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서 온기가 빠져나간다.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낸다. 우리는 공공연한 저항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저 은밀한 저항을 극복하는 엄청난 일을 행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이 말은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것과 맞물려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우라는ㅡ조악하게 구분하자면ㅡ 주관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만약 아우라가 사회역사적인 조건위에서 가능하다면, '아우라의 상실'은 특정한 물적 기반이나 생산 기반, 혹은 여러 제도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조건 위에서 아우라의 상실은 불가항력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 선택지가 남는다. 아우라가 살아 있던 과거ㅡ아우라의 상실 이전ㅡ를 동경하거나, 혹은 아예 아우라라는 경험 자체를 포기하거나. 이런 세계에서 아우라의 상실을 거부하는 행위는, 어디선가 니체가 구분한 3개의 역사관 중에 '기념비적 역사관'(영화로운 과거가 현재에도 재생될 수 있다는, 혹은 재생되어야 한다는 회고적/복고적인 관점)이나 '골동품적 역사관'(과거는 단지 과거의 냄새를 풍기는 문화재와 다름 없는 그 무엇이다)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영성주의 운동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탁월한 수집가 혹은 미술관/박물관의 열정적인 관람객이 되거나.

그렇다면 우리는 아우라의 상실을 기어코 인정해야 할까? 무한한 복제가능성, 무한한 생산과 소비의 연쇄 속에서,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내"는 과정을 인내해야 할까? 상실된 아우라를 애도하고 한줌짜리 체험을 하기 위해 한가람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지에서 개최하는 12,000원짜리 전시회에 가야할까?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우라는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혹은 주관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앞서 언급한대로 사회역사적인 조건이 아우라의 상실을 결과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겐 얼마간 주관적인 조건으로 돌아와 볼 수 있다. 너무 많이 읽혀 말하기도 민망한 시지만 김춘수의 시 <꽃>은 이를 잘 예시하지 않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이런 명명(naming)작업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퇴근길에(아 5개월만 더 참으면 돼) 소가 살고 있는 외양간을 지나야 한다. 얼마 전엔 귀여운 송아지까지 낳았다. 지금까지 소 가족은 단지 껌뻑이는 그 큰 눈들이 예뻤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소 두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를 본다면 어떨까? 수컷은 얼럭소고 암컷은 누렁소다. 얼럭소는 새앙뿔이다. 새끼는 아직 엇송아지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언어가 점점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간주되는 상황에서 다채로운 명사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오죽하면 (이를테면) 300개 표현만 알면 70% 정도의 일상 회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책까지 나올 정도일까. 한국어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많은 명사가 있다. 정말 찾아보기 전엔 몰랐을 뿐이다. 명사를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는 건 아우라를 경험하고 사물에 온기를 보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아닐까 싶어진다. 사물의 빛은 사물을 지칭하는 적확한 언어를 찾을 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사회역사적인 아우라의 상실과는 관련없이 주관적으로 그러나 상호주관적으로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 흐이... 소설가들이 좀 더 분발해줬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한글 단어 모음 스크랩을 위한 뻘글이었고 그렇다면 이쯤에서 역시 ctrl +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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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귀책

생각 2010/03/05 21:06
어떤 부부가 게임에 중독되는 바람에 아이가 굶어 죽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 으레 나오는 반응은 신문 기사에 나왔던 어떤 경찰의 말대로 "자기 자식이 우선이지, 내 자식은 굶고 있는데 인터넷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는데 빠져 내 자식을 굶어 죽게 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어떤 평론가는 블로그에서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을 문제 삼았다. 그 평론가는 이 말에서 '사회의 부재'를 읽는다. 이 사건에서 사회는 무능했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사회는 개인을 구제해야 한다) 개인은 이러한 사회를 닮았다는 것이다. 즉 개인을 배려하고 개인들의 행위를 책임지는(사회는 개인을 조형하고 영향을 미치므로 개인의 과오는 곧 사회의 책임이다)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 평론가는 이러한 종류의 사건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니라, 한 철딱서니 없는 부부 '개인'들에게 귀책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이야기를 맺는다. 그 평론가에게 있어서, 이 사건과 그 사건 뒤에 오간 담론은 한국 사회의 고유한 윤리적 초상을 그려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 평론가는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를 소환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전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개인 대 사회'라는 구도는 오래된 '자유주의' 언어의 토양 위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개인 대 사회'라는 말은, 수없이 많은 근대 문학의 주제이기도 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전제인 '개인과 사회의 대립'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유주의는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벗은 주체(사회가 부과하는 권리나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투명한 모나드적 개체)가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이것이 '개인'이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개인' 이라는 <주체>는 신체의 폐쇄성에 의해 최후로 지탱된다. 사회가 아무리 침투하려고 해도 모나드에 가까운 신체의 자율성마저 훼손할 수는 없다. 신체는 그 자체로 '개인'의 개체성을 보증하는 담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가정하는 '개인'은 외부로 노출된 신체부위는 있어도 보는 눈, 말하는 입, 듣는 귀, 느끼는 피부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주의적 '개인'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개인과 대립하는 '사회'라는 개념이 없으면, 개인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탄생할 수 없다. 이 개인에 사회의 의무나 권리 따위가 덧칠해지면서 개인은 비로소 가시화되고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개인'이라는 말을 쓰려면 필연적으로 '사회'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는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조형하고 그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주의해야 할 점은, 자유주의라고 해서 흔히 오해하듯 '개인 만세'는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적 토대에서, 개인과 사회는 늘 대차대조표 위에서 계산기를 두드릴 수 있어야 한다. 제 멋대로 날뛰는 개인은 사회의 모럴(도덕)을 준수해야 하며, 폭압하는 사회는 개인의 개체성과 자유의지(라는 말이 문제가 될지라도)를 보증해야 한다. (흔히 이기주의로 쓰이는 용법대로의) 개인주의가 규제없이 발호해도 안되지만[아노미], 사회가 개인을 잡아 먹어 전체주의 사회로 흘러가도 안된다[파시즘]. 많은 경우 근대적인 주체들은 모두 이러한 자유주의를 공유한다. 신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자유주의를 통과해야 가능한 주체들이다. 거기엔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물론 라캉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그 평론가의 보캐뷸러리에서 사회라는 단어는 특별한 위상을 가진다. 라캉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사회라는 단어는 자유주의의 사회라는 단어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평론가가 블로그에 남긴 글은 화합되기 어려운 자유주의의 언어와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의 언어가 특별한 구별없이 어우러져 혼잡하게 읽힌다. 다만 그 글을 읽으면서, 그 평론가도 자유주의의 전제를 얼마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평론가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방점을 찍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평론가는 다소 어지럽게 글을 풀어낸 뒤, 잠깐 라캉주의 이야기를 하다가, '(상상된) 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은 결국 우리의 책임이라고 자유주의적인 도덕적 결론을 내리고야 만다. 이건 스타일 탓인가, (글쓰기의) 정치적 의도 탓인가, 혹은 단지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흔히 쓸 수 있는 말이 자유주의의 언어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단지 자유주의의 언어와는 다른 방식의 귀책 방법을 알고 싶을 뿐이다. 킁킁.
그리고 난 다른 데 읽혀야 할 글을 써야는데ㅠ 이런 뻘한 글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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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호흡

생각 2010/01/28 00:24

글쓰기를 다루는 책을 보면 종종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보라는 조언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에도 문장의 리듬을 내심 느낀다는 이유다. 묵독을 할때조차 음성은 영향을 미친다. 고로 소리내어 읽기 좋은 문장은 눈으로 읽기에도 좋다. (그렇다고 구어체로 글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예전엔 이 말이 무슨 말일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새는 어떤 의미인지 알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 어떤 외국인이 한국어가 아름답다고, 시적이라고 얘기한 적 있었다. 많은 문장들이 "다."로 끝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각운이 들어간다는 이유다. 그때는 잘 모르는 소리라고 가볍게 그냥 지나쳤는데, 이제는 한국어가 가장 예쁜 음성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요즘 나를 놀라게 한 건 이런 얘기가 문장에만 해당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문장 말고 문단에도, 물론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소설론을 다룬 어떤 책에서는 문단 나눔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한 소설의 일부를 인용한다. 전쟁, 무기, 싸움, 남자들의 전우애를 다루는 내용인지라 내용에는 호감이 없었지만, 한줄 한줄 읽어 문단을 끝마치는 부분에 다다랐는데 이상하게 호흡이 무척 가빠진 걸 느꼈다. 그리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면 그 가빠진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고, 계속 문장을 읽어 나가면서 호흡은 다시 가빠졌다. 놀라운 것은 그게 번역문이었단 점이다. 문단의 길이도 사람의 호흡시간에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번역문이었으니 길어질 수밖에). 짧지 않은 인용이었는데 단숨에, 단박에 읽어내려갔다. 신비경이었다.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건 비상한 상상력도, 아름다운 단어도, 독창적인 구상도 아니라, 아마 어느 정도는 이런 생물학적 측면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겠지만, 최근에 나오는 멋진 과학 이슈들에도 관심이 점점 생긴다. 특히 뇌과학이나 신경과학 같은 거. "진화"라는 접두어가 붙은 건 종교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싫지만. 내가 그런 것을 생산하고 싶은건 아니고, 인문학의 기반에서 해석하고 응용하고 인용하고 싶다. 그건 "생물학으로 대동단결"을 외치는 개념인 '통섭'과는 다른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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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우리가 속한 위치와 역사는 모두 다르지만, 나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갖고서 희박한 '우리'를 만들어 왔다. 만약 우리가 상실했다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하게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 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에서
 
 
뉴스공급사들은 전 세계 어딘가에서 발생한 뉴스를 신속하고 재빠르게 타전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언론사들은 그것을 받아 보통 '국제 이슈'의 한 단면으로 다룬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서 본다. 보고 또 봐도 끝이 안나는 뉴스들.
 
어제 버스 안에서 멍하게 바라봤던 TV에는 ㅌㄱ 축구팀이 총격을 받아 10여명이 사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앵커가 있었다. 물론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ㅌㄱ 축구팀은 어떤 나라에 갔다가, 어떤 사람들에게 우연히 총격을 받은 것이다. 소위 "아프리카"에 있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지난 수십년간 "아프리카" 지역은 늘 총성과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다.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끝나서는 안될 노릇이다. 왜 폭력, 질병, 죽음, 빈곤이 "아프리카"에 만연한지ㅡ사실 이 말도 틀렸다. 국가도 수없이 많으며 경제 상황도 다르다. 계급별 젠더별 조건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로 '그들을' 이해한다ㅡ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으레 그러려니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 위에서 ㅌㄱ 축구팀이 당해야 했는지, 또 축구팀이 상징하는 바, 혹은 더 나아가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 어떻게 이 폭력 사태에 연관되었는지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안다고 해도 그 앎이 진실된 것인지 보장할수도 없거니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당히 여유 있는 중간 계급의 도덕주의적 감상주의 아니냐는 내면의 힐난에 침묵해 버린다. 결국엔 냉소주의와 만난다. 어딜가도 냉소 뿐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냉소주의 앞에서 좌절할 때 가장 좋은 치유책은, 버틀러의 윤리학 관련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고, 밑줄치고, paraphrase도 하고, 옮겨 적는다. 복잡한 문장과 꼬인 번역문을 읽는데도 짜증이 일기 보다는 겨울철 때이른 어둠이 어느샌가 세상을 온통 적셔 오듯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드는 걸 느낀다.
 
버틀러는 가장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저 위에 적어놓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 사고 방식을 깨트린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사유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버틀러의 방식은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도 윤리를 포기해 가는 마당에, 한국에 이렇게 감동을 주는 윤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정말이지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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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력은 정말이지 형편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이름이나 소설, 드라마, 영화 따위의 제목과 대사 따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구나 숫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기억하지 못한다. 생일이라든지 날짜라든지 돈의 액수라든지 전화번호라든지 하는 것들. 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 단기 기억은 그럭저럭해서 시험은 그냥저냥 봐도 정작 시험지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모두 까먹는... 뭐 그런 종류의 휘발성 메모리.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논문을 쓰며, 가끔씩은 소설을 쓰는 생활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걱정되는 건 이런 형편없는 기억력이다. 너무 까먹는게 싫어서 1년 넘도록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이나 아이디어가 나타나면 옮겨 적는게 버릇이 되었다지만, 그게 언젠가 발목을 잡아도 크게 잡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를테면 오늘 어느 시인이 쓴 블로그의 글도 그렇다. 2년 전 이맘 때 출간한 한 산문집의 어느 파트가 알고보니 어떤 칼럼니스트의 글을 '편집'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느 독자가 꼼꼼히 짚어가며 의혹을 제기했고, 그 시인은 그 본의아닌 표절을 인정하고 다음 판에는 그 파트를 제외하기로 했다. 예전에 자료조사 하면서 이게 대체 자기가 쓴 메모인지 남의 글을 옮겨 쓰는지 구분하지 않았던 탓이라 했다.
 
나도 이러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내가 좋아서 몇 번이고 암송했던 문장ㅡ그러나 물론 지금은 까먹어버린ㅡ이 어느날 갑자기 내 손에 출현해서 글로 옮겨져도 나는 그게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나도 메모와 옮겨쓰기를 구분하지 않는 탓이다. 나중에 글을 쓰다 예전에 읽었던 남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 오면서 그게 내가 해낸 생각이라고, 정말이지 훌륭하다고 자화자찬하며 무릎을 칠수도 있는 노릇이고.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문학에서도 그렇겠지만 논문을 쓰면서는 정말 최악의 일이 된다. 자칫하면 그쪽에서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표절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내 기억력이 나쁜 탓에 그걸 옹호하기 위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네 일상에서 오가는 모든 일상적인 언어는 사실 모두 표절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다. 연예인 가십, 상사나 친구의 험담, 친구와의 환담, 혹은 속담과 민담, 심지어 진지한 사랑의 고백까지도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어딘가에서 읽고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 아니던가.
 
물론 남의 것을 그대로 베껴써서 자기 것처럼 위장하고 그걸로 자기의 업적을 세운다면 그건 반칙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칙이고 경고와 주의를 주면서 다같이 고민하고 경계해야할 문제지, 오늘날의 한국은 병적인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정작용과 자기반성, 도덕적인 문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사법권 혹은 법의 이름으로 치환해서 다루는 '아메리칸'적 방식.
 
진중권의 최근작 <교수대 위의 까치>는 그의 유명세(그래서 사실 소설이든 뭐든 그걸로 돈 깨나 벌고 싶으면 일단 유명해진 다음에 출판하는게 더 쉬운 일이다), 그리고 특유의 입담과 깔끔한 문장, 또 그림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잘 나가는 편인 책이다. 그러나 그가 한겨레21에서 밝혔듯, 그 책은 사실 인터넷의 정보를 짜깁기(편집)한 것이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저자의 관점과 직관인 셈이고, 수없이 인터넷에 널린(한 표현을 빌자면 "자기 산출적 우주"로서의 인터넷) 자료들을 취합해 모종의 논리와 일관성에 따라 편집한 결과물이 바로 그 책인 셈이다. 그건 결국 뭐라 해도 표절이 아니다. 없던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로서의 저자, 결과물에 대한 무한한 권위자로서의 저자라는, 전통적인 이미지의 저자는 그에게서 한 번 더 무너지는 셈이다. 사실 이런 저자관은 진부한 것이다. 왜냐면 논문 쓰는 사람들은 사실 본질적으로 이런 저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용을 세련되게 잘 각색해서 원작이 안 보이게 만들면 훌륭한 문학가로 인정받게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서 난 언젠가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잘 빠진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다. 인용했다는 걸 떳떳히 밝히고.
 
그 시인이 지나치게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게 논문도 아니고, 그걸 통해 뭐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어디서 참고했다고 작게 명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지. 혹은 머릿말이나 저자의 말에 그냥 여러 사람의 글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지. 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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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TAG 기억

10대 때는 어김없이 20살이 되는 나를 상상했듯, 20대 중반을 접고 들어가기 시작한 나이가 된 나는 30살이 되는 나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20대 초/중반을 지배했던 불안은 여전하지만,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기꺼이 새로운 일을 추진할만한 열정은 이미 잃어버린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좌절, 너무 많은 실패, 너무 많은 혐오, 너무 많은 환멸, 너무 많은 ... 그러니까, 너무 많은 것들을 이미 지난 몇 년간 지나왔기 때문에.

물론 나이에 따라 열정을 배분하는 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나이주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그 어떤 소위 '억압적 제도'나 '이데올로기'도 나이주의의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나이주의의 각본에 따르자면 20대엔 열정과 도전정신, 패기로 똘똘 뭉쳐 3~50대 기성세대들이 주는 떡밥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으며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되, 20대 후반이 되거나 30대가 되는 순간 얌전히 제가 찾아 먹을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통상적인 '루저'가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 20대 후반에서 30대 사이가 아닐까. 제 짝을, 제 밥벌이를 제대로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러면서 대다수 이들은 보수화되고...

어쨌거나 지금 같아선, 내가 30살이 되면, 그래도 최소한 품위있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품위있게, 기품있게. 적어도 초라하지 않게. 모호한 말이지만, 사실 간단하다. 그저 그때 하고 있는 일과 생각에 이런 저런 변명을 붙이지 않을 수 있으면 되는 것 같다. 20대 초/중반 특유의 무지와 오기, 굽히지 않는 고집을 '진정성'이 커버해주었다면 30대가 되면 진정성으로는 커버 불가능한 부분이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자기 변명이나 자기 변호를 하지 않아도 내가 납득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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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30세, 일기

고통과 위안

생각 2009/10/14 00:17
고통은 측정할 수 없다. 숫자로도, 언어로도 그것은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고통은 볼수도, 전시할수도 없다. 고통은 그냥 고약하게 아픈 것이고, 다만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원을 많이 가졌기에, 심지어 고통을 욕망하고 탐닉할 수 있는(언제라도 빠져나갈 수 있는) 얼치기 딜레당트들이 열정적으로 '느끼고자 하는' 고통은, 엄밀히 말해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굳이 말을 찾자면 '통증'에 가깝다. 살고 있다는 구체적 느낌을 받기 위해, 자위만큼이나 무해한 자해와 폭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경우, 예컨대 잔인한 고문관의 눈을 바라보며 파국을 짐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정의와 도덕 혹은 관계의 가치를 믿는 사람은 바로 그 신학적 믿음으로 인해 곧 다가올 파국 앞에서 신체의 '통증'을 견디어 낼수도 있다.

그러나 고약하게도 우리는 고통을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왔다. 우리 시대의 사회과학적 전통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계량 가능성'에 입각해 있다. 만약 사람을 계량하고 측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에도 위계와 서열을 매길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그 전통 위에서 우리는 고통의 '계량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할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절대로 공식적인 견해로 인정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근대 체계가 마련한 사회'과학'의 뿌리를 제거하려 드는 악질 바이러스이므로. 숫자가 없는 사회과학은 아예 존립조차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점에서는 되레 자연'과학' 분야의 생리학이나 신경과학의 성과가 더 윤리적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다. 적어도 생리학과 신경과학 그 자체로는 고통의 유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을 '보편적인 것', 즉 호르몬의 분비나 뇌 구조 혹은 신경체계의 기능으로 치환해 버리는 놀라운 경향을 가졌기에 이 학문들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고통의 원인을 삭제한 채, 고통에 대해 얼마든 우생학적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리학과 신경과학의 성과는 고통받는 주체에게 역설적인 위안을 주기도 한다. 고통을 언어화하는 순간 일어나는 고통의 상징화, 내지는 고통의 계량화(와 그에 이은 비교)는 늘 절망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언어화도, 수치화도 할 수 없는 나의 절대적인 고통이, 단지 나의 내부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신호나 신체기관의 이상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것만큼 역설적인 위로가 되는 일이 또 있을까. 만성 우울증이 단지 쭈그러든 해마나 비정상적인 세로토닌 탓이라면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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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주지하다시피 '한국소설'이라는 말은 문제적인 말이다. '한국인에 의해' 쓰인 소설이란 말인가? '한국에서' 쓰인 소설이란 말인가? '한국어'로 쓰인 소설이란 말인가? '한국인에 대해' 쓴 소설이란 말인가? '한국'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이며('코리아타운'은 한국인가 한국적인가 혹은 한국이 아닌가) '한국인'은 누구를 일컫는 말인가(타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한국인인가 아닌가 귀화하면 한국인인가 아닌가)? 잘 읽히는 한국어로 출간된 '번역소설'은 '한국소설'인가 아닌가? 등등 끝도 없이 늘어지는 질문에 나는 도저히 대답할 여력이 없다. (이렇게 질문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는건 생각이 많다거나 현실의 복잡합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질문 자체가 우문에 가깝거나 지적 무능을 질문으로 감추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한국소설'만 본다. 나는 이 말을 쓰곤 하지만 이 말을 보편적인 정의로 묶어둘 생각은 없다. 내가 보는 소설이 곧 내가 말하는 '한국소설'인 것이다. 이걸 고려하면 사실 제목도 수정되어야 한다. <내가 읽는 '소설'> 정도일까... =_= 그렇다고 하여 '한국소설'과 무관한 건 아니고 ㅎㅎ


난 일단 한국어로 쓰인 소설만 읽는다. 그것도 일단 매끈한 한국어로 쓰여야 한다. 읽다가 어색한 문장이나 오탈자가 나오거나 하면 기분을 좀 잡친다. 외국어로 쓰인 소설은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일단 사전 찾느라 재미를 다 잃어버리고 만다. 사실 감동을 받은 외국소설도 있었지만 대학 때 '수업'으로 들어야만 했기 때문에 흥미를 이내 죄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소설의 배경이 한국일수록 좋다. 아니, 한국에 가까울수록 좋다. 가깝더라도 친숙한 지명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연변이라든지 홋카이도라든지. 좋아하는 작가라 하더라도 배경이 외국이면 일단 아웃이다. 나는 이국적인 것에 그리 취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국적인건 나에게 잘 와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 등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잘 소화해내지 못한다. 과거는 낯선 이국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적 배경은 현대에 가깝거나 무시간성이어야 한다.

소설가의 이름도 중요하다. 부모에게 지정된 성과 이름을 가지고 소설가나 소설을 판단하는 건 어찌보면 '죄악'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여러가지 숙명들 중에(타고난 것들 중에) 외모만큼이나 이름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첫인상 만큼이나 이름도 중요하다. 그래서 가끔 볼 수 있는 필명을 쓰는 작가(혹은 필명 같은 이름을 가진 작가)를 사랑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아무리 서사나 플롯이 좋아도 인물 이름이 꽝이면 몰입이 안된다. 인물이 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 상징적인 의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을 써야한다(적어도 그럴듯 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가장 중요한 3대 조건. 그리고 기타 조건들이 있다.


남자 소설가가 쓴 소설은 일단 손에 잘 쥐지를 않는다. 특히 원로 남성 소설가는 절대 안 읽는다(김훈, 조정래, 김진명 등). 만약 대하소설을 쓴 남성 소설가라면? 이게 최악이다 -_- 물론 한국의 규범적인 남성성을 갖지 않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려는(벗어난) 작가는 상관없다(예컨대 정찬씨 정도?). 시인은 남자 시인이어도 상관없는데 이상하게 소설은 좀...

상, 특히 최근에 제정된 상을 받은 소설은 잘 안 읽는다. 1억원 고료라든지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든지. 비슷하게 지나치게 추앙되는(특히 소설책 뒷면이나 해설 등에서!!!) 작가도 안 읽는다.

소설가 고유의 세계관이 느껴져야 한다. 산문집, 에세이를 출판한 소설가는 그래서 고맙다(한강, 김연수, 공지영씨, 김형경 등. 배수아는 에세이집이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고유한 세계관을 가졌다).

판타지는 싫다. 지금 사는 세상도 아스트랄하고 뽠똬스띅한데 판타지 소설 읽을 필요가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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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EBS 지식채널ⓔ - [버튼을 누르지 않은 이유] 스크랩




"피실험자들이 실험자가 내리는 명령에 반항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인성이 아무리 정의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시민들이 만약 옳지 않은 권위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그들 역시 인간의 야만성과 비인간적인 태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탠리 밀그램 (이 실험의 호스트)


심리학개론 수업 들으면 종종 언급되는 이 '유명한' 실험이 얼마나 올바른지 얼마나 적합성이 있는건지 얼마나 현실적용성이 있는 건지 하는 문제들은 일단은 (이 실험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니) 차치해두자. 어쨌든 스탠리 밀그램의 결론은 나름대로 유의미한 것 같다.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나온다는 라이히의 분석처럼.

그러나 밀그램이 "권위자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권위자와의 관계를 단절"해도 '안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절"하는 건 엄청난 영웅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나의 양심에 비추어보았을 때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권위자의 권위와 '나'를 분리시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단절" 행위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불이익들을 감수하는 일들은 오로지 개인에게 맡겨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단절"은 권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권위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권위를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곧 '배신'이기 때문이다. '배신'. 그로인해 '배신자'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왜소한 개인에게 일종의 주홍글자의 낙인으로 부여된다. ㅡ물론 예컨대 '장기수' 같은 경우에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한겨레신문사에서 나온 <배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서점에서 살짝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예전에 '삼성'의 내부를 낱낱이 고발했던 한 변호사의 글, 그리고 정신의학 전공의의 글을 읽었다. 이중 후자의 글은 재밌게 잘 보았다. '배신'이라는 말의 심리학이랄까. '신뢰'란 건 어쨌거나 정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ㅡ한번 '배신'이라는 말로 낙인이 찍히면, 그리고 그것이 널리 한 커뮤니티에 일종의 서사적 권위를 지닌 채 전달이 된다면, '매장' 당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양치기 소년 우화, 박쥐 우화 등등도 우리에게 '신뢰'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배신'의 위험성을 가르쳐주는 '교훈적'인 역할을 하지 않던가.

게다가 이런 식의 '매장'은 단지 '마을'이나 무슨무슨 모임,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 같은 소규모 커뮤니티 뿐 아니라, 소위 '지식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교수의 비리(?)를 언론에 전달했던 한 국문과 대학원생이 완전히 그 커뮤니티에서 축출당했던 (그리고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를) 것처럼. 사람 모인데면 뭐 사실 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배신>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글에는 이런 식의 질문이 나온다. 한 번 배신했다고 알려진 사람을 과연 당신이 속한 곳에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그래서 결속력 있고 지속성 있는 (제도화 된) 시민 단체, 시민 운동 내지는 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제도-장치로는 보호될 수 없는, 그런 "단절" 된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더 중요하게는, 집단적 "단절"을 위해서. 급진주의 정치를 표방하며 (제도화 된) 시민단체의 '보수성' 내지는 심각한 '한계' 등을 비웃는 것은 쉬운일 이지만, 그런 식으로 빈정대고 비꼬기'만 하는' 건 역시 자위는 할 수 있지만 큰 도움은 안되는 일이다. 그것은 잡스러운 냉소주의적 좌파 에고이스트로 가는 길이다. 우리에게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것도 안정적인, 소속감을 주는, 그런 '커뮤니티'. '저항적(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이라면 더 좋고...

읭? 근데 왜 글의 결론이 이렇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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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고전'ㅡ다들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의미에서ㅡ인 폴 윌ㄹ스의 <학교와 ㄱ급 재ㅅ산>을 보다가 문득 이 책의 분석(자체라기 보다는 방법 및 방법적 주의)을 '학생 운동'에도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는 학생 운동 집단이 늘어나고 있기에(아 진짜... ㅠㅠ),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이 책에서 분석한 바ㅡ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ㅡ영국 노동자 계급 아이들의 ("해머 타운"이라는 특수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편재성을 갖고 있다. 이는 데리다가 말했던 바,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이라는, 일종의 '환유'로서 읽어야 한다.) 소위 "반학교문화"는, 학교 외부의 권력 관계 그리고 계급 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 자체의 규범, 논리, 작동 기제를 갖고 있는 소문화다. 그런데 "반학교문화"는 절대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이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외부와 관계를 맺지만, 그럼에도 나름대로 고유한 내적인 일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총화 그 이상의 것이다. 구성원 개인의 내적인 독특한(실제로 독특한 특성이란게 있다면) 속성과는 별로 큰 관련이 없는, 말 그대로 '문화'(구성원 간에 공유된 지식, 내지는 감정 등의 체계)다ㅡ따라서 이 "반학교문화"는 문화가 작동하는 그 자체의 맥락에 들어가 있을 때에만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한 인터뷰 등의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학교의 '공식 문화'와 갈등 관계를 맺으면서, "반학교문화"는 '비공식 문화'로서 자리잡으며, 학교에, 아이에, 교사들에게, 지역 커뮤니티에 뿌리 내린다.

또한 "반학교문화"는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에 대한(그리고 학교 제도에 대한) 일련의 직관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ㅇ리스는 이를 "간파penetration"이라 개념화한다. 물론 그것이 체계화된 지식이 되어 외부로 개념화 해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훌륭한 분석이다. 그 간파는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 "간파"만으로 노동자 계급이 훌륭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 사회주의의 선봉이 되거나 혁명적/정치적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 일련의 문화적/정치경제학적 제한, 윌ㄹ스의 개념으로는 "제약limitation"으로 인해 "간파"는 왜곡되고 교란당하고 흔들린다. 이는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잠재적 가능성은 곧 실패하고 "공식 (지배) 문화"의 하부 구조로 편입된다...

이렇게 요약을 해놓으니 변변찮아 보이기도 하는데, 책을 막상 한 번 정독하면 그 이상의 통찰을 주는 구절들이 있다(그러니 한 번 쯤 읽어도 손해볼 책은 아니라는 이야기^^). 특히 지젝과 푸코의 인상 깊은 통찰 내지는 분석과 연관되는 부분이 읽히기도 하는데, 이쯤 되면 무척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문화기술지/민족지ethnography'라는 형식인데도 불구하고(사실은 현실감 없게 느껴지고 미덥지 않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이 책에 수록된 부분은 상당히 현실감 있게 읽히기 때문에(라포rapport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케 한다)...


어쨌든, 소위 '학생 운동'과 윌리ㅅ가 "반학교문화"라고 보는 것 사이에는 일련의 공유하는 지반 내지는 매커니즘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싸나이lads'와 소위 '운동권'이 공유하는 문화적 매커니즘(집단 정체성의 획득 과정, 하위 문화로서의 문화적 생성 과정, 또한 (대)학교의 '비공식 문화'로 자리 잡는 위치성, 그리고 "간파" 등등등)이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학생 운동'이 (또 얘기하기도 민망하지만) 하향길에 접어 들다 못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전에 문화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번성'할 때 조차도 갖고 있던 내적인 가능성 내지는 한계 등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살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도식적으로, 그리고 표면적으로 "반학교문화"에 대한 분석을 그대로 '학생 운동'에 때려 맞추고 들이미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어떤 충동들을 느낀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안 될까. 하는 탄식도 좋고 이미 사라진/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필요하다. 그러나 '왜'에 대한 보다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이,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ㅇ리스의 책에서 그 분석의 기초가 될만한 것들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또한 푸코가 말했듯, 정치권력에 대한 분석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가장 낮은 곳에서 권력의 현상과 기술 및 과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이 과정들이 어떻게 자리를 이동 및 확장하며 스스로를 변형시키는지, 그리고 특히 어떻게 이 과정이 전체적 현상들에 의해 포위되고 병합되었는지 . . . 를 보여주어야 할 것",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p. 49)) 윌ㄹ스의 책은 어느 정도의 키key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기초해서, '학생 운동'에 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들 때마다 포스팅을 하도록 해봐야 겠다. 물론 그것은 윌리ㅅ가 말한 것과 상이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래도 (누구의 표현을 빌어쓰자면) '운동권 경계인'이라서 이런 충동/느낌을 갖는 건지도 모른다. 발을 뺐다 넣었다 할 수 있는, 그럼에도 말만 디따 많은. 요즘 들어서 나의 '무책임'함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ㅡ서점 '그날'과 관련된 일들도 그렇고... 아마 이렇게 포스팅 해놓고는 또 딴짓하고 팡팡 놀겠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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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제 아무리 하 수상하고, 그로테스크가 일상이 되고, 매일 경악을 하다 못해 왠만한 것에는 경악하지 않게 되어 버린 세상이고 요즘이라지만(우리는 강해지고(=둔감해지고) 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웹상의 풍경 하나.

링크 : http://agora.media.daum.net/event/idea2008/index.html


다음의 아고라에 뜬,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국내의 한 단체의 웹 사이트(ㅇㄴ네)에 배너 광고로 떴던, 바로 그 웹 페이지다. 웹 페이지의 일부를 보자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수상쩍은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단체를 보면, <서울특별시>, <행정안전부>, 그리고 생뚱맞게도(혹은 그럴싸하게도) <기아 현대 자동차 그룹>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세안들을 보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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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눈물 난다 ;ㅁ;

터져나오는 사회적 '불만'을 그냥 잠재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거리 시위를 허용하자니 윗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운 마당에 궁여지책으로 나온 프로젝트인지, 아니면 정말 생각하는 게 이 수준에 그치고 마는건지 알 수 없는 정말 수상스러운 프로젝트다. 안 그래도 듣기 싫고 귀 따가운 '불만'들이니, 차라리 노래로 승화시키라는 건감? '디자인도시'에 걸맞는 '예술도시' 프로젝트라도 하자는 건지 뭔지.

정말이지 '정치'란게 실종된 요즘이다. 요새 유행하는 '본연의 정치(proper politics)'와 관련된 개념들, 그러니까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le politique/the political)'개념이라든지, 바디우의 '진리/사건'개념이라든지,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개념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끌고 오지는 않더라도(아직 끌고 올만큼 공부도 하지 않았고 그 개념들이 사실은 좀 미심쩍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건 정말 아닌데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저런 철학자들 중 한 사람 식으로 표현하자면, "본연의 정치가 실종되는" 현상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정치를 행정의 영역으로 끌고오는 것, 그럼으로써 치안을(<행정안전부>라는 이름은 얼마나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지! 당신들, 천재야!)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번 행정부의 빼어난 정치적 몸짓들. 너무나 빼어나서 무섭기만 한 그런 몸짓들...

그 밑에 "사회창안대회"라는 것도 클릭해서 대충 내용을 살펴 보아도 슬퍼지는 건 마찬가지다. 이어폰 잭을 통일 시켜 달라, 공공장소에 쓰레기통을 설치 해달라, 하는 것이 "사회창안(social invention)"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하에서 요구된다(물론 그러한 요구들도 정당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창안이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 보면 "어떤 방안,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생각하여 냄. 또는 그런 생각이나 방안"이라 되어 있다. 중요한 건 창안이 '처음으로' 하는 생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회를 '창안한다'는 건, 이 사회를 근본적인 층위에서 부터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내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기 싫다!"라는 외침으로 수렴되는 혁명적인 히스테리에 의해 발생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창의적인 상상력을 동반해야 하는 거다. 따라서 이건 개념적으로 봤을 때 <행정안전부>가,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가 전유할 수 없는 말이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전유할 수 없는 말들을 전유할 수 있게 되려면, 모종의 상징적인ㅡ라클라우 식으로 표현하자면 헤게모니적ㅡ접합(articulation)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엄청난(?!) 상징 투쟁과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는 걸까. 국가 기구가 이런 '혁명적'인 어휘("사회창안")를 전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랑시에르가 지적했던 바, 정치에 대한 부인의 몸짓들 중 '초-정치(para-politics)'ㅡ정치를 행정의 논리로 번역하고, 모든 정치적 주체들의 요구들을 대의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합리적인) 경쟁으로 환원하고 마는 정치체제ㅡ의 (물론, 임시적일테지만)승리를 암시하는걸까? (게다가 이게 무려 '아고라'에 게시되어 있는 웹페이지다...)


덧) 혹시 "사회창안(social invention)"이라는 말이, "사회를 창안" 한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창안"이라는 걸까? 그렇다면 아, 뭐 말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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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유학을 간다고 해서 특별히 똑똑해진다거나 영리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건, 경험적으로 증명되어 왔다. 되려 오랜 기간 유학 갔다오는 동안 '현실 감각' 같은 것이 너무나 무뎌진 탓인지, 아니면 유학의 '계급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뻘소리'만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유학에 대한 지독한 선망이 있는 것 같은 교수들도 봤고(유학 갔다온 이만이 공부를 하는 건줄 착각하는). 오히려 똑똑하고 영민한 사람은 어디에서 언제 공부를 하더라도 똑똑하고 영민하게 공부한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 강사(특히 교수) 임용에 있어서 '국내 박사'의 비중이 적은 국내 학계의 현실은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 국사학과나 국어국문학과 내지는 의학과 등 몇몇 학과를 제외하고는 대개 '해외 박사'를 선호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설령 외국에서 '생산'(이런 자본주의적인 언어 말고 또 뭐 없을까) 된 지식이 한국 학계나 한국 사회에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한국 사람들이 '생산'하는 지식은 그럼 뭐란 말인가. 게다가 한국 대학원에 가면 맨날 읽고 쓰고 하는게 이런 외국산 지식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일반 수업 커리큘럼을 봐도 그렇고, 한국어로 쓰인 논문에 달린 참고문헌만 봐도, 정말이지 (영어를 중심으로 불/독어가 중요하게 첨가된)외국어 투성이라 이게 과연 한국산 논문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 자기 밑에서 공부한 제자를 배반하고 해외 출신의 박사를 임용하는 국내 교수들의 '배반 의식' 같은 것을 거론한다든지, '학계'의 (신)식민지화('지식'의 식민지화가 아니라)를 거론한다든지 하는 건 너무 쉬운 분석인 것 같다. '배반 의식'이라든지 '식민지화'라는 말은, 한국에서는 너무나 심리학적인 울림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기표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담론 속에 엉뚱하게 휘말려 들어가기 쉽다. 그렇다고 "문제는 역시 인터내셔널 코스모폴리탄 시대의 지배 언어인 영어!"라고 거론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는 '표면적'인 분석인 듯 하다.

이런 것들 대신에, 오히려 '제의적'인 차원이 지배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해외 박사를 선호하는 대다수의 학과들(특히 사회과학계)도 해외 박사가 국내 박사에 비해 '진짜' 더 우월하고 능력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으레, 해외 박사를 선호하는 것이다. 학계의 관습이, 학계의 의식이 수십년 간 줄이어서 그렇게 변해오고 있으니까. 아마 특별한 이유는 들먹일 수는 없을테지. 물론 학계라는 장(field)에서 이뤄지는 권력의 씨줄과 날줄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겠지만, 이 현실에 있어서 그건 그닥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고, 또 뻔한 일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부딪혀봐야 아는 걸까. 아직은 몽실몽실 떠다니는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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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나에게 계급은?

생각 2008/08/03 17:34

나에게 계급이란 무엇일까? 인종, 성, 장애 등등, 소위 '사회적'인 분류를 위한 범주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까?

벨 ㅎ스의 새 책, <벨 훅ㅅ: 계급에 대해 말ㅎ지 않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슬펐다.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데,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벨 훅ㅅ가 어렸을 때와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 그리고 자신이 성장한 집 주변에 있는 여대에 진학 했다가 겪었던 온갖 계급-인종 차별들, 좀 더 인종적으로나 계급적으로 평등함을 지향한다고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에 진학했을 때에 겪었던 모든 계급성들...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현실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살아 나가기에 한국도 엄청나게 끔찍한 공간이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전혀 없었던 셈.


그렇다면 나의 계급은 어떨까? 나도 완전 잘사는 집안의 아이는 못된다. 아빠는 한 시골에서는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행정 관료이고, 엄마는 읍내의 한 병원에서 사무일을 본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는 3명의 자식이 있고, 첫째와 둘째는 이름만 대면 많이들 아는 대학에 다니고 있고 셋째는 집에서 2시간 거리인 다른 도시에서 유학중인 고등학생이다. 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빠듯하기는 하지만 내 부모님은 다 대주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매달 34만원의 방세와 6만원 가량의 핸드폰 비, 그리고 10여만원 정도의 용돈 보조를 해주고 있다. 나도 40만원의 과외 수입을 갖고 있으며 이걸로 그냥 한달은 그럭저럭 살아간다. 놀 것도 다 놀고 살 것도 대충은 다 사면서. 약소하지만 1만원의 후원금도 내고 있고.

어쨌든 나는 무리 없이 학교를 졸업했다. 학비를 마련하거나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쿨하게', 그리고 내 하고 싶은 짓 다하면서 졸업을 앞두고 있다. 교지에서 5학기를 보냈고 다른 단체나 학회 등에서도 시간을 많이 보냈다. 이렇게 '운동권 경계인'의 감수성으로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 소속 과의 수업들을 경멸하면서, 그리고 많은 타인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고 증오하면서, 그러면서도 나와 어딘가 비슷한 이들과는 잘 어울리면서 4년 반을 보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과정에서 계급은 굉장한 역할을 했다. 아이들을 만나는 과정들을 쭉 돌이켜보면, 나는 나와 비슷한 아이들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아이들과는 거리를 뒀고, 대부분 지방에서 유학을 온 아이들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교수 등의 전문직인 아이들이라기 보다는, 대개 행정 관료나 선생님 내지는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는) 노동계급의 아이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가난해 보이거나, 너무 부자처럼 보이는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일은 굉장히 어려웠다. (물론 '보이는'게 문제 였다. 실제로 그 아이가 어떤 계급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아마 계급은 나에게 '환상'의 영역이었던 것 같다. 계급성, 계급투쟁의 대의, 이 모든 것에 동의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가끔은 계급이 어떻고 저떻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 '남의 일'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는 점을 느끼게 되면, 나는 아마 입에 똥을 물고 끔찍한 말들을 내뱉으며 경멸하고 거리를 뒀을지 모를 일이다. 가난은 그저 끔찍하거나 아니면 아름답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했다. 물론 그것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다른 어휘일 뿐이다. '아름다운 가난'이나 '끔찍한 가난'이나, 둘다 계급이나 가난을 타자화하는 말인 점에서는 완전히 똑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다니는(이제 곧 졸업이군) 대학은 계급이 높은 학생들이 주로 다닐 것으로 생각되는 학교이다. 단지 경제 자본 뿐 아니라, 문화 자본까지도 두루 갖춘 부모들을 둔 학생들이 실제로 굉장히 많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옷과 신체와 행동거지와 사고 방식 모든 것에 반영되어 있다. 촌스러움과 세련됨 사이에서 많은 아이들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젖어 있어서 '자연스러운' 세련됨을 풍기는 아이들과, 이제서야 세련됨을 학습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거리감과 요원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노력이 없으면 이 거리는 좁힐 수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마저 계급을 따라가곤 했다. 그것도 세련됨의 일종이었으니까, 잘 나가는 아이들은 너그러운 휴머니스트로서 정치적인 올바름까지도 쉬이 가질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비싼 옷과 가방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공정 무역, 가난한 사람들, 환경 오염에 대해 운운하는 모습에 심한 불편함이나 때론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그건 단지 불편함이나 역겨움일 뿐이었다. 그것을 말할 사람도 별로 없었으니까.

나는 그런 점들을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굳이 의식하거나 표현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은 잘 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도 계급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 장애, 환경, 인종 등등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계급은 껄끄러운 주제였다. 자기가 '현재' 돈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왜' 돈이 없는가, 즉 자기의 계급 내지는 자기 부모의 계급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 모두는 이 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일종의 규범 내지는 규칙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는거. 계급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열등감 이런거, 잘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고, 내가 다니는 이 학교는 이 사회의 '중심부'에 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네가 잘나서 잘하면 되는거지 왜 남 탓을 하느냐, 너도 잘나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 너도 이제 계급 상승을 하고 있는거 아니냐 하는 암묵적인 이야기들이 모든 구성원들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암묵적인 이야기'라는 말은, 설령 자기 스스로는 계급 시스템의 모순 등을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음에도, 정작 자기 문제가 되면 자기 탓 내지는 개인 탓으로 돌리기 쉽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때로는 이 사회의 계급성이나 가난을 목격했을 때 '슬퍼할' 줄도 알아도, 그건 결국 1시간 지나면 잊어 버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나'의 계급성은 결국 '나' 스스로 열심히 극복해야 한다. 그걸 다른 사회적 범주와 차별 탓으로 하는 건 안된다. 학벌도 갖췄는데 뭐가 문제랴. 하는 생각들.


학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성장한 지역을 보면 이 계급 문제는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나는 완전 변두리인 시골에서 자랐고, 그 지역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아이들 중에 잘 사는 아이들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많은 경우 내가 자란 고향에서 머물고 있으며, 부모님의 계급이나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다.

부모님이 종종 하는 말 중에 "대학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됐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야 이 말을 실감한다. 나는 계급 이동에 이미 가까이 다가왔으며, 설령 앞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을지라도 나의 학벌 자원이나 문화 자본 등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일종의 계급 보증서로서 나의 계급 이동을 철저히 보증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모르겠다. 그냥 끔찍하고 슬프고 그렇다.

벨 훅ㅅ의 책의 원제인 "where we stand: class matters" 마냥,
"나(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

정말 중요한 주젠데 나는 너무나 부분적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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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일부러 촛ㅂ집회, ㅇㅂㄱ이라고 표시했어요. 예ㅂㄱ, ㅇ비ㄱ, ㅇㅂ군이란 뜻입니다. 검색 유입을 막기 위한 나름의 방편입니다 ;ㅅ; 그리고 짜증이 난 상태에서 쓴 글이라 거칠으니 읽으실 분들께는 너그러운 용서를 바랍니다...)



집회에 여러 차례 나가면서, 얼마 전 촛ㅂ집회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갑작스레 '시민을 보호하는' 영웅이 되어 버린 'ㅇㅂㄱ복'을 입은 남자들이 무척 짜증스럽고 역겨웠었더랬다. 하지만 굳이 이런 저런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또 얼마나 폭발적인 반응이 나올지, 또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이 나올지, 또 얼마나 과거와 하나도 다를 것 없고 발전된 것 없는 논의들로 나를 이끌지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ㄱㄷ나 ㅇㅂㄱ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다가 ㅇㅂㄱ 논쟁이 진보넷 블로그에서 한창이루어지고 있길래 며칠 동안 살짝 살펴보았다. 여전히 수년 전과 별로 변한 게 없다. 보면 짜증나고 분노만 일 뿐, 역시 나한테 의미있는 말들은 별로 없었다. (몇몇 블로거님들의 글은 많은 참고와 지지가 되었지만^.^) 국가-(군사)남성으로 이어지는 '남성성'과 '보호'와의 상관 관계, 그 담론 안에서 발생하는 <'보호자(남성)'-'피해자(약자/'여성'/'소수자' 등)'-'적(국가권력)'>이라는 삼자 관계 내부의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작용들, 그리고 그 담론 안에서 순환하는 (ㅇㅂㄱ과 ㄱㄷ를 옹호하는) 진부한 논리와 언어들에 대해서는 별로 하고 싶은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글 쓰다 보면 내가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_-;

어쨌거나 이 '논란'들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예전에 한 포스팅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철(이라도) 드는게 한국 남자들이 평생을 거쳐서 해야 하는 숙명, 업보, 카르마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ㅇㅂㄱ을 무작정 옹호하는 남자들, 그리고 ㅇㅂㄱ들이 지금 국가 폭력으로부터 누구누구들을 '지켜 주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남자들, 여성주의적 마인드로 쓰여진 글들에 대해 블라블라 지껄이는 남자들이 여전히 많다. 이네들은 사회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못한, 지나치게 '유치한' 발상을 갖고 있다. 막말로 설령 자기들이 정말 시위대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정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설령 누군가가 인정받지 않는다고 하여 상처받고, 그것을 (언어) 폭력으로 전이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말로 그대들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리고 너희끼리 서로 위안해주면 되잖아? ㅇㅂㄱ이 그렇게 좋으면 너네끼리 가서 놀라고 제발 -_-)

이렇게 한국에는 '사회적인 인정'에 목 말라하는, "제발 날 좀 봐주세요"라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 남자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너희를 보호해주고 있으니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를 칭찬해달라, 는 외침이다. 좌파/우파, 진보/보수 할 것 없이, '인정'에 목마르다 못해 폭력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유치한' 남성들이 많은 건 똑같다.

이는 평화운동, 환경운동,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 말들이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유독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남/녀 편가르지 말라"부터 시작해서 "여성주의는 이기적", "여성주의는 중산층/부르주아 여성들이나 하는 운동"들이라는, <오해>부터 시작해서 <오만>으로 끝나는 이야기들. 이와 대조적으로 "노동운동이 이기적", "평화운동은 중산층/부르주아나 하는 운동", "환경과 인간 편가르지 말라"는 말들은 잘 성립하지 않지 않는가? 대체 여성주의에 대한 이러한 말들이 겨냥하는 바는 뭘까? 이러한 말들이 욕망하는 바는 뭘까?

나는 이런 이야기들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남성을 (제발) 인정하라"는 욕망에 기반한, '고만고만한 똑같은 소리'로 읽는다. 그럼 대체 누가 남성을 인정하는가? 바로 "지혜로운 (현모양처 형) 여성"들이다. 특히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이러한 요청은 극에 달한다. 남성들 자기 자신들이 한편으로 '불합리'하고 '짜증스럽게' 느끼는 군대 경험은, 사실상 그들을 일종의 '희생자'로 만든다. 그러한 것들을 많은 남성들이 '희생'으로 의미화하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은 대개 (특히) '여성'들의 감정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것을 누군가가 부정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경험이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거기에 대해 무작정 분노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한국 남자들은 '응석받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많은 남성들의 '응석'이 얼마나 많은 논의들을 가로막고, 얼마나 많은 관계들을 황폐하게 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들 중에 하나는, 특히 군대 문제와 관련지었을 때 자주 나오는 말인데, "여성주의는 남성을 끌어안고 갈 필요가 있다"고 운운하는 말들이다. 이런 걱정 섞인 '충고'가 얼마나 웃긴 일인지는, '여성주의'라는 말을 다른 정치적 사상들로 바꿔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탈식민주의는 제국주의자들을 끌어안고 갈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은 자본가를 끌어안고 갈 필요가 있다" 등등. 이러한 말들이 얼마나 그로테스크 한가. 이에 반해 왜 여성주의에 대해서 유독 남성들을 끌어 안고 가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인가(여성주의가 '남성'들을 배제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참 웃긴 일이라고 생각한다만). 왜 유독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보살핌comfort를 요구하는가. 이는 여성주의를 '정치적인 담론'으로 보고 싶지 않아하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의식의 발로는 아닌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평화운동, 환경운동, 노동운동, 장애인운동, 노점 운동 등이 모두 특정한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듯,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운동도 이해관계와 떨어져서 작동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해관계는 필연적으로 어떤 사회적 '충돌'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이해관계의 충돌은 당연히도 어떤 특정한 그룹과 그룹 사이의 '배제'의 양식을 띠기 마련이다(이 '배제'를 최대한 상대화하고, 그 매커니즘에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지는 중요한 담론 중 하나가 여성주의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 '배제' 과정에서 ㅇㅂㄱ을 옹호하는 수많은 남성들이 소외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자체로 누가 누구에게 '사과'하거나 할 문제인가? 오히려 그 '소외감'이 대체 뭔지, 그리고 그것을 유발하는 원인부터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한국 남자들은 매일 '센 척' 하지만 그 한편으로 너무나 말랑말랑한 심장을 가진 것 같다. 그 말랑말랑한 심장을 드러내는 거,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마치 감추고 싶은 진실을 감춘 곳을 콕 찔리면 버럭!하기 쉬운 것 마냥, 이렇게 시끄럽게 굴 필요 전혀 없다. 그 말랑말랑한 심장을 성찰하고 공개적으로(주변의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게 성장의 첫 걸음이다.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공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운동에 참여하라는 것도 아니다. 지금 껏 하던 짓 그만두는게 나의 작은 바람이지만, 일단 제발 응석부리는 것부터 중단해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그리고 성장해다오. 그래야 '소통'할 수 있단다. 너희들의 응석을 받아줄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 별로 없단다.


덧) 보통 일상적으로 늘 '인정'받아 오던 사람들이 한 번 누군가로부터 부정당하면 쉽게 상처 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유명하고 성공한 뉴요커 남성 예술가의 일상을 다룬 한 영화에서, 그 예술가는 자신에게 미술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한 여성을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노동력까지도 착취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여성이 그 관계의 종언을 선언하고 자신에게 미술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자, 그 남성 예술가는 정말 큰 '상처'를 입는다. 이제와서 자기한테 왜 이러냐는 이유다. 그 전에는 일상적인 폭력과 착취에 시달렸던 인물이 순식간에 '가해자'로 둔갑하는 것이다. 늘 어렸을 적부터 인정받고 살아온 모범생들이, 동료간 경쟁과 평가에 더 민감한 것처럼...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때로는 행위에 대한 동기가 되지만, 때로는 (특히 군대나 ㅇㅂㄱ과 관련해서는) 프란츠 파농이 말했던 개념인 "수평폭력"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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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시민고객"

생각 2008/06/04 12:06

어제 이런 저런 일로 지하철을 오고 가면서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그로테스크한 글귀를 보았다. <2010년 세계 디자인수도 서울>이라고 최근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게 있는데, 거기 앞에 붙어 있는 글귀였다
 
"시민고객과 함께 만들어가겠습니다."
시민고객... 시민고객... 시민고객... 시민고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최근 오픈한 상담 콜센터 <다산120>인지 뭔지 앞에도 역시 시민'고객'이라는 말이 붙어있다. -_-;

신자유주의의 승리와 자본주의적 마인드의 '자연화'와 '일상화'가, 학계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전 영역에 뻗쳐나가고 있다는 점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나, 이렇게 공공 기관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틀을 가져다 쓸 줄은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

만약 오늘날의 '시민'이, 민주주의적 주체로서 권리를 가진 시민 내지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니라, 정말 '시민고객'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이제 '시민고객'으로서의 권리란 전통적인 정치 담론이 늘 가정해 왔던 추상적인 담론, 즉 인권 등의 자연법적 원리에 의해서 구성될 틈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아주 '명시적'인 '계약'에 의해서('사회계약론'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권리와 의무가 구성되고 실천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명시적인 계약은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다. 추상적인 '법'이라기 보다는 현실에 아주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법'은 추상과 공백의 위치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서로 다른 가치와 입장들의 헤게모니 투쟁에 의해 결정되고 생산되고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곁에 있지만 한편으로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 영속적으로 소속된 것이 아니다. 즉, '법'은 '정치'의 영역이다. 하지만 '법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이미 지키기로 계약을 맺었음을 전제한다. '법률'은 오직 적용과 집행의 영역일 뿐이다. 즉, '법률'은 '행정'의 영역이다.


-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흐름의 하나는 바로 한국 사회가 미국적인, 너무나도 미국적인 '소송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회적 갈등은 <법원>을 통해서 '해결'된다. 또한 한국 사회의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주체는 (마치 중세의 최고위 종교 재판소와 흡사한) <헌법재판소>가 되었다. 예전의 탄핵정국과 이번의 쇠고기 정국도 그런 흐름이고.

이제 사람들은 '소송'을 통해 옮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정치와 윤리의 문제를 '법률'에 위탁하게 된다. 아주 일상적인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서로가 합의와 토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들의 '계약'에 따라, '합리적'으로, '법률'의 말씀에 의거하여 또한 '판사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판단'하는'게 아니라) 판단 '되'어야 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만 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시민고객'이라는 말이 가능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국가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아 그것에 항의할 수밖에 없을때, '시민고객'들은 거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행정소송을 통해 그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만약 '법률'에 '구제책'이 없다면? 그냥 무력하게 계약을 지키며 '고객'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 '법률'을 강행돌파 하려는 순간 계약 위반이 되고, '불법'이 되며, '준법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전경의 검은 몽둥이와 방패가 내리 꽂힐 테니 말이다. 그 대신 '시민고객'들은 <소비자보호원>같은 기관에 하소연하고 자비와 관심을 베풀어 줄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꼭 <인권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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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고객'들의 세상은 얼마나 비참하고 처연한가. '68혁명 정신'이, 68 이후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이 되었다는 분석은 역시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86년 정신'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정신의 핵심이 되었다는 분석도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역시 유효하다. 탈중심과 탈권위 정신은 기존 자본주의의 맹점을 완벽히 메이크-업 해주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재 '소송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한 것 같다.

여전히 전문가적 권위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여전히 우리는 전문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법률전문가, 경제전문가, 의학전문가 등등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 전문가들은 기존의 '권위'를 갖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상품을 제공하는 충실한 '상인'들이 되었고, 우리는 그들의 충실한 '고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과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있다. 늘 미소짓고 서로를 대한다.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한, 우리는 서로 얼굴 붉힐일도 없다. 복잡하지도 않다. 그냥 돈을 지불한다음 모든 권리를 위임해서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비참함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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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촛불 집회가 한창이다. 그런데 집회를 자꾸 나가면서, 과연 이것이 '시민'들의 '정치적'인 집회인지, 아니면 '시민고객(내지는 소비자)'들이 '뿔'나서 뛰쳐나온 것에 불과한지 확신을 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명 정치적 집회라고 생각했건만,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면서 과연 내가 처음에 생각한게 맞기는 한건지 의심하게 되었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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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울시가 '시민고객'을 내세운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지방 도시들이 자기 지역을 상품화하고 '고객'들을 유치하려고 노력했던 건 비교적 오래된 일이다. 특히 제주도가 두드러지는데, 뭐 다른 지역들이라고 크게 다를게 없다. 서울시에서는 군수 내지는 시장들이 양복을 입고 나와서 지역 특산품을 배경으로 깔고 광고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사회적인 것'이 점차 붕괴하고 새로운 논리가 그것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비스'제공자. 고객. 자본. 사용료. 투자와 이익. 미소. 원칙. 합리성.


덧)

본인 매스컴 탔음-_- (한겨레) 진짜 불쌍한 표정이다 ㅋㅋㅋㅋ (ㅠ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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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이사야 벌린(『낭만주의의 뿌리』)은, 낭만주의는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도 없고, 그 구체적 특징을 자세하게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쉽게 좌절되는 까다로운 사조이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 유산을 물려 받은 사조들 사이에 그 어떤 유사성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예컨대 파시즘과 실존주의), 두 가지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두 개의 원리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벌린은 한글판으로는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사상사/지성사적 탐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원리란 각각 "의지의 필연성"과 "사물의 구조의 부재"이다.

"의지의 필연성"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인간의 의지는 어디에나 있고 그 의지는 그 무엇도 억누를 수 없다. 물론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의 의지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특정 몇몇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통해서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빚을 수 있도록 창조할 수 있다'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구조의 부재"는 간단히 보면, '모든 사물의 구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부족한 인간들이 제멋대로 파악하려고 드는 순간 사물은 그 자체가 될 수 없게 되거나, 그 자리에 없게 되거나, 혹은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사물의 구조 자체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구속하는 힘이니 있어서도 안 된다.'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내 멋대로 정리;)

이 두 원리 사이의 결합, 그리고 이 두 원리들이 다른 어떤 사회적/국가적/문화적 상황과 맞물리느냐에 따라 수많은 변종들이 만들어졌다. 벌린이 보기에는 18~19세기의 수많은 사조들은 물론이거니와, 20세기 들어서 나타난 파시즘도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며,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이 두 원리들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인간의 의지는 필연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 보는 신비주의적 낙관주의. 다른 하나는 "인간은 의지도 있고 이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을 알 수도 없으므로, 우리들 운동의 결말은 예측할 수 없다. 그 결말은 어쩌면 우리들의 파멸일지도 모른다."고 보는 냉혹한 비관주의. (벌린에 따르면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해 왔다.)


왜 이런 포스팅을 하냐면, 며칠 전 하워드 진과 관련한 포스팅을 우연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랫만이었다. 4년 전에 그의 책 한 권을 가지고 세미나 한 이후로 그의 책을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왜냐면 성벽이 맞지를 않아서 -ㅠ- 도무지 참고 읽을 수가 없었다)... 어쨌건 그 포스팅에 링크된 유튜브 동영상을 보게 되었고(클릭), 왠지 선동되는 기운을 받아버렸다 -_-.... 쿠워워워 ^&%#$%#$#$^##@. 하워드 진의 말을 (나쁘게) 요약하자면 뭐 이렇다.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 살아주지 않아요! 세상은 물론 더럽죠!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든 좋게 바뀔 수 있어요! 우리의 의지로, 노력으로! ... 다소 신비주의적인 낙관주의랄까. 그의 낙관주의가 낭만주의의 유산에 기반해 있다는 점은, 그가 "불확실성에 대한 긍정"을 모토로 내세우기도 한다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의 낙관주의란 '근거'가 없다. 그래서 그는 "불확실성에 대한 긍정/낙관"을 내세운다. 예컨대 정부는 민중을 억누를 수 없고, 운동이 다 죽은 것 같아도 사실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가 함께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방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 정부, 의회, 더 나아가 세계 기구들은 우리를(people) 대표할 수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운동을 통해 그것들과 싸워야하고 그것들을 변혁시킬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갖가지 저항들, 그리고 절대 권력과 맞서 승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민중의 운동이 때때로 승리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쨌거나 더 나은 사회와 국가를, 더 나아가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헉 어쩐지 괜시리 힘이 된다 -_-...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다소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낙관주의가, 적어도 한국에(다른 사회권은 잘 모르니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두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한 의지와 노력, 운동의 지나친 강조는 사실 외부에 대한 노출에 너무나 취약한 것이어서, 역자의 말을 빌자면 어떻게 "지랄 발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말들은, 사실 현재의 제도랄까 습속들이랄까,에 대한 강력한 거부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거부란 사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부인(disavowal)'에 가까운 것이어서ㅡ주체에게 외상을 주는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ㅡ주체의 분열이나 심지어 '정신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는 흡사 전쟁을 상기시키는 '혁명'도 싫고, 여러 가지 '사회 운동'들의 "(푸코의 말을 빌자면) 전쟁 모형"에도 염증이 난다. 푸코에게 "전쟁 모형"이란, "한 사람이 반드시 상대방을 눌러버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가지는 "효능" 때문에, 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실상보다 "더 큰 정치적 무게"를 가진 양 착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쟁 모형"은 우리에 반대하는 '적'들이 있고, 그 적들을 파괴하고 '우리'가 승리하면 세상은 아름다워지리라는 생각들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상황이 변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전쟁 모형이 직접적으로 타자에 대한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워드 진의 말이 선동적으로 느껴지면서도 괜히 힘을 북돋아주는 이유도, 사실 명쾌하게 적을(정부/국가/의회 권력들) 설정하고 있으며 그 적을 무찌르는 것은 '우리들'이 모이는 것만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하면서도 낙관적인 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소위 '사회 운동의 대부'라는 사실이 끔찍하리만큼이나 싫다. 그의 책이 또 한 권 번역 출판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제목을 한국어로 하자면 '정부가 억압할 수 없는 힘' 정도? 아마도 내용은 '민중people'은 정부/국가가 아무리 억눌러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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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19일 오후 청와대는 대통령 발언의 진의가 왜곡됐다며 '중점적으로 관리를 하라는 뜻이지 꼭 50개 물가지수를 만들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발언은 실용적인 방향으로 토론을 해보라는 뜻이지 곧이 곧대로 교조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충고도 곁들였다. [이데일리 080319일자 신문]


이것 저것 검색하다가 우연히 읽게 된 기사에서 '충격적'인 글귀를 봐 버렸다 -_-;

지난 번, 정말 웃기지도 않은 에피소드가 되어 버린 '하루 통과 차량 220대 톨게이트' 사건도 그렇지만, 이 '50개 생필품' 발표도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근데 문제는 이게 단지 코미디가 아니라, 정말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전대선 기간에 "어허허허... 오해입니다"로 새로운 유행어를 낳았던 2MB 답달까.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은, 말 하나도 신경써서 해야만 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순식간에 정치적/외교적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으니까. 헌데 이제 그의 말 하나도 그 자체로 믿으면 안 된다. 뭥미? 믿어 말어?

게다가 여기에서 2MB에게는 정치적으로 빠져나갈 구멍, 혹은 정치 공세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완충막이 만들어지게 되는 셈이 되었다. 어쩌면 나중에 "한반도 대운하"도 일반 공무원들의 자의적이고 "교조적" 해석에 의한 프로젝트였다고 발뺌할 수도 있을게다. 허허허허. "영어 몰입 교육"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겠지. "7% 성장론"도 한번 "실용적인 방향으로" 경제 성장을 검토 해보겠다는 뜻이지, 진짜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대단하다. 진짜 님들 좀 짱인듯? 어쩜 이렇게 뻔뻔할까.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2MB 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물론 2MB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도대체 저 인간의 뇌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 즉 2MB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2MB의 말을 들어도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느라 밑에 있는 사람들은 이리 쿵 저리 쿵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어볼라치면 호통부터 치는 대통령이니 "진의"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없다(2MB 스스로도 자기가 하는 말이 뭔지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모든 발생 가능한 문제들의 책임은 그 밑에 있는 관료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도 2MB는 저 뒤에서 그냥 아무 말이나 툭 던질 것이고, 그 밑의 관료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그 말과 관련해서 정말 뭐라도 하려고 들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저런 변화는 많을 테지만, 정말 아무런 비전도 목적도 없는 산발적이고 혼란스러운 변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래저래 죽어 나가는 건 다 마찬가지. 한 명만 빼고.


그리고 밑에는 다소 무리하고 오버스러운 연결이지만, 참조할 만한 것 같아서.

스탈린주의는 엄격한 중앙 집권적 지휘 체제로서, 최고의 지도층이 지침을 하달하면, 상층부로부터 밑바닥까지 누구나 그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첫 번째 수수께끼가 있다.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정확하게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복종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1929~30년 국유화 운동에서 "국유화 방식에 대한 상세한 지침은 한 번도 하달되지 않았고, 지침을 요구한 지방 관리들은 견책을 당했다." 실제로 하달된 것은 일종의 암호ㅡ1929년 12월에 스탈린이 공산주의 아카데미에서 행한 연설ㅡ였다. 여기서 스탈린은 국유화를 위해 '부농(kulak) 계급을 끝장내라'고 지시했다. 하급 간부들은 그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열의를 다했고, 적에 대한 관용이나 경계 소홀의 죄목으로 고발당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하기도 했다. 이들이 스탈린의 명령을 지나치게 열심히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스탈린은 지방 관리들이 명확한 지시 사항을 하달받지 못한 상태에서 수행했던 과잉 충성의 결과들을 부인했다.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도서출판 길, 2006, pp.172-3.


자, 이 분석을 단순히 단어들 위주로 한 번 바꿔보자. 픽션을 쓴다는 마음으로. 픽션은 픽션일 뿐, 오해하지 말자~

2MB주의는 엄격한 중앙 집권적 지휘 체제로서, 대통령이 지침을 하달하면, 상층부로부터 밑바닥까지 누구나 그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첫 번째 수수께끼가 있다.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는 들었지만, 정확하게 말해주지도 않았고, 또 막상 해도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복종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실패로 끝난 2008~10년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에서 "대운하 건설 계획에 대한 상세한 지침은 한 번도 하달되지 않았고, 지침을 요구한 관료들은 문책을 받았다." 실제로 하달된 것은 일종의 암호ㅡ2007년 대선 기간에 2MB의 공약ㅡ이었다. 여기서 2MB는 경제 부흥과 실용주의를 위해 '한반도 대운하를 건설하자'고 언명했다. 그의 당선 이후 정부 관료들은 그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열의를 다했고, 실용적이지 못하다거나 창의적이지 못한 무능력한 인재라며 퇴출당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하기도 했다. 이들이 2MB의 명령을 지나치게 열심히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하지만 2MB는 관료들이 명확한 지시 사항을 하달받지 못한 상태에서 수행했던 과잉 노력의 결과들을 부인했다.

- 작자 미상, 『21세기 동아시아 잔혹사』, 돈데까나 출판사, 2106,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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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문학에서 성(性)을 다루는 건 정말 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마나 한 소리 ^^;)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어제의 한 에피소드 때문에. 메리 롤랜드슨(Mary Rowlandson)의 "The Sovereignty and Goodness of God"을 다루는 수업 중. 이 작품은, 17세기 미국의 퓨리턴 이주민 공동체와 아메리칸 원주민 사이의 전쟁 속에서의 체험담을 다루고 있다. 뉴 잉글랜드에서는 최초의 여성 작가가 남긴 작품. 퓨리턴 이데올로기가 아주 담뿍 녹아들어가 있는 텍스트다.

교수 : 왜 롤랜드슨이 자신의 포로 체험기(captivity narrative)를 시간적 순서가 아닌, 공간적 순서로 기술했는지 알겠나?

학생들 : ..... [자기는 답을 알고 있으니 맞춰보라는 식의 퀘스쳔은 던지나 마나 아닙니까요?]

교수 : 대개 일기는 날짜 순서를 따르잖아. 근데 이 작품은 왜 공간 순서로 1st remove, 2nd remove 이런 식으로 기술했냐는 말이지. 나는 이게 어떤 근본적인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서 오는 기술 방식의 차이는 아닐까 생각하는데. 누구 한 번 말해봐요. [헉!!!!!!!]

학생1 : 저는 그 차이는 그냥 위급한 포로 상황에서 시간적 감각이 없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수 : 그 말도 맞을 순 있는데, 누구 다른 생각하는 사람?

학생2 : 저는 원래 여성들은 공간적 변화에 민감하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남성들은 수렵 생활을 했고 여성들은 채집 생활을 했잖습니까? [이쯤에서 피식 웃어버렸다. 아, 난 진짜 농담인 줄 알고...] 아무래도 그러다보면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주변 공간 변화에 더 민감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학생3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교수 : 음음. 그렇죠. 사실 나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다르다는게 아니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는거죠. [이쯤에서 내 표정은 썩어 들어가고...] (짐짓 검열 작동) 아, 그렇다고 이게 무슨 성차별주의는 아니에요. 허허허. 성차별주의는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공평한 분배를 할 때 생기는거고. [오오... 교수님 잘 나가다가 왜 이러시나이까 ㅠㅠㅠ] 나는 어떤 유전자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헉!] 어떤 생활 습관이 우리의 유전자에 기록이 되어서 그게 내려오지 않느냐는 거지. 아까 수렵과 채집 생활을 얘기했는데, 그런게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남아서... @#$@ [중략] 어쨌건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텍스트도 이런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지 않냐는거지.


이 놀라울 정도로 안습인 에피소드는, 오늘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생각나는대로 각색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오늘 다 같이 읽어 갔어야 할 텍스트에 보면 인종주의적 '타자화'의 일반적인 전략을 요약해 놓은 부분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집단간 차이를 생산하고 강조한다는 것. 이것도 사실은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이런 설명 문구는 오늘 수업에서 한 저 에피소드랑 완전 충돌되잖아욤! 게다가 오늘 읽을 텍스트는 교수님이 직접 쓰신 글 아닙니까요 ㅠㅠ 헌데 남성과 여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심지어 유전적으로 다르다니요. 무슨 근거로? 대체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신화적인 태곳적 이야기를 들고와서 성차sexual difference를 정당화 하시다니요!

사실 문학에서 성(性)을 빼놓으면 서사의 진행이 턱- 막혀버릴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서사들은 성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물론 인종, 계급 등의 범주와 동시에 작동한다). 때문에 문학을 공부할 때 성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문학을 다룰 때 이렇게 탈역사적으로 성을 다루기 쉽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긴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뻘줌한 안드로메다 점프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성차는 많이들 알다시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태곳적에 남자는 수렵 생활을 하고 여자는 채집 생활을 했다... 따위(-_-)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란 말이다. 성차는 기본적으로 제도의 효과다. 특정한 제도 내에서 생산되는 그 무엇이라는 얘기.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 성차는 어떤 제도 내에서 반복/ 인용/ 수행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지, 어떤 '구조' 내에 깊숙히 내재하고 그 구조 자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그 무엇으로 볼 수 없다.

위 에피소드에서의 성차에 대한 이해는,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 +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무관심 혹은 불능에서 기인한다. 성차는 사회적인 층위에서 규범적으로normatively 개인들에게 영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차를 다룸에 있어 그 사회성, 그 사회적인 맥락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성과 그 작품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성과의 상상적 조우라는, 하나의 사건을 작동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문화적 맥락이 다른 지역의 작품을 읽을 경우엔, 그 차이란 더 크다면 크지 적다고 보기엔 힘들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의 그 작품을 읽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만나는 과거는 어디까지나 제 현재의 '투사'의 효과이다. 즉 과거 역시 문학 작품을 읽음과 동시에 '구성되고' '생산된다'(물론 이미 정해지고 유통되고 있는 역사 담론의 어떤 규칙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지만). 그런 점에서 '상상적'이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우리들의 맥락과 우리들이 속해 있는 제도의 틀을 벗어나서는 문학 작품을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에, 혹은 상징계에ㅡ두 개념이 같은 말은 아니다ㅡ등록register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을 통과하지 않는 정치학은,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다. 쓸모가 없다기 보다는 제 목적에 봉사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로 이런 맥락성을 잊어 버리고, 문학 작품을 쉽게 '탈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완전히 자기 맥락에서 전유해버리거나, 혹은 완전히 현재와는 다른(이해할 수 없는) 어떤 그 무엇으로 탈맥락화 시켜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갑자기 모든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떼어내고, 위의 에피소드처럼, 어떤 특정한 속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악은 악을 지각하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보면 재귀적인reflexive 규정이다. 자기를 참조하면서, 혹은 자기를 지시하면서, 담론과 규범norm을 생산해내는 게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본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해내고 유포하지만, 그 과정에서 되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드러내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문학에서 성을 다루면서 빠져버리기 쉬운 함정인 셈이다.

게다가 언어가 주는 수행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화행이론이 말해주는 거지만, 모든 말은 그 자체로 가치 중립적이고 '진술적인 것'은 없다. 모든 진술은 동시에 특정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순전히 정치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무슨 관념이 발화되고 유통되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 관념은, 무수한 행위자들 사이의 '인용' 행위라는 매개를 타면서, 동시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때문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순간 이미 어떤 정치가 발생하는 셈이다. 그 발화된 말로 인해 그 말을 보증해주고 그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른 맥락들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하니까. 그 맥락들이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말을 아예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그 수업은 성-근본주의, 혹은 성차별적인 정치로 화끈 달아 올랐던 셈이다..


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지만, 적어도 인종주의를 공부하는 수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성립할 수도 없는 말이지 않은가. 나와서도 안되는 말이고. 사실 이런 점은 문학 교수직을 맡고 있는 내가 친애하는(정말이다) 그 교수님이 더 잘 알고 있을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엉뚱한 '유전자'까지 나오니 나는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다규... 저절로 성차 근본주의에 토대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만 셈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학생 1,2,3를 보면서 나는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답'을 말했다고 간주된 2번 학생님.. (아 이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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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 Galtung 실망...

생각 2008/03/19 17:14

어제 학교에서 Johan Galtung의 강연이 있다고 해서, 괜찮은 수업 청강을 듣다 말고 뛰쳐 나가 들으러 갔다. 강연회의 한글 제목은 "글로벌 시대의 평화학, 그리고 한반도 통일전망", 영어 제목으로는 "Theories and Methods of Peace Research and Korean Unification in Global Era"였다.

예전을 돌이켜보면, 평화주의 관련 기획 글을 쓸 때 참고할 책들이 필요했는데,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은 역시 J. Galtung이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찾아보고 좀 갸우뚱했었다. 평화학이나 평화주의로 유명하다는 그의 책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흔히들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번역하고들 하는, negative peace와 positive peace라는 개념 뿐이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당시에 통독한 그의 책에 담긴 내용들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시니컬했었다. 내가 전혀 신뢰하지 않는 사유와 방법론 담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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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소극적 평화란, 간단히 말하자면 폭력의 예방에 관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잠재적인 폭력과 갈등을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다. (Galtung의 이야기는 아니다만) 이는 평화의 상태를 "secure"라고 정의하는 관점을 취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secure라는 말에 흔히 붙는 전치사는 against, 혹은 from이다. 즉 무엇으로부터, 혹은 무엇에 대항하여 자신 혹은 자기 집단의 안전을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남성 주체'의 안전 개념과도 유사한데, 이 '남성 주체'의 안전 개념이 사회적/국가적으로 외연이 확장되면 국방부의 안보, 안전 개념으로 연결된다. 흔히 군대에서 바라보는 평화라는 것은 결국 "free from care"이다. 즉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만약 근심이 이렇게 '외부'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1) 지키는 주체, 2) 보호 대상, 3) 적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지극히 젠더화되었다. 1)은 대개 남성-군인이 되었고, 2)는 대개 여성-민간인이 되었고, 3)은 대개 1)과 유사한 남성-군인이었다. '남성' 단위들간의 갈등 속에서 2)의 언어는 삭제되고 2)의 평화는 왜곡되고 드러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 메커니즘으로 마이너리티 그룹의 평화는 지배적인 역사 서술에서 삭제되었다..

그가 말하는 적극적 평화란, 역시 간단히 말하자면, 각 단위간 공정하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상호적일 뿐 아니라 동등한 이익과 조화를 추구한다. 때로 이러한 협력은, 갈등 단체간에 더 높은 단위로 통합을 이루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아 완전 도덕교과서-_-; (역시 Galtung의 이야기는 아니다만) 이는 평화의 상태를 "safe"라고 정의하는 관점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secure"가 외부의 '적'을 흔히 상정하는 것과 반대로, "safe"의 상태는, '그 자체'로 안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free from care"와 대조되는 의미에서, "without care"라고 할 수 있다. 즉 근심과 걱정 '없는' 상태. 이는 굳이 지키는 주체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으며, 그렇다면 보호 대상과 적을 만들어낼 필요 역시 마찬가지로 없다고 할 수 있다.

Galtung은 적극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소극적 평화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적극적 평화는 소극적 평화를 전제한다. 만약 잠재적인 갈등이 합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적극적 평화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될 것이다." 허나 이런 구분법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 사회과목 교사만 잘 만났어도 이런 얘기는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것을 단지 듣기에 그럴싸한 개념으로 확실히 구분한 것(이 두 상태가 과연 무토막 자르듯 자를 수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에 지나지 않는다. negative라는 말과는 반대로 positive라는 말이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사전적인 의미들ㅡ확신하는, 긍정적인, 명확한, 적극적인, 확실한, 실제적인, 실증적인, 완전한ㅡ을 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개념 구분법을 듣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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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강연회에서 실망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그에게 그나마 귀 기울여 들을만한 내용이라고 해봐야 이 개념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몇 가지 추가적으로 설명해준  개념들ㅡ예컨대 the unification of "nation"과 the unification of "state"의 구분이라든지. "nation"의 통일은 자유로운 교류와 열린 국경을 추구하는, 마치 EU와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며, "state"의 통일은 두개의 주권 국가가 합쳐지는 그야말로 흔히 생각하는 '통일'에 가까운 개념이다. 한국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들인 적화통일, 북진통일, 평화적인 합병 등등은 후자의 것이다ㅡ도 그다지 신선하고 충격적인 개념들은 못된다. 그것들은 인터넷 서핑만 좀 할 줄 안다면, 혹은 뉴스나 신문을 좀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을 법한 것들이다. 그가 북한과 남한의 역사와 관계, 그리고 6자(six parties)ㅡ남한,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ㅡ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도 역시 중/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과 신문/뉴스에 나오는 수준의 설명과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겨워서 혼났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그랬을거야. 또 왜 북한이 남한에 관심이 없고 미국한테만 관심이 있다는 걸 거듭 강조하는 건지. 누가 모릅니까 그걸...

그래도 끈질기게 결론까지 기다렸다. 그가 강연의 마지막에 말하는 것은 나름대로 Galtung의 희망이 담긴 것이었다. 즉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점. 이를 예전 핑퐁 외교에 비교하면서, 이게 곧 적극적 평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다가, 기어이 어이를 상실하고야 만 순간은, 그가 필하모닉, 즉 philharmonic이 phil + harmony 라면서, phil은 love니까 이는 곧 "love for harmony"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강연회에서 말장난이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다지만, 이런 말장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한참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핑퐁 외교는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Galtung이 "핑퐁 외교"를 마치 미국과 중국 사이, 그리고 크게 보면 소위 "동방"과 "서방"간의 평화를 영구적으로 수립한 것 같이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순박하신건지, 희망적이신건지,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으신건지. 혹시 유머였나? 내가 유머를 이해 못했나...? ;ㅅ;

어쨌든 나는 '강연'을 다닐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청중들이 잘 모르는 것이나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혹은 청중들이 갇혀 있는 어떤 사고의 틀 같은 것을 깨줄 수 있을 정도의 포스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다시금 확인 하러 강연에 굳이 시간내서 갈 필요는 '그다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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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가 이야기 하는 것들은 역시 "국가" 간의 평화에 한정되어 있었다. 국제정치학과 국제평화의 행위자가 "군사 단체", "국가", 혹은 "초국가 거대 기업"으로만 한정된 것인양 기술하는 것은 강력하게 도전받아야 하는 생각이다. 그가 말하는 소위 "적극적 평화"보다 훨씬 더 "적극적"일 수 있는 사회 안보, 인간 안보 등의 개념에 대해서, Galtung은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사는 걸까? 나에게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다. 이런 개념들에 대한 그의 연구물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그가 이에 대해 고민하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일단 차치해두자.

뭐. 사실 이 정도는 고작 1시간 동안만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 누구도 짧은 시간에 수십 년 동안 연구해온 자신의 성과물을 보여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짧은 시간에 다 보여달라는 요구 자체가 무리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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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그에게 실망했던 점은, 그가 최근 10여년간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표현이었다. 사실 서구 지식인에게 모든 지식을 알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연구하고 공부해오면서(그는 1930년 생이다) 이런 '교양'도 없다는 점에 실망했던 것 같다. 그는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북한의 정권을 넘겨 준 것을 일컬어, 그리고 김정일이 김일성의 라인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일컬어  "arch-Confucian"적이라고 말한다. 즉 북한은 결국 "큰 유교주의 국가" 정도라는 것이다. "헐."

Galtung은 유교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있는 걸까? 아, 물론 나도 유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2008년에 한국에서 쌩라이브로 듣게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은 그만큼 컸다. 진짜 손들고 질문하고 싶어졌을 만큼. 당신이 자랑스럽게 "arch-Confucian"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뜻하는 게 뭔지는 알고 그리 말하는 것입니까? 이는 마치 '서구'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발달 과정을 설명하면서, '동양'은 그와 대척되는 의미로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나 "동방의 전제정치"정도로 표상하는 행동과 다름 없다. 최근에 와서야 그런 수사와 재현이 심각하게 도전받게 되었지만(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서구의 정치경제학 텍스트에서는 그런 류의 표현이 사용되곤 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소위 좌파적 비평가, 맑시스트 비평가들의 글에서도, 그리고 들뢰즈의 텍스트에서도 그런 식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정말 심히 유감이다.

그런 '서구' 중심의 수사학과 재현 체계 속에서 '동양'은 끊임없이 화석화되고 타자화된다는 건 상식 아닌 상식이다. 수많은 국가와 문화들의 발달 과정과 역동적인 역사들이 단지 '동양' 그리고 '전제정치'라는 이름 하에 하나로 포섭되고 거대한 서구 자아(Western-Ego)의 확립을 위한 거울 정도의 역할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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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에서 한창 영어로 질문을 구상(부끄럽지만 영어로 말 한마디 하려면 머리 속에서 회화의 시나리오를 구성해야만 한다;)하고 있을 때 쯤, 다행히도(^^;) 옆에 앉아 계시던 한상진 선생님이 다른 질문을 하면서 중간에 "arch-Confucian"이라는 Galtung의 철없는 표현을 지적했다. "당신이 아까 arch-Confucian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으며,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는 유교에 대한 편견을 전제presuppose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유교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 시원했어. 흥이다, Galtung. (뒤에 이어졌던 한상진 선생님의 질문은 '사회학'이라는 분과 학문이 갖기 쉬운 보수성을ㅡ언제나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ㅡ은연 중에 드러내는 것 같아 좀 씁쓸하기는 했다. "사회 현상"에 대해 '대학'이란 엘리트 기관에서 '교수'라는 엘리트가 설명하면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런 면들. 어떤 사회학과 선생님은 "사회학은 진정한 엘리트의 학문이죠"라고 했다지?;)

네임 밸류 있는 사람인지라 강연료도 많이 줬을 것 같은데... 돈 아깝다... 등록금이나 깎아줘요...



덧1) 3월 31일에 울리히 벡, 4월 1일에는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이 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 사람들은 Galtung보다는 훨씬 좋겠지? ㅎㅎ

덧2) 물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말"은 때로는 극약일 수 있다. 글을 아무리 잘 쓰는 사람이라도 말을 하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할 수도 있는거니까. 뒤틀린 마음에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 (근데 아직 arch-Confucian은 용서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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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체성들 중에는, 단지 구분을 위한 구분에 지나지 않는 정체성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차이를 생성하는 것은, 물론 권력의 산물이다(국가의 주권성sovereignity이나 통치성govermentality라는 의미에서의 권력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정체성의 구분/차이/분류 체계는 당연히도 사회적 위계hierarchy를 만드는 기제이며, 차별을 보다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호명이자 정치적 전략이고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정체성이라는 말을, 한 개인이나 집단의 심리에 깊이 뿌리 박힌 사회적 기질로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그 개인이나 집단이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식과 행동 양식의 프레임을 짜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비혼, 즉 '독신'이라는 것도, 이러한 정체성의 한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이성 결혼 중심주의로 짜여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독신은 때로 한 개인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표가 되기도 한다. 특히 독신 정체성이 젠더 정체성, 나이 정체성과 결합하면 놀라우리만치 개인을 강하게 옭아매는 경우가 있다. 남성과 여성에게 독신이라는 정체성은 다르게 의미화되며, 나이라는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다. 30대 남성 비혼자와 30대 여성 비혼자에게 독신이라는 정체성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독신이 한 개인의 뚜렷한 정체성이 될 수 있음에 반해, 결혼한 사람들은 정체성이 되기엔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그들은 차라리 다른 정체성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유부남' '유부녀' 따위나 '애 아빠' '애 엄마' 따위의 호칭을 결혼한 사람들에게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호칭은 독신이라는 정체성에 비하면 지나치게 성별화 되어 있으며, <(최종적인 목표가 결혼인)연애시장>에서 '교환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별하는, 비교적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호칭를 꼬리표로 달고 다니는 개인들은, 자신의 교환가치가 <(최종적인 목표가 결혼인)연애시장>에서는 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들 호칭은 그 호칭이 부여된 사람들이 <연애시장>에서의 '사용/교환가치'를 여전히 갖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그것들은 한 개인의 뚜렷한 정체성이 되기엔 '턱 없이 모자란' 사회적 기호이다.

여기서 독신(미/비혼)이 기혼자들과 대조된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기혼자들이 위에서 말했듯 정체성으로 보기엔 좀 어려운 것과 반대로, 독신은 뚜렷한 정체성이 될 수 있다.


나는 아마도 독신으로 살 것 같다. 한국에서 20대 초/중반에게, 독신은 정체성이라고 보기엔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독신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독신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이나 즐거움 따위도 사실 잘 모르겠다. 파트너쉽을 인정하는 제도, 예컨대 동반자 등록제 등이 도입이 되면 다행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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