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학교에서 Johan Galtung의 강연이 있다고 해서, 괜찮은 수업 청강을 듣다 말고 뛰쳐 나가 들으러 갔다. 강연회의 한글 제목은 "글로벌 시대의 평화학, 그리고 한반도 통일전망", 영어 제목으로는 "Theories and Methods of Peace Research and Korean Unification in Global Era"였다.
예전을 돌이켜보면, 평화주의 관련 기획 글을 쓸 때 참고할 책들이 필요했는데,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은 역시 J. Galtung이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찾아보고 좀 갸우뚱했었다. 평화학이나 평화주의로 유명하다는 그의 책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흔히들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번역하고들 하는, negative peace와 positive peace라는 개념 뿐이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당시에 통독한 그의 책에 담긴 내용들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시니컬했었다. 내가 전혀 신뢰하지 않는 사유와 방법론 담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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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소극적 평화란, 간단히 말하자면 폭력의 예방에 관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잠재적인 폭력과 갈등을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다. (Galtung의 이야기는 아니다만) 이는 평화의 상태를 "secure"라고 정의하는 관점을 취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secure라는 말에 흔히 붙는 전치사는 against, 혹은 from이다. 즉 무엇으로부터, 혹은 무엇에 대항하여 자신 혹은 자기 집단의 안전을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남성 주체'의 안전 개념과도 유사한데, 이 '남성 주체'의 안전 개념이 사회적/국가적으로 외연이 확장되면 국방부의 안보, 안전 개념으로 연결된다. 흔히 군대에서 바라보는 평화라는 것은 결국 "free from care"이다. 즉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만약 근심이 이렇게 '외부'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1) 지키는 주체, 2) 보호 대상, 3) 적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지극히 젠더화되었다. 1)은 대개 남성-군인이 되었고, 2)는 대개 여성-민간인이 되었고, 3)은 대개 1)과 유사한 남성-군인이었다. '남성' 단위들간의 갈등 속에서 2)의 언어는 삭제되고 2)의 평화는 왜곡되고 드러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 메커니즘으로 마이너리티 그룹의 평화는 지배적인 역사 서술에서 삭제되었다..
그가 말하는 적극적 평화란, 역시 간단히 말하자면, 각 단위간 공정하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상호적일 뿐 아니라 동등한 이익과 조화를 추구한다. 때로 이러한 협력은, 갈등 단체간에 더 높은 단위로 통합을 이루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아 완전 도덕교과서-_-; (역시 Galtung의 이야기는 아니다만) 이는 평화의 상태를 "safe"라고 정의하는 관점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secure"가 외부의 '적'을 흔히 상정하는 것과 반대로, "safe"의 상태는, '그 자체'로 안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free from care"와 대조되는 의미에서, "without care"라고 할 수 있다. 즉 근심과 걱정 '없는' 상태. 이는 굳이 지키는 주체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으며, 그렇다면 보호 대상과 적을 만들어낼 필요 역시 마찬가지로 없다고 할 수 있다.
Galtung은 적극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소극적 평화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적극적 평화는 소극적 평화를 전제한다. 만약 잠재적인 갈등이 합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적극적 평화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될 것이다." 허나 이런 구분법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 사회과목 교사만 잘 만났어도 이런 얘기는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것을 단지 듣기에 그럴싸한 개념으로 확실히 구분한 것(이 두 상태가 과연 무토막 자르듯 자를 수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에 지나지 않는다. negative라는 말과는 반대로 positive라는 말이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사전적인 의미들ㅡ확신하는, 긍정적인, 명확한, 적극적인, 확실한, 실제적인, 실증적인, 완전한ㅡ을 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개념 구분법을 듣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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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강연회에서 실망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그에게 그나마 귀 기울여 들을만한 내용이라고 해봐야 이 개념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몇 가지 추가적으로 설명해준 개념들ㅡ예컨대 the unification of "nation"과 the unification of "state"의 구분이라든지. "nation"의 통일은 자유로운 교류와 열린 국경을 추구하는, 마치 EU와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며, "state"의 통일은 두개의 주권 국가가 합쳐지는 그야말로 흔히 생각하는 '통일'에 가까운 개념이다. 한국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들인 적화통일, 북진통일, 평화적인 합병 등등은 후자의 것이다ㅡ도 그다지 신선하고 충격적인 개념들은 못된다. 그것들은 인터넷 서핑만 좀 할 줄 안다면, 혹은 뉴스나 신문을 좀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을 법한 것들이다. 그가 북한과 남한의 역사와 관계, 그리고 6자(six parties)ㅡ남한,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ㅡ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도 역시 중/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과 신문/뉴스에 나오는 수준의 설명과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겨워서 혼났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그랬을거야. 또 왜 북한이 남한에 관심이 없고 미국한테만 관심이 있다는 걸 거듭 강조하는 건지. 누가 모릅니까 그걸...
그래도 끈질기게 결론까지 기다렸다. 그가 강연의 마지막에 말하는 것은 나름대로 Galtung의 희망이 담긴 것이었다. 즉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점. 이를 예전 핑퐁 외교에 비교하면서, 이게 곧 적극적 평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다가, 기어이 어이를 상실하고야 만 순간은, 그가 필하모닉, 즉 philharmonic이 phil + harmony 라면서, phil은 love니까 이는 곧 "love for harmony"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강연회에서 말장난이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다지만, 이런 말장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한참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핑퐁 외교는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Galtung이 "핑퐁 외교"를 마치 미국과 중국 사이, 그리고 크게 보면 소위 "동방"과 "서방"간의 평화를 영구적으로 수립한 것 같이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순박하신건지, 희망적이신건지,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으신건지. 혹시 유머였나? 내가 유머를 이해 못했나...? ;ㅅ;
어쨌든 나는 '강연'을 다닐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청중들이 잘 모르는 것이나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혹은 청중들이 갇혀 있는 어떤 사고의 틀 같은 것을 깨줄 수 있을 정도의 포스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다시금 확인 하러 강연에 굳이 시간내서 갈 필요는 '그다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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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가 이야기 하는 것들은 역시 "국가" 간의 평화에 한정되어 있었다. 국제정치학과 국제평화의 행위자가 "군사 단체", "국가", 혹은 "초국가 거대 기업"으로만 한정된 것인양 기술하는 것은 강력하게 도전받아야 하는 생각이다. 그가 말하는 소위 "적극적 평화"보다 훨씬 더 "적극적"일 수 있는 사회 안보, 인간 안보 등의 개념에 대해서, Galtung은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사는 걸까? 나에게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다. 이런 개념들에 대한 그의 연구물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그가 이에 대해 고민하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일단 차치해두자.
뭐. 사실 이 정도는 고작 1시간 동안만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 누구도 짧은 시간에 수십 년 동안 연구해온 자신의 성과물을 보여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짧은 시간에 다 보여달라는 요구 자체가 무리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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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그에게 실망했던 점은, 그가 최근 10여년간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표현이었다. 사실 서구 지식인에게 모든 지식을 알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연구하고 공부해오면서(그는 1930년 생이다) 이런 '교양'도 없다는 점에 실망했던 것 같다. 그는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북한의 정권을 넘겨 준 것을 일컬어, 그리고 김정일이 김일성의 라인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일컬어 "arch-Confucian"적이라고 말한다. 즉 북한은 결국 "큰 유교주의 국가" 정도라는 것이다. "헐."
Galtung은 유교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있는 걸까? 아, 물론 나도 유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2008년에 한국에서 쌩라이브로 듣게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은 그만큼 컸다. 진짜 손들고 질문하고 싶어졌을 만큼. 당신이 자랑스럽게 "arch-Confucian"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뜻하는 게 뭔지는 알고 그리 말하는 것입니까? 이는 마치 '서구'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발달 과정을 설명하면서, '동양'은 그와 대척되는 의미로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나 "동방의 전제정치"정도로 표상하는 행동과 다름 없다. 최근에 와서야 그런 수사와 재현이 심각하게 도전받게 되었지만(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서구의 정치경제학 텍스트에서는 그런 류의 표현이 사용되곤 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소위 좌파적 비평가, 맑시스트 비평가들의 글에서도, 그리고 들뢰즈의 텍스트에서도 그런 식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정말 심히 유감이다.
그런 '서구' 중심의 수사학과 재현 체계 속에서 '동양'은 끊임없이 화석화되고 타자화된다는 건 상식 아닌 상식이다. 수많은 국가와 문화들의 발달 과정과 역동적인 역사들이 단지 '동양' 그리고 '전제정치'라는 이름 하에 하나로 포섭되고 거대한 서구 자아(Western-Ego)의 확립을 위한 거울 정도의 역할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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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에서 한창 영어로 질문을 구상(부끄럽지만 영어로 말 한마디 하려면 머리 속에서 회화의 시나리오를 구성해야만 한다;)하고 있을 때 쯤, 다행히도(^^;) 옆에 앉아 계시던 한상진 선생님이 다른 질문을 하면서 중간에 "arch-Confucian"이라는 Galtung의 철없는 표현을 지적했다. "당신이 아까 arch-Confucian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으며,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는 유교에 대한 편견을 전제presuppose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유교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 시원했어. 흥이다, Galtung. (뒤에 이어졌던 한상진 선생님의 질문은 '사회학'이라는 분과 학문이 갖기 쉬운 보수성을ㅡ언제나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ㅡ은연 중에 드러내는 것 같아 좀 씁쓸하기는 했다. "사회 현상"에 대해 '대학'이란 엘리트 기관에서 '교수'라는 엘리트가 설명하면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런 면들. 어떤 사회학과 선생님은 "사회학은 진정한 엘리트의 학문이죠"라고 했다지?;)
네임 밸류 있는 사람인지라 강연료도 많이 줬을 것 같은데... 돈 아깝다... 등록금이나 깎아줘요...
덧1) 3월 31일에 울리히 벡, 4월 1일에는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이 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 사람들은 Galtung보다는 훨씬 좋겠지? ㅎㅎ
덧2) 물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말"은 때로는 극약일 수 있다. 글을 아무리 잘 쓰는 사람이라도 말을 하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할 수도 있는거니까. 뒤틀린 마음에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 (근데 아직 arch-Confucian은 용서가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