 '처벌'을 받고 심지어 '처분'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이들의 감정과 행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정작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어쨌든 남는 건 다만 보여지는 행동(성적 혹은 교사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평가하고 상벌을 내리는 제도뿐인 것이다.
그래서 <클래스>는 학교 제도와 교사-학생 관계에 대한 가장 '보통'의 이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리는 있겠지만 이 정도는 상식인이라면 납득할만한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클래스>의 마랭이 보여주는 상식까지 한국 제도권 교육에 바라는 건 무리일까? 한국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사실 누구나 교육'전문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고, 그렇기에 누구나 한국 교육이 문제라는 걸 알고 또 저마다의 견해를 갖고 있다. 언론에서도 대학 입시 중심의 교육, 방대한 사교육 따위의 문제가 언제나 이런 저런 이해관계가 얽혀서 복잡하게 제시된다. 또한 교육의 문제는 교육 외적인 영역에서 자주 다루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교육감 선거도 교육적 관점이 아니라 계급 이해관계의 실현의 측면에서 치뤄지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거대 담론적 수준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에서, 교사와 학생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전면에 부각되어 다뤄진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교사 학생 관계는 단지 '붕괴된 교권'의 측면에서, 언론을 통한 일종의 추문으로만 다루어진다. 교사와 학생은 그런 식으로 밖에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듯이. 우리에겐 상상력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상상력을을 뒷받침할 든든한 사람들까지. <클래스>는 마지막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끝난다. 마랭에 공감할 수 있는 교사가 1/3만 있다면, 한국 학교에도 어쩌면 봄의 샛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겠다.
덧) 마랭을 보면서, 지금 일선 교사가 된 친구들이 어떤 상황에 부딪히고 어떤 고민을 하게 되는지를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졌다. 내가 교생 할때는 아무래도 student teacher다 보니, 아이들이 좀 더 편하게 대해준 것도 있었거든.
덧2) 학교 다닐땐 당연하다는듯 체벌에 적극 반대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임용 붙고 교사가 된지 1년 만에 술자리에서 애들은 때려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정말 엄청난 '변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미안해지는구나. 안 친해서 직접 말은 못하겠지만, 미안해요, 선배.
덧3) 그러나 나는 아직도 체벌은 납득하기 어렵다. 사범대에 다닐 때에도 "애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충격이었다. 애들은 때려야 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정치인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내가 살던 동네엔 '매맞는 아내(battered wives)'가 많았다. 심지어 친할머니도 "여자들은 맞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할머니가 무섭게 보였던 최초의 순간). 그러나 이제는 남성 무의식의 차원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형법상의 차원에서는 '때리는 남편'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이제는 누구도 아내가 맞아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사회가 개선되었다기 보다는, 단지 그런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져 낙후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덧4) 한편 우리는 <클래스>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마랭은 어디까지나 남자 교사고, 교사와 아이들이 맺는 관계는 교사-아이간 성별에 따라 아주 다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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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남자로 만드는 마법의 레시피를 알려드리죠. 일단 재료를 준비하세요. 재료는 간단해요. 소년, 소녀, 로맨스, 그리고 일(꿈)입니다. 재료가 준비되면 시작은 쉬워요. 여름방학을 맞이한 소년은, 언제나 신비로운 모험(로맨스)과 소녀를 바라기 마련이거든요. 소년은 소녀를 만나면 즉각 화학작용을 시작해요. 우리가 손써볼 틈도 없어요.
일단 화학작용이 시작했으면 500일 동안 가만히 소년을 지켜보세요. 모두 알다시피 여름방학의 시작은 달콤한 기대로 충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쓴 맛을 느끼게 되죠. 혹시 소녀와의 관계가 어려워서 소년이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면, 주위에서 기운을 북돋아주세요. 소년의 마음은 상처받기 쉽고 섬약하니까요. 설령 소년이 공격적으로 나온다고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쑥스럽고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거라네요. (註 : <소년백서>, 2010) 이게 견디기 어려우시면, 그만 두셔도, 뭐, 상관은 없다네요. 그렇게 500일을 꾹 참고 지내면, 소년의 여름방학은 끝나요.
여기까지 왔으면 거의 다 된거에요. 여름방학이 끝나면 곧 가을이거든요. 드디어 결실을 맺을 때가 된거죠. 이제 소년은 남자가 될동말동한 상태예요. 여기에, 우리는 마지막 남은 재료를 조심스럽게 추가해야돼요. 소년은 (꿈꾸던) 일을 만나야 해요. 일이 잘 풀리면, 소년은, 드디어 가을학기를 맞이하고, 비로소 남자가 될 수 있어요. (물론 이건 도박이에요. 될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고)
참, 조심해야할 점이 있어요.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소년은 또 다른 500일의 긴 여름방학을 맞이해야 해요. 그 길고 긴, 여름방학을, 또 다시 말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소년이 우울해하고 힘들어 할 때 기운을 넣어주지 않으면, 소년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가라오케에 토를 할 수도 있고, 종업원을 때릴 수도 있고, 알콜 중독이 될 수도 있고, 스토커가 될 수도 있어요. 정말 조심해야해요. 한 번 잘못되면, 소년은 영원한 소년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500일의 썸머>는 시작부터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가 아니며, 대신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라고 못박는다. 그렇다. <500일의 썸머>는 '소년'이, 어떻게, 어떤 심리적 과정과 사건을 거쳐서, 비로소 '남자'가 되는지에 대한 영화다. 마치 500일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소년'이 '남자'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10대 초반의 작은 여동생에게 인간관계 상담을 하곤 하는 소년 톰에게, 어느날 썸머는 마법처럼 다가온다. 소년 톰에게 썸머는 신비로운(그래서 불가해한) 에로스 그 자체다. 썸머는 우유부단하고 감정적으로 미숙한 톰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톰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썸머에게 빠져든다. 영화에서 썸머가 어떤 감정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어낼 수 없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이 영화가 소년인 톰의 입장에서 500일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선언했듯,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때문에 영화의 서사는, 만남에서 이별에 이르는 일반적인 로맨스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영리하게도, 날짜를 짜깁기 하는 방식으로 연애의 에피소드를 배치한다. 썸머와 함께한 500일은 혼란스럽게 재구성된다. 이를테면 톰이 썸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매혹적인 순간을 맞이한 장면 바로 뒤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썸머에게 이별 통고를 받은 후 축 늘어진 톰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톰이나 썸머에게 감정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다소 혼란스럽게 배치된 영화의 에피소드의 얼개를 맞추는 일은 보통의 멜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의 몫이다. 맞추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그건 이 영화가 의도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썸머는 카드 회사에서 직장 동료로 만난 톰과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카페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을 때 책에 대해 질문하던 남자와 결혼한다. 결혼한 썸머는 '수트'(남성 세계의 상징)를 입은 톰을 찾아와 샤프하다고 칭찬해준다. 톰은 자신의 애인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했던 썸머가 갑자기 결혼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상처받은 소년 톰은 썸머에게 이제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만, 썸머는 오히려 자기가 틀렸고 톰이 옳았다고 말해준다. 톰은 여기서 크게 깨닫는다. 톰은 이제 원하던 직장을 얻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가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여성, 어텀(가을)을 만난다. 꿈꾸던 일과 로맨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소년' 톰은 드디어 썸머(여름)에 안녕을 고하고 '남자' 톰이 된다. 날짜를 가리키는 숫자는 500에서 1로 바뀐다. (가만, 그러다 윈터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땐 '중년' 톰이 되는건가)
이 긴 500일의 과정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얼마나 몰입하는지하는 차원을 떠나서(난 나쁘게 말하는 이야기는 이제 쓰지 않기로 결심했음. 하하하하하), 영화의 만듦새가 제법 훌륭하다. 얼굴부터 아메리칸 보이스러운 배우도 영화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 정도면 훌륭한 성장드라마 아닌가? 감독의 첫 데뷔작이라는데 앞으로도 기대해볼만 한 것 같다.
덧1) 시나리오 작가는 과연 '남자'가 되었을까? 영화가 시작하면 작가의 말이 뜬다. "본 영화는 허구이므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비슷한 점이 있더라도 완전히 우연일 뿐입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Bitch." (...)
덧2) 유독 소년에게 너그러운ㅡ심지어 한국의 가부장제는 4~50대의 얼굴을 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소년인 남자들의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ㅡ한국에서는 500일 갖고도 안될지도 모른다. 이거, 마늘과 쑥만 먹으면서 1000일은 썩어야 할지도...
덧3) <언 애듀케이션>을 봐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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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는 이른바 '콜 걸'에 대한 영화적이거나 서사적인 '전통'이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면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콜 걸'이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어떤 문화적인 각본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또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사랑'과는 별개로 다루어야 하는 '러브 어페어(Love Affair)'라는 주제는 대체로 중간 계급 이상의 계급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다루어지므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낭만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한 중간계급 이상의 가족을 배경으로 하는 설정 역시도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배경 탓에 잘난 미중년 남편과 역시 남편을 닮아 잘난 청소년 아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중년 여성이 편집증에 빠진다는 설정도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설정 탓인지 어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이>는 분명 후반까지는 별다른 특색을 찾아볼 수 없는 영화다. 클로이의 눈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빼면 말이다. 또한 스릴러 장르라고 선전은 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초반부터 영화의 결말이 예상 가능하다. 우선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문화적 재현물에서 '팜므 파탈'로 그려지는 인물이 결말 부분에 가면 대개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클로이의 미래를 쉽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클로이가 캐서린에게 의뢰를 받아 데이비드에게 접근한 뒤 접근 내용을 보고하는 장면 역시도, 클로이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감추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빛을 발한다. 벤야민은 "운율이 맞게 구상되었으면서 나중에 어느 한 구절에서 리듬이 빗나간 글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일방통행로』 중에서). 우리는 벤야민의 말에서 '운율'에 맞게 산문을 쓴다는 표현을, 작가의 신성한 창의력에 따른, 혹은 뮤즈의 불가해한 부름에 따른 작품의 무기반적 '창조'가 아니라, 작품 자체의 흐름을 어떤 언어적 전통이나 문법, '질서'와 조율한다는 의미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클로이>는 전통을 무조건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섣부르게 감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전통적인 몇몇 규칙과 문법을 적절히 합성하고 변주하며 따르다가 재빠르게 약간은 뒤틀린 모습을 하고 결말로 질주한다. 그 만듦새가 제법 좋다. 또 캐서린이 마지막 파티 장면에서 클로이가 준 핀을 머리에 꽂고 있는 장면이 상징하는 것도 좋다. 캐서린은 더 이상 이전의 캐서린이기를 멈추고 비로소 무언가를 뚫고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남는 하나의 의문. 왜 영화 속의 '팜므 파탈'들은 언제나 '소실하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의 역할만을 하냐는 것이다. 클로이는 영화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단지 서사를 이끌어 가기 위한 가상의 인물 혹은 단순한 하나의 장치처럼 보인다. 많은 영화들은 '팜므 파탈'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 가에 대해 설명할 때도, 유사 정신분석학적으로 간단히 어릴 적 트라우마나 부모와의 뒤틀린 관계에서 찾을 뿐, 다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팜므 파탈'을 일상적인 의미로는 이해를 전혀 할 수 없는, 그러나/그렇기에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그 무엇으로 그려낼 뿐인 셈이다. '팜므 파탈'을 만나 주인공의 일상은 파괴되지만, '팜므 파탈'은 결국 죽어 버리거나 어딘가로 사라지기 마련이고 주인공의 생사나 몰락과는 큰 상관없이, 질서는 되찾아진다.
덧1) 오늘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완전 득템! +_+ 한강의 신작 장편소설이 나왔다!!!!!!! 흑흑 그저 감사합니다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웅얼웅얼...
덧2) 클로이가 캐서린의 아들 마이클 스튜어트에게 들려주는 노래가 좀 좋았다ㅎㅎ 캐나다의 인디 밴드 Raised by Swans의 노래라는데, 백조가 키워냈다고 믿기엔 좀...; 어쨌거나 동영상 링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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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만났다. 가슴 한쪽 구석부터 차오르는 따뜻함, 그리고 다른 한쪽에 남아버린 씁쓸함. bittersweet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적절한 것 같다. 영화는 얼마간 전형적인 로드무비다. 다소 답답해진 일상을 벗어나서 길따라 여행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은 뒤에 마지막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렇게 돌아온 집은 이전의 집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은 뚜렷하지만 '직업'이 뚜렷하지는 않은 커플, 버트와 베로나는 버트의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다. 베로나는 그 방문이 마뜩찮기는 하지만 아이의 출산이 임박했기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이제 아이가 생겨날 두 사람은, 이 둘 외에 이 관계를 살피고 도와줄, 그들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가족 같은 것" 아니면 "친구 같은 것", "친분 같은 것", "우리가 아는 사람 같은 그런 것"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찾아간 곳에서 버트의 부모님은 2년간 벨기에로 떠나버린다고 뉴스를 전하고, 집도 임대를 놓아버렸다고 한다. 충격. 그럼 이제 이미 떠나온 길을 따라 길을 더 갈수밖에.
피닉스(Phoenix) - 투손(Tucson) - 매디슨(Madison) - 몬트리얼(Montreal) - 마이애미(Miami) - 집의 코스를 밟으면서 이들은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사람들과 사건에서 자신들의 <현재> 모습을 읽어낸다. 피닉스에서는 왜 결혼한 커플들이 자신들처럼 사랑하지 않을까를 궁금해하고(결혼은 관계의 파탄일 것이다. 베로나는 끝끝내 버트와의 결혼을 거부하던 중이었다), 투손에서는 베로나의 동생을 만나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애틋하고 얼마간은 애증이었던 관계를 떠올린다(자신이 부모가 될 때에, 비로소 부모라는 것에 대해 진지해질 계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매디슨에서는 정말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던 버트의 이를테면 사촌인 엘렌을 만나고, 엘렌의 뉴에이지 일상에 충격을 받는다(부모와 태어난 아이와는 '적절한' 거리와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몬트리얼에서는 옛 대학 동기였던 부부를 만나는데, 그들에게서 버트와 베로나 두 사람에게는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방패막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두 사람<만의> 삶은 없어지고 책임감과 인내라는 중요한 가치가 두 사람의 관계를 덧칠하게 된다.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침내 "친구 같은 것"을 찾아냈다고 생각해서 몬트리얼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던 두 사람은, 버트의 형이 전한 급한 연락을 받고 마이애미로 떠난다. 마이애미에서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형네 부부는 이미 파경이었다. 와이프는 이미 떠나서 잠적한 상태고, 버트의 형은 관계와 신뢰, 무엇보다도 평범한(정상적인) 삶이 무너졌다고 절망한다(결혼 생활 중이라도 얼마든 관계는 무너질 수 있고 세계는 붕괴할 수 있다. 아이가 있든 없든. 관계와 세계는 어쨌든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다소 작위적인가?
특히 마이애미에서 버트는 눈에 띄게 불안해 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무너진 커플의 신뢰 앞에서, 버트는 영 자신감이 없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야밤에 콩콩이를 뛰던 버트는 베로나와 인상깊은 장면을 연출한다. 속삭이듯 따뜻한 대화의 연속..
-(버트) 최소한, 결혼은 해줄 수 있겠어? / =(베로나) 절대 안 해. 그러나 절대 너를 떠나진 않을거야. / -(버트) 그래... / =(베로나) 약속할게 / -(버트) 그래 알겠어. 너는 나랑 절대 결혼을 하지 않을거야. 원하지 않으니까. 네 부모님이 결혼식 자리에 없으면 넌 절대 결혼하지 않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날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 할 수 있어? 우리의 이 아이를 절대 안 떠날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그럼(I do). / [... 중략 ...] / =(베로나) 우리 딸이 뭔가를 말하려 할 때 진심으로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특히, 아이가 두려워 할때 말야. 그리고 아이가 싸울 때면 마치 자기 싸움인 것처럼 아이 편을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 -(버트) 응(I do). 내가 부끄럽게 죽든 진부하게 죽든, 우리 딸한테는 아버지가 850명의 체첸 고아들을 구해주려다가 러시아 군인들과 맨손 격투를 벌인 끝에 죽었다고 말해줄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응. 체첸 고아들, 알겠어. 응.
보통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보는 사람은 진부한 사랑의 맹세를 늘어놓고 커플에게 "네(I do)"라고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진부한 결혼식 대신, 그들은 사회문화경제적인 이익을 주는 '제도권' 결혼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거행한 셈이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에 "우리는 비현실적이야", "우리는 망할 수도 있어"라고 자조하기도 하고 "꼬꼬마야? 혼란스러워? 미숙해? 미국적이야?"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얼마간 성장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추운 날씨에도 히터를 켜면 전기가 나가는 집이기는 하지만... 정말 사랑스럽다.
덧)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고 살찌는 것 가지고 베로나를 괴롭히던, 그래서 얼마간은 거북함이 들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던, 어벙꺼벙하고 우유부단하며 썰렁한 유머를 구사하던, 키만 껑충하게 큰(191cm) 버트 역을 맡은 존 크래진스키의 인터뷰 중에서 이런 말이. "제 이름은 원래 존 콜린스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재능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이름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크래진스키라는 폴란드 계관시인의 이름을 빌려왔어요. 완전히 쇼비즈니스계를 위한 이름이더라니까요." 아 이 배우 뭐냐고 ㅋㅋ
'선거' 만큼 진부한 운동 방식은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차피,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한국의 지방자치기구는 끼리끼리모여 쌈싸먹고 나눠먹는 허울 좋은 제도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또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선거 관련 부정부패비리는 너무나도 뿌리 깊은 것인데다, 출마하는 남자들의 면면과 야심 자체도 꼴불견인 경우가 많이 보였다. 그래서 선거 당일이 되면 (그나마) 선호하는 당을 보고 투표를 하거나 아니면 기권을 하는 것(그러나 투표장에는 반드시 가는 것)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모 정당에 일반 당원으로 가입해 적은 돈이지만 당비를 납부할 때도, 해당 정당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충분히 민주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급진과 민주주의가 뭐길래.
어제는 영화 <밀크>를 정말 감명깊게 봤다. 많이 울었고, 많이 흔들렸고, 많이 무서웠다. 몇가지 흐름이 개연성 없이 보이는 장면도 조금 있었지만(예컨대 스캇과 하비가 뉴욕의 지하철 입구 계단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라든지, 댄 화이트가 갑자기 눈에 광기가 서린 인물로 나타나는 장면이라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고, 전체적으로는 큰 무리 없는 설정이었다. 또 하비 밀크가 최초의 게이 정치인으로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이라는 약간의 이력 외에는, 어떤 성격을 가졌고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었으며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여줬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기 때문에, 2시간 5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선거'와 '의정 활동'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밀크>를 보면서 처음 느꼈다. 물론 그 과정을 단지 '아름답다'고 타자화(=미학화)하는 일은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소수자 운동에 대해 보통의 남성 진보 지식인들이 보내는 찬사와 격려 따위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선거 운동의 지난하고 숨막히는 과정은 물론, 의정 활동에 마주하는 수없이 답답한 상황을 어쨌든 헤쳐 나가는 밀크의 모습에 푹 빠져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가 청중을 향해 연설을 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벌떡 일어나서 그가 외치는 구호에 당장 동참하고 싶었다. "Gay Rights Now! Gay Rights Now!"
미국 보수 기독교 집단의 온갖 협박과 협잡은 치졸하고 유치한 것이었지만, 그랬기에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밀크는 처음 받은 살해 협박 종이를 아예 냉장고에 붙여 놓으면서, 그 종이를 숨기거나 찢어 버리자는 애인 스캇에게 이런 종이를 어디에 숨기거나 한다면 더 무서워질 뿐이지만 이렇게 붙여놓고 계속 본다면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자기에게 불리한 장소에서 공개 토론회를 거침없이 제안한다. 마이크를 잡으면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는 엽서를 받아도, 그는 마이크를 잡고 감명 깊은 연설을 한다(그는 타고난 선동가였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예감한 밀크는 자신의 정치사, 생애사를 담은 육성 테이프를 남긴다(그가 원고를 써서 녹음을 했다는 것에 마음이 무너졌다. 외부의 폭력에 암살을 예감하고 유서를 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상상할 수도 없어서). 그러한 모습은 낭만적 액티비스트의 모습 그대로였다.
불모지에 가까웠던 카스트로 구역을 명소로 만드는 과정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그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 내가 어떤 공간에 붙박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악FM이나 마포FM같이 지역 라디오 방송사가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고, 라디오는 없더라도 적당한 문화 인프라(관제가 아닌)가 있는 곳에서 잠자는 방과 서재 혹은 작업실로 쓸만한 방, 부엌, 개인 화장실을 갖춘 집에서 살면서 애착을 가질만한 지역 공간을 만드는 일을 언제나 꿈꿔왔었으니.
가장 좋았던 장면은 게이 인권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권리로 가자며 밀크를 설득하는 사람들의 말에 밀크가 단호하게 대응하는 장면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타협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자꾸 숨어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왜 게이의 권리이면 안되는가. 왜 인권이라는 두루뭉수리한 말로 현실을 감추어야만 하는가. 또 기억에 남는 다른 장면. 댄 화이트가 밀크 당신은 이슈가 많아 정치인으로서는 축복 받았다고 질투하는 장면에서, 밀크는 분개하면서 그건 단지 하나의 '이슈'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고 삶의 문제이며, 나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몇 가지 개인적으로 불편했던 점이 있었는데(단지 영화에 그치지 않는)... 그에 대한 생각은 벤야민을 인용하는 것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전통에 적대적인 사람일수록 다가올 사회적 상황의 입법기관으로 떠받들고자 하는 규범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의 개인적 삶을 영위할 것이다. 아직 어디서도 실현되지 못한 그러한 규범들의 모범을 적어도 자신의 고유한 삶의 영역 안에서라도 보여줄 의무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신분과 민족의 아주 오래된 전통과 자신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적 생활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원칙과는 대조적인 사생활을 때때로 과시한다. 하등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는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마치 그가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원칙의 확고한 권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도 되는 듯 은밀히 찬양한다." <일방통행로>. 김영옥, 윤미애, 최성만 역.
이런 정도의 역량을 갖춘 독일이 참 부럽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를 이렇게 꽁꼼땅꼼하게 기록해 낼 수 있다니. 적군파의 해체가 고작 10여년 전인 1998년에 공식 선언됐다는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다. 68의 독일판 유산이라면 유산이랄 수 있는 적군파가 98년까지 이어졌다는 일도 그렇지만, 그게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부러운 일이다. 예전에 다카우 수용소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 느낌을 받았더랬다. 악명 높은 수용소가 이렇게 잘 가꾸어지고 보존된 시설로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으니까. 물론 내부 사정이야 내가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고, 나의 철없는 부러움에 이의를 제기할 독일 사람들이 많겠지만.
어쨌거나 한국 영화계에서 이 정도의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먹먹해진다. 불과 몇 년전의 대추리,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용산 참사, 지금도 진행 중인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는 차치하더라도,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이나 80년 광주에 대해서 <바더 마인호프> 정도의 세련미와 신중함을 가진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못할 것이다. <바더 마인호프>는 "독일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영화라고 한다. 일종의 '블록버스터'다. 자본이 투입되어도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사회가 역사를 기억하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은 아직 갈길이 먼 것 같다.
영화에 나오는 미디어들은 적군파를 내내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테러리스트'라는 언설은 정치 권력이나 발화할 수 있는 채널을 갖지 못한 이들이 투쟁을 결의하고 선포했을 때 앞으로 얼마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말이다.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들으면 중국의 제국들이 생각난다. 중국의 한족 제국들은 소위 '오랑캐' 국가와 전쟁을 일으킬 때 토(討), 벌(罰), 벌(伐), 정(征), 습(襲), 침(侵), 취(取) 등의 어휘를 동원했다. 그리고 제국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인정되는 상대에게만 전(戰)이라는 말을 썼다. 싸우긴 싸우되 벌(罰)하는 것이며, 너를 혼내고 취(取)한다는 식의 논리다. 중화 의식이란게 유구하게 있어왔으니(지아장커에게까지 이어지는!) 그리 특이하다싶은 말은 아닐지 모르겠다만, 실제 중국의 제국들은 저런 말을 사용할만한 힘을 갖고 있을 때가 많았기에 저 말들은 단지 말일 뿐 아니라 늘 '실현'되었다. 한국도 그리 다르지 않다. 성공하거나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 '저항운동'에는 마지 못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기념하지만, 그 외에는 '난(亂)'이라는 말을 동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테러리즘'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국가 권력은!
마오쩌둥, 호치민 등에 대해서 자랑스레 말할 수 있었던,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뜨거웠던' 시절을 그려낼 때엔 감독의 '위치' 선정은 특히 중요한 일이다. 보수 세력의 프로파간다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혹은 당사자들의 역겨운 회고담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바더 마인호프>는 영웅담과 '테러리즘' 사이에 영리하게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적군파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동기와 추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다루는 감독의 시선에서 그런게 느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나 봤던 유명한 장면들(네이팜 탄에 폭격 당한 베트남의 마을과 그 마을에서 뛰어 나오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길거리에서 권총으로 즉결 처형당하는 '베트콩'의 모습, 체 게바라의 모습 등)이 영상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 영화를 더욱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독이 어느 편인지는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든다.
열정과 확신이 가득 들어찬 정치적 언어를 자신의 것처럼 말하는 에슬린, 에슬린의 애인으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혐오 발화를 거침없이 내뱉는 행동파 바더, 차갑고 분석적인 말로 토론과 글 쓰는데 재능이 뛰어난 좌파 저널리스트 출신의 마인호프. 이들이 적군파를 결성하고 모든 "억압적인 세력", "경찰국가"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는 모습에 심장이 쿵쿵 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구속된 이후에 그들을 석방하기 위해 다른 조직원들이 수행하는 행동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부르는 걸 보고 있자면 양눈썹 사이에 주름[川]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하긴, 감옥의 바더는 그들이 한 행동은 자신들이 명령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1~2년 전에 봤다면 나는 아마도 에슬린에게 몰입했겠지만, 지금에서는 마인호프에게 좀 더 마음이 간다. 적군파를 결성하고 활동하면서도 자신의 두 딸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마인호프. 아이들이 고아원에 맡겨지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마인호프. 체포당할 때 "당신이 왜 여기에?"라는 질문을 던지는 경찰관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마인호프. 결국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나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런 저런 '혁명'의 대의에는 여전히 공감하지만, 그 대의가 실제로 내 눈앞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내심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바더 같은 사람과 나는 무슨 일이 되었든 절대 같이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게 가장 큰 문제는 젠더 문제라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청소년들이 꼭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의 해묵은 계몽주의자들도 싫다고.
과장을 섞어 말하건대 어찌 신민아와 공효진, 두 배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아빠 찾아 삼천리'하다가 두 '자매'가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며 울고 불고 싸우다 끝나는 '가족 신파'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조금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조금은 '특별한' 자매가 있고,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로 완전히 성장하지는 못한 채 성년기를 맞이하게 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이가 찬 이후에 그 성장 과정에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하지만 아버지를 만나건 못 만나건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뭔가를 깨닫게 되고 성장하게 되는, 사실 특별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지루하달 것도 없는 평범한 (하지만 배우들이 매력적인!) 감동 성장 심리 가족 드라마 로드무비겠거니 싶었는데.
사실 가족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이상적인 가족' 보다는 좀 더 현실에 맞는 가족을 다루거나, 나름대로 '대안적인' 가족을 다루거나, 흔들리는 가족 상을 본격적으로 반영하는 영화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볼 수 있었다. <가족의 탄생>, <좋지 아니한가>, <바람난 가족>, 해외작으로 국내 개봉한 작품으로는<미스 리틀 선샤인> 등. 이런 영화들과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가 다른 점을 일단 하나 들자면, 일단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에 나름대로 구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감독이 제주 출신이라 그런진 몰라도, '제주'와 '서울'이라는, 비교적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장소를 영화의 배경으로 택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직업만 보더라도 광고 회산지 PR회사인지에 다니는 제법 자리를 잡은 회사원인 명은(신민아), 그리고 제주에서 생선을 파는 명주(공효진). 게다가 아무래도 바다('경계')를 건너야만 한다는 설정이 도입될 수밖에 없기에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에도 큰 몫을 하는 것 같다.
결말에 명은의 '아빠'에 대한 예상치 못했던 '폭로'가 있는데, 정말 말 그대로 그건 '충격'이었다. 물론 그러한 '폭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비교적 평화롭게 끝난다. 하지만 대체 아빠가 어디있는지를 묻는 명은에게 '엄마'는 퉁명스럽게 "죽은 거나 다름 없어." 라고 대꾸하는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말이 잘 잊혀지질 않는다. 한국에서는 명은의 '아빠'가 겪은 과정이 일종의 '사회적 죽음'이나 다름 없다는 선언 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은의 '아빠'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 왔다. 곁에 있으나 곁에 있지 않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부재했던 삶. 그렇기에 이 영화가 단지 '아빠 찾아 삼천리' 식의 영화로 읽히지는 않는다. '아빠'는 없다. 아니, 중요하지 않다. 대신 이 영화는 '사회적 죽음'을 거친 존재(혹은 그 상태에 있는 존재), 즉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못한 존재, 마치 유령과도 같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 비-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일종의 <윤리적 탐문>으로도 읽히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다소 묵직한 소재가 단지 자리 깔아주기 위한 것으로 보일 만큼.
물론 영화는 그 탐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쨌든 '아빠 찾아 삼천리'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기에, 그에 걸맞는 결말을 맞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던져지는 문제도 일종의 '가족주의' 안에서의 탐문이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명은의 '아빠' 설정이 어떤 일반적인 선입견이나 편견을 답습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해피 엔딩'이었잖아?
조조로 봐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그리 많진 않았다. 대부분 여성 관객들이었는데, 중간에 명은과 명주가 싸우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우는 관객들이 좀 있었다. 자매가 '없는' 나로서도 계속 눈물이 났는데 정말 슬프게 공감하며 우는 분들이 많았던 걸 보니, 이 영화 진짜 훌륭한 영화 임엔 틀림 없다!
덧말) 공효진은 진짜 <미스 홍당무>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명주 식의 캐릭터도 진짜 잘 소화해내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좋아ㅎ
덧말2) 아무래도 명주보단 명은에게서 내게도 있는 몇몇 모습들을 발견했던 터라... 어흐.
<우아한 세계>는 꽤나 재밌는 영화였다. 나는 조폭물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편이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변주였다고 본다. 한참 전에 봤던 조인성 주연의 <비열한 거리>가 줬던 느낌이랑 비슷했다. 조폭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남자들의 '의리', 폭력의 정당화, 사랑과 폭력의 동일시(혹은 (성)폭력 없이는 사랑도 없다는 식의 설명), 반드시 등장하는 성폭력과 성매매, 폭력과 위계질서로 웃음을 유발하는 문법 등등이 조금씩 뒤틀리고 탈환상화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송강호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아한 세계>는 조폭물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아버지'에 바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아버지를 위한 영화. 예전에 비해서는 심각하게 떨어진 아버지의 '권위'에 바치는 송가(訟歌)나 애가(哀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남성 권력은 더 이상 예전 같은 '가부장제'식의 강력한 권위와 권력이 아니라, '찌질함'으로 대표되는 동정심을 통해서 작동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송강호는 자신의 '가족'ㅡ소위 '처자식'ㅡ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려움을 참아내며(심지어 목숨까지 걸어가며!) 동분서주하는 아버지로 등장한다. 그게 어디까지나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지만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상'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잘못된' 사랑 방식이다. 딸의 선생님에게 촌지를 준답시고 자기랑 관계 있는 나이트 클럽의 200만원짜리 상품권을 주는 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호의일 것이다. 딸의 다이어리를 훔쳐 본걸로 모자라 딸이 자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쓴 걸 보고서 칼을 들고 설치는 장면도 역시 쉽게 공감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렵다. '처자식'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을 끝끝내 고수하면서(물론 송강호에 공감하는 이들은, '타고 나서 배운게 이거밖에 없으니'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과 유대의 끈을 배신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무를 다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사랑과 관심을 표현한답시고 허세를 부리며 비싼 집을 알아보고 다니는 모습에는 코웃음까지 났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극적인 '화해'를 한 뒤 아내와 딸은 아들이 유학 가 있는 외국으로 떠나고, 송강호는 이제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가 된다. 그리고 송강호는 넓은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그들이 보내온 비디오 테이프를 본다. '아버지'의 '잘못된' 사랑 방식은 여기서도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들은 가정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 행복은 어디까지나 스크린에 비친 재현,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가닿지 못한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부재한 곳에서, 송강호가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일종의 (가상) '현실' 속에서 가장 행복하다. (예상했던 바대로) 송강호는 처음엔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리면서 라면을 집어 던져 버린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리고 나서는 (역시 예상했던 바대로) 쓸쓸하게 자기가 저지른 일을 마무리(청소)한다. 아버지의 '세계'는 온갖 굴곡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기 반복적으로 순환되고 복원된다.
이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년) 기러기 아빠'에 대한 동정심 어린 관심이 크게 일었던 걸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흐름은 아니다. 허나 이러한 흐름이 아주 '그럴싸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당시 '기러기 아빠'는 무려 심각한 "사회 문제"로,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을 하나로 수렴하는 '핵심(core) 문제' 혹은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었다. 물론 그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되려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할 문제는 '기러기 아빠'가 모든 '가정 문제'에 우선하는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중하다면, 아내 폭력, 부부 성폭력, 성별 분업, U자를 그리는 여성 노동 곡선, 보육 시설 등에 대해서는 우리는 왜 그동안 그리도 말을 아꼈는가. 왜 그런 것들은 흥행하는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기러기 아빠는 당당하게 영화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는가. 정희진씨 말대로 남성의 문제는 곧 사회의 문제로 번역되기 때문은 아닐까('농촌 총각'을 위한 국가-행정적인 전폭적인 지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남성권력 편향적인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 영화도 아니고, 한국 사회 아버지들의 권위를 재기있게 뒤튼 영화도 아니란 생각이다. 위에서 말했듯, 점점 존재감 없어지는 어떤 사회적 유령을 소환하는 영화다. 그 유령에 대한 동정심 어린 애도이고, 주술이다. 오늘날 권력을 유지하고 옹호하는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등장한 '동정심'. '동정심'이라는 주술..
덧말) 강인구(송강호)의 아들이 한국에서 이들과 같이 살았다면 이 영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 봤음~ 아침에 요 인근 도시로 가서(내가 사는 데는 영화관이 없기 때문에;) <인ㅅ동 스캔ㄷ>이랑 <박쥐>를 연달아서 보고 왔다. <인사ㄷ 스ㅋ들>에 대해서는 뭐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다. 그냥 김ㄹ원 역시 별루다 엄정ㅎ 역시 킹왕짱 뭐 이 정도? ^^; 최근 들어 미술품이 유망한 투기나 투자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ㅡ물론 거래량 세계 1위 미술 경매회사의 사장이 지적하듯 미술품이 대세라거나 새로이 등장한 안정적인 투자 시장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섣불리 얘기할 시점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신경제New Economy'의 메커니즘과 미술 경매에 쏠리는 투자/투기적 관심의 특수성과 상관관계를 생각한다면ㅡ이런 꽤나 볼만한 범죄 스릴러 물이 나오는 것은(그리고 서사적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테다.
<박쥐>를 보면서 내내 이거 라캉주의자들에게는 좋은 '떡밥'이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정신분석학에서 나오는 개념들로 짚을 수 있는 부분들이 정말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이 요새 지젝의 책이나 정신분석학 책이라도 심취해서 읽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자체가 정신분석학 영화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쾌락과 판타지의 관계, 남성적 쾌락과 여성적 쾌락, 이어서 '쥬이쌍스'와 팜므 파탈, 또 상징계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실재의 귀환, 정신분열(정신병), '아버지'의 법과 도덕(윤리) 그리고 죄책감, '남성적' 주체와 '여성적' 주체,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프로이트의 말, 응시(gaze), 증상의 지속 등등. 이러한 단어들에 영화 장면 가지고 살을 덕지덕지 붙이면 꽤나 재밌게 짧은 라캉주의 정신분석학 개론 에세이 하나 쓸 수도 있겠다(물론 내 능력 밖이다). 물론 여기에 참신한 것은 하나도 없고, 단지 라캉 '어르신'을 비롯한 정신분석학 텍스트에서 이러콩 저러콩 말했네 하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 관련한 책은 다신 읽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던 터에 영화를 보면서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었으니 보고 나와서도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_-... 하아. 내가 지젝을 비롯하여 라캉 정신분석학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건, 그들이 더 이상 영감을 주지 않는다거나 진부해져서도 아니고 어려워서도 아니다. 어려운 만큼이나 영감을 주는 것도 많았고 읽고 나서 재미도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 표현이나 개념 상에 불편한 부분이 많아서 그것들을 견뎌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명하는 말을 많이 접해도 정신분석학이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어려웠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예전에 어떤 포스팅에서도 얘기 했었던 바지만 어떤 철학자가 지적했듯 라캉을 읽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를 들자면, 라캉을 읽고 라캉적으로 글을 쓰는 그 자체로 자신이 혁명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 때문이다. 나 스스로도 그런 식으로 글을 썼고. 황석ㅇ의 소설 <개밥바ㄹ기 별>에서 유일하게 건질만 했던 얘기인 '(정작) 별은 보지도 않구 별에 대해 쓰는'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달까... 잡소리는 이만.
어쨌든, 진짜 <박쥐>는 볼만한 영화였다. 박찬욱 감독이 어떤 인터뷰에서였나 이 영화에 대해 후한 만족감을 표한걸 읽은 적 있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 나야 영화 전문가도 아니고 뱀파이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장르적 특성이 빼어난 건지 알 도리가 없지만 예전에 <놈, 놈, 놈>더러 '김치 웨스턴'이니 하고 비꼬는 이들이 많았던 걸 떠올리면 '김치 뱀파이어' 운운하는 말이 (별로) 없는 것만 봐도 꽤나 뱀파이어라는 소재의 특성을 나름 잘 살려서 만들었다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적어도 뻔한 뱀파이어 물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캐릭터만 보더라도 송강호 자체가 미끈하고 길쭉하게 빠진 몸매에 창백한 얼굴을 가진 백인도 아니고, 또 흡혈할 때 이빨을 목에 쿡 꽂은 다음 쪽쪽 빨지도 않고.
사지절단, 피, 뾰족한 걸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두 눈 퍼렇게 뜨고는 못 볼 장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진짜 아름답다고 섹시하다고 느꼈던 부분도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흐으;). 가끔 소름끼치기도 했으니까. 또 중간 중간 등장하는 블랙 유머들은 좀 많이 웃겼다. 나름 심각한 장면에서 인터넷과 자살 커뮤니티(?), 고해성사에 대한 송강호(상현 역)의 대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 마지막 장면도 꽤 맘에 들었다. 대체 마지막을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했는데, 좀 길다 싶었지만 적당한 유머 감각으로 지루하지 않게 잘 끌고 가서 예쁘게(?) 끝낸 것 같아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았다.
송강호는 예전 작품에 비해 조금 만족도가 (-)였지만 김옥빈(태주 역)이 예상 외로 너무 (+)여서 연기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초반에 약간 어색하다 싶은 부분이 있었지만, 중반 쯤 진척된 후 감정 연기가 힘들었겠다 싶은 부분이 많았는데 그런 쪽에서 굉장히 놀라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모르지만 김옥빈 나온다면 꼭 챙겨 보리라! 그런데 강우 역을 맡은 신하균은 아쉽게도 좀 튀는 느낌이었다. 강우 역은 시원찮아야 하는데, 신하균이 나와서 연기를 하니 비중이 높은 캐릭터처럼 보였다. 존재감이랑 느낌이 강한 배우이기 때문에 이런 조연 역할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나저나 신하균님하는 진짜 왜 이런 역할만 ㅠㅠ 이것도 전문 분야인가요.. 오달수라든지 박인환이라든지 다른 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만족 +_+
이건 번외 이야기이지만, 상현의 기도(독백)는 꽤나 맘에 들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고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씨네 21 기사에서 긁음) 나야 개신교 신자도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난 누구(;;) 말마따나 무신론자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_-...
덧말 1. 송강호의 곧휴가 나온다고 호들갑 떨었던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본 건지 진짜 이해할수가 없다. 난 대체 어떤 장면에서 나오나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암튼 같이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그 장면에서 탄성 아닌 탄성을 내지르는 것으로 보아 어떤 이들에게는 '혐오'를 유발하기는 하나 보다. 때론 공포나 혐오를 불러 일으키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파워'를 상징하는 그것은 여전히 흥미로운 분석 대상이다 진짜-_-..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연장선 위에 있으니 뭐.
덧말 2. 이 포스팅하면서 잠깐 찾을 게 있어서 검색하던 중에 '융드옥정'이랑 강우와 태주의 엄마로 나온 배우가 닮았다는 기사를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ㅎㅎ
덧말 3. 가장 궁금했던 것 하나. 송강호는 어디에서 온 어떤 피를 수혈 받았기에 뱀파이어가 된 것일까; 그 뱀파이어는 왜 헌혈한 것인가; 아님 어디에 뱀파이어 확산 위원회라도 있는 건가;
덧말 4. 어떤 작품이 원작이라는데, 그거랑 비교해서 보고 싶다. 초반에 등장하는 바이러스가 '백인과 아시아인만 걸린다'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그리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설정은 아니지마는, 그 원작에서는 어떻게 이 설정이 그려지고 있는지. 어떤 인종주의적인 정치적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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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ㅇ프터 ㄹ딩>을 봤다. <노인을 위한 ㄴㄹ는 없다> 이후 코엔 형제의 작품은 오랜만인듯 싶네. 게다가 무려 조지 클루니에 브래드 피트가 나올 뿐 아니라 틸다 스윈튼, 존 말코비치 등이 나온다. +_+ 진짜 초호화 캐스팅! 하지만 코엔 형제의 명성, 그리고 이들 배우들의 영향력에 비해 한국에서는 개봉관이 딱 하나로 무척이나 적은 편인듯. (스포일러 안쓰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D)
사실 누가 나온다는 사실만 알고 봤기 때문에 내용이 어떻게 전개 될지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건 웬걸. 이 영화 상상 이상이다 진짜. 이런 쟁쟁한 배우들이 어떻게 이런 캐릭터를 소화해 냈을까. 감독도 대단하지만, 이런 배역들을 잘 소화해 낸 배우들도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국가 기밀을 다루는 에이전트, 우연히 새 나간 국가 기밀, 미국 국무성 등 쟁쟁한 국가 기관, 러시아 대사관, 총, 미행, 살인, 사랑, 시체 은닉.. 이러한 요소를 조합하면 (당연히) 그럴싸한 첩보 스릴러가 나와야하는게 맞다. 게다가 출연 배우들도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존 말코비치 등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을 테다. 헐리우드 식의 스릴러 물의 문법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렇게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조합되었는데도 이렇게 웃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나는 아직도 이 영화의 영특함과 명민함이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저 막장 블랙 코미디로 치닫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꼭 말해두어야 겠다. 피식, 하는 웃음부터 푸핫, 하는 웃음 사이 사이에, 첩보 스릴러물에서나 느낄 법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 나로서는 중간까지도 이게 대체 무슨 영환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덧 자랑스레 젊다고 말하기엔 조금 민망한 중년 길에 접어든 배우들이 나와서,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위해 성형 수술비를 모으고, '바람'을 피우고, 그 바람은 또 바람과 바람 그리고 이혼 도장과 사설 탐정 고용과 술을 불러오고, 사랑을 위해 침투하고 기밀을 훔쳐 내고, 통장에는 자기도 모르는 새 돈이 빠져나갔고, 누군가는 실수로 총에 맞아 죽고 그 실수는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오고, 파산자로 오해 받고, 편집증이 나타나 반은 미쳐버리고. 이 모든 사건과 유머들이 사실은 '미국 중년의 삶'에 초점이 있는 것 같아 내내 씁쓸했다. 이 영화의 어디에서도 중년 연령대의 인물 외에 다른 인물에는 조명이 맞춰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듯, 이 시대의 진짜 '성적 소수자'는 '중년의 배나온 남성'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와 맞물려서, 일반적인 문화 재현물의 연령 배치를 떠올리게 되니 더욱 암울해졌달까. 그로부터 누가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괜히 긴장했다가 이내 피식 피식, 낄낄 웃고 또 긴장하면서 90여분을 보내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겉잡을 수 없는 허무와 허전함에 질식해 버리는 줄 알았다. 갑자기 많이 외로워져버렸다. 영화가 싫어서도 아니고 재미없어서도 아니다. 이 영화 진짜 훌륭하다. 단지 "이번 사건을 통해 배운게 대체 뭔가?"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네."로 이어지는 대사 연쇄를 보고 있자니 더 그랬단 말이다. 휴우.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는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하는 영화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영화 서사의 문법에서라면 분명 이들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 가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만약 영화가 한 여자를 '쟁취'하기 위한 두 남자의 '각축전'을 선택한다면 너무나 뻔한 결말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남자들 사이의 에로틱하기 짝이 없는 끈적끈적한 대결(주먹이 오가고 피와 눈물과 격정이 철철 흘러 넘치는데 어찌 에로틱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을 보여주든, '자원'을 적게 가진 남자가 결국엔 '패배'하여 저 뒤안길로 사라지고 승리한 남자는 한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든, 그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넓은 의미에서의 남성 정치, 남성 연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당연히도 이러한 방식의 서사가 우리가 보아 왔던 영화 속 연애 유형의 대다수를 차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서사의 문법은 두 남자의 선택과 갈등보다는, 한 여자의 '선택'과 '행위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서사 유형을 전도한 형태로서(어떤 이들은 지배적인 어떤 것의 단순한 전도를 기계적으로 비판하고 힐난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가장 단순한 전도야 말로 핵심적인 무언가를 건드리고 또 가능케 한다고 믿는 편이다) 이성애적 문법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의 서사는 가능할까?! 만약 '한 여자'가 "레즈비언"이라면? 혹은 남자 중 한 명이 "게이"라면? 혹은 한 남자가 "바이"라면? 충분히 더 흥미롭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서사가 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들의 문화적 지형에서, "호모섹슈얼"(아직 "바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은 점점 하나의 흐름으로서ㅡ어쩌면 단지 서사의 한 유형으로서만ㅡ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이에 대한 평가는 뒤로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영화가 흥미롭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만큼 관객수도 전위적으로 급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빈한하기 짝이 없는 문화적 지형은, 만약 주인공들의 네이션이 소위 "동남아", "라틴", "치카노", "흑인" 등등이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 인물들의 네이션이 뒤섞여 있다면, 이러한 영화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blah blah blah
...
말이 길어졌네(ㅋㅋ)
어쨌든, 이 영화, 무척이나 재밌게 보았다!는게 결론이다 ㅋㅋ
모래(신민아)와 상인(김태우)은 알콩달콩 살아가는 부부로 등장한다. 모래는 상인을 '형'으로 부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 둘은 같이 지냈고, 그러다 보니(어쩌다 보니) 둘은 결혼에 이른다. 왜 둘이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는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초반부에 둘은 분명 친밀하고 서로를 깊게 배려해 주고 신뢰하는 커플로 보인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이다. 두 사람은, (아니, 모래는) 넬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Let's not change the world, but make another one"하는 식의, 분명 70~80년대의 한국에서라면 비난받아 마땅했을 그런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래에게 상인은 세계를 순환하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다. 모래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늘 양산을 휴대하고(햇볕을 오래 쬐면 금방 피부는 물론이고 사고 전체에 '이상'이 온다. 햇볕은 다른 세계의 시선(gaze)이다) 심지어 양산만 파는 가게를 운영한다. 물론 손님은 전혀 없다.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래의 유일한 친구이자 언니(역시 상인처럼 어릴 적부터 알아온 듯 하다), 상인, 두레(주지훈), 그리고 양산을 우산으로 바꿔줄 순 없겠냐고 묻는 고등학생들 뿐이다. 양산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프랑스로 어릴적에 입양된 요리 천재 두레가 상인의 초대로 등장하게 된다. 두레와 모래는 우연히 밀폐된 공간에 갇히게 되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른하게 만드는 햇볕 때문에 모래는 섹스를 하게 된다(최고의 비주얼;;). 모래에게는 "이상한 맛"이 나는 섹스였다. 모래는 그 "이상한 맛"의 존재를, 자신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인 상인에게 '순진하게' 말해 버린다. 상인은 그 "이상한 맛"이 나는 사내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나지만(남성-상인에게도 이는 두 사람만의 세계의 붕괴를 알리는 전초였을 것이다), 덮어두기로 한다. 그 "이상한 맛"나는 사내가 자신과 친한 동생인 두레라는 것은 모르고. 결국 두레는 상인의 집에서 살게되고 이제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두레가 프랑스로 '입양되었다가' '돌아온'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은 꽤나 중요한 것 같다. 프랑스가 중요하다는게 아니라 어쨌든 두레가 전형적인 '한국 남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초반, 중반부에 걸쳐서 두레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인 상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마치 외국의 입김이 미치지 않으면 그런 관계 맺음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국 남자들에게 그런 방식의 관계는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두레는 모래와 상인의 관계에 단순히 '끼어들어' 그 관계를 분해시키지도 않고, 그 관계의 성장을 촉진시키고 자신은 사라져 버리는 비료(젠체하자면 'vanishing mediator' 정도?)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무척 흥미로웠다. 두레와 모래는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게 될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얼마간 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랑스로 입양갔던 두레의 정신은 금방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상인이 "너도 한국인은 한국인이구나"라고 말한 게 적중한 셈이다. 영화는 결말 쯤에 가서는 두레와 상인의 으르렁대는 대결 구도로 가버리고('보스의 여자'를 빼앗으려드는 2인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통속적인 조폭 영화랑 똑같지 않은가!),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끈적한 남성 연대의 재결합과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겪은 갈등 이전과 같은 식의 남성 연대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쉽기 짝이 없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동 말 동 했었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무한히 긍정할 수 있다면 모래(신민아)의 '변화(혹은 성장)'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모래의 성장 드라마라는 얘기다. 오로지 모래만을 위한 영화. 물론 그 변화(내지는 성장) 속에서 모래가 맺는 관계의 방식이 변화했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상인을 중심으로 회전하던 모래의 세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경험(진리-사건?ㅋㅋ)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적이지만, 그래서 초반부의 모래와 결말부의 모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여기서 어떻게 변했는지 말하면 진짜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패스. 무엇보다 이러한 모래의 변화는 나의 일련의 변화 과정과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ㅋㅋ 치이고 닳기만 했던 20대 초반을 정신 없이 지나 온 사람들이라면, 내가 본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구.
『이론. 이후. 삶(Life. After. Theory)』이라는 자크 데리다와 토릴 모이 등이 참여한 대담집의 제목처럼, "로맨스. 이후. 삶(Life. After. Romance)" 그렇다고 로맨스가 없는 건 아니라는 데 방점이 있다!!
어쨌거나 홍지영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대 된다. 흐흐흐. 이만한 관목을 가진 감독이라면, 충분히 기대할 만 하다.
덧) 영화 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관객들이 제법 있었음에도 한 명 빼고 모든 관객이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커플들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인터넷 평들은 온통 이들의 '불륜'에 대한 비난 일색이다. 왜 연애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서는 이토록 엄격할까. 왜 종교 재판관을 자임하려들까. 역시 한국에서는 <키친>정도도 '불가능한' 연애 서사일까?
본 지는 꽤 지난 영화지만...
이 영화, 꽤나 흥미롭다. 3명의 감독 중에, 미셸 공드리와 봉준호가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니까 말야. (사람들이 많이 주목했던 것 같은데, 레오 까락스라는 감독과 드니 라방이라는 배우는, 나로서는 이름만 들어봐서 잘 모르겠다.)
예전에 <사랑해, 파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가 있었는데, 널리 이름을 알린 유명한 감독들이 모여서 짧은 단편들을 찍고 옴니버스 식으로 편집한 영화였다. 몇몇 작품은 지루했지만, 그 때만 해도 전반적으로 재밌는 시도였다고 생각했었다. 약 3박 4일간(이것도 머물렀다고 말할 수 있다면^^;) 파리에 머물 때 보았던 거리와 풍경들이 영화 속에서 낯설게 보여질 때ㅡ그러나, 영화에서 마레지구를 보아도 마레지구라 못믿는 나에게, 영화가 '이곳은 마레지구라고!'라고 주장할때ㅡ의 신선함만으로도 재미는 충분하지 않겠는가(이런 신선함은, 일전에 보았던, 전도연과 하정우 주연의 <멋진 하루>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또 구스 반 산트의 단편을 비롯해서 몇몇 segment들을 보고서는 완전 완소스러운 기분이 들었으니까. 근데, 내 기억으로는 그 영화를 봤을 때쯤해서(그 영화에 나왔던 얘기였나?) 도쿄와 뉴욕등을 돌아다니며 그 도시들을 배경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도쿄!가 아마 그 후속이지 싶다.
<수면의 과학>, <이터널 선샤인>에서 받은 신선함보다는 한층 약했지만, 어쨌든 미셸 공드리가 맡은 segment 1은 마음에 들었다. (별로 스포 아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주인공이 의자로 변하는데, 왠지 그 장면은 내게 한강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와 단편 소설 <내 여자의 열매>를 상기시키기도 했고, 또 그 주인공이 택한 삶의 태도는 김기덕 감독의 작품 중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작품인 <빈집>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물론, 미셸 공드리 특유의 말캉몰캉한(이터널 선샤인은, 내게 '비극'이 아니었다) 시선도 함께ㅡ그러나 너무 씁쓸하고 차가운 결말이었지만ㅡ공존하고 있었기에 완전히 한강이나 김기덕으로 환원할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segment는 한강-김기덕-미셸 공드리였달까. (난 새로운 것을 접해도 익숙한 것으로 해석하고 환원시켜야 이해가 쉬워지는, 다소 불성실한 관객... =_=)
segment 2 같은 경우엔, 다소 지루하게 봤다. 결말 부분의 묵시록적인 부분만 빼놓고는, '도시의 광인'이라는 소재는 그닥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일본인에 대한 일반적인 혐오를(japs!), 아주 우스꽝스럽게 전유해서 '대놓고' 드러내는 장면은 역시 불편했고(그 장면의 다른 일본인들은, 대체 왜 웃는가?), 뿐만 아니라, 그 광인이 도시 지하에서 발견한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들로 일본의 심장, 수도 도쿄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며 그 도시를 아나키 상태로 몰아간다는 설정에는 살짝 코웃음도 나왔다. 아무리 정신분석적으로 읽어서 끼워 맞춰 가는대로 좋게 생각하려 해봤지만 그렇게 하기에도 그닥 흥미로운 텍스트도 못 되었고(한 작품을 정신분석적으로 읽는다는건, 그 작품에서 아무런 메시지도 읽어낼 수 없었단 얘기ㅡ혹은 읽어내기 싫었거나 귀찮았단 얘기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런 장르는 내 취향이 아닌가봐. 감독은 이 광인을 뉴욕까지 보내겠다고 선언했는데... 워워 플리즈.
완소 아오이 유우(!)가 나오고 봉준호 감독이 맡은 segment 3은, 주제 자체는 조금 지루했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몇몇 영화적 아이템(?)들은 재밌었다. <허니의 클로버>에서 아오이 유우 특유의 긴 생머리를 하고 나와 다소 몽환적이고 멍한 눈길을 보내고ㅡ카메라의 정면을 응시하는ㅡ어디선가 살며시 바람이 불어와 그 생머리를 날리는 장면은, 당시 많은 남자애들의 첫 사랑 '판타지'를 자극했던 걸로 기억한다(허나 말 그대로 '판타지'다). <도쿄!>에도 그 장면은 아주 아주 유사하게 변주되어 등장한다. <허니와 클로버>의 그 응시는 남성 주체 봉준호 감독 역시 매혹 시켰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ㅅ-
참, 이 작품에 메인 캐릭터로 등장한 카가와 테루유키의 인터뷰를 봤는데... 아무리 제 딴에는 '농담'처럼 했다지만, 몇 명의 남자들이 모여서 성희롱을 대놓고 하는 모습에는 질릴 수밖에 없었다는. 이런 배우가 상대역이라면 연기를 하고 싶을까.
전반적으로는 맘에 들었으나, 부탁하고 싶은건, 제발, 서울에는 오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일전에 서울을 배경으로도 이런 옴니버스 방식의 영화를 기획 중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도쿄!>를 보고 나서는 완전히 plz don't come! 이란 맘이 든달까. 좋게 해석하면 '유명 도시'의 '유명 감독'들에 의한 '창의적/창조적 전유'지만, 내가 볼 때엔, 다소 불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제작자들의 편견을 작가주의의 이름으로 제 멋대로 정당화하는 걸로 비춰진다. 나야 파리에 대해 무지하고, 도쿄에 대해 무지하니까 그럭저럭 재밌게 볼 수 있었지만(그리고 아마 뉴욕도 재밌게 보겠지만), 서울이 그런 시선들에 노출되어 제멋대로 전유되는 모습을 속 뒤집어 지지 않고 보아 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내가 서울을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서두.. 나, 민족주의자인가? ㅠㅠ
너무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네. 서울에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약속 시간까지 텅 빈 시간을 감당하느라 센트럴 씨너스에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어떤 내용인지도 거의 모르고 봤는데 생각보다 만족했음 ㅎㅎ
전반적으로 화면이 참 아름다웠던 것 같다. 신윤복이 강무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장면 장면들도 그렇고, 섹스 신 등 '옷 벗고' 나오는 장면들도 그렇고. 한국 영화에서 '옷 벗고' 나오는 장면들은 대개 어딘가 어색하거나 불편하거나 짜증스러운 경우가 많았는데, 미인도는 훨씬 덜 그랬던 것 같다. (숏버스랑 비교할 수 있을까?) 물론 약간 길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뭐, 그 정도 쯤이야.
개인적으로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정극'이랄까(-0-), 유혹과 사랑과 증오와 자기연민과 (성별/나이/계급)권력 등등이 끊임없이 얽히고 교류하고 무한히 증폭되면서 결국엔 당사자들을 나락으로 떨궈버리는(-_-) 서사를 종종 즐기는 편인데... 사실 너무나 진부해져버리기 쉬운 주제여서 마냥 즐기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제대로(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표현하는 작품이 드물기도 하고. 대개가 지나치게 어색하기 짝이 없거나, 복잡한 그 감정 덩어리들을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안타까운 경우도 많고. 또 너무 쉽게 그냥 '이성애 여남 간의 삼/사각 관계' 정도로 정리해버리는 경향이 많고(이런 경우, 당사자들 중에 동성간의 관계는 아주 가볍게 다루어지고, 관계의 승자와 패자가 등장한다).
미인도도 사실 그런 서사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유독 맘에 들었던 점은 굳이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을 '말(대사)'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대사 보다는 눈빛, 몸짓, 분위기 등으로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상대방 배우는 그 미묘한 전달을 또 금방 캐치해 내고. 또 내가 보기에 섹스 장면은 (비록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긴 하지만) 아주 부차적이거나,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 맥락과 비교적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던 것 같다. 비록 영화지만, 이런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게 놀랍기도 하고(현실에서는 얼마나 오해가 판을 치는데!), 부럽기도 하고.. 또 '동성'간의 관계도, 조금 더 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 같다. 분명 티비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있듯 단순한 '승자'와 '패자'로만 읽을 수는 없다. 어쨌든 이러 저러한 점에서 이 영화를 '준 포르노' 정도로 치부하는 평가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더니;) 나는 인물들, 그리고 서사가 너무나 잘 이해가 되던걸. 덕분에 아주 몰입(투사)해서 보기도 했고..
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강무와 신윤복이 몇 번의 '교류(!)'를 거친 뒤에는 신윤복이 완전히 '여성'이 된다는 점 정도를 일단 들고 싶다. 왜 거기서 '그 옷'을 입히는지(;) 그리고 신윤복은 왜 '그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건지(;) 사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약 시나리오 작가였다면 그렇게 전개시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좀 더 퀴어하게 관계를 구성하고 전개시킬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뻔한 이성애 관계로 만들었달까. 마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별 다른 갈등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또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음, 마초 김홍도의 완벽한 파멸을 원했는데... 아오; 그리고 강무 캐릭터도 좀 밍밍했다. 또 신윤복의 어렸을 적의 '상처'도, 솔직히 영화 내에서는 좀 애매한 위치였던 것 같다. 신윤복 캐릭터의 '젠더 정체성(이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을 보다 복잡하게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너무 예뻤다. 서양화 풍에 질릴 참이었는데...
어쨌든, 김민선 너무 좋음 ㅎㅅㅎ
사진 열기(ㅎㅎ)
<콰이어트룸에서 만나요>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다. 정말 담백하게, 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런 문제의식들을 '압축'적이자 '상징'적으로 잘 풀어낸, 수작(秀作)인 것 같다. 젠더 문제를 비롯한 여러 일상의 문제를 정신 병원과 연결시키고,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정신병원이다, 정신 병원. 현대의 정신 의학적 담론에서 보자면, 우리는 어느 정도는 정신병을 갖고 있고ㅡ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미칠랑 말랑한, 달랑달랑하고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다ㅡ누구나 은밀하게 편집증, 강박증, 신경증을 갖고 있고 또 누구나 은밀한 거식증, 폭식증 '환자'이다. 최소한 '잠재적인' 정신질환자들인셈이다. 그렇다면ㅡ정신 병리학이 우세한 담론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한에서ㅡ우리는 거대한 정신 병원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제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정상'/'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예컨대 광인/정상인)이 작동한다기 보다는, 현대적인 정신 병리학적 담론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비정상'인 사람들이 되었으니까. 규범화하는 사회(규격화하는 사회; normalizing society).
... 아 뭔소리람... 어쨌든 -_- 이 영화의 미덕은ㅡ그리고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본 드라마나 영화의 최대 미덕은ㅡ감정이 과잉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요즘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데,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어쩜 그렇게 감정들이 과잉적인지 모르겠다. 드라마든 영화든, 왜 다들 그렇게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지 몰라. 사랑도 잡아 먹을 듯이 하고, 미워하는 것도 잡아 먹을 듯이 한다. 왜 이렇게 연기를 '찐하게' 하는 걸까. 그에 반해, 과연 우리네들의 일상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 같이, 그러한 걸까.
나에게 있어 영상물을 볼 때 가장 힘들 때는, 영상물이 나에게 나 스스로 어떤 해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다. 다시 말해, 메시지를 '곧바로', 그리고 '성급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출연(연기)하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감정들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영상물들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럼 어느 정도는 피곤하게 되기 쉽다. 이러한 영상물은 관객들에게 호통을 치고 협박한다. 윤리적인 긴급성이 있는 문제에라면 이러한 방식들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방식들을 고집해야 할까. 적잖은 한국의 영화나 다큐멘터리들의 문법도 이러한 방식을 따르는 것 같다. 다들 울고 불고 눈물을 쥐어짜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마냥 활짝 웃고 희망이 넘치고 행복하기만 한. 그저 뜨겁기만 한.
이런 방식은 오히려 나의(관객들의) 지속적인 공감과 몰입을 방해한다. 영상물을 보는 당시에는 충격과 공포로 부들부들 떨면서 감정이 고양될 수는 있지만, 그건 그냥 그 때 뿐인 것 같다. 사랑과 우정 등 친밀함 속에서 나타나는 관계의 폭력성, 더 크게 보자면 예컨대 전쟁의 참상, 빈곤의 끔찍함, 학대 현장의 참혹함 등등을 '노골적으로' 다루는 영상물들은, 오로지 관객들에게 노출될 때에 한해서 관객들을 자극할 수 있을 뿐이다. 멜로를 보고 감동하지 포르노를 보고 감동하기 쉽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그건 모종의 '관성'을 생산한다. 그래서 다들 그냥 아 세상엔 끔찍한게 있구나, 하고 마는거지.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반복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여운, 관객들의 헛점(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그 무엇들이 메시지의 '영향력' 측면에서 보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상물의 너무 과잉된 감정에 노출되는 건 역시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_-... (으흑)
덧) 아오이 유우, 우치다 유키 킹왕짱! hoho.
어제는 오랜만에 종로-광화문 쪽에 출두(?)했다. 내가 가는데야 사실 뻔하니까, 뭐 갔던 곳들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듯 하고..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던 하루 동안(그래서 집에 와서는 완전 녹초; 헥헥_) 시네큐브에서 하는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두 영화 모두 하루에 딱 한 번 상영하는, 영화들.
그 중 하나는 <카라멜>.
레바논의 영화라는데. 영화 전체 배경의 분위기가 흔히 보기 힘든 분위기였다. 요즘 들어 한국에도 소위 '중동' 쪽의 작품들이 소개 되고 있는 것 같다. 서구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어서인가? 그래봐야 개봉한 숫자는 얼마 되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이 영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 영화 만든 감독의 처음 장편 영화라는데, 감독도 무려 주인공으로 출연한다(굉장히 아리따우심). 출연한 이들도 모두 전문 배우가 아니라 '길거리 캐스팅'한 사람들이란다. 그런데 연기도 다들 너무나 잘한다. 요즘 드라마 같은데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발 연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관계의 윤리랄까,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척 좋다. 미용실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인물들의 (남들이 보기엔) 사소한ㅡ그러나 본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상의 '사건'들일ㅡ이야기들. 물론 내가 직접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는 없었지만, 뭐 어때. 사실 일상만큼 가볍지만 무거운 것도 없기 때문에, 레바논의 '현실'들은 만만치않게 다가온다. 마음 편하게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는 거다. 그리고 우리들의 '정치적 올바름'의 입장에서 보면 그닥 올바른 영화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정치를 성급하게 적용하여 판단하기보다는, 일단은 영화의 문법, 그리고 그 인물들의 관계등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게 솔직한 맘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최고로 명장면을 꼽자면, 미용보조사 리마가 여자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는 몇 장면들. 아 이렇게 대사 하나 없이 얼굴 클로즈업 만으로 감정이나 미묘한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배우도, 편집도, 연출도 대단하다. 이렇게 묘한 감정선과 분위기를 잡아내는 능력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보기 드문 (여러 가지 의미로) '찐한' 장면. (^^;)
정말 미용실은 에로틱한 공간인 것 같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에로틱하게 되기 '쉽다'고나 할까. 그렇지, 그렇고 말고. :D 이렇게 말하니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미용실에 가는 소설 속의 한 인물도 떠오른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인하고 차가운 캐릭터인데, 가끔, 정말 가끔은 머리를 감겨주는 미용보조사의 손길에서 나름의 묘한 위안을 받는... 이건 에로틱은 아닐 수 있겠구나;
다른 한 영화는 <더 걸>.
이렇게 직선적이지만 지루하지 않은 영화가 있을까. 스토리 전개가 예상 가능할 뿐 아니라, 굵직한 스토리에 맞춰서 모든 장면이 딱딱 맞춰서 따라가는 느낌이다. 딱딱 맞춰서 간다는건, 이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여느 영화에서 그렇듯 '현실적'으로 보여서 그런건 아니다. 리얼한 배경이 여러 가지 장치들에 의해 묘하게 뒤틀리고 딱 그 장면에서 강조해야 할 특징만을 정확히 강조한, 그래서 너무나 영화 스토리 상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그런 장면이랄까. 연극적이라면 연극적이겠군.
내용은 완전 무겁다(그러나 영화 자체는 그렇지 않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도 말하고 있는 거지만, 이건 단지 독일의 한 소도시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후 독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을, 너무나 현실적인,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끔찍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얼핏 행복하게 끝나는 듯하던, 그래서 교훈을 주는 듯 하던 영화는 결말을 살짝 뒤튼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보고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
영화의 내용을 보편화해서 내 일상에까지 끌고 내려오면 영화의 문제의식을 '물 타기'하는 것이 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이건 정말 '공동체'에 대해서, 아니면 최소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할 영화 같다. 꼭 나치독일 이후의 독일에 대한 관심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대체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ㅡ대중, 인민, 시민, 국민, 민족, 인종 등등 그 어떤 범주든간에ㅡ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공동체란.
과거는 낯선 나라다 (2007)
90 분 / 12세 이상 관람가 / 2008-03-06 개봉
배급사 : CINEMA 상상마당 /
기억과 망각 사이의 딜레마
1986년 4월 28일, 대한민국 서울, 서울대학교 앞 신림 사거리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십대의 청년 김세진 이재호 두 사람이 400여명의 학생들과 군사훈련인 전방입소 반대 시위를 벌이던 중 ‘반전반핵 양키고홈’ ‘북미 평화협정 체결’ ‘미 제국주의 축출’,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이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중적인 반미 구호였다. 한국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20년이 흘렀다. 세상은 변하였다.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협정’을 논의한다. 상상할 수도 없던 일들이 벌어진다.
두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던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하고 있을까? 세상이 변한 것만큼 그들도 변했을까? 순응의 페르소나들! 부적응의 표정(얼굴)들!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다.’ 그 진실에 관하여 친구들과 감독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위치를 바꾸며 증언한다.
제작노트
22년 전, 불꽃처럼 생을 마감한 두 사람
그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말하는 그 날의 흔적들
영화는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가 두 열사의 분신 20주기를 맞아 김응수 감독에게 이들에 관한 기록 다큐멘터리를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자신 그 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감독은 오랜 고민 끝에 일반적인 추모다큐멘터리처럼 그 날의 사건을 재정리하거나 당시의 정치적 주요 쟁점들을 재조명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두 열사의 분신이 일어나기 전후 며칠간 일어났던 일들을, 두 열사와 그 사건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잊혀졌던 기억의 편린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하면서 이제 다큐멘터리는 잊혀진 사건을 재조명하기보다 개인들의 기억과 역사의 조우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역사, 다큐, 치유
1. 역사 History
80년대 중반, 군부정권 하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높았던 시기, 우리는 흔히 그 시기를 정치적 암흑기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 강의실보다 가두가 훨씬 더 친근했던 이들에게 80년대는 ‘원죄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이후, 이들은 다시 ‘삼팔육 세대’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며 정치적 주체로 부상했고, 이제 80년대는 신화화된 공간으로 남아 유령처럼 2000년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류의 다큐멘터리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이다. 우리는 마치 무언가 이 역사를 건드려선 안 되거나 혹은 전부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정말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인가? 더 이상 과거란 유효하지 않은 질문인가? 혹은 이 역사는 고정불변의 실체일 뿐인가? 오늘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죽음을 다시금 불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과거란, 역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 다큐 Documentary
현재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것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영상을 담을 수도 없고, 기록 문헌이나 영상도 찾기 어렵고 무엇보다 지금 왜 이 영화를 찍고 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자기 질문과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 2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된 이 영화는 두 열사와 두 열사의 죽음이 뜻하는 현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과거의 사건 재현이나 영상, 문서 기록에 의존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열사의 죽음이 가져온 정치적 의미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는다. 대신 두 열사와 함께 그 날을 보냈던 사람들의 기억을 재구성해내고, 그로부터 해답을 구하려 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집요하다 싶을 만큼의 인터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면서 인물의 미세한 변화와 정지의 순간을 잡아낸다. 이러한 순간의 포착이야말로 과거를 생생하게 만들어내는 요소이며, 이로 인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파격적인 형식을 선보인다.
3. 치유 Healing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모두에게 치유의 과정이 된다. 감독은 처음부터 인터뷰이들에게 그 날의 사건 정황을 최대한 정확하게 기억해주기를 요구했다. 이를 위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 3일동안의 기록을 메모해달라고도 요청했다. 잊혀진 기억을 다시 복원해내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질문받는 것, 이 영화는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치유 (불)가능성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건소개 - 22년 전, 김세진, 이재호 두 생명이 사그라들다.
1986년 4월 28일 9시, 서울 관악구 신림사거리 가야쇼핑 근처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4학년 학생이었던 김세진 이재호 두 사람이 4백여 명의 2학년 학생들과 함께 전방입소거부 투쟁을 하다가 4층 건물 옥상에서 분신했다. (그들의 의도였는지, 진압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황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옥상에는 진압군(경찰)과 김세진 이재호만이 있었고, 거리에서는 그들의 머리나 상반신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옥상으로 뛰어올라가 그 상황을 목격한 10여명으로 추정되는 백골단(진압군)은 찾을 수 없고, 상황의 증언자인 두 사람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전방입소반대, 반전반핵, 한반도 군사기지화 반대, 남북불가침조약체결, 북미평화협정체결, 연방제통일 등이었다.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무엇을 찍을 것인가?’의 문제
1986년 4월 28일 9시, 서울 관악구 신림사거리 가야쇼핑 근처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4학년 학생이었던 김세진 이재호 두 사람이 전방입소거부 투쟁을 하다가 건물 옥상에서 분신하는 사건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존재한다.
남아있는 기록은 연기, 허공, 그들이 찍힌 몇 장의 사진, 신문기사 스크랩, 과거의 시위장면, 님을 위한 행진곡,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나레이션이다. 그것들은 신비화된 과거이지 그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과거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들이지 이 사건의 실체가 아니다.
김응수 감독은 이 모든 기록 이미지들을 버리고 단 하나, 이미지 불꽃에서 그들의 구체성과 생명을 불어넣고자 한다. 영화는 바로 그 불꽃 이미지에서 시작해서 현재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감독은 인터뷰이들에게 과거를 무리하게 기억하기보다는 현재 그들의 생각을 묻는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 감독 본인 역시 인터뷰이로 위치를 바꾸어 증언한다. 그 역시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단순한 결심이었다.”라고 김응수 감독은 인터뷰이로 본인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서정적인 영상으로 표현된 공간과 끈질긴 인터뷰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현란한 영상과 편집 기술을 배제한다. 그래서 이 영화 안에는 고스란히 공간과 인터뷰만이 남는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는 공간이다. 영화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각 장소마다 대표되는 하나의 이미지만을 제시한다. 하지만 텅 빈 공간들-가로수길, 이재호의 집, 서울대 자하연, 댐-과 인터뷰이들이 등지고 있는 배경을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공간의 형태나 인터뷰를 행하는 사람의 감정과 움직임에 밀착 되어있어 그 정서적인 울림은 더욱 커진다.
인터뷰는 감정적인 밀착보다는 냉정하게 바라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이유는 인터뷰이들이 상흔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친구를 떠나보내고 살아남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터뷰는 영화 내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원과 다양한 층위-목격자, 비목격자, 현 세대, 가족-들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인터뷰는 감독 스스로 진행하였다. 이 다양한 층위의 인터뷰이들을 어떤 위치에서 촬영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감독에게 큰 고민 지점이 되었다. 이 문제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정립이기도 하면서, 카메라와 대상의 관계정립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처음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김응수 감독은 밀착형 인터뷰를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방식으로 촬영된 장면들은 인터뷰이들을 피해자로 만들면서 그들에게 감정 이입을 강요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감독은 첫 번째 시도를 과감히 버렸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인터뷰이들과 거리 두기를 시도하였다. 비로소 이 거리 두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현재에 과거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또는 현재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과거가 보이는 것을 보았다.”라고 감독은 그 순간을 회고한다. 김응수 감독은 이 느낌을 살리기 위해 원제였던 <대화>에서 <과거는 낯선 나라다>로 제목을 바꾸기도 하였다.
엄, 며칠 전에 지인이 군에 입대한다고 하여 술자리에 갔다가 드라마 이야기를 잔뜩 듣고 와버렸다. 워낙 팔랑대는 귀를 가지고 있다 보니, 그런 드라마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찾아 보지 않을 수 없다는 -_-; 어쨌든 결국 술자리에서 친구들의 강력한 입김(?)으로 인해 <쾌도 홍길동>이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어이쿠야.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 진짜 홈빡 빠져들고 있다는;
아마 오늘부로 해서 16편까지 했을 텐데, 늦바람이 무섭다고 약 이틀 만에 10편까지 스트레이트로 봐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14편을 볼 차례. 평소엔 20분짜리 시트콤도 두 편 이상 이어서 못 보고, 2시간 짜리 영화도 1시간 씩 끊어서 볼 정도로 영상물에 대한 집중도가 되게 낮은 편인데, 나는. 그리고 드라마는 원래 잘 보지도 않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이 정도면 꽤나 집중력 있게 본 셈이다.
가끔씩 드라마에 홈빡 빠져서 며칠을 허우적 대는 경우가 있다. 그게 그 드라마가 가진 고유의 힘인지, 혹은 내 정신적인 건강 상태나 심리 상태가 어떤 중독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제사 새삼 돌이켜 보면, 가장 최근에는 <태왕사신기>에 중독되었고, 그 전에는 <한성별곡>에 중독되었었다. 그 전에는... 음 잘 생각나질 않는다. 뭐 <커피 프린스>는 중간까지 보다가 집어 치웠으니 별개로 치고.. 음 <쾌도 홍길동>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누구냐 하면, 주인공 길똥이도 아니고 이녹이도 아니고 창휘도 아니다. 뭐 셋 다 좋지만. 가장 좋은 캐릭터는 좌상댁 아씨로 나오는 서은혜 ㅠㅠ 뭐 딱히 동일시해서 좋다기 보다는 그런 자리가 주는 나르시시즘이랄까 자아도취랄까, 또 그런 자리만이 할 수 있는 몇몇 역할들이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쾌도 홍길동>, <태왕사신기>, <한성별곡>.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을 조금 폭력적으로 압축해서 꼽아보자면, 주요 인물들의 연기랄까 대사랄까 그런것들이 사실 좀 어딘가 어색하다는 점이다. 특히 <한성별곡>은 1편을 켜고 한 20여 분 정도 보는 동안 실실 대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리고는 이내 중독되어 버렸다. -ㅅ- 어색함이 매력 포인트랄까.. <태왕사신기>도 욘사마의 뿅뿅스러운 진지함이나 여러 인물들의 뿅뿅스러움에 낄낄대며 보았었고(아 몇몇 명대사들도 빼놓을 수 없지 ㅠㅠ), <쾌도 홍길동>도 특히 허이녹의(+ 이창휘도 좀 어딘가 미끄러지는 것 같기는한데)부자연스런 표정연기에 매료되고 있다. 게다가 몇 편이더라? 갑자기 핸드폰 문자 토킹이 나와서 밥 먹으면서 보다가 식겁했다는 ㅋㅋ 그리고 이 드라마들은 형식적으로는 '사극'을 표방하지만 '정통 사극'은 아니다. 정말 뭔가 뿅뿅스러운 구석이 있는 사극들이다. 뭐 갑자기 인물들이 기를 발산한다든지 갑자기 날아다닌다든지 혹은 절대 있지도 않았을 사실들을 막 섞어 놓았다든지 솔직히 좀 어색하게 현실 정치 비평을 집어 넣는다든지 하는 식의 것들. 어흠;
이 세 드라마에서 가장 좋은 느낌을 받은 것은 <한성별곡>이다. <태왕사신기>는 사실 서사나 연출보다는 배우들의 매력 때문에 보았던 것이고, <쾌도 홍길동>은 팔랑귀 때문에 본 것이니. 하지만 <한성별곡>은 서사도 그렇고 배우들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정말 길지 않은 상영 횟수에 많은 것들을 담아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성별곡>에는 선과 악의 구도가 없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영웅도 없다. 우리는 그 드라마의 서사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온갖 모략과 욕망들, 그리고 그것들이 교차하는 지점들이 남긴 흔적 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흔적 위에 새로운 욕망이 쓰이고, 그 욕망을 뒤덮는 다른 무엇이 또 쓰이고. 무엇보다 <한성별곡>은, 그렇게 각 인물들의 새로운 욕망들이 서사 위에 겹치고 겹쳐 쓰일 때에도, 과거의 욕망들이 단지 보이지만 않을 뿐 지워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보니 서사의 완결성이나 통일성 따위가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다. 원래 욕망이 그런 건데 뭐. 화면에서 얼핏 악해 보이는 인물들은 선해 보이는 인물들에 비해 악하지 않고, 선해 보이는 인물들은 악해 보이는 인물들이 비해 선하지 않다. 누구는 자신의 욕망을 승화해서 고상한 '이상'으로 포장하지만, 누구는 자신의 일차적인 욕망에 충실하다. 하지만 <한성별곡>의 서사는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다. 그리고 제로섬으로 달려간다(나중엔 한명인가 빼고 다 죽더라;). 그게 이 드라마의 미덕 아닌 미덕.
아이고 쓰다보니 <쾌도 홍길동>에 대한 내용이 아니네; 어쨌든 참 재밌다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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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5x2>라는 영화였다. 별 다른 기대 없이 봤는데, 기대만큼 별 다른 감흥 없이 끝났다. 이런 구도는 이젠 시시하기 짝이 없다. 처음에는 이혼하게 된 커플이 등장하고, 그 커플이 지내온 과거의 장면들을 하나 하나씩 추적해 가면서, 결말은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폴-인-러브하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를 보고서는 무엇보다 일상적인 섹스-정치(여기서는 rape-politics와 유사어로서)의 장면들에 대해 새삼 재확인하게 되었달까. 이는 예전에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에서도 주인공 남자가 레이프rape를, 일종의 관계 맺음의 수단(혹은 관계 확인을 위한 것이나 관계의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5x2>에서 질이 마리온을 레이핑한 뒤에 마리온을 붙잡고 간절한 눈으로 "다시 시작하는 건 어때?"라고 묻는 것에서 섬찟함까지 느꼈다. 급작스럽게 레이핑을 하는 질에게는 그것이 정사(情事)이고 로맨스일 수 있겠지만(그는 이 순간 gender-hierarchy를 enact하면서 레이프-정치를 행하는 셈이다), 마리온에게는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직후에 마리온은 그런 멍청한 질을 내차버리지만. 물론 구체적인 '개인-개인' 관계에서는 이 레이프-정치학으로 그 관계에 대해서 캐묻는 것이 부당한 면이 없지 않겠으나, 이렇게 레이프-정치가 영화적 재현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현상을 볼 때는 또 다른 문제가 개입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이렇게 레이프-정치가 작동하는 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개인-개인' 관계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 맥락과 연결지어 '판타즘'에 대해서도 지적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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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카페 뤼미에르>였다. 과외도 했고 살짝 피곤했었기 때문에 졸 뻔한 위기도 있었으나(;), 영화의 느낌이 꽤나 마음에 들고 좋아서, 영화가 끝났을 땐 "벌써?"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여기 등장하는 요코의 '가족'이 보여주는 관계의 질서가 너무 익숙해서 헛헛 웃음이 나왔었다. 그 질서가 익숙한 이유는, 요코-'새 엄마'-아빠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 그리고 그 각자가 맺고 있는 관계의 양식이 꼭 내가 나의 가족과 관계 맺고 있는 방식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 3인 '가족'의 모습에 여/남동생 2인을 끼워 넣고 대충 조합해도 비슷한 모습이 나오리라. 사실 이건 웃음 나올일이 아니고 좀 씁쓸한 일이다.
덧)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은 정말 마음에 든다. 예전에 시네큐브 자리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덧2) <5x2>를 볼 때 관객 구성이 참 특이했다. 나이 어린 사람은 거의 없었고(나를 포함해 3~4명?), 대부분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주 관객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이유일까 싶어서 혼자 생각해 보고 키득댔다; 사실 키득댈 일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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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참 좋았다. 아, 정말 좋았다.
나의 어줍잖은 언어로 <그르바비차>에 대해 막 해석하고 늘어놓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닌듯 하여 그냥 묻어 두려고 한다. 사실 영화 속에서 많은 장면들에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글로 막 풀어내기도 쉽지 않다. 그냥 떠오르는 감상만 늘어놓자면, 등장하는 캐릭터에도 매료되었고, 감정의 흐름을 이렇게 잘 잡아냈다는 점에 또 감동했다. 더욱 좋았던 점은, '그' 장면을 실사로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직접 보여주지 않고서 카메라와 배우의 힘만으로 보는 관객들을 힘들게 하고 덜덜 떨게 만들 수 있구나 싶다. 음, 여기서는 그만 얘기하고 친구랑 얘기할래.
<그르바비차>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을 슥- 제치고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던데, 진짜 <그르바비차>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르바비차>에 상을 줄만한 영화제면, 앞으로도 신뢰할 만한 것 같다.
덧) 다만 파트너랑 먹을 것 한 가방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영화 보는 내내 우적우적 (쳐)먹어대던 내 옆에 앉았던 한 남자는, 정말이지 나올 때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 더 격한 표현은 생략 -_-*). 아, 밖에서 "물"만 갖고 들어갈 수 있단 말 써있던 것 못봤나요? 게다가 파트너가 막 보자고 억지부려서 질질 끌려 따라온 거라고 해도 같이 보러왔으면 파트너의 의사를 좀 존중해줘야지 지가 지루하다고 자꾸 말 걸어대고 ㅈㄹ하고 또 자꾸 스킨쉽할라고 발광하면 파트너는 또 얼마나 난감하겠으며 주변의 다른 관객들은 또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요!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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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하고 있었는데, 2008년은 68혁명 40주년이 되는 해다.
'혁명'에 대한 내러티브들은 늘 진한 페이소스를 갖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이런게 소위 '꿘' 마인드? //ㅅ// 하긴 교지관악이 '좌'라는 평을 듣는 마당에...; 요즘 세상엔 뭘 해도 '좌'고 '꿘'일 수밖에 없지 뭐; 2008년은 흉흉하다. 뉴스에서, 또 주 언론들이 다루지 '않'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들도 흉흉하기 짝이 없다.
언제나 세밀한 컨텐츠가 아닌 모종의 '형식'만 갖고 생각하면, 모든 역사적 행동들은 비슷하게 해석이 가능하고 또 맘껏 어디에든 적용이 가능하다. 68혁명도 그렇다. 역사적 맥락이고 상황이고 흐름이고 다 쳐내고 가장 '단순'하게만 보자면, 68의 역사적 배경은 최근의 한국적 상황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면 한국도 모종의 사건들이 얼마 안 남았는지도 모른다. 흥. 물론 어떤 사회적이고 또 정치적인 '사건event'이 터지더라도, 어떤 거대한 '혁명revolution'이라기 보다는 국지적인 '반란revolt'의 형태를 띠겠지만..
[또 거의 알지도 못하는 데다가 다른 맥락에서 들먹이는 것 같아 무척 민망하기는 한데(;),] 민승기씨의 해석에 따르면(지난 여름 중앙대에서 들었던 강의에서) 알랭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event'은 '상태state'(단순한 situation이 아님)를 중지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만약 그렇다면, 바디우가 말하는 상태state는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계the symbolic'적인 것이다('국가' 역시도 상징계이므로, 대문자를 써서 State가 된다). 그리고 사건event은 그러한 상징계가 작동을 멈추게 되는 지점을 적실하게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상징계의 완결 불가능성을 드러내며 그 완결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실재the real'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건event 발생 이후의 상태state는 이전 단계의 상태state와 같지 않다.
앞으로 5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쨌든 이런 의미에서의 사건event! 물론 사건event은 지극히 우발적인 것인데다가, 사후적으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일테다. 그렇다면 대선을 전후한 MB의 출현은 사건event이 될 수 있는가? MB 정부가 노무현 정부와는 또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르게 한국의 갖가지 삶들을 사회학적으로 구성해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노무현 정부와 연속선 상에 있을지, 무언가 다른 근본적이고 이전 체계에 적대적인 변화를 가져올지 아직은 모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고로 MB의 출현이 과연 사건event이 될 수 있을지 아닌지는 모르는 것이다.. 아직은 한국 사회가 '실재'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뭐, 운하는 어쩌면 사건event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바디우에 따르면(<윤리학>) "주체는 사건event이 생기기 '이전의'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재한다". 만약 MB의 출현이 한국 사회에서 사건event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목도하게 될것이다. 그것은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인적 투사"도 아닐 것이고 "주체로서의 계급"이라는 "잠꼬대"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은 "88만원 세대"라고 요약되는 '세대'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적 인지를 초과하는, 그 무엇일 것일테다.
갑자기 이상한 예언론자가 되었군 ㅠ 이런 저런 뉴스를 보다보니 너무 흉흉해서 답답하기 짝이 없다보니, 이렇게라도 풀어내고 있다. 인수위 기사도 물론 그렇지만, 이런 판결문도 무섭다. "피고인이 사회 및 제도에 대한 적대심을 갖고 범행했다는 점에서 재산적 범죄로만 다룰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적대심'이 뭐 어때서요 ;ㅅ;
블로그가 계속 '응가' 싸는 공간이 되고 있음; 이런 식으로 이상한 몽상 속에서 노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집회에 나간지도 너무나 오래되었고.. 어쨌든 영상은 무척 '재미'있스압!
EBS 지식채널 - 68혁명(1부 주동자가 없는 시위)
1978년,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의 푸코라고 함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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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The Old Garden, 2007)
2007년 12월 26일 | 메가패스 사이트(무료 영화 차암 많음 +_+)
올해 초에 개봉했을 때 부러 보지 않고 이제야 본다. 나는 불안감을 주는 영화들을 보지 않으려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게 보지 않고 개봉 시일을 넘긴 영화들이라도, 언젠가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보게 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오래된 정원>은 무엇보다도 다소 불쾌한 영화다. 하지만 불쾌하다는 것은 이 영화가 꼭 싫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정원>은 지루하지 않게 썩 잘 만든 좋은 영화고, 또 서사 속에 깊게 흡입되는 면도 있다. (물론 나는 상상하고 추측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혁명'과 '투쟁'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을, 허울좋은 이성애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자-관계적인 '사랑'이라는 것에 완전히 값싸게 팔아먹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 시대의 사랑은 얼마나 단순하며 또 통속적이며 제한적인가.
물론 <오래된 정원>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으나, 조금은 다른 방식의 재현을 드러낸다. <화려한 휴가> 따위에서 볼 수 있던 지독한 허무함을 느끼지는 않을 정도. 다소 무리하게 도식화하자면, <오래된 정원>은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는 이 느낌이 좋다. <화려한 휴가>등의 대다수 영화들이 상상계에 보다 손을 들어준 것과는 다르게도.
이 영화를 보고나니 딱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영화는 역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다. 나는 <몽상가들>을 보고 나서는 참담함을 느꼈고, 베르톨루치 감독에 대한 심심치 않은 분노까지 느꼈다. 그의 영화는 처음이었으나, 만남과 동시에 결별을 선언했다. 썩 괜찮은 영화를 만든 감독을 쓰레기라고 느낄 만한 분노를 느꼈던 적은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실 그 분노란 것은, 내가 <몽상가들>을 보고 있었을 때 서사와 화면에 깊게 몰입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그러므로 나 자신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베르톨루치는 나의 어떤 지점을 콕콕 건드렸고 나는 그것에 대해 짜증을 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도 나는 한동안 기분이 더러웠고, 이 딴 영화랑 비슷한 영화는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때 그 느낌은 <오래된 정원>을 보고난 뒤에 지금껏 느껴지는 현기증이나 편두통과 유사하다. <오래된 정원>은 <몽상가들>에 비해 판타지는 늘어나고 관음적이고 섹슈얼한 욕망은 줄어든(혹은 겉으로 내세우지 않는) 한국적 판본이다. 허나 확실히 허접한 베르톨루치 따위의 <몽상가들>에 비해서는 훨씬 낫다. 베르톨루치의 섣부른 과거 회상이 우리 시대의 어떤 지점과 깊게 맞물려 있겠는가. 그것은 아마도 '자유'를 위장한 폐쇄적이고 자기애적이며 자기-충족적인 '욕망'의 언어들일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오래된 정원>이 가진 하나의 미덕이자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과거(운동 담론들)를 섣부르게 '억압'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에 있다.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해석 방식은, 과거의 운동 담론들이 운동하는 활동가 개인들을 '억압'했던 것으로 본다. "개인들을 혁명과 역사의 '도구'로 삼았다", "개인들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운동/활동가들이)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아버렸다"는 흔해 빠진 말들은 이러한 지배적인 해석 방식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적으로 말해서, 섣부르고 단순한 과거 회상이 낳은 냉소주의다. 우리가 싸워야 할 주체성은 이러한 냉소주의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 역시도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지점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서 완전히 패배적으로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이게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미덕이고 윤리라면 윤리다. 불편한 지점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예컨대 한윤희의 역할 상징이라든지. 이점에 대해서는 <몽상가들>에 대해 손을 들어주고 싶다), 뭐 어쩌랴. '완벽'해서는 텍스트가 될 수 없으니까, 텍스트는 타협과 저항의 산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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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좋다. 음악 영상 구성 배우 뭐 할 것 없이 모두 다 최고다. -_-)=bbb
섣불리 내 멋대로 이해하려들기 보다는 천천히 더 음미해야겠다.
서서히 환상이 현실을 잠식하는 그런 느낌, 꽤나 이색적이다. (+ 대사가 없다는 게 참 좋다)
아직 둥실둥실 떠다니는 생각들은, 두세 번 정도 더 보면 뭔가 잡힐 듯도 하다.
그런 점에서 DVD에 수록된 김기덕-정성일의 대담은 참 재밌었다. 정성일씨는 "이런 장면에서는 이런 이런 의도가 있으신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이러면 감독은 "아.. 정성일씨는 참 신기하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군요.." 이런 식이다 ㅋㅋ 가장 압권은 영화 속 장소의 변환을 이야기 하면서, 정성일씨가 "장소가 서울을 떠나지 않는데 이는 감독님의 어떤 의도가 반영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 호수의 레인보우가 어쩌고 저쩌고" 하니까 감독이 "아.. 그건 하루만에 일정을 소화해야 해서 그냥 일산에서 다 찍은 겁니다.." 라는 식의 말을 했다 ㅋㅋ
대담을 이렇게 끌고온 이유는, '해석'을 무시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이미 해석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미 한 번 내뱉어진 자신의 담론/작품은 저자의 손을 떠나버린다는 단적인 사례인 것 같아서..
김기덕 감독 작품도 더 찾아서 챙겨봐야지 +_+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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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논쟁이 되었던 <300>을 또 이제야 보았다 -_-; 확실히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읽었던 지젝의 <The True Hollywood Left(링크)>라는 글에 보다 더 동의하는 편이다.
내가 봤을 때도 스파르타 군은 절대 '미국'(으로 대표되는 경제군사개발국)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300명의 스파르타군은 탈레반에 가까이 해석할 수 있으며, 페르시아군이야 말로 현재의 경제군사개발국의 이데올로기를 압축하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중언부언 말 덧붙이는 건 무의미하고, 캐즘님의 블로그에 지젝의 이 글이 번역되어 있기에 허락없이 옮겨둔다.. 출처는 http://blog.jinbo.net/chasm/?pid=44
캐즘님의 번역문 보기
영어 원문 보기
확실히 지젝의 이 글 자체도 논쟁적일 수 있다. 그의 영화 내용에 대한 분석은 나도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바 이지만, 그가 덧붙이고 있는 이러한 말들은 확실히 동의하기엔 아직 석연찮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 방임론hedonist permissivity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 좌파가 규율과 희생정신을 (재)평가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루소에서 자코뱅에 이르는 근대의 평등주의적 급진파들이 스파르타를 동경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새로운 스파르타로 상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 규율이라는 스파르타의 정신 속에는,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제거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해방의 정수(core)가 존재한다.
스파르타인들의 가혹한 군대식 규율은 아테네인들의 “자유민주주의”와 단순히 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내적인 조건이자 기반을 이룬다.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는 오직 가혹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지젝의 이러한 진단은 물론 일정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 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현대적인 질문은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영화속에서 엿볼 수 있는 성정치적 이슈나 장애학적 이슈는?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혁명적인 "핵core"에 관한 것일 테다. 물론 그것은 내용 없는 순수한 형식이며, 따라서 지젝(을 통한 라캉)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윤리'적인 것에 보다 근접한 것일 테다. 그러나 그 "핵"을 추구함에 앞서, 그 핵을 둘러싼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감춰서는 안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짧은 글에서는 지젝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있지는 않았겠지만, 과연 그 질문들에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답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과연 현대적인 자아들의 해석틀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그 혁명적인 "핵"은 어떤 주체들에게 모종의 충격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어떤 '충격'만을 주기 위한다면, 그것은 쓸모도 별로 없을 뿐더러 위험하기 짝이 없다. 주체들이 실재적이고 외상적인 '충격'을 어떻게 흡수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홀로코스트는 물론 현대 한국에서 광주나 제주 혹은 곳곳에서 있었던 집단 학살 등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충격(특히 혁명적인)에 대해 가능한 '흡수'와 '망각' 그리고 '의미화'에 대한 가장 끔찍한 판형이다. 우리는 보다 더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최근 서구의 일부 아카데믹 스타들ㅡ랑시에르, 아감벤 등ㅡ에게서 회자되고 있는 '벌거벗은 삶'이라든가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해봐야할 테지만, 여전히 나는 기본적으로는 회의적이다. 회의적이라기 보다는, 사실 그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아직 별로 쌓이지 않았다. 인용한 글에 나온 바디우의 말을 다시 인용해 와보자. “우리는 민중적 규율이 필요하다. ···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오직 규율만 가지고 있다. 권력도, 돈도, 무기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가진 것은 규율, 즉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이 규율은 이미 조직의 한 형태이다.” 물론 타당한 진단이고, 여태까지 지배적인 정치학에서 보지 못했던 (아니, 일부러 보지 않았던) 어떤 형태들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학적 관심이, 랑시에르가 말한 "인간에서 휴머니티(humanity)로, 휴머니티에서 인도주의(Humanitarian)으로의 기이한 전이"와 어떻게 분리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날카롭게 진단했던 "인권의 종말" 역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인도주의'의 새로운 아카데믹적 판본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궁지에 몰린 아카데믹 지식인들의 탈출구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위의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기 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물론 이건 다 '혐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심판대에 올릴 권능도 이유도 별로 없다. 문제는 역시 그것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에도 있지만,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읽느냐"에도 역시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이 제 아무리 진정성을 갖춘다 해도 그들의 충실한 독자들이 진정성이 없으면 꽝이다. 선교를 해야하는 곳에서 교회만 세워서는 안되는 것처럼. 게다가 난 여전히 아카데믹 지식인이나 이론가들이 '혁명'을 말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위에서 나오는 '남성 아카데미 스타'들이 놓치거나 보지 않고 있는 부분도 내게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다. 또한 내게 있어서 그들은 (아직까지는) '상징자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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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6) 음... -_- 개봉한지 정말 한참 뒤에야 보게 된다. 나는 '동성애' 영화니 뭐니 하는 영화들을 잘 챙겨보진 않는다. 이유는 딴게 있는게 아니라, 그냥 불안해서 그렇다. 특히 그것이 관객들에게 잘 수용되는 영화일 경우에는, 이 영화에 뭔가 다른 불길하고 저열한 요소가 가미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내심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대중적인 것에 대한 경계심을 그냥 부정하고 싶지는 않고, 한국에서 흥행하는 영화들에 대한 경계심이고 조바심이고 노파심에서라고 변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음;) 사진 보기
2007년 12월 16일 22:40 | DVD 대여
어쨌든 그냥 잘 만든 멜로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된 것이었다. 이 말은 영화를 보면서 보는 이들이 심심하지 않게 이것저것 잘 조합되어 있었다는 얘기를 의미 한다. 그것은 물론 제작진의 능력이다. 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 이것은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있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성립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관객들 역시 이 산의 장엄한 풍경이 주는 재미와 동물들을 비롯한 다양한 오브제들의 출현으로 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겪는 과정은 시시하기 이를데 없다. 물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 혐오 범죄나, 두 사람이 삶 속에서 겪는 갈등, 이런 것들이 시시한 것은 아니다. 영화가 설정한 장치가 너무 뻔하다는 얘기고 그렇기에 보는 동안 심심하진 않지만, 재미가 있다거나 어떤 인식적인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냥 그저 그런, 저잣거리에 나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썩 잘 만든 멜로에 지나지 않는다. 여느 멜로가 그렇듯, 결말을 보면서 찔끔 눈물 흘릴 수 있고 보고 나서는 감상적으로 누구를 떠올려볼수도 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엔딩 음악이 나오는 동안 뭉클할 수 있는, 그게 <브로크백 마운틴>이 줄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다. (하기사 제 아무리 클리셰 클리셰 그래도 클리셰를 넣지 않으면 작가주의 영화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을게 뻔하고...)
우리는 이 영화를 '동성애', 혹은 '게이'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주인공들의 '행동'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 영화는 동성애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석해버리면 어딘가 맹하고 허전하지 않겠는가. 이성애와 동성애를 가르는 기준을 단지 실제로 행하는 성애적 행동에 한정해버리는 것은 대체로 이성애 월드적 관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이성애 월드적 상상력의 한계니까. 아직 지배적인 현대적인 영화적 상상력은, 대상(여기서는 일단 asexual한)에 대한 판타지도, 리비도의 투사와 애착의 순간에 대한 미묘한 포착도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냥 '금지된 사랑' 운운할 뿐. 아쉬움(때론 분노).. 하긴 여기서 언급하는 건 사실상 한국에서 수용되는 방식에 대한 아쉬움일 뿐이다.
나는 이 영화 어디서도 '동성애'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게 좋았다. 하기사 카우보이가 등장하고 털털거리는 자동차가 등장하는 시점에, 오늘날에는 관심만 있다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성애'란 말이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 말이 발견되면서 널리 유통되는 현상이, 결코 동성애에 대한 '관용'이라거나 윤리적인 판단 혹은 정치적 올바름이 전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엿볼 수 있었던, 이 두 주인공 주변 사람들의 반응들이 오히려 윤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두사람을 섣불리 어떤 개념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그것이 윤리적인 것이다. 에니스가 잭과 키스하는 장면을 에니스의 아내 알마가 목격하는 장면, 그리고 알마가 다른 사람과 재혼한 다음에 땡스기빙데이 파티에서 에니스와 갈등하는 장면. 나는 알마야 말로 진정한 윤리적 인물은 아닐까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개념의 발명과 사용은 오히려 해방을 위한 '발굴'이라거나 '발견'이 아니라, 다만 구획짓고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정희진씨가 말했던 대로, 권력은 구획짓고 경계짓는 것이고 그것을 유통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많은 이분법들은 물론 권력의 산물이다. 개념 속에는 물론 다양한 담론적인 코퍼스들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그 개념을 사용하는 순간 어떤 정치를 행하고 있고 어떤 해석을 유통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동성애' 영화라고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구획짓고 경계를 짓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틀 자체가 이성애 중심 세계의 호모 포비아를 온유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개념을 누가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 그것은 물론 운동과 정치를 거쳐야만 재의미작용을 할 수 있다. 개념의 정치화, 그것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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