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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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2010/09/13 20:48
여기까지만 하고, 잠시 단행본 1권 발제가 끝날 때 까지 잠시 휴업 ㅠㅠ

Rey Chow, Ethics after Idealism―Theory-Culture-Ethnicity-Reading, Indiana Univ Press, 1998, pp.XIII~XVI

Introduction

대학원생이었던 이래로, 나는 비판이론에 열린 태도를 지닌 학과와 과정에 속해있었다. 이러한 사실의 이점이 있다면,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이론에 대한 저항”을 하면서 보는 눈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론”의 폭넓은 역사적 함의를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론”이라고 말할 때, 나는 지금도 대학원생들이 배우고 있는 플라톤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던 철학 그리고 해석학, 문예비평 및 해석의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나는 1960년대 이래로 영미권 학계를 급진적으로 만들어온 해석 방식을 대표하는, 일반적으로 “후기구조주의”나 “해체”라고 불리는 용어를 의미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러한 용어들에 특정한 뉘앙스나 정확한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지난 몇 십 년간의 지적작업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던 방식으로 축약해서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에서 이해되는 “이론”의 명백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지시성(referentiality)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화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1916)>에서 언어학적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를 상대화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의 전통을 따르면서 고정된 기원을 유보하고 불안정하게 만들어왔던 이러한 일반적인 추세는, 부분적으로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추세는 “실재”(언어, 텍스트, 이야기, 저자, 자아, 정체성, 커뮤니티 등 무엇으로 실재를 정의하든 상관없이)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내파했던 작업을 관통하며, 이 작업은 최근에도 여러 방식의 보편주의적 비평(젠더, 인종, 계급, 성적 선호 등등에 대한 탐구를 거쳐)으로부터 많은 반향을 얻었다. 지시성을 의미작용과 의미 사이의 투명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혹은 조금 더 잘 정의하자면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 끈질기게 [투명한] 반영성(reflectionism)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지시성 문제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문제시되거나 중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는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증적인 것(the positivistic)의 뼈아픈 고역으로 채워진 이론적 거부반응으로서, 지시성은 대신 “문화연구”라 불리는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최근 들어 지식인 간의 논쟁에서 팽배한 “문화”라는 개념의 두 가지 유형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념은 인류학에서 유래했는데, 일반적으로 “생활세계” 혹은 “삶의 방식”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문명화된” 삶의 세련된 성취의 총합으로서 더 엄밀하게 정의되는데, 이는 주로 문예이론, 예술이론, 클래식 음악 등 이른바 “고급문화”를 구성하는 것과 흔히 연결된다. “문화” 개념의 첫 번째 정의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이 관점은 문화를 공통의 신념, 태도,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며, 또 모든 집단의 인류에게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 정의는, 자주 지적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적이고 배타적이며, 그 자체로 특정한 계급이해관계의 헤게모니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각각 다른 종류의 문화정치학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를 옮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이들이 “문화”를 소유한다고 간주하여 잠재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개념은, 모든 문화가 엄격하게 “특수성”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문화적 관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거꾸로 문화가 “고급문화”라는 개념은 엘리트주의적일 수는 있지만,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세련된 성취”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하여 “문화”는 역설적으로 지역적이라기보다는 비교 문화적 현상으로서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개념은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문화연구의 추진력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추진력은 “문화”를 미완성의 과정이자 끝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사회관계의 별자리―절대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라고 보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몇몇 비평가들은 문화연구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이기에 진지한 지적 관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는 연구대상에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문화 자체의 미완성적인 특성과 정확하게 관련된다. 끝없이 열린 역사를 “지금”이라는 말보다 더 잘 상징하는 시간의 순간이 있는가? 또 끝없이 열린 평가에 대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넘겨진 것들보다 더 잘 드러내는 대상이 있는가? 문화의 미완성이라는 특성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이거나 존재론적인 의미작용의 “모호성”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성은 국제 노동 분업에 내재한 엄청난 불평등의 지속적인 효과 때문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재현과 정치적 권력에 대한 접근의 문제, 또 문화자본의 소유와 교환 그리고 강화의 문제에도 내재해 있다. 탈식민주의 시대와 탈냉전 시대는, 부분적으로 후기구조주의의 유산에서 유래했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탐구를 사회주의적 가치의 외관에 천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취해야 하는 정치적 행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도 소실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해왔다.

그렇다면 문화연구는 문화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이해하면서, 기호의 해체와 함께 출발한 문화상대주의의 단순한 연속이고 확장에 지나지 않을까? 문화연구와 비판이론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고급문화” 대 “생활세계”라는 문화의 공식화를 따른다면, 최근 몇 십 년간 학계의 실천은 두 개의 학풍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문학(인문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언어의 주체로 간주하는)”과 “인류학(사회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을 문화적 환경의 대상이자 생산물로 간주하는)”으로 부르자. 또 최근에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 사이에 유사한 분화가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러한 최근의 분화는 내가 뒤에 자세히 설명할 측면에서 볼 때, 문화에 대한 연구의 잠재적인 인종주의화를 의미한다.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자. “비판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를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연구가 “이론적 엄격함”을 결여했다는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강력한 이유는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문화”를 물화(reify)한다는 것이다. 즉 문화연구는 문화를 유기적인 총체로 간주하면서, 오랜 전통의 연속주의적(continuist) 사유에 속해있는 역사주의와 경험주의, 실증주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다른 두 “가치체계(regimes of value)”, 즉 이론적으로 늘 깨어있음을 상징하는 한 쪽 체계와 문화적 물화(reification)를 상징하는 다른 한 쪽 체계의 통약불가능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만약 이론을 뺀 문화에 대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면, 문화를 뺀 이론에 대한 표현은 가능할까? 나는 “문화”가 무엇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은 언제나 문화연구에 대한 “이론적” 거부라는 측면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 작업이 “너무 이론적”이라고 비판받아온 이론가들이 영리하게 반박했던 것을 빌자면, “이론”에 대해서 가장 잔인한 비평가라 할지라도 이미 언제나 특정한 이론적 위치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말하는 비평가들 역시도 특정한 문화적 위치에서, 또 특정한 문화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문화는 “비판연구”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특정한 형식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이는 영미권이나 불어, 독어권의 정전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나는 그러한 특정 형식이 무엇인지 곧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오로지 비판이론에만 헌신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흔히 문화적 추상화의 정반대로 간주된다. 이들에게 문화연구는 상스러운 것과 단순한 것들의 쓰레기장이자, 투명하고 이해가능하며 접근도 쉽게 가능한 현상들의 하수처리장이다. 게다가 문화연구의 대상이 자주 유색인종에 연관된다는 사실 때문에, 문화연구는 “우리”라기보다는 “그들”과 동일시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비판이론”이 사용될 때에도 연구주제가 비서구와 관련되거나 이론이 비서구의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면, 연구는 자동적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문화연구”의 자리로 “추락”하게 된다.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위계적 분화의 조건 위에 있기 때문에, “지시성”을 문제화했음에도 지시성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지시성”이 “문화”에 대한 연구로 추방당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의미적 투명성을 가졌으며 따라서 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현상이 내가 언급한 방식처럼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비판이론”으로 가는 노동력과 “문화이론”으로 가는 노동력을 구별하는 계급차이(class distinction)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은 사회계층의 전통적인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 프로우(John Frow)가 지식의 소유와 사용의 관점에서 기술했던 용법을 말하는 것이다. 프로우에 따르자면 지식인들은 곧 “지식 계급”이다. 지식의 습득을 통해, 특정한 사회화 과정이 시작된다. 예컨대 특정한 스타일로 쓰는 것이나 특정한 텍스트의 세부사항에 주목하는 것, 특정한 유형의 매력적인 문학적 비유를 찾는 것은 어떤 습관을 수양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또한 이는 전문적 공동체의 특정한 영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격증을 발급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식”계급에 대한 프로우의 개념에 더해 지식계급 자체에 계급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차이는 “비판이론”과 “문화연구”의 관계에서 논쟁을 유발해왔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문화연구 실천가들이 비판연구자들만큼이나 주의 깊게 읽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학계의 낮은 계급지층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이다. “문화자본”은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비판이론”에 유창한 상위계급의 감각과 실천, 습관의 문제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노동 종류의 분화 또 백인 문화와 비백인 문화 사이의 분화를 중첩시킬 때, “지식계급”에 내재한 계급차이의 공식화는 급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요컨대 비판이론과 문화계급의 분화는 지식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인종주의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종주의화는 귀족정치라는 결과와 “지식”의 생산과 배포의 관점에서 종속적인 계급을 낳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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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9/04/10 01:02

어젠가 그제에 포스팅 했던 대로 오바마의 당선에 부치는 버틀러의 글, "Uncritical Exuberance?"를 옮겨 둔다. 역시 인터넷에 원문은 많이 돌아다니니 원문 링크는 일단 패스^^; 이 글은 앞서 올린 지젝 글보다 훨씬 더 번역하기 어려웠다 헥헥; 전체적인 양은 지젝의 글이 한글 기준 2000자 정도가 많지만 버틀러의 글이 단어나 문법 선택이 역시 beyond me이기 때문에 -_-; 이번 뉴레프트리뷰에 올라온 마이크 데이비스의 글도 흥미로울 것 같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 번역은 포기했다. 어쨌거나 비록 퇴고도 못한채 출근을 위해 일단 잠을 자야하기에 초고를 올려두지만, 어쨌거나 무려 4시간이나 걸려서 사랑스러은 셸든이 나오는 빅뱅이론 봐도 될 시간에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지만) 독자를 고려한 번역을 끝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글에 엄청나게 지적 자극을 받으면서 그녀에 대한 바보같은 애정이 한층 깊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어졌다. 덧붙여 약간의 행복감마저 느끼며, 그렇기에 오역은,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들 하세요, 하는 무책임한 말을 던지며, 나는 이만 총총... 수정은 천천히...
 

무비판적인 열광(Uncritical Exuberance)?

by Judith Butler
translated by 비앙


이 순간, 이 흥분 상태에 무감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내 좌파 친구들은 나에게 “구원”같은 느낌을 받는다고도 말했고, “이 나라가 우리에게 돌아왔어!”라고도 말했고, “마침내 백악관에 동지가 생겼군!”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나 역시도 오바마의 승리가 확인된 날, 부시 정권이 마침내 끝장나버렸다는 생각이 엄청난 위안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이 흥분 상태에 빠져있었다. 생각이 깊고 진보적인 흑인인 오바마의 생각들은 역사의 토대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만들어 낸 새로운 지형들을 따라 대변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뀐 지형들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이 지형의 윤곽을 완전히 그려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이제부터 평가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구원이 아닐뿐더러 구원일 수도 없다. 만약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오바마가 제안했던 과장스런 동일시 상태나 “그는 우리 동지야”라는 우리들의 제안에 찬성해버린다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특히 오늘날의 정치적인 삶을 구성하는 적대 관계(antagonism)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국가적 연합”을 이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좋은 이유는 항상 있었으며, 정치 지도자를 향한 절대적이면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를 의심하는 생각을 키워야 하는 좋은 이유들 역시도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부분적으로는 지도자를 향한 흠집하나 없는 동일시 상태에 의존한다. 공화당은 정치 감정을 조직하기 위해 파시즘과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컨대 엘리자베스 돌(Elizabeth Dole)은 그녀의 청중들을 쳐다보며 “나는 당신들 각각을 사랑하고, 당신들 모두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바마의 당선에 대한 열의 넘치는 동일시의 정치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오바마에 대한 지지가 보수적인 대의에 대한 지지에 부합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자면 말이다. 이는 그가 “지지 정당을 바꾸는 투표(cross-over)”로 성공했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는 60%의 득표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서는 52%의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명백한 괴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오바마가 동성 결혼권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지한 바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더 나아가, 웬디 브라운이 주장했듯이 공화당원들은 최근에 있었던 선거들과는 달리 유권자들이 “도덕적인” 이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오바마에게 투표한 이유는 분명히 경제 때문인 것처럼 보이며, 그것은 종교 문제 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에 의해 완전히 구조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권자 다수가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던 공화당 소속 알래스카 주지사인 페일린(Palin)의 정치 회합이 결국 실패했다는 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총기 규제나 낙태권 그리고 게이의 권리 같은 “도덕”적인 이슈가 예전과는 달리 더 이상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이는 이 도덕적인 이슈들이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의 다른 칸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정치적 신념의 새로운 형상화(configuration)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상화 안에서는 명백히 모순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는 오바마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오바마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그들의 인종주의를 명백히 드러내면서 어쨌든 간에 오바마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고, 투표장에서는 백인 후보에게 투표하면서 여론조사나 출구조사에서는 비백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하는 브래들리 효과(Bradley-effect)의 반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 아마도 그가 경제에는 더 낫겠죠.” 이러한 유권자들은 그들의 조각난 신념을 해결하지 못하고 감춰둔 채 인종주의를 지키면서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다.

강력한 경제적 동기 외에 경험적으로 조금 더 분별하기 쉽지 않은 요소들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이 선거에서 있었던 탈동일시의 힘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즉 조지 부시가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했다는 점에 대한 불쾌감, 미국이 저지른 고문과 불법 구금에 대한 부끄러움, 엉뚱한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적 관점을 유포했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 과도한 탈규제 경제가 전 지구적 경제 위기를 낳았다는 점에 대한 경각심과 공포심 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오바마가 그의 인종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의 인종 덕분에 이 국가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대표자가 된 이유 아닐까? 그러한 대의제적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오바마는 흑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흑인이 아니기도 하였으며(누군가는 “충분히 흑인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너무 흑인스럽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오바마는 인종문제에 대해 양의적인 관점을 해소하지 못하는 유권자들 뿐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원치 않는 유권자들에게도 호소할 수 있었다. 대중들이 대중들 스스로의 양의성을 견뎌내고 감출 수 있도록 해주는 공적인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의 인물로 나타난다. 이는 당연히 이데올로기의 기능이다. 그러한 요소는 강렬한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인 힘을 잃는 것은 아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오바마 개인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관심들이 쏠렸다. 즉, 진중하고 신중한 그의 성격, 언제 어디서든 성미를 놓아 버리지 않는 능력, 상처를 주는 공격들과 야비한 정치적 수사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방식,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부끄러운 상황을 회복할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약속 말이다. 물론 그러한 약속은 매혹적이지만, 오바마를 선택하면 이 모든 불협화음을 일거에 해소하고 통합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믿음을 낳는다면 어쩔 것인가? 이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자신의 과오점을 보여주고 자발적으로 다른 세력과 타협하며, 심지어 소수자들을 팔아치울 때에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실망에 고통 받는 결과로 끝나 버릴만한 가능성은 또 어떤가? 사실 그는 분명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점들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이들은 이 순간 극단적으로 모호하지 않은(extremely un-ambivalence) 상황을 즐기기 위해 이러한 우려를 “미뤄두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더 잘 알게 되었을 때에도 무비판적으로 즐거워하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뭐니 뭐니 해도 오바마는 거의 좌파가 아니다. 보수주의 반대세력이 오바마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칭을 붙여줬다지만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의 행동들이 정당 정치와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해 제한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미 타협되었는가? 만약 우리들이 현재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기 위해 오바마를 지지할 것이라면, 우리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비판적인 정치학을 떨궈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덧없는 것일지에 대해서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바마가 무슬림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표를 던질 거예요”라고 공공연하게 자백한 인종주의자가 한 켠에 있다면, “오바마가 게이의 권리와 팔레스타인을 팔아 치웠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아. 하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의 구원이야”라고 말하는 좌파들도 분명히 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I know very well, but still)’라는 말은 부인(disavowal)의 고전적인 형식이다. 우리는 어떤 수단을 통해 이렇게 충돌하는 신념을 유지하고 감추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

오바마의 성공이 미국의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유럽의 사민주의를 닮은 경제 접근법이 도입되면서 경제 규제에 있어서 새로운 원리를 보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도 논리적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부시 행정부가 국가 간의 조화를 파괴해 온 치명적인 흐름을 뒤바꿔 놓을 다변적인 관계로 재편되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서도 더 자유주의적인 흐름이 있게 되리라는 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오바마가 전 국민 의료혜택 보장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동성 결혼권을 명백하게 지지하는데도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가 중동에서 정당한 정책을 펴리라고 희망할만한 이유가 많지도 않다. 물론 그가 컬럼비아대 중동문제연구소 소장으로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오던 라시드 칼리디를 알고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오바마의 당선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요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성공에 암묵적으로 강제된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하고만 관련이 있다. 이 사실은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격려할 것이며 또 압도할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미국의 자기 정의(self-definition)의 변화를 촉진할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이 투표자들 다수가 오바마에 의해 “대표되기”를 원한다는 의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즉, 우리는 많은 인종으로, 각양각색의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가(nation)다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오바마는 우리가 누구로 되어왔으며, 또 앞으로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지를 인지해야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대통령직의 대의제적 기능과 대중을 대표하는 것, 둘 사이의 불화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거의 메시아에 거는 것만큼 이 남자에게 쏟아진 기대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오바마의 재임기간이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실망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또 실망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 분(the man)은 한낱 인간이 될 것이며,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정치는 모호함이나 신중함 없는 찬양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사실 정치는 소란스러운 토론과 공중의 비평, 필수적인 적대의 장이지 메시아적 경험은 아니다. 오바마의 당선은 토론과 투쟁의 장이 이동했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지리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의 당선을 잠정적이나마 투쟁의 끝으로 생각한 우리들은 어리석었지만, 오바마의 당선은 투쟁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오바마가 시도할 많은 행동들과 시도하지 못할 일들에 의심할 여지없이 동의하고 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오바마가 그 자체로 “구원”이며 “구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때 우리는 그를 무자비하게 처벌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통합되었다는 느낌과 모호한 점 하나 없는 사랑의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실망을 거부하거나 억누를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따라 붙을 드라마틱한 실망감을 피해가려면 오바마는 빠르고 자알~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충돌”ㅡ그에게 반대하는 정치 의지를 불러일으킬 심각한 실망ㅡ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 재임기간의 첫 두 달 안에 중대한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아마도 관타나모 기지를 폐쇄하고 수용자들의 재판을 합법적인 재판정으로 이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이라크에서 병력을 철수할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셋째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그의 호전적인 언급을 철회하고, 그 지역에서 외교적이고 다변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단계를 밟아가는 데 실패한다면, 오바마에 대한 좌파들의 지지는 악화될 것이며, 우리는 자유주의적 주전론자들과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들 사이의 균열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또 만약 오바마가 시오니스트인 로렌스 서머스 같은 이들을 주요 내각에 지명하거나, 클린턴과 부시가 이미 실패한 경제 정책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우리의 메시아는 엉뚱한 예언자로 판명되어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불가능한 약속의 지점에서, 우리는 부시 정권이 저지른 정의(justice)의 끔찍한 폐기를 뒤집기 위해 확실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환멸(disillusionment)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비판적인 정치학을 되찾으려면 얼마만큼의 각성(dis-illusion)이 필요하며, 극적인 각성을 얼마나 해야 지난날의 정치적 견유주의(cynicism)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정치란 오바마가 보여줬던바 인간에 대한 것이나 불가능하고 아름답기만 한 약속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러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더 큰 정의의 여건을 만들어줄 확실한 정책 변화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_끝.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9/04/07 20:43

오바마의 당선에 대한 지젝의 글을 번역해 옮겨 둔다. 나름대로 의역과 직역의 중간 쯤으로 해봤다. 이희재씨의 <번역의 탄생>을 보고 번역 방식 자체를 조금씩 저울질해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습이랄까... 어쨌든 작년 11월 쯤에 올라온 글인걸로 아는데, 이제야 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찾아서 보고 있다. 원문은 인터넷에 워낙 많이 돌아다니므로 패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버틀러의 글도 있던데, 뒤늦게 발견하였기에 조만간 번역을 해둘까 하고^^ (번역을 해둬야 기억에도 오래 남고 나중에 들춰보기도 좋은 것 같다!) 언뜻 봤지만 버틀러의 글은 역시 너무나 버틀러스럽게도 해체적이고 일반적인 희망과 믿음에 의문을 강하게 제기한다. 나로서는 다소 의외지만 오바마의 승리에서 약간이나마 희망을 읽어내는 지젝의 글과는 묘하게 상충한달까. 지금으로서는 지젝의 글에서 힘을 얻고 있지만, 버틀러의 글, 독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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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을 이용하라 _슬라보예 지젝

_translated by 비앙



노엄 촘스키는 사람들에게 ‘환상 없이’ 오바마에게 투표하자고 요청했다. 나는 오바마의 승리가 낳은 진정한 결과에 대한 촘스키의 의심에 심히 공감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오바마의 승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부시’로 밝혀질 아주 작은 개선만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그는 기본적으로 부시와 같은 정책을 좀 더 매력적인 방식으로 추구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부시의 재임 시절에 겪은 재앙으로 손상을 입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효과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에는 무엇인가 심히 잘못된 점이 있다. 아주 중요한 차원이 빠져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단지 다수자를 위한 끊임없는 의회에서의 투쟁과 그 투쟁이 포함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계산과 조작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는 더 많은 무엇인가의 징후이다. 이것이 그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은 나의 완고한 좌파 미국인 친구가 오바마의 승리 소식을 들었을 때 울었던 이유이다. 우리들이 의심이 어찌했든 간에, 바로 그 순간에는 우리들 각각은 모두 자유로웠고,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에 참여하고 있었다.

<학부간의 논쟁(The Contest of Faculties)>에서 칸트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역사에서 진정한 진보는 존재하는가? (그는 윤리적인 질문을 의미했지, 단지 물질적인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보란 증명될 수 없지만, 진보가 가능하다는 점을 가리키는 징후는 식별해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바로 그러한 징후였다.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 일어났고,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자유의 평등을 주장했다. 칸트가 보기에 파리의 거리에서 벌어진 (자주 피가 흘렀던) 현실보다 더 중요한 점은, 유럽 전역의 공감적인 관찰자들의 눈에 보였던 프랑스 혁명의 열정이었다. 그리고 이는 서인도 제도의 공화국인 아이티(Haiti)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세계사적인 사건이 촉발되었다. 최초의 흑인 노예 반란 말이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프랑스 혁명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아이티에서 온 투쌩 루베르뛰르(Toussaint l'Ouverture)가 이끄는 대표단이 파리를 방문한 뒤, 인민 의회가 그들을 열광적으로 평등한 자들 중에 평등한 자로 환영했을 때 일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는 signum rememorativum, demonstrativum, prognosticum이라는 3중의 칸트적 의미에서 역사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각주:1] 오래된 과거를 가진 노예제에 대한 기억과 노예제의 폐지를 위한 투쟁이 울려 퍼지는 징후이자 오늘날의 변화를 증명하는 사건이며 미래의 성취를 향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에 대해 걱정하는 진보주의자들이 꽉 닫힌 문 뒤에서 보여주었던 회의주의("만약 공식석상에서는 부인되어온 인종주의가 투표소라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다시 등장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근본적인 냉소주의적 현실주의 정치가인 헨리 키신저에게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가 말한 예측의 대부분이 완전히 틀렸다는 점이다. 예컨대 1991년 반 고르바초프 군이 불시의 일격을 가했다는 소식이 서구에 전달되었을 때, 키신저는 즉각 그 새로운 정치체제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군사조직은 3일 뒤에 불명예스럽게 몰락해버렸다. 그 전형적인 냉소주의자는 아주 자신감있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돈과 권력과 섹스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원칙이나 가치에 대한 언명은 실상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말 뿐이고, 그 말들은 실상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죠..." 그러한 냉소주의자들은 환상의 힘을 무시하는 그들 스스로의 순진무구한 분별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오바마의 승리가 그러한 열정적인 반응들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모든 역경을 딛고 실제로 오바마가 승리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 오바마의 승리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같은 위대한 역사적인 균열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공산주의 정권의 썩어빠진 비효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공산주의 정권이 실제로 무너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키신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냉소적인 실용주의의 희생자였다. 최소한 투표 2주 전에는 오바마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었지만, 그의 승리는 여전히 놀라운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한 전투는 오바마의 승리 뒤인 지금 시작하고 있다. 그의 승리가 사실상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전투 말이다. 특히 9/11과 최근의 금융 대폭락이라는 더 불길한 사건의 맥락에서는 말이다. 역사는 처음엔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반복된다. 부시 대통령은 각각 9/11 이후와 금융 대폭락 이후에 똑같은 내용의 연설을 다른 형식으로 발표했다. 두 경우 모두 부시는 미국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이 있다는 점, 그리고 즉각적이고 확고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또한 부시는 개인들의 자유와 시장 자본주의를 보증하는 미국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잠시동안 그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유예시키자고 요청했다. 이러한 유사점은 어디에서 오는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행복한 90년대'의 시작이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에 따르면 자유자본주의가 원칙적으로 승리했었던 그 시대는, 일반적으로 9/11 이후에 끝났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두 번 죽었어야만 했다. 9/11 이후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 유토피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종말로 치닫고 있는 전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의 경제 유토피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금융 대폭락 이후 이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난잡한 불합리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에이즈, 기아, 물 부족, 지구 온난화와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이 아주 시급한 문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숙고하고 결정을 미룰 수 있는 시간들도 충분히 가졌다. 세계적인 리더들은 발리에 모여 기후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회합은 성공적이었다며 환영받았지만, 그 모임의 중요한 결과가 있다면 2년 뒤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이어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융 대폭락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무조건적으로 문제의 시급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돈도 순식간에 마련되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보호하고 지구 온난화로부터 지구를 지키며 에이즈 치료제를 찾고 굶주리는 아이들을 지키는 일은 어떻게 하고? 그 모든 일들은 잠시 기다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은행을 지켜라!'라는 말은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또 즉각적인 행동을 낳은 무조건적인 명령문이다. 공포는 절대적이었다. 초국가적이고 초당파적인 조직이 즉각 만들어졌고, 세계적인 리더들 사이에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지금은 이 재앙을 피해가야 한다는 이유로 잠시 동안 잊혀졌다. (말이 나온김에 말하자면, 꽤나 절찬을 받고 있는 '초당파성(bi-partisanship)'이라는 말은 민주적인 과정이 사실상 유예되었다는 뜻이다.) 숭고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진짜' 일을 해결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시장의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자본이 우리의 삶의 실재, 즉 우리의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보다도 더 절대적인 실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미국에서만 7000억 달러가 단지 은행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다는 점과 가난한 국가의 식량 부족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부유한 국가들이 220억 달러(실제로는 22억 달러만 쓸 수 있었다)를 투입하기로 했었다는 점을 비교해 보자. 식량 부족 위기에 대한 책임을 부패나 비효율성, 혹은 국가 개입주의에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빌 클린턴 마저도 곡물을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중대한 권리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일상적인 상품으로만 취급했다며 "나를 포함한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망쳐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클린턴은 자신이 한 개별적인 국가나 정부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연합 또한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그밖의 다른 국제 기구들이 추진했던 서구의 정책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은 농부에게 지급되는 정부 보조금을 삭감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가장 기름진 땅을 돈 벌이가 되는 수출 작물을 기르는데 사용했다. 그러한 '구조 조정'의 결과로 전지구적 경제로 지역 농업이 통합되었다. 작물은 수출되었고, 농부들은 땅을 빼앗기고 노동 착취 공장으로 끌려 들어갔으며, 가난한 국가들은 점점 더 수입 작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난한 국가들은 탈식민주의적인 종속 상태에 빠져들었고, 시장의 성쇠흥망에 취약하게 되었다. 즉 (부분적으로는 생물 연료(biofuels)에 사용되는 곡물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는) 곡물 가격의 상승은 곧 아이티로부터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국가의 기아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음식은 다른 것들과 달리 일상적인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식량 정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자급자족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은 채로 전 세계의 국가들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믿었다니 미친게 틀림없다"고 말했던 클린턴은 옳다. 허나 최소한 2가지가 덧붙여져야 한다. 먼저 서구의 선진국들은 그들의 농부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식량 자급자족을 유지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농장 보조금은 유럽 연합의 전체 재정의 거의 반이나 된다. 두 번째로 "다른 것들과 달리 일상적인 상품"이 아닌 것은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음식 외에도 모든 애국자들이 알고 있는 방어라든지, 물, 에너지, 환경, 문화, 교육, 건강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만약 그것들이 시장에 맡겨질 수 없다면, 누가 그것들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것인가? 바로 여기서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2006년 6월 5일 타임지의 커버 스토리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쟁'이었다. 그 기획은 지난 10년간 콩고에서 4백만명의 사람을 죽인 정치적인 폭력에 대해서 자세히 다뤘다. 허나 통상적인 인도주의 시위도 없었고, 단지 2개의 독자 편지가 반응의 전부였다. 타임지는 희생자를 잘못 골랐던 셈이다. 타임지는 무슬림 여성이나 티베트의 승려들을 선택했어야 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 아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팔레스타인 아이의 죽음이야말로 이름 없는 콩고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사보다 몇 배는 많은 분량으로 다뤄질 가치가 있다. 왜 그런가? 10월 30일에 AP통신은 콩고의 동부지역 수도인 고마(Goma)를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의 장군인 로렌 은쿤다(Laurent Nkunda)가 정부와 직접 대화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고속도로와 철도에 대한 보상으로 중국에게 수십억 달러 어치나 되는 풍부한 콩고 천연광물의 채광권을 제공하겠다는 조약을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신식민주의적인 문제는 잠시 제쳐 놓고 보더라도, 이 협상은 콩고 민주공화국이 통일된 국가로 기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할 것이었기에, 지역 군벌의 이해관계에는 치명적인 위협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2001년 UN은 콩고 천연자원의 불법 착취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콩고의 주요 갈등 원인이 콜탄(contan), 다이아몬드, 구리, 코발트, 금이라는 다섯 개의 주요 광물 채광권과 관리권, 그리고 무역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지역 군벌과 외국 군대의 콩고 천연자원 착취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르완다 군은 휴대폰과 노트북에 쓰이는 콜탄의 판매로 18개월 동안 최소 2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UN의 보고서는 콩고의 영원한 내전과 분열은 "모든 수혜자들에게는 '윈-윈'이었다. 이 거대한 비즈니스 벤처의 유일한 패배자는 콩고 사람들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 종족 전쟁이라는 탈을 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윤곽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극심한 착취 세력은 14년전 제노사이드의 희생자였던 르완다의 투치족들이다. 올해 초, 르완다 정부는 제노사이드에 대한 미테랑 행정부의 공모 관계를 보여주는 문서를 발행했다. 프랑스는 영어를 사용하는 투치족을 희생시키고 르완다 내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심지어 무기까지 제공하면서 후투족의 계획이 실행되도록 도왔다. 프랑스는 근거가 전혀 없다며 철저하게 그 고발을 기각했지만, 암만 좋게 봐도 그러한 행동이야 말로 근거가 전혀 없다. 아마도 미테랑을 그의 사후에라도 헤이그 국제 형사 재판소로 데려가는 일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의 보호자로 활동한다고 사칭했던 일류 서구 정치가를 최초로 재판에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선을 넘는 일이 될 것이다.

최근의 질서에 대한 위협과 맞서 싸우기 위해 최근 몇 주 동안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기 소르만(Guy Sorman)은 최근 아르헨티나에서의 인터뷰에서 "이 위기는 충분히 짧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소르만은 이 금융 대폭락을 다루기 위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즉, 상황을 다시 정상화하는 것 말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기술 혁신과 그 자체로 좋은 경제 정책의 힘을 받는 기업가 정신에 의해 추동되는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끊임없이 바꾸는 과정은 부유함을 낳는다. 비록 충분히 이해할만하게도 자신들의 직업이 잉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 과정에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재정상화 작업은 그 반대와도 공존한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 제시한 분명 불공평한 것이 틀림없는 해결책들을 대중이 불가피한 것인양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 공황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소르만은 시장이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가득차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재빨리 "과도한 정부 규제를 복원시키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행동주의 경제학을 사용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다. 결국 국가는 개인보다도 합리적이지 않게 될 것이며, 그러한 국가는 결국엔 거대한 파괴적인 결말로 치닫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 사이클과 정치적인 압력의 위기에 직면한 민주주의 정부와 지도층들의 주요한 임무는, 인류에게 훌륭히 봉사해 온 바로 그 체제를 방비하고 보호하는 것이지, 그 체제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구실로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이러한 훈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기 가장 어려운 것들 중 하나다. 이 세계에서 가능한 경제 체계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사실 불완전하다. 경제 과학에서 발견되지 않은 진실이 무엇이든, 자유 시장이야 말로 인간 본능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반영이며, 그 자체로 거의 완벽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더 명징한 용어로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심각하게 제기되는 비판에 대항하여 현존하는 체계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자유 시장을 인간 본능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2008년의 금융 대폭락이 외면상 불행해 보이는 행복이 된다거나,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 된다거나, 우리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일에 대한 분별력있는 암시가 된다거나 할 가망은 없는 것 같다. 이는 금융 대폭락이 어떻게 상징화되며, 어떤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나 이야기가 그 위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물의 일반적인 운영이 외상적일 정도로 중단되면, 그 장(field)은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경쟁에 활짝 열리게 된다. 1920년대 후반 독일에서 히틀러는 어떤 내러티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에 대한 이유와 그 위기를 탈출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경쟁에서 승리했다. 1940년 프랑스에서 마레샬 페텡은 2차 세계대전 초 프랑스의 패전 이유를 찾는 컨테스트에서 우승했다. 따라서, 오래된 맑스주의적 용어로 말하자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요 전략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에 대한 책임을 그 자체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탈(느슨한 규제, 큰 금융 조직의 부패 등)로 책임을 돌리는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면서 누군가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즉, 이 자본주의 체계 그 자체의 어떤 '약점'이 그러한 위기와 붕괴의 가능성을 열어 젖혔는가? 라는 질문 말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명심해야할 점은 이 위기의 기원이 '자비로운'일이었다는 점이다. 2001년 닷컴 거품이 무너진 뒤, 불경기를 막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촉진시키자는 결정이 당의 정책 노선을 휩쌓았다. 오늘날의 금융 대폭락은 7년전 피했던 불경기의 대가이다.

따라서 진짜 위험은 금융 대폭락에 대한 지배적인 내러티브가 우리를 꿈으로부터 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꿈꾸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우리는 걱정해야 한다. 금융 대폭락의 경제적 결과 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다시 활성화하고자 하는 명백한 유혹, 그리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주의에 대해서도 걱정하기 시작해야 한다. 오바마의 승리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오바마의 승리는 우리의 자유를 넓혀 놓았고, 그 결과로 우리들의 선택 폭도 넓혀 놓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오바마의 승리는 그의 승리가 없었더라면 어둠의 시대에 살았을 우리들에게 희망의 신호이며, 좌파든 우파든 현실주의적인 냉소주의자들에게 최후의 언어가 속해있지 않다는 신호이다. _끝

  1. 인터넷 검색을 조금 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원어로 옮겨 둔다. 혹시 아는 분들 있으면 좀 헬프 미ㅠ [본문으로]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9/30 12:52

예전부터 시작된 '계급'에 대한 고민들이 흐름을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휘날리다가 결국 생각을 놓고 있었는데, 본가로 돌아와 예전에 뽑아둔 논문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리타 펠스키의 글을 발견했다. 리타 펠스키의 논문을 한 5개 정도 뽑아두었는데, 예전에 세미나 때 읽었던 『근대성과 페미니즘』에서 느껴졌던 엄청난 매력 덕분인지 이 논문들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시간도 많은데다가 시간이 잘 가질 않아서 하나만 살짜쿵 번역해 봤음. 에이포로 빽빽하게 2장 반 정도 되는 양이라 그닥 많지도 않았다(근데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쿨럭).

어쨌건 정말이지 한국에서는 '중산층'이라는 말이 오용(catachresis)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중산층이라는 말이 정말이지 도통 뭔지 모르겠다. 심지어 2mb은 실소득 8800만원에 연수입 1억 2천 이상인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규정했다나(그리고 이게 '글로벌 스탠다드'라던가)? 물론 내가 '계급', '계층', '계급 의식'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지만ㅡ이건 순전히 내 탓만은 아니고, 학내에서 이런 단어들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내게 신뢰를 주지 않았기 때문... -_- 쿨럭ㅡ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특정한 단어들에 지나치게 많은 견해들과 때로는 오해들이 쌓여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물론 어떤 점에서 보면 이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 사이에서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징적 전투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일반적 용법'이라는 식으로 이 단어를 정의 내리는게 위험할 수밖에 없는(왜냐하면 그러한 정의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지적하듯 특정한 누군가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권력 관계 네트워크 내부에서 위협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의 강력한 담론적 무기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것이기도 하고... 에라 몰라.

어떤 블로그들에서 '중산층' (내지는 '중간 계급')에 누구를 포함할 것이고, 누가 이 집단에 포함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들의 논쟁은 분명 일면 타당하지만, 너무나 국지적이란 생각이다. 예컨대 '강남' 사람들이 모든 논의의 중심이 된다든지 하는. 그것 가지고 중산층 내지는 중간 계급 운운하는 것은 약간 오버란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대다수의 담론적 논의와 투쟁들은 오직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거기에 계급적 문제나 계층적 문제가 끼어들게 되면, 이상하게 늘 강남이 언급되고는 한다. 물론 강남은 아주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논의의 중심에 있기 쉽지만, 이러한 논쟁의 구도는 언제나 협소할 뿐 아니라, 이 구도 자체가 오히려 다른 수많은 갈등들을 감추는데 사용되는 덮개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적어도 강남 대 강북의 대립 구도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그닥 아는 바도 없고 담론의 구체적 지형들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므로 그냥 의심만 할 뿐이다. (무책임 흐흐)

어쨌든 "middle class"는 흔히 번역하듯 '중산층'으로 하지 않고 '중간 계급'으로 통일했음.


Rita Felski. "Why Academics Don't Study the Lower Middle Class."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Vol. 48). 2002.

우리는 계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미국에 있는 모든이들이 중간 계급이라는 공통된 믿음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큰 소득 불균형을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투쟁에 관한 맑시스트들의 모델은 여전히 어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얻고 있지만, 사람들(people)이 어떻게 계급을 경험하며 계급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계급 정체성과 그 [정체성들의] 관계들은 그리 깔끔하게 분리될 수 없다. 품위 있는 사람들(people of modest)라는 말은 상위 중간 계급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열망을 의미한다. 부유한 전문직들은 토스카나 농부들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고결함을 느낀다. 백만장자들은 월마트(Wal-Mart)에서 쇼핑한다. 매우 가난한 잉여 인간들(poverty-stricken adjuncts) 은 교육과 학식이 넘쳐난다. 모든 사람들은 갭(Gap)에서 쇼핑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계급에 대한 기호(sign)들이 어떻게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뒤섞여 있는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자 리처드 세네트(Richard Sennett)와 조너던 콥(Jonathan Cobb)이 한 때 "계급의 숨겨진 상처(hidden injuries of class)"라고 불렀던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나처럼 영국을 떠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계급에 대한 미국의 언어는 특히 판독해 내기가 어렵다.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 연구실에 들렀던 학생이 자신은 중간 계급적 배경에서 자랐다고 언급한적이 있다. 계급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자라난 나는 그 학생의 말을 그 학생의 부모가 상류 부르주아지의 구성원이며, 그 부모의 임금 노예들이 공장 바닥에서 구르는 동안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빈둥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실 그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중간 계급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품위있는 배경에서 왔다는 점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학생이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평범함을 강조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 학생이 자신의 특권을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계급에 대한 새로운 언어들을 배워야한다고 느꼈다. 이는 단지 "휘발유(petrol)"을 "가솔린(gas)"으로, "눈깔사탕(boiled sweet)"을 "하드 캔디(hard candy)"로 기억하는 식으로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문제가 아니다. 대신,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은 단어들이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간 계급"이라는 말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은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평균적인 노동자나 그 가족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또한 그 범주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빌 게이츠(Bill Gates)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중간 계급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어느 정도 성공해 왔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부유한 사람은 그들 자신이 특별한 특권을 갖지 못했다고 믿는다. "중간 계급"은 미국의 일상에서는 이상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성공과 겸손함을, 성취와 평범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무한히 융통적이다.

나는 한 저널리스트가 하위 중간 계급에 관한 나의 책ㅡ그가 사실은 읽지 않았다고 고백했던(그는 반만 맞았다. 나는 그러한 책을 쓴 적이 없다)ㅡ에 대해서 토론하고자 전화했을 때 그러한 융통성이 존재한다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왜 하위 중간 계급은 시장 경영자 뿐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무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가 같은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점차 알게 되었다. 인터뷰어에게 지금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하위 중간 계급"이라는 말을 "근로 빈곤층(워킹 푸어; working poor)"라는 의미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나는 허를 찔렸다. 나는 노동 계급과 하위 중간 계급의 차이점을 물었다. 그는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지만, "노동 계급"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했다.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w"로 시작하는 용어("w" term)에 대한 비슷한 저항을 볼 수 있었다. 젠더와 계급문제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으며 반본질주의적인 페미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 혼종성 등의 최신 이론에 대해서는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학생들이, 가장 기본적인 계급 범주를 만나면 버둥거리고 말을 더듬는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최근에 있었던 세미나에서 노동 계급의 삶을 기술하는 19세기의 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들에 대해서 토론했다. 나의 학생들은 "노동 계급"이라는 말을 거의 발음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술은 그 두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용어에 친숙하지 않은가? 아니면 그들은 그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가득차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때때로 그들은 "노동 계급"이라는 말을 "중간 계급"이라고 단순히 바꿔놓기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었던 시기의 맥락에서는 그러한 대체 용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면 그들이 적절한 용어를 궁리하다가 마침내 "하위 계급"이라는 말에 도달하게 되는 숨돌릴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귀에는 하위 계급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만 한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질겁하게 된다.

몇몇 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미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중간 계급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동시에, 나는 학계에서 계급 분석으로 지나가는 많은 것들이 너무 진부하며 상상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문학 연구와 문화 연구 분야에서는 계급의 문제로 돌아갈 필요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최근에 인종과 젠더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계급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취급이 되더라도 오직 이름 뿐이고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취급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경제적 자원, 부의 분배, 계급 특권, 그리고 계급적 박탈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재촉당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논쟁들에서, 계급이라는 말이 자주 노동 계급을 의미하며, 그 노동 계급만이 진지하게 고려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점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한 줌의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그 누구도 중간 계급 자체에 내재해 있는 완전히 다른 경험, 태도, 그리고 경제적 자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중간 계급은 아주 모호한 방식으로 엘리티즘, 사치, 그리고 특권을 대표하는 것으로 가정될 뿐이다. 만약 미국의 미디어들이 모든 사람들이 다 중간 계급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계급적 차이를 지워버리려고 한다면, 좌익(left-wing) 학계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지의 장화에서 짓밟히고 있는 영웅적인 노동자의 이미지를 상상함으로써 계급적 차이를 과장한다. 그러한 상상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계급 차별을 어떻게 살아나가며 느끼며 숨쉬고 있는지에 대한 많은 차이들과 뉘앙스들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들을 얻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최근에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는 많은 이유로 내게 흥미를 준 주제였다. 첫째로, 이 계급은 지식인들이 혐오하기를 좋아하는 계급이며, 또한 나쁜 취향(bad taste)로부터 히틀러의 등장에 이르는 모든 것들의 책임이 있다고 책망받는 계급이다. 보수주의자로부터는 상스럽고 몰락했다며 비웃음당하고 진보주의자로부터는 완고하고 반동적이라고 공격당하면서, 하위 중간 계급은 그 어떤 올바른 것도 행할 수 없다. 나는 근대적 사유의 역사에서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강하고 지속적인 적의가 있었다는 점을 곧 알아차렸다. 그러한 적의는 쁘띠 부르주아지들이 역사의 바퀴를 되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라고 불평했던 맑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엇(Eliot), 울프(Woolf), 그리고 포스터(Foster) 같은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듯 교외에 사는 판매원들과 여점원에 대해 능글능글하게 비웃는 참고문헌에 이르기까지, 내가 대학원에 있을 때 "쁘띠 부르주아지"라는 말이 궁극적인 혹평으로 늘 사용되었던 것에 이르기까지 온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나는 궁금했다. 왜 지식인들은 그렇게까지 하위 중간 계급을 혐오하는가?

두 번째 이유는, 고백하건대 나는 하위 중간 계급 출신이라는 점이다. 대학의 교수로서 상위 중간 계급적인 라이프스타일으로 바뀌는 동안 나는 때때로 나는 이상한 행성에 착륙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중간 계급 내부에 있는 문화, 태도, 그렇다, 그리고 돈의 막대한 차이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엘리트 대학에 있는 교수진들의 계급 문화는, 내가 학생 때 있었던ㅡ때때로 별나고 괴벽스럽거나 장학금을 받는 남학생(아아, 슬프게도, 더욱 드물게는 장학금을 받는 여학생)의 자리를 남겨 두었던ㅡ캠브리지보다도 훨씬 동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아마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계급 출신을 감추거나 과거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고르게 섞이는 데 훨씬 더 능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하위 중간 계급과 상위 중간 계급 사이의 긴장, 적의, 그리고 오해들에 대해서 심사숙고하는데 관심을 점점 더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하위 중간 계급이 딱 잘라지는 범주는 아니다. 이 계급은 무엇을 포함하는가? 상점의 주인? 은행원? 회사원? 비서진? 기술자들? 교사들? 서로 다른 사람들은 사로 다르게 경계를 그리곤 한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자주 숙련되거나 반숙련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으로 정의되는 하위 중간 계급이 미국의 일상에서 가장 큰 계급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중간 계급으로 정의한다/된다. 하지만 그들은 전문 관리직이라고 자주 불리는 의사, 변호사, 상위 관리자에 비하면 더 적은 돈과 교육과 지위를 갖는다.

1960년대에 내가 영국에서 자라날 때, 이웃사촌중에 누가 하위 중간 계급인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관습적인 예의, 노력, 청결함, 그리고 괴벽스럽거나 아방가르드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심의 분위기를 풍기는 품위 있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하위 중간 계급의 문화는 과거 그것이 사용되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더 결착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하위 중간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사이에 낀(in-between) 그 자신의 지위이다. 하위 중간 계급의 구성원들은 그들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하고 일하고 있듯, 그들 자신을 노동 계급 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하지만 사회적 사다리의 높은 곳에서 하위 중간 계급이 문화와 지적 교양이 부족하다며 깔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열망은 자주 비웃음 당하곤 한다.

나는 최근에 내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나의 논문에 대한 매력적인 응답들을 받았다. 분명히, 그 논문은 신경을 건드렸다. 하위 중간 계급적 배경 출신의 학자들은, 그들의 동료뿐 아니라 학생들까지 그들 자신들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썼다.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 그리고 비싼 레스토랑과 외국 여행에 대한 일상적인 직장에서의 대화에 낄 수 없는 자신들에 대한 부끄러움에 대해서 썼다. 그들은 그들의 어색함과 혼란에 대한 여러 감각들을 감명깊게 이야기했다. 모든 종류의 역기능에 대한 공적인 폭로를 과시하는 나라에서 최후의 금기는 자신이 충분한 돈을 갖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계급에 대한 공적 언어의 부족은, 특정한 삶과 경험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 것이다.

나는 하위 중간 계급은 결코 매력적인 정체성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인문학에서는 전복과 위반의 언어가 대유행이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경계로 밀려난 사람들과 줄을 맞추어 행진할 것을 원하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법외 추방자(outlaw)와 아웃 사이더, 그리고 억압당하는 사람들로부터 비춰지는 빛을 쬐고 싶어하는 것처럼. 하위 중간 계급은 너무 주류적이며 점잖고, 그들의 가치는 너무 세속적이다. 하위 중간 계급의 대부분은 체계를 전복하기보다는 물위로 간당간당하게 올라와 있는 그들의 머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걱정할 뿐이다. 하지만 하위 중간 계급은 평범한 개인들의 신념, 가치, 그리고 경험을 이해하는 데 아주 핵심적이다. 이 계급은 현대 미국에서 어떻게 계급이 생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9/05 17:03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78-183의 초벌 번역 (진행중)


미궁 속으로, 더 깊게

레비-스트로스가 쓴 "가족(The Family)"이라는 에세이에서 우리는 더 많은 개념들을 추출해 볼 수 있다. 그는 그 에세이에서 친족 분석에 관한 다른 고찰들을 소개한다. 그는『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성적 결합의 규칙들과 체계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한편 "가족"에서는 결혼 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들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노동의 성적 분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친족 체계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사람(people)"들이 요구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비록 모든 사회들이 성을 통해서 과업들을 분담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한 과업을 한 성이나 다른 성에게 부과하는 방법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농업은 어떤 집단에서는 여성의 일이지만 또 다른 집단에서는 남성의 일이다. 어떤 사회에서 여성들은 무거운 짐을 운반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운반한다. 심지어 여성 사냥꾼이나 여성 전사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으며, 또한 아이를 돌보는 일을 수행하는 남성들의 사례도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성에 의한 노동 분업에 대한 조사로부터, 노동 분업은 생물학적으로 특화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가 주장하기로, 이러한 목적은, 최소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을 포함하는 실행 가능한 최소한의 경제 단위를 만듦으로써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연구를 위해서 선택된 사회들을 통해 보건대 [노동의 성적 분업이] 끝없이 다양하다는 그 사실은, . . . 최소한 자연적 필요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노동의 성적 분업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요구된다는 사실, 그리고 완전히 엉뚱하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 . . 노동의 성적 분업은 성별 사이에 존재하는 호혜적인 의존적 상태를 [제도적으로] 설립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 1971:347-48)

따라서 성에 의한 노동의 분업은 "금기"로 보일 수 있다. 즉, 남성과 여성의 같음을 막는 금기, 성들을 상호적이지만 완전히 배타적인 두개의 범주로 나누는 금기, 성들 사이의 생물학적인 차이점들을 심화시킴으로써 마침내 젠더를 창조하는 금기 말이다. 또한 노동의 분업은 최소한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을 포함함으로써 이성애적 결혼을 강요하는 성적 결합을 넘어서는 다른 성적 결합들을 막는 금기일 수 있다.

"가족"은, 섹슈얼리티의 그 어떠한 측면도 지레 "자연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성적 결합에 대한 급진적인(근본적인) 질문들을 보여준다(1960년에 헤르츠(Hertz)는 왼손잡이에 대한 모욕에 대해 전적으로 문화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비슷한 논점을 구축했다). 오히려 섹스와 젠더의 명백한 형태들은 사회 체제의 강제적인 원칙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한 관점으로부터 『친족의 기본구조』또한 특정한 전제 조건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순전히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떤 결혼들을 금지하고 다른 결혼을 할 것을 명령하는 규칙들은, 결혼할 것을 명령하는 다른 규칙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결혼은 결혼할 개인들을 전제한다.이러한 종류의 연역적인 기획을 레비-스트로스가 했던 것보다 더 끌고 나가는 것, 그리고 그의 전체적인 친족 분석에 깔려 있는 논리적인 구조를 해석해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층위에서, 성의 사회적 조직은 젠더, 강제적 이성애, 그리고 여성 섹슈얼리티의 제약 위에 기초한다.

젠더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성의 분업이다. 또한 젠더는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친족 체계는 결혼에 기초한다. 그렇기에 친족 체계는 남성(male)과 여성(female)을 "남자(men)"와 "여자(women)"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그 남자와 여자는 불완전한 반쪽으로서, 다른 쪽과 결합했을 때에만 완결성을 찾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남과 밤, 땅과 하늘, 음과 양, 삶과 죽음만큼 다르지는 않다. 사실 자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남자와 여자는 굉장히 가까우며 다른 자연적인 존재들에 비했을 때도 그렇다. 예컨대 산과 캥거루와 코코 야자나무를 생각해보라. 남자와 여자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비교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서로 다르다는 생각은, 자연이 아닌 그 어딘가로부터 오는 생각이다. 게다가, 비록 남성과 여성들 사이에서 다양한 특질들이 평균적으로 차이 날 수 있다지만, 그러한 다양한 특질의 범위는 상당히 겹치는 측면들을 보여준다. 예컨대, 비록 평균적으로는 남자들이 여성들보다 키가 크지만, 언제나 어떤 여성들은 어떤 남성들보다 키가 클 수 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두개의 상호적이지만 배타적인 범주라는 생각은, 단지 존재하지도 않는 "자연적인" 대립항이라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로부터 비롯된다. 단지 자연적인 차이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배타적인 젠더 정체성은 자연적인 유사성에 대한 억압이다. 이는 심리적인 억압(repression)을 요구한다. 남성에게는 "여성적인" 특질의 지역적인(local) 버전이라면 그 무엇이든 억압되며, 여성에게 있어서는 "남성적인" 특질의 지역적인 정의(definition)라면 그 무엇이든 억압된다. 그 교환 관계에 있어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체계는, 개인의 성격들을 엄격한 구획(division)으로 강제로 밀어 넣으면서 모든 이들을 억압한다.

게다가 개인들이 생겨난 다음에야 결혼이 보장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성애가 제도화된 과정이라고 말할 뻔 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만약 생물학적이고 호르몬에 의한 강제적인 원칙들이 항간의 신화(popular mythology)가 가진 강제적인 원칙들 만큼이나 불가항력적이라면, 경제적인 상호의존성에 의해 이성애적 결합을 보증하는 것은 거의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근친상간 금기는 동성애에 대한 금기를 전제한다. 몇몇 이성애적 결합에 대한 금지는 -이성애적인 결합에 대한 금기를 취한다. 젠더는 한 성의 정체성인 것만은 아니다. 젠더는 다른 성을 직접 향하고 있는 성적 욕망을 포함한다. 노동의 성적 분업은 젠더의 양쪽 측면 모두에 포함되어 있다. 이 분업은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며, 그들에게 이성애를 창조해 준다. 따라서 인간 섹슈얼리티의 동성애의 구성요소에 대한 억압과, 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로서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은, 여성을 억압하는 규칙과 관계를 가진 동일한 체계의 산물이다.

사실 우리의 상황은, 우리가 일반적인 수준에서 특정한 성적 체계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갈 때에는 명백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친족 체계는 이성애를 단지 동성애에 손상을 주는 [섹슈얼리티]로 강제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아마도 이성애의 특정한 형식들이 요구될 것이다. 예컨대, 몇몇 결혼 체계들은 강제적인 교차-사촌 혼의 규칙을 갖고 있다. 그러한 체계에 있는 사람은 이성애적일 뿐 아니라 "교차-사촌-애(cross-cousin-sexual)"적이다. 만약 그 결혼의 체계가 더 나아가 모계적인 교차-사촌 혼을 특화시킨다면, 남자는 "어머니의-남동생의-딸-애(mother's-brother's-daughter-sexual)"적일 것이며 남자는 "아버지의-여동생의-아들-애(father's-sister's-son-sexual)"적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친족 체계의 복잡성은 아마도 특정하게 제도화된 동성애 형식(form)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뉴기니에 있는 많은 집단에서는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간에 너무나 불화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남자 아이가 자궁에서 보내는 기간은 부정된다. [또한] 남성의 삶의 활력은 정액 속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남자 아이는 정액을 얻거나 정액을 섭취함으로써 아이가 태아일 때 겪은 일들의 영향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남자 아이는 더 나이가 많은 남성 친척과 동성애적 관계를 맺는다(Kelly, 1974; Val Ball, 1966; Williams, 1936을 보라).

신부대가 남편과 아내의 지위를 결정하는 친족 체계에서는, 결혼과 젠더의 온전한 필수 전제조건이 무효가 될 수 있다. 아잔데(Azande)족들 사이에서 여자들은 나이든 남자에 의해 독점된다. 하지만 재산이 있는 젊은 남자는 그가 적당한 나이가 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남자 아이를 아내로 둔다. 그는 단지 신부대를 (창(槍)으로) 남자 아이에게 지불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 아이는 아내가 된다(Evans-Pritchard, 1970). 다호메이(Dahomey)족에서는, 여성들이 충분한 신부대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녀 자신을 남편으로 바꿀 수도 있다(Herskovitz, 1937).

모하브(Mohave)족의 제도화된 "교차의상제(transvesticism)"는 한 사람이 다른 성으로부터 또 다른 성으로 바꾸는 것을 허용한다. 해부학적으로 남자인 사람은 특별한 의식을 거치면 여자가 될 수 있으며, 해부학적으로 여자인 사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남자가 될 수 있다. 복장을 바꿔입은 사람(transvestite)은 그/녀의 해부학적 성과 같으면서 자신과 반대의 사회적 성을 가진 사람을 자신의 아내나 남편으로 취할 수 있다. 우리는 아마도 그 결혼에 동성애적이라고 딱지를 붙일테지만, 모하브족의 표준에서 봤을 때 사회적으로 반대의 성으로 정의된 결합은 이성애적인 결혼이다. 우리들의 사회에 비교해 봤을 때, 이러한 결합들은 엄청난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젠더의 양쪽 모두가 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는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지만, 각각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Devereaux, 1937; McMurtrie, 1914; Sonenschein, 1966을 보라).

위에서 제시한 모든 예시에서 볼 수 있듯, 젠더 분업의 규칙과 강제적인 이성애는 그들의 변형들 속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한 두 규칙은 남성과 여성의 행동과 성격에 대한 억압에 똑같이 적용된다. 친족 체계는 양 쪽 성의 섹슈얼리티의 조각들을 받아 적는다. 하지만 우리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여성들이 친족 체계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때에 남성에 적용되는 것에 비해서 여성들에게 더 많은 억압들이 적용된다는 점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약 여성이 교환된다면ㅡ우리가 이 용어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든ㅡ결혼에서 발생하는 부채(debt)는 여성의 살점(flesh)을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어떤 남자의 성적 파트너가 되어야 하며, 그 여자는 이전에 있었던 결혼에 대한 보상으로서[어떤 종족들에서는 여성의 교환이 여성의 교환을 공유하는 (친족) 집단 사이에서 상보적이고 순환적으로 이루어짐. 그 상호적인 보상의 순환이 깨어질 경우 두 집단의 유대는 파괴됨. -옮긴이] 그 남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여자아이가 유아 시절에 누군가와 결혼할 것으로 예정되었고, 만약 이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결혼에 참여할 것을 거부한다면, 이는 부채와 약속들(promises)의 흐름을 파괴할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되는 여성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잠을 같이 잘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문제는 [그 여성이 속한] 그 특정한 체계의 순조롭고 지속적인 작동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처리될 것이다. 이러한 체계의 관점에서 보건대, 보다 선호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능동적으로 욕망하고 타인의 반응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타인들의 욕망에 응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반성은, 젠더와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작동하는 체계속에서의 다양한 변이체들과 자유로운 실천들 속에 종속된다. 레레(Lele)족과 쿠마(Kuma)족은 여성의 교환에 관한 가장 명료한 민족지적 사례를 제공한다. 양 종족의 남자들은 그들의 여성 친척들의 성적인 운명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필요로 하는 체계에 영구히 관여하게 된다. 양 측 사회에서, 남자 친척이 가진 성적인 통제력을 회피하려는 여성들의 시도는 많은 경우 드라마(drama)의 일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경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의 저항은 엄격하게 제한된다(Douglas, 1963; Reay, 1959).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8/27 17:58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71-177의 초벌 번역^^;

"Vile and Precious Merchandise" -모니크 위티그

『친족의 기본구조』는 인간 사회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인상적인 진술이다. 이는 민족지적인 지구의 거의 1/3을 이루는 친족 체계에 관한 논문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이는 친족의 구조적인 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시도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의 마지막 챕터에 요약되어 있는) 그러한 원리들을 친족 자료에 적용하는 것은, 서구 인류학자들을 혼란시키고 신화 속에 빠뜨렸던 금기들과 결혼 규칙에 관한 인지가능한(intelligible) 논리들을 밝혀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서는 요약해낼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진 체스 게임을 구성해냈다. 하지만 그의 체스 말들 중 2개는, 특별히 여성과 관련이 깊다ㅡ"증여(gift)"와 근친상간 금기로, 이 둘의 접합(articulation)은 여성의 교환에 관한 그의 개념에 덧대어진다.

『친족의 기본구조』는 부분적으로 원시적인 사회 조직에 관한 유명한 이론인 모스(Mauss)의 『증여론(Essay on the Gift)』(Shalins, 1972의 챕터 4도 참조하라)에 대한 급진적인 주해(註解)이다. 모스는 원시 사회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들 중 하나의 중요성에 대해서 최초로 이론화한 사람이다. 즉 선물을 주고, 받고, 보답하는 행위의 정도(extent)가 사회적인 교제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음식, 주술, 의식, 말(word), 이름, 장신구, 도구, 그리고 힘 같은 모든 종류의 것들이 교환 속에서 순환한다.

당신은 아마도 당신이 축적해 온(pile up)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여동생(누나), 당신의 돼지, 당신의 얌(yam)을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축적해 온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 다른 사람들의 여동생(누나), 다른 사람들의 돼지, 다른 사람들의 얌은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Arapesh, 레비-스트로스, 1969:27에서 인용)

전형적인 선물 교환에서는, 당사자들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트로브리안드 섬(Trobriand Island)에서는, 각각의 가족들은 얌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유지하며, 각각의 가족들은 얌을 먹는다. 하지만 가족이 기른 얌과 가족들이 먹는 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수확 시기에 남성은 그가 재배한 얌을 그의 동생이 있는 가족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가족은 그의 아내의 오빠(남동생)에 의해서 먹을 것을 공급받는다(Malinowski, 1929). (재산의) 축적이나 거래(trade)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과정은 쓸모 없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러한 교환 논리는 다른 측면에서 탐구되어왔다. 모스는, 선물을 증여하는 것의 중요성은 선물 증여가 교환 파트너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연결(link)을 표현하거나 확인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선물 증여는 선물의 증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연대와 상호적인 도움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제공한다. 선물 교환은 또한 경쟁(competition, rivalry)의 관용적인 표현일 수 있다. 한 사람이 그가 보답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증여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많은 예시들이 있다. 뉴기니 고지대의 빅 맨(the Big Man) 시스템 같은 어떤 정치 제도는, 물질적인 수준에서 불공평한 거래에 기초해 있다. 야심을 가진 빅 맨은 그가 보답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들을 준다. 그는 정치적인 위세를 그 보답으로 받는다.

비록 모스와 레비-스트로스 모두가 선물 교환의 연대적인 측면을 강조했지만, 다른 이들은 선물증여에 의해 제공받는다는 것은 오직 사회적 상업의 편재(遍在)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강화해줄 뿐이라고 주장했다. 모스는 선물이란 사회적 담론의 줄거리(thread)이자, 특화된 정부 기관이 부재하는 사회가 단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증여란, 시민 사회내에서 국가에 의해 보장받는 평화를 성취할 수 있는 원시적인 방법이다. . . . 사회를 구성할 때, 증여란 문화의 해방이었다." (Sahlins, 1972:169, 175)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적 교환에 관한 이론에다가 결혼ㅡ여성이 가장 귀중한 선물인ㅡ이 선물 교환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근친상간 금기가 그러한 교환을 가족들과 집단 사이에 일어날 수 있도록 보증해주는 메커니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친상간 금기의 존재가 보편적이지만 그러한 금지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므로, 그들은 유전적으로 가까운 짝짓기의 발생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 대신, 근친상간 금기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 위에다가 족외혼과 동맹이라는 사회적인 목적을 부과한다. 특히 한 집단 내에서의 결합을 금지함으로써, 근친상간 금기는 집단들 사이에 결혼 교환을 강제하게 된다.

딸이나 여동생의 성적인 사용(use)에 대한 금지는, 그들이 다른 남성과의 결혼에 주어지도록 강제시킨다. 동시에, 이 금지는 이 딸이나 여동생에 대한 다른 남성의 권리를 확립시킨다. . . . 한 남성이 취하지 않은 여성은, 그러한 이유로, 바쳐진다(offered up). (레비-스트로스, 1969:51)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는 어머니나 여동생이나 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머니나 여동생이나 딸을 다른 이들에게 줘버릴 수 있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규칙이다. 이는 증여에 있어 최상의 규칙이다. . . (Ibid.:481)

여성 증여의 결과는 다른 선물 교환의 결과보다 훨씬 심원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들어지는 관계는 단지 보답일 뿐 아니라 친족관계이기 때문이다. 파트너를 교환하면 친인척이 되고, 그들의 후손은 피로써 관계를 맺게 된다. "두 사람은 우정으로 만날 수도 있고 선물을 교환할 수도 있다. 나중에 그들은 말다툼하고 싸울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씨족과의 결혼은 그들을 영원한 예절 속에 결합시킨다." (Best, 레비-스트로스, 1969:481에서 인용). 선물 교환에서는 흔히 있는 경우이지만, 결혼은 단지 평화를 이루기 위한 단순한 활동만은 아니다. 결혼은 아마도 꽤나 경쟁적일 것이며, (이 때문에) 서로 싸우는 수많은 친인척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판단에서 보자면 그 이유란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가 넓은 관계의 네트워크를 낳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친족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교환의 다른 모든 수준, 양, 그리고 방향(잔인한 것까지 포함해서)은 이러한 구조에 의해서 정해진다. 민족지적인 문학에 기록된 결혼 의례란 여성, 아이, 조개, 말(word), 가축의 이름, 물고기, 조상, 고래의 이빨, 돼지, 얌, 주문, 춤, 돗자리 등이 어떤 유대관계를 이루도록 해주면서 손과 손을 거쳐서 거래되는 부단하고 질서정연한 과정의 순간이다. 친족은 조직이며, 조직은 권력을 준다. 하지만 누가 조직되는가?

만일 거래되는 것이 여성이라면, 그들과 연결된 여성들을 주고 받는 건 남성들이며, 거래의 파트너라기보다는 관계를 이어주는 도랑이 되는 건 여성이다. (*) (그러나) 여성의 거래가 여성이 대상화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관점에서보면, 원시적인 세계의 대상들(objectives)은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자질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선물과 주는 사람 사이의 구분을 암시한다. 만약 여성이 선물이라면, 남성들은 파트너를 교환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상호간의 교환이 그 교환이 가진 사회적 결합의 의사(擬似)-신비적인 힘을 수여하는 것은 파트너이지 선물이 아니다. 이러한 체계의 관계들은, 여성들이 그들의 순환에서 오는 이득을 알아차릴 수 있는 처지에 두지 않는다. 그러한 관계가 남성이 여성을 교환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두고 있는 한, 사회적 조직이라는 그러한 교환의 결과물의 수익자는 남성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교환의 총체적인 관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 이루어진 두 집단 사이에서 설립된다. 그리고 여성은 교환 속에서 대상의 하나로서만 나타나지, 파트너의 하나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 . . 게다가 이는 여자 아이의 감정이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때조차도 진실로 남아 있다. 제안된 결합에 묵종(默從)하는 동안 그녀는 교환이 일어나도록 촉진하거나 허락한다. 그녀는 이러한 본성을 바꿀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 115) (**)

파트너로써 선물 교환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증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만약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양도될 수 있다면, 여성들은 그들을 증여해 버릴 수 있는 신세가 아니다.

한 젊은 Northern Melpa족의 남성이 심사숙고하며 말했다. "여성이란 무엇인고하니, '우리가 moka를 만들도록 해줘요, 아내와 돼지를 찾을 수 있게 해줘요, 우리의 딸을 남자에게 줄 수 있게 해줘요, 우리가 전쟁을 할 수 있게 해줘요, 우리가 적을 죽일 수 있게 해줘요'라고 줄곧 떨쳐 일어나서 말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 . . 그녀들은 단지 집에 머물고 있는 그저 하찮은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죠. 그렇지 않나요?" (Strathern, 1972:161)

실로 여성들이란! 이 젊은 남성이 말한 멜파족의 여성들은 그녀들아내이기에 아내를 갖지 못하며, 그렇기에 그녀들이 갖는 것은 남편들이지만, 이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멜파족의 여성들은 그녀들의 남성 친척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딸에 대한 권리ㅡ증여권(소유권은 아니지만)ㅡ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딸을 남성들에게 줄 수 없다.

"여성의 교환"은 유혹적이고 강력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생물학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인 시스템 안에 여성의 억압을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게다가, 이는 우리가 여성 억압의 궁극적인 장소를 상품의 거래라기 보다는 여성의 거래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제안한다. 여성의 거래에 대한 민족지학적이고 역사적인 예시들을 찾는 건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여성들은 결혼 안에서 증여되고, 전투 속에서 취해지며, 호의를 표하기 위해서 거래되며, 공물로 보내지고, 거래되며, 구입되고, 또 팔린다. 이는 "원시적인" 세계에 제한될 수 없다. 그러한 관습들은 더 "문명화된" 사회들 속에서 더 공언되고 상업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남성들도 거래된다. 하지만 그들은 노예로서, 민완가로서, 운동선수로서, 농노로서, 혹은 다른 파멸적인 사회적 지위로서 거래되지, 남성으로서 거래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노예로서, 농노로서, 성매매여성으로서 거래되지만, 단순히 여성으로서도 거래된다. 그리고 만약 인간의 역사의 대부분에서 남성들이 성적인 주체ㅡ교환하는 자ㅡ이고 여성들이 성적으로 반-대상(semi-object)ㅡ선물ㅡ이어 왔다면, 많은 관습들과 클리셰들 그리고 개인적인 특성들은 많은 부분 그럴듯하고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다른 것들 중에서도, 아버지가 신부를 줘버리는 진기한 관습이 그렇다).

"여성의 교환"은 또한 문제적인 개념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근친상간 금기와 그 금기가 적용된 결과가 문화의 기원을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세계사적인 패배가 문명의 기원과 함께 일어났으며 또한 이 패배가 문화의 선결조건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그의 분석이 그저 순수한 형태로 적용된다면, 여성주의자들의 계획은 반드시 남성을 근절하는 것보다도 훨씬 성가신 작업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계획은 문화를 내다버려야만 하며 지구의 표면 위에 완전히 새로운 현상으로 대체해내야만 한다. 하지만 여성의 거래가 없다면 문화도 없을 것이며, 그것 이상의 다른 이유가 없다면 문화는 당연히 창조적(inventive)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미심쩍인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의 교환"이 친족 체계의 모든 경험적인 증거들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 또한 논쟁적이다. 레레(Lele)족이나 루마(Luma)족 같은 몇몇 문화권에서는, 여성을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교환한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여성의 교환은 추측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샘플에서 제외된 그 사냥꾼들과 수집가들의 예에서 보자면, 이 개념의 효용성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유용하지만 여전히 어렵기만한 개념을 만들도록 했을까?

"여성의 교환"은 문화에 대한 정의도 아니며, 문화에 내재해 있는 혹은 문화 그 자체의 작동 원리도 아니다. 이 개념은 섹스와 젠더에 관한 사회적 관계들의 특정한 측면에 대한 예리하지만 응축되어 있는 하나의 이해이다. 친족 체계는 자연 세계의 한 부분 위에 사회적인 목적(end)을 부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친족은 용어의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생산"이다. 이는 물체(이 경우라면 사람)를 주관적인 목적으로(to) 변형시키고 형성시키거나 주관적인 의도에 의해(by) 변형시키고 형성시키는 것을 말한다("생산"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맑스, 1971a:80-99를 보라). 친족은 사람들 사이에 특정한 "재산" 형식을 포함하는 그 나름의 생산, 분배, 그리고 교환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 형식은 배타적이거나 사유재산권과 같지는 않으며,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종류의 권리들을 갖는다. 결혼 교환ㅡ결혼을 특징짓는 의례에서 순환하는 선물들과 물질들ㅡ은 정확히 누가 누구들 사이에서 어떤 권리를 갖는가를 결정하는 풍부한 자료의 원천이다. 그러한 교환들을 보면서 많은 경우에 여성들의 권리는 남성들의 권리에 비하면 훨씬 더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추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친족 체계는 단지 여성만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그 체계는 성적 접근, 가계의 지위, 혈통의 이름과 조상들, 권리와 사람들ㅡ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ㅡ을 사회적 관계의 구체적인 시스템안에서 교환한다. 그러한 관계는 언제나 남성들을 위한 특정한 권리,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특정한 권리를 포함한다. "여성의 교환"은, 친족 체계의 사회적 관계가 남성들이 그들의 여성 친족들에 대해 특정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 그리고 여성들은 그들의 남성 친족들에게 뿐 아니라 그녀들 스스로에게도 남성 친족들과 같은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 대해 성급하게 설명한 개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의 교환'이라는 개념은 여성이 그녀들 스스로에게도 완전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여성의 교환은 만약 그것이 문화적 필연성(necessity)으로서 비춰질 때나, 특정한 친족 체계에 접근하는 분석을 할 때 유일한 도구로서 사용된다면 난처하게 된다.

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여성의 거래를 친족의 기본적인 원리로서 본 점이 맞다손친다면, 여성의 종속은 섹스와 젠더가 조직되고 생산된 관계성의 생산물로써 관찰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인 억압은 파생적이며 이차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섹스와 젠더의 "경제학"이 있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체계(sexual system)의 정치 경제학이다. 우리는 섹슈얼리티의 특정한 관습이 생산되고 유지되는 정밀한 메커니즘을 측정하기 위해서 각각의 사회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거래"는, 성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들의 무기고를 건설하기 위한 최초의 한 걸음일 뿐이다.


(*) "뭐라구요? 당신은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다고요? 대체 뭐가 문제요? 매부(brother-in-law)를 원하지 않는거요? 만약 당신이 다른 남자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다른 남성이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한다면, 당신은 최소한 두명의 매부(자형;처형;시숙)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모르겠소? 그렇지 않고 당신이 만약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한다면 매부를 단 한명도 얻지 못하는데도? 당신은 누구랑 사냥을 갈것이며, 누구랑 정원을 돌볼 것이며, 누구를 방문할 것이란 말이오?" (Arapesh, 레비-스트로스, 1969:485에서 인용)

(**) 여성을 수단으로 하여 남성들 사이에 만들어진 유대에 기초한 사회에 대한 이러한 식의 분석은, 완전히 이해할만한 여성 운동의 분리주의자적인 응답을 만들어 낸다. 여성들 사이에서의 무매개적인(unmediated) 유대에 기초한 사회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분리주의는 이 사회 구조 속에서의 변화로 보일 수 있다. 분리주의는 또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권리"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거부로서,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에 대한 여성의 권리에 의한 선언으로서 보일 수 있다.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8/20 17:12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9-171


친족 관계(유인원으로부터 "인간"으로 가는 이행 속에서 섹슈얼리티에 의해 수행되는 부분에 대하여)

인류학자에게 있어서, 친족 체계는 생물학적인 친척들의 목록을 뜻하지 않는다. 친족 체계는 실제적인 유전적 관계와 자주 충돌하기도 하는 카테고리들과 지위들의 체계이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친족 지위가 생물학에 선행하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누어(Nuer)족의 "여성 결혼(woman marriage)"은 적절한 예시이다. 누어족은 부권의 지위를 어머니를 위해 가축떼를 신부대(bridewealth)로 받는 사람에게 소속된 것으로 정의한다. 그렇기에 여성은 그녀가 정자를 가진 수컷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결혼할 수 있으며 한 아내의 남편과 아이의 아빠가 될 수도 있다(Evans-Pritchard, 1951:107-9).

전(前) 국가 사회에서, 친족은 사회적인 의사소통행위, 그리고 조직화하는 경제적, 정치적, 의례적일 뿐 아니라 성적이기까지한 행위들의 특징이 된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한 사람의 의무, 책임감, 그리고 특권은 상호적인 친족관계나 그것의 결여라는 측면에서 정의된다.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 생산과 분배, 적개심과 연대, 의식(ritual)과 의례(ceremony) 등의 모든 것은 조직적인 친족관계의 체계 속에서 시작된다. 친족 관계의 편재(遍在)적이고 적응력있는 효력은 많은 인류학자로 하여금 언어의 발명과 함께 친족의 발명을 사람과 비슷한 반인류(semi-human hominoid)와 인류 사이의 불연속성을 결정적으로 표식하는 발전으로 간주하도록 하였다(Sahlins, 1960 Livingstone, 1969; Levi-Strauss, 1969).

친족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생각이 인류학에서 으뜸가는 원리라는 지위를 누리는 동안에, 친족관계의 내적 작동방식은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친족 체계는 한 문화로부터 다음 문화로 가는 동안 격렬하게 변화한다. 그들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bewildering) 모든 종류의 규칙들ㅡ어떤 사람이 결혼하고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을지를 지배하는ㅡ을 포함한다. 그 규칙들의 내적인 복잡성은 압도적이다. 친족 체계는 수십년 동안 인류학자들의 상상력을 근친상간 금기, 교차사촌혼(cross-cousin marriage), 혈통 관계(terms of decents)들, 기피해야할 관계나 강요된 친밀성, 씨족(clans)과 계층(sections), 이름과 관련한 금기 등ㅡ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항목들은 실제하는 친족체계의 묘사 속에서 발견된다ㅡ을 해명하려는 시도를 하도록 부추겼다. 19세기에 들어서, 몇몇의 사람들은 인간의 성적 체계(sexual system)의 역사와 본성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을 쓰려고 시도했다(Fee, 1973을 보시오). 그러한 작업 중의 하나는 루이스 헨리 모건(Lewis Henry Morgan)이 쓴 『고대 사회(Ancient Society)』이다. 이 책은 엥겔스에게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엥겔스의 이론은 친족관계의 결혼에 대한 모건의 설명 위에 기초한다.

친족관계 연구로부터 성 억압의 이론을 추출하는 엥겔스의 프로젝트를 취하면서, 우리는 19세기부터 이어진 원숙한 민족학의 이점을 취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독특하면서 아주 특별하게 적절한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들』이라는 책의 이점을 취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결혼을 이해하기 위한 19세기 프로젝트의 굵직한 20세기적 판본이다. 이는 친족이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에 부과된 문화적인 조직으로서 명백하게 상상된 것이라고 보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으로 충만해(permeated) 있다. 이 책은 추상적이고 젠더가 없는(gerderless) 인간 주체를 가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기술이다. 그와는 반대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 있는 인간 주체는 언제나 남성 아니면 여성이며, 따라서 두 성(sex)의 다른 사회적인 운명도 추적해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 관계의 핵심은 남성들 사이에서의 여성의 거래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성 억압에 대한 암시적인 이론을 구성한다. 적절하게도, 이 책은 루이스 헨리 모건의 기억에 헌납되었다.

2008/08/20 - [번역]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4-169
2008/02/16 - [번역]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4


불명확 한것들-

"clan" 과 "section"의 번역어.
"cross-cousin marriage", "terms of decents"의 번역어.
"ritual"과 "ceremony"의 차이점과 적절한 번역어. ritual은 보다 종교적인 건감?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8/20 14:08

번역놀이를 계속 해볼까하여.. 요즘엔 책도 잘 안읽히고 글도 잘 못쓰겠기 때문에, 이러한 '2차 창작'에 몰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집중이 안 될 때(=시간이 잘 안 갈때) 번역을 하면 그래도 집중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오역은 제 책임이겠으나, 오역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는 제가 책임질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건 취미 생활(= 타임킬링)일 뿐 이에용. ㅎㅎ

그나저나 게일 루빈의 글을 읽다보면 정말 매력적이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군데 군데 드러나는 유머와 위트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번역이 어렵다(버틀러나 스피박에 비하면 얌전하지만;). 내 실력을 탓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언니' 정말 멋져요!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4-169의 토막 번역


엥겔스Engels

『가족, 사적 소유, 그리고 국가의 기원(이하 『기원』)』에서, 엥겔스는 성의 억압을 이전의 사회 형태들로부터 자본주의가 물려받은 것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게다가, 엥겔스는 그의 사회 이론에 성sex과 섹슈얼리티를 통합한다. 『기원』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기원』에 실려 있는 증거의 상태는 인류학 내부의 보다 더 현대적인 발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옛스럽다는(기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이 반영하고 있는 다른 19세기의 가족과 결혼의 역사 학술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것의 한계들에 의해 무색해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통찰을 갖고 있다. 특히 "섹슈얼리티 관계"가 "생산 관계"로부터 구분될 수 있고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엥겔스의 훌륭한 통찰이다.

유물론적 관념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당면하고 있는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생존 수단들의 생산, 즉 의식주와 그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대와 특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제도 안에서 살아간다. 이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 즉 한편으로는 노동의 발전 단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엥겔스, 1972:71-72; 이탤릭은 루빈이)


이 단락은 중요한 인식을 암시한다. 즉 인류는 옷, 음식, 그리고 따뜻함을 위해 그 자신의 활동력을 자연 세계를 개척하는데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자연 세계의 요소들은 인간들의 소비 대상으로 변형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체계를 일컬어 "경제"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서조차 경제 활동을 통해 충족된 욕구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들을 없애지 못한다. 또한 인류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그 자신을 재생산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생식의 욕구는 식욕만큼이나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학의 자료들에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추론들 중 하나는, 그러한 욕구들은 식욕이 그러한 것처럼 그 어떤 "자연적인" 형태로는 거의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굶주림은 굶주림이다. 하지만 음식으로 간주된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조직화된 경제적 활동의 형태들을 갖는다. 섹스는 섹스이다. 하지만 섹스로 간주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또한 섹스/젠더 체계를 갖고 있다. 이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생식의 생물학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요소들이 인간들과 사회적 개입에 의해 고안되고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 전통이 얼마나 기괴한지와는 상관없이 전통적인 방식 속에서 만족되는 것이다. 3)

인간의 섹스, 젠더, 그리고 생식의 영역은, 수 천 년 동안 냉혹한 사회적 행동들에 종속되었고, 또 이 행동들에 의해 변화되어 왔다. 우리가 아는 바ㅡ젠더 정체성, 성적 욕망과 판타지, 유년시절에 대한 개념ㅡ로서의 섹스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생산물이다. 우리는 섹스의 생산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잠시 동안은 음식, 옷, 자동차, 그리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대해서는 잊을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맑시스트의 전통에서, 그리고 심지어 엥겔스의 책에서는, "물질 생활material life의 두번째 양상[무슨 말이지?; 이 말은 second aspect of material life의 번역인데 확실히 맑시즘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으니;]"의 개념은 배경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혹은 "물질 생활"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었다. 엥겔스의 제안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섬세한 고안을 따르지도, 종속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내가 섹스/젠더 체계라고 부르고 싶은 사회적 삶의 영역의 존재와 중요성을 보여준다.

섹스/젠더 체계를 부르기 위한 다른 이름들도 제안되어 왔다. 가장 일반적인 대안들은 "재생산 양식mode of reproduction"과 "가부장제patriarchy"이다. 용어를 가지고 애매한 말을 늘어 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 두가지 용어들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한 3가지 제안들은 "경제" 시스템과 "섹스" 시스템 사이의 구별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섹스 시스템은 나름의 자율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경제적 힘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예컨대 "재생산 양식"은 더 친숙한 "생산 양식"의 반대로써 제안되었다.  하지만 이 용어는 "경제"를 생산에, 그리고 섹스 체계를 "재생산"에 연결시킨다. 허나 "생산"과 "재생산"은 두 체계에서 모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두 체계의 풍부함을 축소시킨다. 모든 생산 양식은 (도구, 노동,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의 다양한 국면의 양상들 모두를 섹스 시스템으로 이관할 수는 없다. 기계의 대체는 경제 속에서 볼 수 있는 재생산의 한 예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섹스 체계를 "재생산"이라는 용어의 사회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관점 안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섹스/젠더 체계는 단순히 "생산 양식"의 재생산적 순간은 아니다. 젠더 정체성의 구성은 섹스 체계의 영역에서 생산되는 것의 한 예이다. 그리고 섹스/젠더 체계는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재생산인 "생식 관계"를 넘어서는 것을 포함한다.

"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성차별주의(sexism)을 지속시키는 힘(force)들을, 자본주의 같은 다른 사회적인 힘(force)들과 구분짓기 위해서 소개되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사용은 다른 차별들을 눈에 띄지 않게 한다. "자본주의"라는 용어의 쓸모가 서로 다른 체계들(systems)ㅡ그 체계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고 조직될 수 있는ㅡ을 구분하는데에 정확히 있는 것에 반해, "가부장제"의 사용은 자본주의를 모든 종류의 생산 양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어떠한 사회든지 "정치 경제학"이라는 체계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체계는 평등주의적일수도 있고 사회주의적일 수도 있다. 이는 계급 분화적일 수 있다. 이 경우에 억압받는 계급은 농노, 농부, 노예 등을 포함할 수 있다. 또한 억압받는 계급은 임금 노동자들을 포함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그 체계는 정확히 "자본주의적"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다. 이 용어의 힘은, 사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들이 있다는, 이 용어가 함축하는 바에 있다.

유사하게도, 어떠한 사회든 간에 섹스와 젠더, 그리고 아기들을 다루는 체계적인 방법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체계는 알려진 사례의 대부분이나 전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성적으로 평등할 수 있고, 혹은 "젠더 계급화"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ㅡ심지어 그 우울한 역사에도 불구하고ㅡ성적인(sexual)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인간의 능력 및 필요성, 그리고 성적인 세계가 조직되어온 경험적으로 억압적이었던 방법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가부장제는 그 두 가지의 의미를 같은 용어로 포섭해버린다. 반면 섹스/젠더 체계는 그 영역(domain)을 가리키고, 그 영역에서 억압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억압이 그것을 조직하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적이라고 적절하게 설명될 수는 없는 젠더 계급화된 체계들이 있다. 많은 뉴기니 사회들(엔가, 마링, 베나 베나, 훌리, 멜파, 쿠마, 가후쿠-가마, 포어, 마린드 아님 등등 질리도록 많다; Berndt, 1962; Langness, 1967; Rappaport, 1975; Read, 1952; Meggitt, 1970; Glasse, 1971; Strathern, 1972; Reay, 1959; Van Ball, 1966; Lindenbaum, 1973)은 사악할 정도로 여성에게 억압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무리의 남성들이 가진 권력은 그들이 가진 아버지나 가부장으로서의 역할에 기초해 있지 않다. 대신 비밀스러운 컬트 문화나, 남성들의 집이나, 전쟁이나, 교환 네트워크나, 의례적 지식이나, 다양한 성년식의 과정들에 포함되어 있는 집단적인 성인 남성성에 기초해 있다. 가부장제는 남성 지배의 특정한 형식이며, 그 용어의 사용은 구약성서에나 나올 것 같은 유목 유랑민들이나 그들을 닮은 무리에게 사용되는 것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가부장이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 가축떼와 식솔들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나이든 남성이었고, 그가 살았던 사회적 그룹에서 정의된대로 부권 제도(the institution of fatherhood)의 한 양상이었다.

우리가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든, 중요한 것은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제도, 그리고 섹스와 젠더 관습의 재생산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한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엥겔스가 여성의 종속을 생산 양식의 발전에 위치시키면서 포기했던 프로젝트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1) 이를 위해서 우리는 엥겔스의 결과 보다는 그의 방법을 모방할 수 있다. 엥겔스는 친족 체계 이론을 고찰하는 방법으로 "물질적 삶의 두번째 양상(second aspect of material life)"[* 이게 무슨 말이야 ㅠㅠ]을 분석하는 과제에 접근했다. 친족 체계는 많은 의미를 가지며, 또 많은 일들을 수행한다2). 하지만 친족 체계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섹슈얼리티의 구체적인 형식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그것을 재생산한다. 친족 체계는 섹스/젠더 체계의 관찰가능하고 경험적인 형식이다.



<미주>

1) 원주 - 엥겔스는 남성들은 부(wealth)를 가축떼의 형식, 그리고 이러한 부를 그들의 자손에게 전해주기를 원하면서 부계 상속에 이익이 되도록 "어머니 권리"를 추방(overthrow)하는 형식으로 취득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권리의 추방은 여성(female sex)의 세계사적인 패배였다. 남성은 집안에서도 명령을 할 수 있었다. 여성은 지위가 깎였고, 예속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남성들이 가진 정욕의 노예가 되었고, 단지 아이들의 생산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엥겔스, 1972:120-21; 강조는 원문)." 자주 지적되었듯이, 여성들은 모계 상속을 수행하는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권위를 필연적으로 갖지는 않는다.

2) 역주- 이 문장은 "Kinship systems are and do many things"의 번역입니다. 사전을 뒤적이며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이렇게 적당히 의역해버렸다는... ㅠ.ㅠ


다음에는 "친족"에 관한 이야기


연관된 글:
2008/02/16 - [번역]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4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8/01/10 10:51

예전에 올렸던 걸 한데 모았다 -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57-167의 번역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모두에게, 여성에 대한 문학은 여성의 억압과 사회적 종속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질문의 오랜 심사숙고의 결과물이다. 그 질문은 사소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주어진 답은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에 대한 희망이 현실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 억압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젠더 위계gender hierarchy가 없는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 변화되어야만 할 것들에 대한 어떠한 평가든 간에, 그 평가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본유적인 남성의 공격과 지배가 여성 억압의 근저에 있다면, 논리적으로 페미니스트 기획은 공격적인 성의 근절이나 그 공격적인 특성을 수정하기 위한 우생학적 기획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성차별주의sexism가 이익을 위한 자본주의의 냉혹한 욕구의 부산물이라면, 성차별주의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출현과 함께 시들어버리게 될 것이다. 만약 세계 역사 속에서 여성의 패배가 무장한 가부장제의 폭동의 손아귀에 일어난 것이라면, 이제 아디론댁Adirondacks 산맥에서 아마존Amazon 게릴라를 훈련시키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 논문의 시야는, 성적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유명한 몇몇 설명들ㅡThe Imperial Animal에 의해 예시된 유명한 진화에 관한 이론이나, 선사시대 모계사회에 대해 추정된 전복overthrow에 관한 것이나, 자본Capital 1권에서 사회적 종속의 현상 모두를 발췌해내려고 하는 시도까지ㅡ을 지지하는 비평의 바깥에 있다. 대신 나는 그러한 문제의 대안적인 설명에 대한 몇몇 요소들을 간략히 그려보고자 한다.

맑스는 한 때 이렇게 질문했다. “흑인Negro 노예란 무엇인가? 흑인 종족black race의 사람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흑인Negro은 흑인Negro이다. 면 방적기는 면을 방직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특정한 관계에서만 자본이 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이것이 자본이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money이 아닌 것이나 설탕이 설탕의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Marx, 1971b:28)” 이것은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가정적인 여성women이란 무엇인가? 한 종species의 여성female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woman은 여성woman이다. 그녀는 오직 특정한 관계에서만 하녀, 와이프wife, 동산動産, 바람둥이 토끼, 성매매 여성prostitute, 인간 딕터폰(속기용 구술 녹음기)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그녀가 남성의 조력자가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성female이 억압받는 여성women이 되는 그 관계는 무엇인가? 여성이 남성의 먹이가 되는 관계의 구조를 해명하기 시작할 수 있는 토대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중복되는 작업 안에 있다. 여성women 길들이기domestication는 그 두 사람의 작업에서 충분히 토론될 수 있다. 그 작업들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여성을 정제되지 않은raw 물질로 간주하고, 길들여진(가정家庭화된) 여성을 생산물로 만들어 버리는 구조적인 사회적 장치social apparatus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물론 프로이트도 레비-스트로스도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기술한 과정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분석과 기술은, 반드시 맑스가 맑스 앞에 있었던 고전적인 정치 경제학자들을 읽었던 방식처럼 읽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1970:11-69)를 참조하라).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는 리카르도와 스미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즉 그들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작품이 페미니스트의 눈에 제시되었을 때 생성할 수 있는 비평적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성, 성적 소수자, 개인에 존재하는 특정한 인간 성격의 특성들에 대한 억압의 장소가 되는, 그 사회적 삶의 부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적인 도구를 제공해 준다. 나는 더 정치精緻한 용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삶의 부분을 “섹스/젠더 시스템”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임시적인 정의로써, “섹스/젠더 시스템”이란 사회가 생물학적 성을 인간 행동의 산물로써 변형시키는 배치arrangement, 그리고 변형된 성의 그 욕구가 충족되는 그 배치의 일단을 일컫는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독특하면서 해석적인exegetical 읽기의 한 방법을 통해서, 섹스/젠더 시스템에 대한 풍부하게 발달된 정의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나는 “해석적exegetical”이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한다. 사전적으로 “해석exegesis”은 “특히 성서의 해석에 관한, 비판적인 설명이나 분석”으로 정의된다. 때때로,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읽기는 자유로이 해석적이며, 또한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만족으로부터 그것의 전제와 함축하는 바까지 이동한다. 나의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텍스트에 대한 독해는, 레비-스트로스로부터 강하게 영향 받아서 프로이트주의자들의 경전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을 갖고 있는 자크 라캉에 의해 제공된 렌즈를 통과했다. 1)

나는 후에 섹스/젠더 시스템의 정의에 관해서 더 섬세한 것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먼저 나는 성 억압을 완전히 표현하거나 개념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맑시즘의 실패를 검토함으로써 그러한 개념의 필요성을 논증하려고 한다. 이러한 실패는, 사회적 삶의 이론으로서의 맑시즘이, 성sex을 상대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사회적 세계에 대한 맑스의 지도map에서, 인류는 노동자, 농부, 혹은 자본가이다. 그들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반대로,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그려진 사회적 현실의 지도에서는, 사회 내에서의 성의 위치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경험 사이의 뿌리 깊은 차이에 대한 심원한 인식을 볼 수 있다.



맑스


비교-문화적,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여성의 억압을 해명하는 이론들 중에서 그 끊임없는 변화형들과 단조로운 유사성이라는 지점에서 봤을 때, 계급 억압에 관한 맑시스트들의 설명 능력 만 한 이론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여성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맑시스트의 분석을 적용하고 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맑시스트의 분석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지금껏 여성들은 자본주의를 위한 예비 노동력이며, 일반적으로 낮은 여성들의 임금은 자본가-고용주에게 특별한 잉여 가치를 제공하며, 여성들은 가족 소비의 관리자라는 그들의 역할 속에서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말미를 제공한다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문들은 훨씬 더 야심찬 노력을 기울여 왔다. 즉 가사노동과 노동 재생산 사이의의 상관관계를 지적함으로써, 자본주의 역학의 핵심 속에 여성의 억압을 위치시키는 것이다(Benston, 1969; Dalla Costa, 1972; Larguia and Dumoulin, 1972; Gerstenin, 1973; Secombe, 1974; Gardiner, 1974; Rowntree, M. & J., 1970을 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정의定意 그리고 자본에 의해서by capital 노동으로부터 오는 잉여 가치의 착취로 인해 자본이 생산되는 그 과정에 여성들을 공평하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맑스는 자본주의가 그 특유의 목적으로 인해 다른 어떠한 생산 방식과도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은 창조creation와 자본의 확장이다. 다른 생산 방식들이 그들의 목적을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쓸모 있는 물건들을 만드는데 두거나, 혹은 지배 귀족계급을 위한 잉여를 생산하는데 두거나, 혹은 신의 교화를 위한 충분한 희생을 보증하기 위해서 생산하는데 두었다거나 했던 것에 반해서, 자본주의는 자본을 생산한다. 자본주의는 생산production이 돈, 상품, 인간들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관계ㅡ소유의 형식 등등ㅡ의 세트이다. 그리고 자본은, 노동으로 교환되었을 때,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 속에서 무보수 노동의 착취나 잉여가치를 통해 그 자신을 재생산하고 증식하는 상품이나 돈의 양quantity이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의 결과는, 단지 생산(사용가치)이라거나 상품commodity인 것은 아니며, 적어도 교환가치를 가진 사용가치이다. 그것의 결과나 생산은, 자본을 위한 잉여가치의 창조이며, 결과적으로 돈이나 상품의 자본으로의 실질적인 변형이다. (Marx, 1969:399; 이탤릭은 원전에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 그럼으로써 자본이 되는 이 교환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으며, 자본가는 노동자 그/녀가 고용 시간동안 만들어낸 물건들을 갖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물건의 총 가치가 그/녀의 임금의 가치를 초과한다면, 자본주의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자본가는 임금의 비용을 되찾는 것에 더해서 잉여 가치의 증가분도 갖는다. 이것은 임금이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가 아니라, 그/녀를 계속 유지하는 것ㅡ매일매일 그/녀를 재생산 하는 것, 그리고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체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ㅡ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는 노동 계급이 전체로서 생산하는 것과 노동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재순환되는 그 전체 총계 사이의 차이이다.

노동력을 위한 교환에 주어진 자본은, 생존하는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뼈, 그리고 뇌를 재생산하는 소비에 의해 필수품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노동장workshop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발생하는, 생산 과정의 일부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노동자의 개인 소비는 마치 세탁기washing machine(*)가 그리하는 것처럼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요소factor를 형성한다. (Marx, 1972:572)

개인적인 상황에서, 노동력의 생산은 그 자신의 재생산이나 그의 생계maintenance를 포함한다. 그의 생계를 위해서, 그는 생계 수단으로 주어진 양quantity을 요구한다(**). 노동력은 노동하는 행동으로서만 그 자신이 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의 근육, 뇌, 신경 등의 일정한 양은 소모되며, 따라서 그것들은 회복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Ibid.:171)

따라서 노동력의 재생산과 그것의 생산 사이에서의 차이의 양은, 노동력을 재생산 할 것으로 취하는 그 측정determination에 달려있다. 맑스는 노동자의 건강, 일상, 그리고 힘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음식, 옷, 주택, 연료 등의 일용품의 양을 그 측정의 기초에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용품들은 그것들이 생계의 수단이 되기 이전에 먼저 소비되어야 하며, 그것들이 임금에 의해 구매되었을 때 곧바로 소비 가능한 형태가 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 이전에(***), 그것들에게 추가적인 노동이 행해져야 한다. 음식은 요리되어야 하며, 옷은 빨아져야 하며, 침대가 만들어지고, 나무는 쪼개져야 한다, 등등.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를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재생산과정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여성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필요조건sine qua non인 잉여가치 연쇄 속으로 여성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그 노동력 재생산을 통과한다고 관찰되어왔다. 2) 좀 더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가사 노동에는 임금이 지불되지 않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자본가에 의해 파악되는 잉여가치의 궁극적인 양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여성의 유용성usefulness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유용성이 여성의 억압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꽤나 다른 문제다.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분석이 여성과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 설명을 중단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여성들은 자본주의로 기술될 수 있는 상상력이 뻗치지 않은 사회에서도 억압당한다. 아마존 계곡과 뉴기니 고지(高地)의 여성들은, 남성적 위협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증명되었을 때, 집단 성폭행gang rape에 의해 그녀들의 장소에 자주 가두어진다. 한 Mundurucu의 남성은 "우리는 우리들의 여성을 바나나로 길들이지요"라고 말했다(Murphy, 1959:195). 민족지적인 기록은 남성 숭배, 비밀스러운 비법 전수들, 불가해한 남성 지식 등등을 통해 "그녀들의 공간"에 여성들을 가두어 놓는 효과를 갖는 관습들로 어지럽혀진다. 그리고 전-자본주의 봉건제의 유럽은 성 차별주의가 없는 사회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수 세기를 거쳐 자본주의보다 앞서 존재했던 여성과 남성이라는 개념을 계승하고 다시 연결시켰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에 관한 어떠한 분석도 다양한 시간대와 장소 속에서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전족, 정조대(貞操帶), 비잔틴의 믿을 수 없는 의상들, 물신화된 모욕들, 그리고 더 평범한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분석은 많은 경우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왜 많은지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노동의 재생산에 대한 맑스의 논의로 돌아가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노동자를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것은 부분적으로 인간 유기체의 생물학적 요구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노동자가
살고 있는 장소의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 또한 부분적으로 문화적 전통에 의해서 결정된다. 맑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맥주가, 프랑스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와인이 필요하다고 관찰했다.

그의 [노동자의] 소위 반드시 필요한 욕구와, 그리고 그들을 만족시킬 방법으로써의 수효와 양은 그 자체로 역사적 발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국가의 문명화 정도에 엄청난 양을 의존하게 되며, 더 자세히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그 조건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안락함의 정도와 습속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상품commodity의 경우와 비교하여 봤을 때, 이는 역사적이고 도덕적moral인 요소인 노동력 가치의 결정으로 융화된다. (Marx, 1972:171, 이탤릭은 필자가)

"아내"가 노동자의 필요성 위에서 존재한다는 것, 남성들이라기 보다는 여성들이 가사 노동을 한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가 여성들이 상속 받지도 앞장서지도 신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던 오랜 전통의 상속자라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정확히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자본주의를 남성성과 여성성 형성의 문화적 유산과 함께 나타낸다.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성sex, 섹슈얼리티, 그리고 성 억압의 전체 범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맑스가 한 주장의 간결함은, 단지 그것이 포괄하는 사회적 삶의 거대한 영역을 강조할 뿐이며, 그것을 검토되지 않은 채 내버려둘 따름이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를 분석의 과제로 만듦으로써만, 성 억압의 구조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

1) 맑시즘, 구조주의, 그리고 정신분석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어떤 인식론적인 충돌을 만들어 낸다. 특히, 구조주의는 인식론적 지도 전체에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귀찮은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나는 라캉과 레비-스트로스가 현대 프랑스 지식인 혁명에 있어 선도적인 살아있는 조상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무시하려고 한다(Foucault, 1970을 보라). 만약 프랑스에서라면, "실천을 의미화하는 변증법적 이론"의 길을 따라 구조주의자들의 미로의 중심으로부터 나의 주장을 시작하는 것과 거기로부터 나의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2) 여성과 가사노동에 관한 많은 논쟁이, 가사노동이 “생산적인” 노동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의 가운데에 있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가사 노동은 용어의 테크니컬한 관점에서 보면 보통은 “생산적인” 노동은 아니다(I. Gough, 1972; Marx, 1969:387-413). 하지만 이 차이는 이 주장의 요점과는 관련이 없다.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와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한다는 관점에서는 “생산적인” 노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잉여 가치와 자본 생산의 결정적인 요소다.

3) 우리들의 관점에서, 그것들[전통/관습들] 중 다소 기괴하게 보이는 것들은, 섹슈얼리티는 문화의 개입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Ford and Beach, 1972를 보라). 몇몇의 예들은 아마도 인류학자들이 즐기고 있는 이국exotica에서 선택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2/02 21:21

오 마이갓 -_-;; 거의 한달만에 재개하는구나; 11월에 난 대체 뭐 한거지?; 거침없는 날림 번역 ㅋㅋ

일단 좀 유의할 점은, 본문에서는 "sex system"과 "sexual system"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냥 이것들을 전부 "섹스 체계"라는 다소 어색한 말로 다 바꾸어버렸다. 아무리봐도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생식"이라는 표현은 procreation의 국역어로 썼다. "출산"이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출산이라는 의미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서...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4-167

translated by Namunnib


엥겔스Engels

『가족, 사적 소유, 그리고 국가의 기원(이하 『기원』)』에서, 엥겔스는 성의 억압을 이전의 사회 형태들로부터 자본주의가 물려받은 것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게다가, 엥겔스는 그의 사회 이론에 성sex과 섹슈얼리티를 통합한다. 『기원』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기원』에 실려 있는 증거의 상태는 인류학 내의 보다 더 현대적인 발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옛스럽다는(기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이 반영하고 있는 다른 19세기의 가족과 결혼의 역사 학술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것의 한계들에 의해 무색해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통찰을 갖고 있다. 특히 "섹슈얼리티 관계"가 "생산 관계"로부터 구분될 수 있고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엥겔스의 직관이다.


유물론적 관념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당면하고 있는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생존 수단들의 생산, 즉 의식주와 그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대와 특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제도 안에서 살아간다. 이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 즉 한편으로는 노동의 발전 단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엥겔스, 1972:71-72; 이탤릭은 루빈이)


이 단락은 중요한 인식을 암시한다. 즉 인류는 옷, 음식, 그리고 따뜻함을 위해 그 자신의 활동력을 자연 세계를 개척하는데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자연 세계의 요소들은 인간들의 소비 대상으로 변형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체계를 일컬어 "경제"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서조차 경제 활동을 통해 충족된 욕구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들을 없애지 못한다. 또한 인류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그 자신을 재생산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생식의 욕구는 식욕만큼이나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학의 자료들에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추론들 중 하나는, 그러한 욕구들은 식욕이 그러한 것처럼 그 어떤 "자연적인" 형태로는 거의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굶주림은 굶주림이다. 하지만 음식으로 간주된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조직화된 경제적 활동의 형태들을 갖는다. 섹스는 섹스이다. 하지만 섹스로 간주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 것이다. 모든 사회는 또한 섹스/젠더 체계를 갖고 있다. 이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생식의 생물학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요소들이 인간들과 사회적 개입에 의해 고안되고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 전통이 얼마나 기괴한지와는 상관없이 전통적인 방식 속에서 만족되는 것이다. * (각주)

인간의 섹스, 젠더, 그리고 생식의 영역은, 수 천 년 동안 냉혹한 사회적 행동들에 종속되었고, 또 이 행동들에 의해 변화되어 왔다. 우리가 아는 바ㅡ젠더 정체성, 성적 욕망과 판타지, 유년시절에 대한 개념ㅡ로서의 섹스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생산물이다. 우리는 섹스의 생산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잠시 동안은 음식, 옷, 자동차, 그리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대해서는 잊을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맑시스트의 전통에서, 그리고 심지어 엥겔스의 책에서는, "물질 생활material life의 두번째 양상[무슨 말이지?; 이 말은 second aspect of material life의 번역인데 확실히 맑시즘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으니;]"의 개념은 배경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혹은 "물질 생활"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었다. 엥겔스의 제안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섬세한 고안을 따르지도, 종속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내가 섹스/젠더 체계라고 부르고 싶은 사회적 삶의 영역의 존재와 중요성을 보여준다.

섹스/젠더 체계를 부르기 위한 다른 이름들도 제안되어 왔다. 가장 일반적인 대안들은 "재생산 양식mode of reproduction"과 "가부장제patriarchy"이다. 용어를 가지고 애매한 말을 늘어 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 두가지 용어들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한 3가지 제안들은 "경제" 시스템과 "섹스" 시스템 사이의 구별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섹스 시스템은 나름의 자율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경제적 힘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예컨대 "재생산 양식"은 더 친숙한 "생산 양식"의 반대로써 제안되었다.  하지만 이 용어는 "경제"를 생산에, 그리고 섹스 체계를 "재생산"에 연결시킨다. 허나 "생산"과 "재생산"은 두 체계에서 모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두 체계의 풍부함을 축소시킨다. 모든 생산 양식은 (도구, 노동,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의 다양한 국면의 양상들 모두를 섹스 시스템으로 이관할 수는 없다. 기계의 대체는 경제 속에서 볼 수 있는 재생산의 한 예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섹스 체계를 "재생산"이라는 용어의 사회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관점 안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섹스/젠더 체계는 단순히 "생산 양식"의 재생산적 순간은 아니다. 젠더 정체성의 구성은 섹스 체계의 영역에서 생산되는 것의 한 예이다. 그리고 섹스/젠더 체계는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재생산인 "생식 관계"를 넘어서는 것을 포함한다.

* 각주: 우리들의 관점에서, 그것들[전통/관습들] 중 다소 기괴하게 보이는 것들은, 섹슈얼리티는 문화의 개입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Ford and Beach, 1972를 보라). 몇몇의 예들은 아마도 인류학자들이 즐기고 있는 이국exotica에서 선택되었을 것이다.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2007/10/31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3-164
2007/12/02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4-167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31 14:19

맑스 편은 끝났고, 다음 편은 엥겔스!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3-164의 번역


여성들은 자본주의로 기술될 수 있는 상상력이 뻗치지 않은 사회에서도 억압당한다. 아마존 계곡과 뉴기니 고지(高地)의 여성들은, 남성적 위협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증명되었을 때, 집단 성폭행gang rape에 의해 그녀들의 장소에 자주 가두어진다. 한 Mundurucu의 남성은 "우리는 우리들의 여성을 바나나로 길들이지요"라고 말했다(Murphy, 1959:195). 민족지적인 기록은 남성 숭배, 비밀스러운 비법 전수들, 불가해한 남성 지식 등등을 통해 "그녀들의 공간"에 여성들을 가두어 놓는 효과를 갖는 관습들로 어지럽혀진다. 그리고 전-자본주의 봉건제의 유럽은 성 차별주의가 없는 사회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수 세기를 거쳐 자본주의보다 앞서 존재했던 여성과 남성이라는 개념을 계승하고 다시 연결시켰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에 관한 어떠한 분석도 다양한 시간대와 장소 속에서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전족, 정조대(貞操帶), 비잔틴의 믿을 수 없는 의상들, 물신화된 모욕들, 그리고 더 평범한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분석은 많은 경우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왜 많은지를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노동의 재생산에 대한 맑스의 논의로 돌아가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노동자를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것은 부분적으로 인간 유기체의 생물학적 요구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노동자가 살고 있는 장소의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 또한 부분적으로 문화적 전통에 의해서 결정된다. 맑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맥주가, 프랑스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와인이 필요하다고 관찰했다.

그의 [노동자의] 소위 반드시 필요한 욕구와, 그리고 그들을 만족시킬 방법으로써의 수효와 양은 그 자체로 역사적 발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국가의 문명화 정도에 엄청난 양을 의존하게 되며, 더 자세히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그 조건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자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배경의 안락함의 정도와 습속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상품commodity의 경우와 비교하여 봤을 때, 이는 역사적이고 도덕적moral인 요소인 노동력 가치의 결정으로 융화된다. (Marx, 1972:171, 이탤릭은 필자가)

"아내"가 노동자의 필요성 위에서 존재한다는 것, 남성들이라기 보다는 여성들이 가사 노동을 한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가 여성들이 상속 받지도 앞장서지도 신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던 오랜 전통의 상속자라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정확히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자본주의를 남성성과 여성성 형성의 문화적 유산과 함께 나타낸다.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는 성sex, 섹슈얼리티, 그리고 성 억압의 전체 범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맑스가 한 주장의 간결함은, 단지 그것이 포괄하는 사회적 삶의 거대한 영역을 강조할 뿐이며, 그것을 검토되지 않은 채 내버려둘 따름이다. 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를 분석의 과제로 만듦으로써만, 성 억압의 구조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2007/10/31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3-164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30 14:03

이 부분은 좀 뻔해서 재미가 없었다.. 다음 부분은 엥겔스인데, 그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책세상 문고판으로 구해놓긴 했다. 허지만 일부 번역이라서..) 좀 기대가 된다만.. 맑스 부분 번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60-163의 번역

맑스

비교-문화적,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여성의 억압을 해명하는 이론들 중에서 그 끊임없는 변화형들과 단조로운 유사성이라는 지점에서 봤을 때, 계급 억압에 관한 맑시스트들의 설명 능력 만 한 이론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여성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맑시스트의 분석을 적용하고 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맑시스트의 분석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지금껏 여성들은 자본주의를 위한 예비 노동력이며, 일반적으로 낮은 여성들의 임금은 자본가-고용주에게 특별한 잉여 가치를 제공하며, 여성들은 가족 소비의 관리자라는 그들의 역할 속에서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말미를 제공한다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문들은 훨씬 더 야심찬 노력을 기울여 왔다. 즉 가사노동과 노동 재생산 사이의의 상관관계를 지적함으로써, 자본주의 역학의 핵심 속에 여성의 억압을 위치시키는 것이다(Benston, 1969; Dalla Costa, 1972; Larguia and Dumoulin, 1972; Gerstenin, 1973; Secombe, 1974; Gardiner, 1974; Rowntree, M. & J., 1970을 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정의定意 그리고 자본에 의해서by capital 노동으로부터 오는 잉여 가치의 착취로 인해 자본이 생산되는 그 과정에 여성들을 공평하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맑스는 자본주의가 그 특유의 목적으로 인해 다른 어떠한 생산 방식과도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은 창조creation와 자본의 확장이다. 다른 생산 방식들이 그들의 목적을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쓸모 있는 물건들을 만드는데 두거나, 혹은 지배 귀족계급을 위한 잉여를 생산하는데 두거나, 혹은 신의 교화를 위한 충분한 희생을 보증하기 위해서 생산하는데 두었다거나 했던 것에 반해서, 자본주의는 자본을 생산한다. 자본주의는 생산production이 돈, 상품, 인간들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관계ㅡ소유의 형식 등등ㅡ의 세트이다. 그리고 자본은, 노동으로 교환되었을 때,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 속에서 무보수 노동의 착취나 잉여가치를 통해 그 자신을 재생산하고 증식하는 상품이나 돈의 양quantity이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의 결과는, 단지 생산(사용가치)이라거나 상품commodity인 것은 아니며, 적어도 교환가치를 가진 사용가치이다. 그것의 결과나 생산은, 자본을 위한 잉여가치의 창조이며, 결과적으로 돈이나 상품의 자본으로의 실질적인 변형이다. (Marx, 1969:399; 이탤릭은 원전에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 그럼으로써 자본이 되는 이 교환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으며, 자본가는 노동자 그/녀가 고용 시간동안 만들어낸 물건들을 갖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물건의 총 가치가 그/녀의 임금의 가치를 초과한다면, 자본주의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자본가는 임금의 비용을 되찾는 것에 더해서 잉여 가치의 증가분도 갖는다. 이것은 임금이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가 아니라, 그/녀를 계속 유지하는 것ㅡ매일매일 그/녀를 재생산 하는 것, 그리고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체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ㅡ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는 노동 계급이 전체로서 생산하는 것과 노동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재순환되는 그 전체 총계 사이의 차이이다.

노동력을 위한 교환에 주어진 자본은, 생존하는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뼈, 그리고 뇌를 재생산하는 소비에 의해 필수품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노동장workshop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발생하는, 생산 과정의 일부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노동자의 개인 소비는 마치 세탁기washing machine(*)가 그리하는 것처럼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요소factor를 형성한다. (Marx, 1972:572)

개인적인 상황에서, 노동력의 생산은 그 자신의 재생산이나 그의 생계maintenance를 포함한다. 그의 생계를 위해서, 그는 생계 수단으로 주어진 양quantity을 요구한다(**). 노동력은 노동하는 행동으로서만 그 자신이 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의 근육, 뇌, 신경 등의 일정한 양은 소모되며, 따라서 그것들은 회복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Ibid.:171)

따라서 노동력의 재생산과 그것의 생산 사이에서의 차이의 양은, 노동력을 재생산 할 것으로 취하는 그 측정determination에 달려있다. 맑스는 노동자의 건강, 일상, 그리고 힘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음식, 옷, 주택, 연료 등의 일용품의 양을 그 측정의 기초에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용품들은 그것들이 생계의 수단이 되기 이전에 먼저 소비되어야 하며, 그것들이 임금에 의해 구매되었을 때 곧바로 소비 가능한 형태가 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 이전에(***), 그것들에게 추가적인 노동이 행해져야 한다. 음식은 요리되어야 하며, 옷은 빨아져야 하며, 침대가 만들어지고, 나무는 쪼개져야 한다, 등등.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를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재생산과정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여성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필요조건sine qua non인 잉여가치 연쇄 속으로 여성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그 노동력 재생산을 통과한다고 관찰되어왔다.1) 좀 더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가사 노동에는 임금이 지불되지 않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자본가에 의해 파악되는 잉여가치의 궁극적인 양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여성의 유용성usefulness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유용성이 여성의 억압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꽤나 다른 문제다.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분석이 여성과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 설명을 중단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미주]
1) 여성과 가사노동에 관한 많은 논쟁이, 가사노동이 “생산적인” 노동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의 가운데에 있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가사 노동은 용어의 테크니컬한 관점에서 보면 보통은 “생산적인” 노동은 아니다(I. Gough, 1972; Marx, 1969:387-413). 하지만 이 차이는 이 주장의 요점과는 관련이 없다. 가사노동은 잉여 가치와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한다는 관점에서는 “생산적인” 노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잉여 가치와 자본 생산의 결정적인 요소다.

* washing machine이 뭔지 잘 모르겠다. 세탁기 맞겠지? - -; 맑스가 살아 있을 때도 세탁기라는 개념이 존재했나?;

** 이 문장은 "For his maintenance he requires a given quantity of the means of subsistence"라는 문장의 어색한 번역이다. subsistence와 maintenance의 주요한 차이를 모르겠다.. 영영 사전을 보면 좀 드러나긴 하는데, subsistence는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총체적인 것과 관련이 된다면, maintenance는 정부나 외부 기관들에 의해서 지원되는 최소 생계 정도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 이 문장은 "before they can be turned into people"이라는 표현의 번역이다. 좀 어색한디;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2007/10/31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3-164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29 15:52

다듬지 않은 거친 번역물-_- 번역 하는 건 상관 없는데 다듬는건 무지 귀찮다. 나야 시간도 원체 남아도는 인간이니 하루에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번역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아야 겠다. 영어 공부도 할 겸해서... (speaking/listening은 어떡하지 ㅠ.ㅠ)

사실 어제 했듯이 <젠더 트러블>을 먼저 해볼까 했는데, 너무 어렵기도 하거니와 오역의 리스크가 다른 것들에 비해 너무 크기 때문에 먼저 다른 것들 위주로 하려고 한다. 그를 위해서 일단 버틀러가 좋다 좋다 하는 게일 루빈의 중요한 논문 중에 하나인,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을 번역 해볼까 한다. 다른 중요한 논문인 Thinking Sex: Notes for a Radical Theory of the Politics of Sexuality는 도서관에 없길래 일단 포기. 1975년에 쓰여진데다가 수많은 텍스트에 인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고전적인 저술인 건 맞는데, 그만큼 참고해 두지 않으면 어쩐지 허전;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Not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sex", Toward an Anthropology of Women, (New York: Monthly Reviews Press, 1975), pp. 157-160의 번역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모두에게, 여성에 대한 문학은 여성의 억압과 사회적 종속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질문의 오랜 심사숙고의 결과물이다. 그 질문은 사소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주어진 답은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에 대한 희망이 현실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 억압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젠더 위계gender hierarchy가 없는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 변화되어야만 할 것들에 대한 어떠한 평가든 간에, 그 평가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본유적인 남성의 공격과 지배가 여성 억압의 근저에 있다면, 논리적으로 페미니스트 기획은 공격적인 성의 근절이나 그 공격적인 특성을 수정하기 위한 우생학적 기획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성차별주의sexism가 이익을 위한 자본주의의 냉혹한 욕구의 부산물이라면, 성차별주의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출현과 함께 시들어버리게 될 것이다. 만약 세계 역사 속에서 여성의 패배가 무장한 가부장제의 폭동의 손아귀에 일어난 것이라면, 이제 아디론댁Adirondacks 산맥에서 아마존Amazon 게릴라를 훈련시키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 논문의 시야는, 성적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유명한 몇몇 설명들ㅡThe Imperial Animal에 의해 예시된 유명한 진화에 관한 이론이나, 선사시대 모계사회에 대해 추정된 전복overthrow에 관한 것이나, 자본Capital 1권에서 사회적 종속의 현상 모두를 발췌해내려고 하는 시도까지ㅡ을 지지하는 비평의 바깥에 있다. 대신 나는 그러한 문제의 대안적인 설명에 대한 몇몇 요소들을 간략히 그려보고자 한다.

맑스는 한 때 이렇게 질문했다. “흑인Negro 노예란 무엇인가? 흑인 종족black race의 사람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흑인Negro은 흑인Negro이다. 면 방적기는 면을 방직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특정한 관계에서만 자본이 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이것이 자본이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money이 아닌 것이나 설탕이 설탕의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Marx, 1971b:28)” 이것은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가정적인 여성women이란 무엇인가? 한 종species의 여성female이다. 이 하나의 설명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woman은 여성woman이다. 그녀는 오직 특정한 관계에서만 하녀, 와이프wife, 동산動産, 바람둥이 토끼, 성매매 여성prostitute, 인간 딕터폰(속기용 구술 녹음기)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분열되어서, 그녀가 남성의 조력자가 아닌 것은 금 자체가 돈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성female이 억압받는 여성women이 되는 그 관계는 무엇인가? 여성이 남성의 먹이가 되는 관계의 구조를 해명하기 시작할 수 있는 토대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중복되는 작업 안에 있다. 여성women 길들이기domestication는 그 두 사람의 작업에서 충분히 토론될 수 있다. 그 작업들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여성을 정제되지 않은raw 물질로 간주하고, 길들여진(가정家庭화된) 여성을 생산물로 만들어 버리는 구조적인 사회적 장치social apparatus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물론 프로이트도 레비-스트로스도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기술한 과정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분석과 기술은, 반드시 맑스가 맑스 앞에 있었던 고전적인 정치 경제학자들을 읽었던 방식처럼 읽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1970:11-69)를 참조하라).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는 리카르도와 스미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즉 그들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작품이 페미니스트의 눈에 제시되었을 때 생성할 수 있는 비평적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성, 성적 소수자, 개인에 존재하는 특정한 인간 성격의 특성들에 대한 억압의 장소가 되는, 그 사회적 삶의 부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적인 도구를 제공해 준다. 나는 더 정치精緻한 용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삶의 부분을 “섹스/젠더 시스템”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임시적인 정의로써, “섹스/젠더 시스템”이란 사회가 생물학적 성을 인간 행동의 산물로써 변형시키는 배치arrangement, 그리고 변형된 성의 그 욕구가 충족되는 그 배치의 일단을 일컫는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독특하면서 해석적인exegetical 읽기의 한 방법을 통해서, 섹스/젠더 시스템에 대한 풍부하게 발달된 정의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나는 “해석적exegetical”이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한다. 사전적으로 “해석exegesis”은 “특히 성서의 해석에 관한, 비판적인 설명이나 분석”으로 정의된다. 때때로,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읽기는 자유로이 해석적이며, 또한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만족으로부터 그것의 전제와 함축하는 바까지 이동한다. 나의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텍스트에 대한 독해는, 레비-스트로스로부터 강하게 영향 받아서 프로이트주의자들의 경전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을 갖고 있는 자크 라캉에 의해 제공된 렌즈를 통과했다. 1)

나는 후에 섹스/젠더 시스템의 정의에 관해서 더 섬세한 것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먼저 나는 성 억압을 완전히 표현하거나 개념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맑시즘의 실패를 검토함으로써 그러한 개념의 필요성을 논증하려고 한다. 이러한 실패는, 사회적 삶의 이론으로서의 맑시즘이, 성sex을 상대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사회적 세계에 대한 맑스의 지도map에서, 인류는 노동자, 농부, 혹은 자본가이다. 그들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반대로,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그려진 사회적 현실의 지도에서는, 사회 내에서의 성의 위치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경험 사이의 뿌리 깊은 차이에 대한 심원한 인식을 볼 수 있다.

[미주]
1) 맑시즘, 구조주의, 그리고 정신분석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어떤 인식론적인 충돌을 만들어 낸다. 특히, 구조주의는 인식론적 지도 전체에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귀찮은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나는 라캉과 레비-스트로스가 현대 프랑스 지식인 혁명에 있어 선도적인 살아있는 조상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무시하려고 한다(Foucault, 1970을 보라). 만약 프랑스에서라면, "실천을 의미화하는 변증법적 이론"의 길을 따라 구조주의자들의 미로의 중심으로부터 나의 주장을 시작하는 것과 거기로부터 나의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 이 문장은 "In particular, structuralism is a can from which worms crawl out all over the epistemological map."이라는 문장의 번역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특히, 구조주의는 벌레들이 인식론적 지도 전체에서 기어 나오는 깡통이다." 정도 일텐데 당연히 이런 뜻 일리 없다. 일단 "a can of worms"라는 표현은 복잡하고 귀찮은 문제, 혹은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에 적당히 옮겨보았다 -_-


2007/10/29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57-160
2007/10/30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0-163
2007/10/31 - [번역물] - Gayle Rubin, "The Traffic in Women", pp. 163-164

Posted by 소이연
번역 / 2007/10/29 01:34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Routledge, 1999 (2nd edition), 3-4의 일부 번역

푸코는 사법적 권력의 구조가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재현하게 될 주체를 "생산"한다고 지적한다. 사법적 권력 개념들은 순전히 부정적인 항으로 정치적인 삶을 규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제한, 금지, 규제, 통제, 그리고 심지어는 우연적이고 원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선택의 과정을 통해 정치적 구조에 관계하는 개인들의 "보호"를 통해서. 그러나 그러한 구조에 규제되는 주체들은, 그 구조에 종속되는 덕분에 그러한 구조들의 요구에 맞추어서 형성될 수 있고 정의될 수 있고 재생산 될 수 있다. 이 분석이 옳다면, 페미니즘의 "주체"로써 여성을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학의 사법적 구성체는 그 자체로 담론적 구성체이자 재현적 정치학의 주어진 판본의 효과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주체는 그 주체의 해방을 촉진한다고 가정되는 바로 그 정치적 시스템에 의해서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이 밝혀진다. 만약 그 시스템이, 차별화된 지배의 축을 따라서 성별화된 주체를 생산한다고 보여지거나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주체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문제적이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그러한 시스템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명백히 자멸적일 것이다.

"주체"에 대한 질문은, 정치학 특히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사법적 주체들은 언제나 똑같이 일정한 배타적 실천ㅡ이 배타적 실천은 정치의 사법적 구조가 한번 설립되면 그 실천을 "보여" 주지 않는다ㅡ을 통해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체의 정치적 구성은 일정한 합법화와 배타적인 목적과 함께 진행되어 나가며, 또한 그러한 정치적 기능은 사법적 권력들을 그들 자신의 토대로 하는 정치적 분석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은폐되고 자연화된다. 사법적 권력은 불가피하게 자신이 그저 재현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정치학은 반드시 이러한 권력의 이중 기능ㅡ사법적인 것과 생산적인 것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실제로, 법은 자연화된 근본적 전제로서의 담론적 구성체를 불러내기 위해서 "법 이전의 주체"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는 곧 은폐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법 고유의 규제적인 헤게모니를 합법화한다. 어떻게 여성이 언어와 정치학 속에서 완벽하게 재현될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페미니스트 비평은, 페미니즘의 주체로서의 "여성" 범주가, 해방이 추구되는 바로 그 권력 구조를 통해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제한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아카데미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조금씩 원서를 번역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출판할 것도 아니고, 이해한 대로만 번역해보면 될 것 같다. 시간을 엄청 뽈아 먹지만, 어쩌랴.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나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뭐 여기에 쓴다고 해서 방해가 될까 싶기도 하고;

그 첫번째 프로젝트는, 거창하게도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_-;; 물론 다 할 것은 아니고, 읽다가 흥미진진한 부분이 있거나 만만한 부분이 있으면 번역해 보려고 하는 것. 게다가 원서 중에 애정이 가는 책은 이 책밖에 없다. 사실 지젝의 <Parallax View>를 조금씩 번역 해볼까 했는데, 그건 출판된지 1년 넘었으니 한국에서 곧 번역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지젝의 책이 나오면 제깍제깍 번역하면서 버틀러의 책은 번역 안된게 산더미 같은데 번역 잘 안하는 번역계(?)가 미울 뿐이다 ㅠ.ㅠ
 
그런 맥락에서, <젠더 트러블>은 앞으로도 번역이 안 될 것 같아서 (<안티고네의 주장> 번역하신 조현준(순)씨가 번역 안해주시려나 ㄲㄲ) 시도해 보는 거다. 그나마도 <젠더 트러블>의 1장은 예전에 양쌤 세미나에서 봤었기 때문에 낯이 익기는한데... 당시에 한글로 번역된 것만 읽다가 이렇게 원서로 다시 보니 또 새로워서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_- 읽고서 내가 이해한 바라 다른 것도 있고. 일단 그 때 번역된 글은 염두에 두지 않고 번역을 해봐야 겠다.. 번역의 어려움을 새삼;

아 버틀러 박사 논문 출판본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담. 이 부분을 읽으니 사고 싶어. 또 열흘 이상 걸릴텐데 ㅠ.ㅠ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역시나 동문선 판이라 영 못 미더워서 구입을 주저하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원서랑 같이 비교해 보고 산다... 는 말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불어를 못해;)

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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