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조금씩 읽고 있다. 유명한 인용구들을 직접 확인한다는 점에서도 즐겁지만, 사람들이 많이 주목하지 않은데서 발견하는 빛나는 문장과 통찰에 감동하면서 읽게 된다. 그러니까, 엄밀한 공부라기보다는 유희적 독서랄까(유희라고 하기엔 물론 내용이 벅차지만;). 사실 (시차와 번역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독해시에 불편한 점들이 종종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요즘 같이 살고 있는 나로서는 스피노자가 아래에 인용해 놓았듯이 그저 "무지한 사람들"로 간단하게 묶어서 어떤 유형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종류의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음. ㅠ.ㅠ 가장 좋아서가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가장 위로가 되어서 일부를 옮겨 둔다.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pp. 311-2.
정리 70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가능한 한 그들의 친절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증명_ 각자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무엇이 선인지를 판단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그것을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일 그 친절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더 작게 평가하는 것을 본다면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우정으로 연결되는 데는 힘쓰지만, 그들의 정서에 따라서 그들에게 똑같은 친절을 그가 베풀 것을 기대하는 그러한 친절을 보답하려 애쓰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자유로운 이성의 판단에 의하여 인도하고자 하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행하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인간은 무지한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충동이 아니라 오로지 이성에 따르기 위하여 가능하면 그들의 친절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Q.E.D. (Quod Erat Demonstrandum; which was to be proved)
주석_ 나는 <가능하면>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무지한 사람들일지라도 역시 인간이며 급한 경우에는 최선의 인간적 도움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자주 생긴다. 즉, 그들로부터 친절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기호에 따라서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첨가된다. 즉 친절을 피하는 데서도, 우리가 그들을 경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또는 우리가 탐욕 때문에 보수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들의 미움을 피하려다가 그들을 분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친절을 피할 때 이익과 명예를 고려해야만 한다.
정리 71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감사한다.
증명_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 가장 유익하며, 서로 가장 밀접한 우애로 결합한다. 그들은 똑같은 사랑의 노력으로 서로 친절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감사한다. -Q.E.D.
주석_ 맹목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서로 소유하는 감사는 대체로 감사드리기보다는 오히려 거래나 계략이다. 망은은 정서가 아니다. 그렇지만 망은은 예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체로 인간이 지나친 미움, 분노, 교만, 탐욕 등에 자극받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리석기 때문에 선물에 보답할 줄 모르는 자는 배은망덕하지 않다. . . . 왜냐하면 어떤 증여물에 의해서 자신의, 또는 공동의 파멸이 되는 행동을 하도록 유혹당하지 않는 사람은 반대로 확고한 정신을 가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기획을 이미 시작하고 또 실현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다는 것조차 배수아의 인물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는 노릇이다. 다만 나의 배수아 독서는 어느 시점 이후의 것이었기
때문에, 2002년에 쓰인 이 텍스트의 명시적인 서문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 뿐일지도. 비록 배수아 소설가의 최근 저작들은 이해가능한 영역을
초월해 있지만(ㅠㅠ) 여전히 그는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아흥
성-Gender(p. 5)
드물게도, 이 글은 분명하게 미리 생각되어진 면이 있었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별을 규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소극적인 면으로
본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녀)는 남자도 또한 여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개입한다면, 성 정체성의 의도적인
거세이다. 성별이 결정되지 않으면 주인공의 사회적 입장, 정서적인 상태,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 작가나 독자가 소설을 접할 때
느끼게 되는 무의식적인 동일시, 그런 점들이 방해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는 자의식이 확고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주인공의 전형에서 멀어질 것이다. 결정적으로 말해서 성별이 없는 인간이란, 지금 현재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그(녀)에게 성별을 규정하지 않은 이유는, 성적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모든
정서의 상태를 부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혹은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 대답은 다음
문장이다. 그 자체로서의 현실과 그 기준이란, 유행이나 다수결 혹은 파티에 초대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금박 글자의 명함처럼, 글을
쓰고 있을 때의 나에게는 가장 무시하고 경멸해야 할 대상이 된다.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옥수수 뜯어 먹듯 조금씩 씹어 몇 알씩 삼키고 있다. 그 중에 뭐라도 글을 쓴 뒤에 딱 자책하기 좋게 만드는 글이 있어 옮겨둠 ^ㅅ^ (벌써 자책 중ㅋ 젠장...) 물론 이 글이 자책하기 좋게 만든다는 건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이고,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이 글이 사실 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내 나름의 맥락을 덧대어 일반적 지침으로 삼을만 하다는 얘기다. 아도르노의 짧은 에세이들이 연속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보면, 그도 무슨 사건이나 사람이 동기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곳 저곳에서 때로 모순되고 갈라지는 틈이 느껴지거든(즉,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얘기). 물론 전체적으로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글 다운 글'을 써보고 싶다. 블로그에 쓰는 것 말고 말이다. 다음 주부터는 열흘 간 어디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여하간 3월부터는. 물론 지금은, 그리고 당분간은 내게 허락된 지면이 없(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지면을 만들고자 한다면...
51. 거울 뒤로
문필가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유의사항은, 모든 텍스트와 모든 절, 모든 문단에서 중심 모티브가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쓰인 것에 대한 별다른 반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내버려두려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생각 속에서는' 자신의 의도에 밀착되어 있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어떤 결함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무방할 정도로 너무나 작고 사소하지는 않다. 수백 번의 교정 중 하나하나의 작업은 사소하고 고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체가 합쳐지면 새로운 차원의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길이는 아무래도 좋다. 분량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유치하다. 일단 존재하게 되고 씌었다는 이유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단지 변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종종 저자가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그 무엇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이 경우 최상의 표현을 골라내어 이것을 가지고 계속 작업해나가야 한다. 구성상 필요할 경우 버리기 아까운 사유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문필가의 테크닉이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버려진 사유들이 힘있고 꽉 찬 구성에 도움이 된다. 식탁에서처럼 마지막 한 입을 먹지 않아야 하며 술잔의 바닥을 비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바닥이 보인다는 의심을 받는다.
상투어를 피하려는 사람이 속된 아양떨기에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개개의 단어 선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훌륭한 산문들은 그런 것에 특히 민감했다. 하나의 단어도 진부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음악에서 또한 개개의 음조는 진부함에 저항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상투어는 카를 크라우스가 비판했던 유형의 단어 결합ㅡ예를 들어 '남김 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번영으로 그리고 파멸로', '확장시키고 심화시켜' 같은ㅡ이다. 왜냐하면 이런 단어 결합에서는, 말이 절실히 요청되는 곳에서 필요한 저항이 정교한 표현을 통해 가동되는 대신 김빠진 언어의 한가한 물결만이 철썩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은 단어 결합뿐만 아니라 전체 형식의 구성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어떤 변증법론자가 휴지부마다 '그러나'라는 표현으로 시작함으로써 사유 진행의 전환을 표시하려 든다면, 그러한 구성 틀은 그의 사유가 체계 없는 거짓말이라는 판결을 받게 만든다.
덤불은 정성스럽게 보살핀 신성한 숲이 아니다. 자기는 최선을 이해한다는 편안함에서 나오는 난해성을 해소하는 것이 의무이다. 대상의 깊이를 충실히 감당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쓰려는 의지와, 독특하고 난해하며 자만에 찬 날림 글에 대한 유혹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전한 인간 오성'이라는 우둔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진부한 사유를 화려한 문체로 치장하려 들지 않난 조심해야 한다. 로크의 진부한 문체가 하만의 모호한 문체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길이와 상관없이 완성된 글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이의라도 제기된다면 그러한 이의가 적절한가와 관계없이 이의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텍스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적 개입이나 허영심은 모든 의심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의심이라고 흘려버린 것은 텍스트 전체가 객관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징표일 수 있다.
에히터나흐의 부활절 댄스 행진[이 댄스 행진은 세 발짝 앞으로, 두 발짝 뒤로 간다ㅡ역주]이 세계정신의 행진은 아니다. 일정한 부분에 국한시키거나 유보시키는 것은 변증법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변증법은 극단을 통해 나아가며, 사유를 한정시켜 거기에 일정한 특성을 부여하기보다는 그 논리의 극단까지 몰고가 반전을 시도한다. 일거에 너무 멀리 나가는 모험을 금하는 '신중함'이란 대개 사회적 통제의 대리인, 나아가 우민화의 도구이다.
어떤 텍스트나 담론이 '너무 아름답다'는, 종종 제기되는 이의는 의심해볼 만한다. 표현된 사물, 심지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너무 쉽게, 인간이 겪은 치욕의 흔적을 무로하한 언어 형태로는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저자에 대한 앙심만을 합리화시킨다. 치욕 없는 존재자에 대한 꿈ㅡ그런 꿈을 내용으로 그려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런 꿈에 대한 언어적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데ㅡ은 악의적으로 교살된다. 문필가는 아름다운 표현과 객관적 표현을 구별하려 드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문필가는, 성실한 비평가에게는 그런 구별이 가능하리라 믿어서도 안되며 자기 스스로에게도 그런 구별을 용인하면 안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완전하게 말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된 표현의 아름다움이란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추잡한 허식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사물에 봉사한다는 핑계로 표현의 순수성을 등한시하는 사람 또한 항상 '사물'을 배반하게 된다.
고귀한 텍스트는 거미줄 같다. 촘촘하고 집중되어 있으며 투명하고 탄력있고 견고하다. 이것들은 날고, 기는 것들을 모두 자신 안으로 잡아챈다. 거미줄 같은 텍스트를 재빨리 통과해 빠져나가 보려는 메타포들은 거미줄의 제물이 되어 텍스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거기에는 재료들이 날아든다. 어떤 관념이 견실한가는 인용이 적절한가의 여부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 사유가 현실의 세포를 열어준 바로 그곳에서 사유는 주체의 폭력 행위 없이 다음 세포로 파고들어야 한다. 이런 사유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유지하며, 금방 다른 대상들이 그런 사유의 주변에 결정체를 이루면서 모여든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한 그의 시선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문필가는 자신의 텍스트 속에 집을 짓는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고 다니는 종이, 책, 연필, 서류들로 방을 어지럽히듯, 그는 사유 속에 비슷한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사유는, 그가 기분 좋게 느끼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가구이다. 그는 이것들을 다정스럽게 문지르기도 하고 혹사시키기도 하며, 뒤범벅을 만들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이제는 고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거주가 된다. 글쓰기에서 그는 예전에 가족들이 그랬듯이 어쩔 수 없이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배출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창고가 없기 떄문에 이 찌꺼기들과 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을 자기 앞에 밀어놓기 때문에 결국 자기 주변을 쓰레기로 둘러싸이게 할 위험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에는 가혹하라는 요구에는 기술적 필요도 들어 있는데, 이것은 지적 긴장을 늦추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다음의 모든 것, 즉 작업 중에 나온 부스러기, 괜히 얼쩡거리는 것들, 처음 단계에서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가십이었지만 점점 가면서 이제는 초라하고 곰팡내나 피우게 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 속에서 거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미니마 모랄리아>, 117-21)
얼마 전 메일로 작년 체크카드 사용 내역이 와서 보고는 깜짝 놀랐다. 수입도 거의 없는 대학원생인 내가 무슨 카드 지출이 이렇게 많았다는건지(거짓말! 거짓말이야! 죄다 거대한 사기극이라구!ㅠㅠ) 현금인출기에서 뽑아쓴 돈은 체크카드 사용 내역에서 제외일진대 이렇게 많은 내역은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해본 건, 1) 절대로 술을 과음하지 말 것(특히 비싼 곳에서 ㅠㅠ), 2) 주문음식은 최대한 먹지 않고 인근 시장에서 장을 봐서 요리해서 먹을 것, 3) 책도 마구 지르지 말 것(특히 알라딘 멤버십 플래티넘에 집착하지 말것 =▽=), 4) 사람 만나는 것도 다이어트 할 것. 특히 카드 사용 내역와 알라딘 구입 내역을 보면 지난 해엔 책을 규제 없이(?) 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기본 조건들을 정해 본다. 이렇게라도 써놔야 각인이 될 것 같아서.
1. 신간 베스트셀러는 절대, 절대로 사지 말 것. 사더라도 적어도 1년 이상 지난 뒤에 살 것. 특히 최근에 유행했던 장하준 씨의 책, 샌델의 책 같은 건 결국 내게 아무런 영감도 흥미도 주지 못했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되는 책들은 죄다 피할 것. 그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시류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다.
2. 저자 소개에 '인류학, 생물학, 철학, 역사학, 등등을 넘나들며' 운운하는 책이 있거든 사지 말 것. 지나치게 산만하거나 저널리스트적인 글이 많다. 인용하는 책에 침만 바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고. 사더라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찾아보고 살 것.
3. 일본, 중국 소설은 왠만해서는 사지 말 것. 대체로 이들 소설의 상상력은 내게는 좀 부박하게 다가오는 편인데다, 이들 소설의 윤리나 로고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물론 플롯이 괜찮은 경우도 많아서 훌륭한 이야기로서는 괜찮은데 그걸 위해서면 구입할 게 아니라 대출해서 보면 된다.
4.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소설은 사지 말 것. 특히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직후에는 더더욱. 여태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다. 있는 책은 거의 중고서점에 팔았음.
5. 세계문학전집을 살 때 민음사 편집본은 피할 것. 번역은 잘 모르겠으니 둘째치더라도(번역 되어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 판형이랑 글자 편집이 가독성이 떨어진다. 얼마 전에 산 <토니오 크뢰거>와 <무진기행>도 잘 안 읽혀서 쩔쩔. 누워서 볼 때는 더 치명적인데, 두꺼운 책일 땐 일단 무거운데다(종이를 왜케 두꺼운 걸 쓰나) 페이지가 잘 안 넘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6. 번역주의보 : 인간사랑. 이건 뭐 예전부터...
7. 반값 할인 도서에 유혹되지 말 것. 성공한 적이 없다. 할인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8. 전집에 집착하지 말 것. 출판사 기획물은 물론, 특정 저자의 모든 것을 구입하려는 태도는 지양할 것. 같은 저자나 전집기획이라고 해서 모든 책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전집 구매는 대체로 책꽂이의 아름다움을 위한 허세다. =_=
9. 문학계간지는 왠만해선 대출해서 볼 것. 보통 글 한 두개가 땡겨서 사는데 그거 읽고 나면 짐덩어리.
10. 알라딘 행사 사은품에 절대로, 절대로 현혹되지 말 것. 예컨대 지난 해 알라딘 컵은 3가지 색깔로 나왔는데 집에 다 있고 은희경 씨 사인이 담긴 소맥컵을 받기 위해서 책을 사기도 했음 ㅋㅋ
11. 북디자인에 집착하지 말 것. 책이 예쁘고 편집이 가독성이 좋으면 읽을 때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12. 난해한 저자의 책은 절대로 번역본을 사지 말 것. 번역본을 살 때는 꼭 출판사(누가 기획자인지)를 보고 살 것.
마지막 남은 기말 요약과제. 계속 수정중인 글이긴 한데... 이렇게라도 올려버려야 끝날 것 같아서.
사실 이 장의 요지는 세속적인 문장 딱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난 떨지 말고 겸손해지라. =_=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Chapter 2. 'Against Ethical Violence'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버틀러는 그가 이전부터 계속 보여 왔던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버틀러는 모든 근대적 인식론의 폭력성, 즉 제대로만 한다면 모든 사물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한다. 근대적 인식론은 타자를 지식으로 다루지만 버틀러에게 오면 타자는 포획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타자는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들 삶의 근저를 뒤흔들고, 또한 시공간적으로도 여기에 이미 항상 도래해 있는 존재다. 2장의 초입에서 읽을 수 있는 버틀러의 단어는 불투명성, 비일관성, 자기동일성의 폐기, 무한히 열린 질문, 앎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이해, 필연적인 인정의 실패, 의무, 윤리적인 실패, 윤리적인 기획 등이다. 이제는 묵은 먼지 날리는 서고에서나 볼 수 있는 기투, 헌신, 책임, 앙가주망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버틀러의 글은, 어쩌면 버틀러야말로 이 시대에 유일한 실존주의의 상속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도 한다.
버틀러는 2장에서 포스트-헤겔적인 인정(recognition)을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 가져가려고 한다. 이를 위해 버틀러는 우선 ‘투명한’ 인정을 일종의 윤리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투명한 인정의 장면은 우리들은 물론 우리와 인정을 주고받는 타자들의 일관성과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타자는 인정을 수여하는 우리들의 일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삭제될 뿐이다. 그 대신 버틀러는 인정 장면의 근본적인 불투명성에서부터 윤리적인 가능성을 읽어낸다. 1장에서 버틀러가 반복해서 언급했듯이, 나와 너를 초과하는 어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의 영역이 인정의 장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들 주체의 능력은 이들 언어, 규범, 사회성, 담론에 의해 불투명해지고 제한되고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기획은 너와 나는 물론, 인정의 장면 자체도 근본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정초되어야 한다. 우리가 입주해 있지만 우리를 초과하는 영역의 불투명성 때문에 우리들은 지식과 앎의 과정에서 영원히 투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조건 덕에, 인정의 장면에서 타자에게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고, 또 질문에서 최종적인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방향을 상실하고 자기 동일성을 “실패”하는 조건에서만 지속적으로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너는 누구인가?”라는 인정의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정은 한 번 성취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상태로 영원히 개정되는 과정이자 운동이다. 그리고 이렇듯 끝끝내 완결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인정의 장면은, 불가지론적인 회의주의가 아니라 ‘너’와 ‘나’가 인정의 장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해준다. 그래서 버틀러에게 이러한 불투명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차라리 일종의 윤리적인 의무이다. 사회적 인정을 윤리적인 기획으로 구성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칙적인 불만족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의 한계(Limits of Judgment)
그런데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는 때로 ‘판단’을 수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든 윤리적인 기획 속에서든 무엇인가를 긴급하게 선택하고 판단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인정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수도 없고, 행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앞서 살펴본 바, 인정의 장면에서 나타나는 영원한 불만족이야말로 일종의 윤리적인 기획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판단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판단은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는 자를 각각의 영역에 격리해버리고 인정의 과정을 종결해 버리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윤리적인 기획에서 판단의 중요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면 어떤 유형의 판단이 작동해야 할까? 다시 말해, 판단은 윤리화 될 수 있을까? 만약 판단이 윤리화 될 수 있다면 윤리적인 기획과 판단은 어떤 방식의 말 걸기 형식에서, 또 어떤 관계 속에서 작동해야 할까? ‘판단의 한계’라는 장에서 버틀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과 예화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장에서 버틀러는 인정, 관계, 윤리, 말 걸기 장면의 복잡한 함수를 펼쳐 놓기 시작한다.
버틀러는 비난(condemnation), 탄핵(denunciation) 같은 특정한 유형의 말 걸기 장면을 종합하는 단어로서, ‘판단’이라는 특정 행위를 우선 심문에 올리고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필연적으로 윤리적이지도 않고, 사회적 인정을 작동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판단은 사회적인 인정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있어서,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과 판단 받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도덕적인 거리(distance)를 설정하고 둘 사이의 공통 지반을 부인하는 말 걸기 형식이다. 판단은 이로써 판단하는 사람의 불투명성을 추방하고, 또한 판단 받는 사람의 비판적이며 윤리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다시 말해, 버틀러가 보기에 판단은 사회적 인정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단호하게 인정이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인정은 언제든지 판단을 중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정에 기초하지 않은 판단은 곧 윤리적인 실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판단은 언제나 판단하는 우리와 판단 받는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고려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정이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영원히 개정되어야 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인정에 기초한 윤리적 판단 역시도 불투명하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장에서 흥미롭게도 버틀러는 카프카의 우화 <심판>을 들고 와서 분석하고 있다. 게오르그는 빠져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몸을 던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게오르그가 아버지의 선언에 내몰릴 뿐 아니라 스스로도 기꺼이 몸을 내던진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게오르그는 투신을 요구한 아버지의 말에 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버지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여 투신한다. 이렇듯 능동과 수동이 묘하게 얽힌 게오르그의 도착적인 투신 장면에서, 우리는 판단이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애착 관계와 인정의 함수를 읽을 수 있다.
<심판>의 서사에서 이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서로에게 관계로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와 게오르그는 모두 상호간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판단의 ‘거리’를 두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행위하고 있다. 이는 도착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스스로에게 내리는 ‘도덕’적이지만 파괴적인 판단이다. 버틀러가 말하듯 이러한 모럴리스트들은 살인자로 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상호간의 인정은 언제나 상호 주체들의 자율성, 자기반성, 자기성찰, 비판적 능력을 지킬 수 있는 윤리적 관계의 장을 열어두고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말 걸기 장면은 이러한 인정과 관계맺음의 과정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말 걸기 장면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말 걸기 장면을 윤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을 원용한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버틀러는 이 장에서 정신분석학의 ‘전이(transference)’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전이의 윤리적인 가능성에 대해 모색한다. 또한 버틀러는 전이 개념을 기반으로 말 걸기 장면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정이 작동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전유하고 있는 전이 개념은 그 자체로 타자와의 관계성이다. 이 논의의 과정에서 버틀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정신분석학에서 전이가 주체형성을 조건 짓는 ‘일차적 관계성(primary relationality)’의 출현을 추적할 수 있는 통로가 되듯이, 말 걸기 장면을 정초하고 기초하는 근본적인 관계성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말 걸기 장면에서 메시지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말 걸기 장면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며, 말 걸기 장면의 전제조건과 실행의 양상 자체를 바꾸어낼 수 있는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는 불투명한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며,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말 걸기 장면은 우리들의 관계에 일차적으로 기초해 있으며, 우리는 말 걸기의 장면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장면 자체에도 개입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바꾸어 나간다는 점이다.
우선 말 걸기 장면의 관계성은 우리가 말하고 서사화하는 것들은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 한(예컨대 ‘이성’의 광기), 결코 일관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관적으로 구성되고 파편화된 기억과 경험을 연결하고 지배하는 소유격 ‘나의(my)’ 서사는 일종의 심리적 위안이자 환상, 혹은 편집증적 고립일 뿐이다. 이럴 때 ‘나’는 ‘나의’ 서사를 독백하고 강요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인정의 법칙에 따라 말 걸기 장면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말을 전달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다. 또한 말 걸기 장면에서 ‘나’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짜기에 필요한 구조와 규범은 1장에서 살펴보았듯 타자에게 속해있고 너와 나를 초과해 있으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범의 영토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말 걸기 장면에서 서사와 설명은 아무리 비판적으로 개정되고 재구성되더라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 즉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버틀러에게 말 걸기의 장면은 전이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나에게 속할 수 없는 무의식을 실연하고 또 무의식이 현재에서 다시 살게 하는 말 걸기의 구조이다. ‘나’는 전이 장면에서 타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말 걸기 장면의 구조 속에서 ‘나’와 ‘나의’ 서사는 타자에게 탈취당하고 압도당하고 휘말려 든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나를 탈취하고 압도하는 “‘너’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의 전이와 역-전이의 특징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전이는 그 자체로 주체와 타자의 근본적인 관계를 현재의 맥락에서 편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는 주체의 발생적 조건인 ‘일차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또한 자아들이 출현하는 다양한 말 걸기의 장면을 접합한다. 그리고 전이와 역-전이는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작동하지만, 언제나 ‘나’가 타자에게 근본적으로 연루된 상태에서, 결코 일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한다.
따라서 전이 장면에서 “‘너’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되고 있는가?”라는, 최후의 답변이 있을 수 없는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 ‘너’에 대해 물으면서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것, 이는 곧 ‘너’와 ‘나’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며, 따라서 ‘너’와 ‘나’가 속한 말 걸기 장면에 대한 심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너’와 ‘나’에 대해 동시에 묻는 이 짝패 질문은 말 걸기 장면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전이와 역-전이 장면에서 ‘너’와 ‘나’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관계가 아닐 것이다. 이제 ‘너’와 ‘나’는 전이와 역-전이를 통해 불가피하게 연결된 채 서로에 대한 영향력 속에서 새로운 관계로 돌입할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말 걸기 장면에서는 무시간적이며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서사, 즉 말하는 주체 ‘나’의 투명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에 대해 닫혀 있는 지배적인 ‘나’의 서사는 거부될 수밖에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서사의 불투명성을 긍정하고 일관된 서사화 전략에 저항할 것이다. 반복하지만, 여기서 서사가 비일관적이라는 것은 모호함과 모순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뜻할 뿐이다. 일관성이 없다고, 투명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해서 ‘너’와 ‘나’가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해 설명하고 서사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서사화는 윤리적 기획의 전부도 아니고,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버틀러에게는 완전히 서사화할 수 없는 근본적인 관계성의 장이 분명히 존재하는 탓이다. 버틀러에게 ‘나’는 ‘너’에게 말을 걸면서 ‘너’와 연결되고, ‘나’와 ‘너’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나’와 ‘너’가 연결되는 방식(말 걸기 장면)에 개입한다. 전이가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 공간이 바로 이 개입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말 걸기 장면은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관계와 상호 인정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리고 윤리적인 말 걸기 장면은 ‘나’가 타자들과의 관계에 불가피하게 연루된 채로도 생존할 수 있으며, 반대로 타자들도 말 걸기 장면에서 생존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를 인정하는 것은 환상의 죽음이자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의 상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불가피한 윤리적인 의무이다. 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슬픔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를 배려하지 않는 말 걸기는 쉽게 폭력에 경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The “I” and the “You”)
그러나 버틀러는 ‘상호인정’이라는 균형적이고 양비적인 ‘착한’ 관점으로는 긴급한 윤리적 기획에 필수적인 어떠한 불가피성이나 절박성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성의 장에 연루되고, 또 연루될 수밖에 없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이 장에서 “나(the “I”)”와 “너(the “You”)”라는, 말 걸기 장면에서 등장하는 주체의 포지션,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어떤 ‘장소(locus)’이자 구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시도한다. 또한 버틀러는 “나”의 불투명성, 불가능성, 부분성, 유한성을 어떤 사회성과 관계의 장에 연결하고, 또한 이를 “너”라는 타자와의 이자적 관계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 장에서 타자(“너”)는 말 걸기 장면과 “나”에게 근본적인 층위에서 도입된다. 이렇게 버틀러는 “너”를 관계와 윤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버틀러가 보기에 서사적인 목소리 “나”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 언제나 “나”가 묘사하는 자아도 상연(enact)한다. “나”는 반복적으로 재등록된다. 그러나 “나”라는 서사적 목소리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지금 말하고 있는 “나”가 어떻게 구성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서사적인 “나”는 서사 자체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모든 순간에 재구성 될 뿐이다. 이는 서사화 될 수 없는 수행적이고 비서사적인 행위이다. 요컨대, “나”가 어떻게 이 말 걸기 장면에 출연하고 소환되고 있는지, “나”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가 보기에 “나”를 설명하고 “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설명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 최선을 다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망친다. 이는 설명 자체의 ‘내용’보다는 설명이 발생하고 있는 말 걸기 장면의 수사적 차원, 즉 ‘형식’적 차원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정신분석학적 실천이 신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국 서사는 일차적인 관계성을 추적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최선의 경로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메시지를 수신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말 걸기 장면에서 이 누군가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누군가는 말 걸기 장면에서 나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는 어떤 상황, 혹은 말 걸기 장면을 구성하는 수신자의 장소(locus)나 구조(‘너’)라는 어떤 환영적인 관계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것이 설령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수신 구조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조금 달리 풀어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단수의 타자-수신자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언제나 변화하는 복수의 타자, 또한 복수의 말 걸기의 장면이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말 걸기의 장면에서 천의 얼굴을 한 채 언제나 서로 다르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달받고 있는 타자들의 얼굴 앞에서, 다시 말해 이 복수의 타자들의 목소리, 얼굴, 침묵 속의 현존 앞에서, 타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는 일관적이고 단단한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이 얼굴들을 나의 지평에서 제거하는 폭력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의 이야기는 풀리게 된다.
여기서 버틀러는 라플랑슈를 인용하면서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타자라는 ‘얼굴’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라플랑슈는 타자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어떤 단일하고 절대적인 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다양한 타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라플랑슈는 이러한 타자들이 유년 아이에게 남기는 압도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과 자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이들은 성인들이 던지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에 압도당한 채 반응한다. 메시지가 전달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타자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라는 정신분석학의 고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은 타자의 인지/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또한 타자에 반응한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질문이자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아이의 세계를 초과해서 성인의 세계에도 깊숙이 내삽(內揷)해 있다. 라플랑슈의 이론은 주체형성의 조건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라플랑슈의 이론에 따르면 ‘나’의 욕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조차도, 타자의 욕망이라는 ‘나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욕망에 기초해서, 또 이러한 이질적인 욕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주체들의 조건인 일차적 억압에 정초한 ‘일차적 관계성’의 탄생을 설명해준다. 이는 주체 형성을 조건 짓고 또한 말 걸기 구조를 조건 짓는 근본적인 관계성이다. 또한 이는 ‘나’가 벗어날 수 없는 ‘사회성’이라는 조건의 일부이다. 그리고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관계성의 차원은 앞서 살펴보았듯 완전한 서술이 불가능하며, 단지 메타-인지적으로 재구성되어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조건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서술 불가능한 ‘나’의 조건을 대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철학적 사변이나 픽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버틀러가 강조하고 경고하는 점은, ‘나’와 ‘타자들’이 상호적으로 평등하게 무엇인가를 등가교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만큼, 버틀러에게 ‘나’는 타자에 의해 ‘탈중심화’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나’가 위치한 조건을 구성하는 어떤 “수동성”의 이름, 혹은 “수동성에 선행하는 수동성”을 의미한다. 즉 ‘나’는 라플랑슈가 말하던 압도적인 일차적인 인상/자국(impression) 같이 ‘나’의 이전에 존재하던,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의해 탈취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소 불균형하게 느껴지는 관계성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점은, ‘나’가 비록 어떤 수동성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가 존재할 수 없다거나 ‘나’의 기획이 완전히 무용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나’가 최선을 다해 설명할 때조차도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이 개입하여 ‘나’의 설명을 부분적이고 불투명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주체는 존재할 수 있고 또 행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윤리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재구성의 토대는 ‘나’라는 주체를 형성해온 조건들은 궁극적으로 ‘나’가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나”라는 기획에서 탈구되어 ‘너’에게 연결되어야 한다. 결국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너와 나의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나’가 ‘너’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삶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나’의 욕망과 충동을 기원적으로 구성하는 대상이다. ‘나’는 ‘나’의 타동사적인 수동성을 인정하는 토대와 근본적인 관계성 위에서, 그리고 오직 ‘너’에게 말을 거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어떤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는 ‘당신’에 대한 ‘나’의 양도이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윤리적인 겸손함, 반성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반드시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이어야 한다.
자기가 훌륭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드는 아티스트의 욕망만큼 예술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어. 그건 끔찍한 이상주의의 유혹이라고! 당신은 당신의 이상주의, 당신의 악덕, 미덕까지 모두 극복해야해.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글을 쓰도록 충동질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당신의 분노, 당신의 정치, 당신의 슬픔, 당신의 사랑 따위를 모두 극복해서 미학적으로 성취해야 할 뿐이야! 당신이 가진 것을 한번 설교해보라고. 그리고 위에서 당신의 관점을 한번 내려다 봐. 그럼 당신은 아티스트로서는 가치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걸. 가치 없고 또 우스꽝스럽지. 대체 왜 그렇게 뭐라도 선언하고 싶어하는거지? 주변을 돌아보고선 '충격' 받아서 그런거야? 사람들은 너무 쉽게 감정을 포기해버리고는 감정을 날조해 버려. 사람들은 감정을 즉시 느끼길 원해. 그래서 '충격'받고 '감동'받는 건 세상에서 제일 쉬운거라고. 그게 가장 멍청한거야. 주커만씨처럼 드문 경우도 있기는 해. 하지만 충격은 언제나 날조된거야! 예술은 선언하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제발 그따위 사랑스러운 생각일랑 당장 갖고 꺼지라고.
_Philip Roth, <I Married a Communist>, p. 219
오랜만에 들어간 ozzyz 블로그에서 웃기는(그러나 웃어선 안되는;;) 책 표지를 보고 구글링했다가 우연히 발견한 소설의 일부분 번역. ............. -_- 젠장젠장젠장; 저 대사를 어떻게 부정해야 할까?
나는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작품(oeuvre), 책, 문장, 관념에 생명을 불어 넣는 비평에 대해 꿈꾸지 않을 수 없다. ... 이러한 비평은 판단이 아니라 삶의 징후를 증가시킬 것이다. _미셸 푸코
그런 나쁜 습관에도 불구하고 지도 교수가 훌륭한 보호자로 보이기 떄문에 여러분이 꼭 그와 함께 논문을 작성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일관성 있게 정직하지 않도록 하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복사라는 알리바이에 빠지지 말 것! [...] 종종 복사는 하나의 알리바이로 이용되기도 한다. 수백 페이지의 복사물을 집에 가져 와서는, 그 복사된 책에 대한 간단한 수작업만으로도 그 책을 소유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복사물의 소유는 책 읽기를 방해한다. [...] 그것은 일종의 수집 현기증이며, 정보의 신자본주의다. 복사물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일단 복사를 하자마자 읽고 곧바로 기록하라. 정말로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전의 복사물을 소유하기(말하자면 읽고 기록하기) 이전에는 새로운 것을 복사하지 말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누군가 여러분이 쓴 것을 이해하는지 확인하라. 외로운 천재 놀이를 하지 마라. _움베르트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_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신을 드러내는 것, 죽을 수 있는 것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으로 번뜩이는 사람들이 살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비평가라고 부른다. 비평가란 무엇인가? 죽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했던 사람이다. 서양과 북아메리카의 큰 수도에는 죽어서 부활할 수 있는 사람들과 부활하지 못하면서 죽이기만 하는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적 삶이라 부른다. 나는 문화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삶이라는 단어는 이보다 더 부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_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옛 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극소수이긴 하나 사랑에서 영원한 여행을 찾는 이들도 있다. 이 후자의 부류는 어머니 대지와의 접촉을 꺼려야 하는 멜랑콜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향의 우울함으로부터 그들을 멀리 벗어나게 해줄 사람을 그들은 찾는다. 그런 사람에게 그들은 충성한다. 인간의 체질을 논한 중세의 책들은 이러한 인간형이 품고 있는 먼 여행에 대한 동경을 알고 있었다. _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카르투지오 패랭이꽃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외롭게 보인다. _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며칠 간 피똥싸면서 한 요약과제 =_= 사실 매일 붙잡고 있진 않았고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만... 원문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하기 부담스러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제출 전날 피토하며 겨우 끝 마치게 되었다. 요약의 질이 높다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일단 텍스트를 내가 풀어서 한 번 써봄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해 안되는 소리는 거의 다 뺐으니... 흑. 어서 번역본이나 나와라.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by Judith Butler 1장 ‘An Account of Oneself’의 요약
행동하는 것에 대한 탐구, 즉 도덕 철학은 어떤 맥락에서 출현하는가? 오늘날 도덕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도덕적인 탐구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아도르노는 “도덕적 탐구는 언제나 공동체의 삶에서 도덕의 행동 규범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의문에 부쳐질 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집단에토스는 언제나 보수적이며, 여러 난관과 불연속적인 것들을 억압하는 허위의 통일성을 강제한다. 그렇기에 집단에토스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을 때에만(이때 집단에토스는 인용부호 “”를 달고 등장한다) 그래서 이 보수적인 에토스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 때에만, 도덕적인 질문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부호를 단 “집단에토스”는 이제 자신의 집단성 혹은 공통성이라는 가상(假想)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도구화한다. 또한 “집단에토스”는 일단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하면 폭력이 되어버린다. 폭력으로서 “집단에토스”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현재에 강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빛을 가리운다. 여기서 도덕성은 폭력적인 “에토스”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출현한다.
아도르노는 폭력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이 출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정식화도 제공한다. 즉, 폭력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에 대한 요청에 대한 맥락에서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이란 것이 개인을 포함하지 못하기에 “보편”에 대한 요청이 곧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게 되는 경우, “보편”은 곧 폭력이자 개인과 상관없이 단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현존하는 사회 조건을 무시하는 “에토스”는 폭력이 된다. 이런 “에토스”가 특수성에 반응하지 못하고,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개인들에게 전유될 수 없을 때, “에토스”는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개정하기 위한 경합의 장소가 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보편적인 것(예컨대 사회적 조건, 도덕규범 등)과 특수한 것(예컨대 ‘나’) 사이의 어긋남과 불일치는 언제나 도덕적 질문을 위한 장소이다. 아도르노에게 도덕성은 어디까지나 경합에 열려 있는 일련의 보편 규칙을 개인들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렇게 개인의 자리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시켜 초연한 존재로 다루는 실수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점을 잊지 않는다. 물론 ‘나’ 없이는 도덕성이 존재할 수 없지만, ‘나’는 자신을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도덕규범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 혹은 도덕규범은, ‘나’를 인과적으로 생산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나’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는 ‘나’를 초과하고 초월하는 사회적 조건에 이미 항상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가 도덕규범에 순응해야한다거나, 도덕규범과 궁극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나’를 이해함에 있어 그러한 도덕규범 혹은 “에토스”의 발생적 근원과 사회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에토스”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사회이론은 언제나 ‘나’가 생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할 때, ‘나’는 언제나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히 인식론적 질문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체가 규범들을 전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주체의 존재론적 장을 제공할 수 있는 규범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과연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주체가 될 수 없는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규범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까? 사회적 존재론의 영역에서 주체가 스스로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과정에 규범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을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Scenes of Address)
여기서는 주체가 도덕성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주체의 생산에 있어 도덕성이 갖는 힘에 대해서 고려해볼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반추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상처 받고 고통 받을 때에만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나 고통 겪는 사람들의 옹호자들은,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를 질문한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은 기억을 만든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양식은 자아가 곧 고통의 원인이므로 특정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특정한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다름 아닌 어떤 기성의 권위이다. 정의와 처벌의 체계로서 권위는 우리를 호명하며, 우리는 그 권위에게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써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 행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게 된다. 요컨대, 니체에게 설명가능성/책임성(accountability)은 기성 권위의 위협과 비난을 받은 뒤에야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니체식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는 아니다. “너”를 알고 이해하려는 욕망과 처벌이 아닌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고 서술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마주할 때에만 설명을 시작한다.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해 나에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 즉 “그게 너였어?”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만, 우리는 설명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자아를 설명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서사(narrative)의 형식을 취하며, 말이 되도록 사건의 이행과정을 설명할 능력 뿐 아니라 서사의 목소리와 권위에도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침묵할 수도 있다. 침묵은 나에게 던져진 질문의 형식과 또 질문을 던진 사람에 대해 그리고 질문자가 호소하는 권위의 정당성을 의문에 던지거나, 혹은 침묵 속에서 질문자가 끼어들 수 없는 자율성의 영역을 보존함으로써 장면 안에 존재하던 관계를 바꾸어 낸다. 이렇게 책임의 귀속을 묻는 질문에 대해 진술을 거부하는 행위가 갖는 여러 차원의 의미는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scenes of address)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니체는 이러한 ‘대화’의 장면, 즉 말 걸기/메시지 전달 장면을 완전히 고려하지는 않았다. 니체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사법적 체계의 처벌 위협에서만 도덕적 질문이 만들어지고 설명이 시작될 뿐이다. 이러한 위협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도덕 뿐 아니라 영혼의 국면까지 생산한다. 니체는 이러한 사법적 체계와 처벌 위협의 도덕체계에 귀속되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구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공격과 같은 범위에 걸쳐 있고, 삶의 근원으로서 공격을 금지하면 삶 자체도 금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고통을 입히더라도, 니체에게 이러한 공격과 고통은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분이며 심지어 일종의 생명력을 구성하기도 하므로 쉽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덕성은 차라리 부정적인 의미까지 갖는다.
푸코는 감옥의 훈육 권력에 대해 설명한 바 있지만, 반성적 주체의 출현에 있어서 처벌 장면을 일반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푸코는 도덕과 ‘양심의 가책’이 어떻게 니체 식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말년의 푸코에게 주체란 일군의 코드와 규정, 혹은 규범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는데, 주체는 (1) 자기의 구성을 제작(poiesis)의 종류로 드러낼 뿐 아니라, (2) 자기제작(self-making)을 더 넓은 비판의 맥락에서 움직이도록 한다. 즉 푸코의 자기제작은 무로부터(ex nihilo) 급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떤 규범에 대한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의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는 늘 자기 자신의 형성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늘 윤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과정을 지지하는 “주체화의 양식”과 “자아의 금욕주의” 같은 자기활동성의 형식들이 도덕적 행위를 구성한다. 또한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실천 과정에 있어서 ‘비판’은 주체가 속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지평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아의 미학에 관여함으로써 “진리의 정치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의 과정 안에서 주체의 탈종속화를 보장”한다.
푸코는 도덕을 니체처럼 창조적인 충동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니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도덕이 창안적(inventive)이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푸코에게도 주체화/종속화라는 푸코의 설명에서 보듯이 “나”는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생성될 수 있지만, 이러한 생성 과정은 니체처럼 자신을 꾸짖고 자책하는 심리적인 행위성의 결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아가 어떤 외부의 질문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만들고 형성하는가하는 문제는 열린 질문까지는 아니어도 또 하나의 도전이다. 요컨대, 도덕규범이 필연적으로 주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주체가 이러한 규범을 자유로이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방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택할 수 없었던 조건들과 갈등하고 투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만 도덕/윤리적인 주체는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형성과 행위의 구성 맥락이 완전히 자기에 정초해 있지 않다면, 그래서 주체가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하고 자기 스스로도 완전하게 인식해낼 수 없다면, 이러한 주체에게 행위에 따른 개인적·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주체는 윤리적 고려와 인간의 행위성 자체를 훼손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을 불가능한 기획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불투명성은 어쩌면 주체가 관계적 존재, 즉 관계성의 근본적인 형태를 요구하며 관계의 맥락에서 형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불투명하다면, 또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가 윤리적 책임감의 현장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자신에 대해 불투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주체는 윤리적으로 속박되고 이 속박을 유지한다고 말이다.
푸코적 주체(Foucaultian Subjects)
푸코에게 자아구성의 문제에서 자기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진리체제(regime of truth)이다. 진리체제의 용어는 어떤 존재의 형식을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의 여부를 사전에 결정하면서, 주체의 본 모습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진리체제가 제공하는 규범은 자기제작에 따르는 일군의 결정에 틀과 참조점을 제공하면서 협상에 열려 있을 뿐, 우리를 결정론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코의 핵심은 우리와 진리체제의 규범이 언제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 외에도, 진리체제와 맺는 모든 관계가 곧 나와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다. 따라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자기 반성적 차원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진리체제는 주체화/종속화(subjectivation)를 실현하고 통치하지만, 이 통치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제작의 과정 속에서 항상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체제에 대한 의문은 진리체제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즉 진리체제를 문제 삼는 것은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이며, 이는 곧 나 자신에 대해 설명(account)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가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은 때로 자신의 존재조건과 관련을 맺는 진리체제와 자신을 동시에 의문에 던지면서 주체로서 인정불가능성을 감행하는 것이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인정가능한 주체인지에 대해 의문에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와 타인들이 진리체제 내부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규범은 나-너(타자)라는 이자 관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규범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총체성이나 불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정의 실천 속에서, 타자의, 혹은 타자라고 하는 인정불가능성이 발생시키는 인정의 붕괴와 파열이 진리체제의 규범적 지평을 문제 삼는 경우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보지 못한 점이지만) 다른 이를 인정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 즉 현존하는 진리체제에서는 언제나 충족될 수 없고 실패하는 상호 인정에 대한 욕망과 투쟁은, 진리체제의 규범들을 비판적으로 심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진리체제를 열어놓는 것은 진리체제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정욕망 속에서 진리체제 속의 나를 문제 삼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곧 미덕의 신호이자 윤리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진리체제에 대한 논의를 일인칭 관점을 택한 윤리적인 질문의 맥락에서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이자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을 단순한 형태로 직접 던지게 되면, 나는 사회적인 규범성의 영역 뿐 아니라 권력의 문제 틀에도 즉각 포획된다. 장면 속에 “나”와 “너”가 존재하더라도, 규범적인 프레임이 이 출현과 조우에 필수적이라면 규범은 나의 행위를 규제할 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만나는 장면의 출현도 좌우하게 된다. 또한 윤리의 영역은 사회적인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일인칭 관점의 윤리적 질문은 방향을 쉽게 상실한다. 이런 경우 만약 “나”가 “너”에게 인정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는 나 자신의 사적 근거에서 인정을 제공하지 않게 된다. “나”는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규범에 종속되며, 따라서 “나”는 어디까지나 규범의 행위성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가 규범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정도만큼 “나”는 규범에게 사용된다. “나”는 “너”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결국 내가 규범과의 싸움에 휘말려들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인정을 제공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규범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포스트 헤겔적인 질문(Post-Hegelian Queries)
헤겔이 지적하듯 인정은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동시에 나는 인정을 받게 되며, 또한 내가 인정을 제공한 형식도 잠재적으로 나에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두 주체 사이에서 인정이 가능해질 때 암묵적인 상호성의 조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정(recognition)은 헤겔이 지적하듯이 나와 타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호적인 행동에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구조적 동일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alterity)과의 만남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타자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헤겔적인 타자는 언제나 외부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탈-아적(ecstatic)이며, 따라서 나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에서 나 자신을 나의 밖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를 말하고 “나”를 알고 또한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일인칭 관점이 탈구되는 일인칭 너머의 관점에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나도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이며, 따라서 나 자신으로 귀환하는 여정의 최후의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겪는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되며, 따라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에는 과연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이 존재한다. 이렇게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조건은 우리가 우리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 밖의 외부적 매개, 즉 규범이나 관습의 힘에 의해서만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헤겔적인 인정의 주체는 이렇듯 불가피하게 상실과 엑스타시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교환은 교환에 참여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규범의 언어와 관습, 그리고 침전에 의해 조건화되고 매개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묘사하는 인정투쟁은 다름 아니라 이자 관계가 사회적 삶을 이해하기 위한 참조점이 되기엔 부적합하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이자 관계에 대한 천착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그 무엇, 예컨대 ‘인륜성(Sittlichkeit)’이다. 다시 말해, 이자 관계의 교환은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는 어떤 규범을 향한다. 또한 인정의 무대에 서기 전에 서로를 인지하고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로를 독해할 수 있는 시각적 틀, 즉 이자 관계를 초월하는 규범 안에 들어갔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타자는 시각 장의 규범성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나의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내적 능력’을 통해서 나에게 인정을 수여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반응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시각 장의 규범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시각 장의 규범성은 타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인식론적인 장일 뿐 아니라 또한 권력의 작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개인의 얼굴은 쉽게 읽히고 다른 이들은 쉽게 읽히지 못하게 되는 걸까?
“너는 누구인가?”("Who Are You?")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정에 대한 사회이론은 주체의 인지가능성에 있어 비개인적인 규범이 작동한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실제 일상에서 우리는 주로 가까운 이들과의 생생한 교환 속에서 규범과 접촉하고 타자를 만나며, 우리가 누구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카바레로는 이러한 인정의 질문이 마치 사람됨의 그릇에 특정한 내용을 채워야 되는 것인 양 우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카바레로가 보기엔 질문을 던질 때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 자체가 이 질문의 함의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한다.
상호 인정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질문은 직접적인 질문으로, 이는 타자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타자관은 타자의 독특함과 대체불가능성을 가정하면서, 헤겔식의 상호 인정 모델이나 타인에 대해 더 일반적으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제한한다. 또한 이 질문에 함의된 ‘누구’라는 것은 이타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누구’냐는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처럼 도덕적 책임의 귀속과 설명가능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알려질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카바레로는 타자에 노출되는 존재로서, 그리고 취약한 존재로서, 또한 서로의 독특성(singularity) 안에서, 어떻게 이 필연적이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만남을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살핀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갇혀서 오직 나에게만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너”를 위해, 그리고 “너”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 속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나”가 말을 걸 “너”가 없다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너”와 연관해서만 “나”를 지칭할 수 있고, “너”가 없다면 “나”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성을 삭제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헤겔이 논의하는 바 이자 관계에서 사회적 인정이론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논의이다. 카바레로는 오히려 사회적인 것을 이자 관계에 정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카바레로는 그래서 “너”를 무시하고 “나”의 권리만을 칭송하는 모든 개인주의적 유파는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타락과 “너”의 우연성을 회피하는 대신 “우리”라는 집단적인 대명사를 특권화하면서 내부의 도덕에 천착하는 유파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쓴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너희들은 가능한 우리 편이며, 그들은 적대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나는 꼴사납고 너는 물론 불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너”라는 타자를 만날 때 “나” 자신을 드러냄으로써만 나 스스로의 독특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신체성에서 나온 삶의 특질이므로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적 영역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독특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카바레로가 보기에 자신의 사회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공성의 일부분이다. 또한 카바레로는 “나”의 독특함도 타자에게 드러나지만, 타자의 독특함도 “나”에게 드러난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것 때문에, 즉 우리의 독특성 때문에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독특성을, 나 스스로가 만남의 장면에서 드러났음을, “나”와 “너”가 서로의 독특성 때문에 묶여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가능하게 만들고자 할 때 사용하는 규범은 완전히 내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규범이 출현하는 시간은 내 삶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규범은 나의 생과 나의 죽음에 무관심하며, 나와 다른 시간에 존재하기에 나의 시간을 가로막기도 한다. 푸코는 이렇게 적는다. “담론은 삶이 아니며, 담론의 시간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담론으로서 제시하는 “나”에 대한 설명은 살아 있는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의 말은 내가 그 말을 할 때 탈취되어, 내 삶의 시간과 같지 않은 담론의 시간에 차단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규범의 무관심이나 방향상실 같은 것이 나의 생존을 추동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은 담론을 통해 회복되거나 확장될 수 없지만, 이는 불가지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불가피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나”의 것으로서의 “나”의 관점이 차단되고 탈취되는 것은 무엇이 인정할만한 설명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규범의 작동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규범에 어느 정도 순응하거나 협상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장면에서 설명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것에서 몰수되는 경우에만 완성될 수 있다. 오직 탈취 속에서만 “나”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설명을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서사는 “나”의 것이 아닌 무엇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만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를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의 독특함과 서사적 권위는 이렇게 규범의 관점과 시간에 어느 정도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다만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태를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그것은 지시체의 회복 불가능성과 폐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불가능성은 서사를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라캉이 얘기하듯, “허구적 방향”에서 서사를 생산한다. 이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차 반복해서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개연성 있는 판형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 여러 판형 중에 어느 것만이 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또한 내 서사의 조건, 내 서사의 주제에 종속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에 몸이라는 지시체가 있다. 몸은 내가 가리키고 지시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다시 말해 심지어 내 몸이 어디에 갔었고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함에도 완전히 서술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몸이 있다. 따라서 몸이 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온전한 회상이 박탈당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을 정리하자면, 나의 독특성을 설립하는 서술 불가능한 (1)드러남(exposure)이 있으며, 내 삶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거듭하여 인상/자국을 형성하는 회복 불가능한 (2)일차적 관계(primary relations)들이 있다. 따라서 나의 (3)부분적인 불투명성(partial opacity)을 확립하는 역사가 존재한다. 여기서 (4)규범(norms)의 존재를 고려해야하는데, 규범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촉진하지만, 내가 지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독특성의 역사를 확립하려는 순간 나를 대체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탈취 현상은 내가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설명함으로써 내 설명의 서사구조가 (5)말 걸기/메시지 전달의 구조(structure of address)에 의해 대치된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구성적 통약불가능성(constitutive incommensurability)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나의 이야기가 뒤늦게야 도착하도록 만들고, 내가 서술하려고 하는 삶의 구성적 출발점과 전제조건의 어느 정도를 놓쳐버리는 방식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서사가 갑작스러운 사건 가운데(in media res)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의 손실을 회복하고 재구성한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기원을 픽션으로 만들고 우화로 만든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내고, 이 새로운 형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과거의 삶을 가진 “나”에 서사적인 “나”를 덧붙인다. 이러한 서사적인 “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계속 이야기에 효과적으로 더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서사적 관점에서 다시 나타나고, 또한 이렇게 더해지는 서사적 “나”는 문제가 되는 서사에 관점을 정박할 수 있는 순간에도 완전히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나에 대한 설명은 내가 정확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종속되어 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사적 재구성에 대한 나의 노력은 영원한 개정의 과정이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언제나 나에게 있으며, 또 나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윤리적인 실패로 간주해야 할까? 내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완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윤리가 소멸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투명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언어와 ‘너’에게 더욱 단단하게 묶어줄 관계성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윤리는 “자아”의 조건이 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눈멀게 하는 어떤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커피하우스 : 로스쿨 학생들의 아비투스와 수행성
Coffee House : Habitus and Performance Among Law Students
- Desmond Manderson and Sarah Turner
피에르 부르디외와 주디스 버틀러의 작업에 의존해서, 우리는 주요 로스쿨의 사회적 공간에 대한 자세한 문화기술지 작업을 통해 로스쿨 학생들이 어떻게 사회화되는지를 탐색해보았다. "커피하우스"는 캐나다 로펌이 스폰서가 되어 개최하는 주간 사교 이벤트로, 로스쿨 재학생들에게 공짜로 음료수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 이벤트와 행위자들이 학생 정체성과 교육적 열망을 변화시키는데 근본적으로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비록 이 학생들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요"라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문화기술지는 "커피하우스" 정체성이 수행을 통해서 발달하며,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미래의 커리어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의 문제라고 느낄 때까지 상징자본이 축적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서 부르디외의 중요한 작업을 탐색할 것이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의 결정론(determinism)을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 버틀러의 작업을 따라 우리는 정체성은 공간, 반복, 수행성의 사이에서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역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커피하우스에 다니는 로스쿨 학생들이 개인의 무의식적 변형을 겪는 과정은 이미 실행중이다. 하지만 이 공간의 의미가 변화할 기회와 로스쿨 학생들의 수행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Drawing on the work of Pierre Bourdieu and Judith Butler, we develop a detailed ethnography of a social space in a major law school and explore its socialization of the students there. “Coffee House” is a weekly social event sponsored by Canadian law firms and offering free drink and food to the students present. We argue that this event and the actors involved profoundly change student identities and alter educational aspirations. Although the students themselves insist that “nothing is going on,” our ethnography suggests that in “Coffee House” identity is developed through performances, and in the accumulation of symbolic capital, until ultimately students come to feel their future career path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destiny. We explore the important work of Bourdieu through this setting, but ultimately we resist his determinism, and suggest instead that, following the work of Butler, identity is a more complicated and fluid dynamic between space, repetition, and performance. It appears that a personal unconscious transformation among law students attending Coffee House is underway; yet opportunities to change the meaning of this space and these performances remain.
Law & Social Inquiry Volume 31, Issue 3, 649–676, Summer 2006
수강 중인 강의 리딩리스트에 있는 논문의 초록. 아.. 이거 재... 재밌겠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강의 리딩리스트에서 재밌어 보이는 논문은 이 논문이 처음일세. 발제를 이번 주에 할 걸 그랬어 아이고
(물론 상징자본이란 개념이 약간 남발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또 부르디외를 결정론자라고 비난하는 것도 어느 정도 맞기는 하지만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다. 이들처럼 집단 속 개인의 현상학적 체험을 다루면서, 부르디외 같은 사회학자의 개념을 쓰려고 들면 당연히 안 맞는 건데. 개념이 설명하는 층위가 있는 건데. 그러니 당연히 버틀러 쪽 개념이 땡길 수밖에..)
나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단편집부터 접했다. 그리고 최근 웹진 문지에서 지난 달 웹진문학상을 수상한 <옹기전>까지. 단편을 읽고 나니 <백의 그림자>라는 경장편을 읽기가 두려웠다. 언제나 좋아 뵈는 글은 최대한 미루고 아껴서 보게 된다. 가장 적확한 순간에 만나게 될 때까지. 내가 읽어 치우는 것들과 동급에 두기를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그 좋은 것들을 끝까지 보존해두기 위해서. 영화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다. 최상의 것들은 최상의 순간에 만나야 하고, 절실할 때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삶의 어느 순간엔, 언젠간, 꼭, 온다. 내가 책을 사 모은 채 보지 않고, '굿 다운로더'가 되어 영화를 다운 받아 둔 채 보지 않고, 한달에 돈 얼마 내면서 150곡을 다운 받고도 안 듣는 음악들이 있는 이유다. 여하튼 몇번이고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늘 실패했다. 부분적인 인용조차 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특히 무재와 은교 사이에 오고가는 짧은 대화가 무척 마음에 드나, 그 대화가 이 작고 하얀 책 밖으로 나오면 황량한 여백에 쉽게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이 소설을 근래 보기 드문 최상급의 사랑소설로 읽었고(연애소설이 아니다. 나는 사랑과 연애는 별로 겹칠게 없는 다른 범주라고 생각한다. 또 난 연애엔 도통 젬병이므로), 또한 윤리적 탐문으로 읽었다. 사랑과 윤리의 불가분적 관계. 사랑하지 않고 윤리가 어찌 있을 수 있으며, 윤리적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 어찌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혹은 이 소설을 마음에 품고 있는 한, 만났을 땐 손쉽게 서로 인지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라는 착란마저 들게 한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소설을 언젠가 쓰게 된다면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까 싶은,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공이 생긴다면 써보고 싶게 만드는 좋은 소설.
소설 자체에 대해 어쭙잖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과제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부분이 있어 옮겨두려고 한다. 소설에서 인용한 건 아니고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한 부분이다.
이 작가에 대한 기왕의 비평적 논평들을 존중하기 위해 '환상'이라는 용어를 고수했지만 사실 적절한 단어라고 하기 어렵다. 복잡한 문학 이론의 문제들은 제쳐 두고라도, 도대체가 이 소설에서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 주체가 어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발생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인' 환각을 뜻하는 환상이라는 용어로 그 현상을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간 비윤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차라리 '극(極)현실'에 가깝지 않은가.
황정은이 (이 소설뿐만 아니라 기왕의 작품들에서도) 환상을 동원하는 까닭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방금 짚어 본대로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수단으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종류의 것일 때, 소설가는 그 극한의 불행을 어떻게 소설화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학(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자세)의 문제다. 벤야민이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한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178-9)
원래는 문학이론을 가장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너무 붙어 있어서는 데일 수밖에 없으니 '취미'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언제나 스스로 환상 구조ㅡ행위자성, 혹은 주체를 탄생시키는ㅡ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결국엔 자신감 부족일테지) 그것은 잠시 미뤄둔 채 인류학 관련 전공, 더 넓게는 '질적 연구'를 하는 전공에 들어 갔다. 왜냐면, 나는 더 이상 "정보들"을 생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독성"을 밝히고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질적 연구방법론이 할 수 있는 것에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공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때때로 나는 오가는 이야기와 그 결과물에서 "단독성"에 대한 열망을 조금씩 읽을 수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그 열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아직 석사 1학기라 왜 그 전공을 택했냐는 말엔 상대방이 가장 원할 것 같은 말, 혹은 주변 상황에 따라 적당히 조절해서 말하곤 했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단독성"의 문제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블로그에라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요즘 수업에서 강독하는 버틀러 책의 일부분은 마침 이 단독성(singularity)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단수성인가, 단독성인가, 특이성인가, 혹은 독특성인가. 그 무엇으로 번역하든 universal-particular라는 이분항이 아닌 third term으로서 singularity 개념이 적확하게 한국어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지금 당장은 산적한 과제를 해치우고.. 방학 때 조금 더 몰입해 볼 주제.
부록 : http://webzine.moonji.com/?p=2910
나 이렇게 조금 수줍은 인터뷰가 완전 좋아 *-_-* 다음 작품 이야기에서 완전 기다리게 된다. 이 인터뷰도 한참 전에 봤는데 블로그에 올려서 나눌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이.
달에서 흘러 내리는 빛은 한낮의 우리 삶이 벌어지는 무대를 비추는 것이 아니다. 달빛이 의심스럽게 빛을 던지는 구역은 지구가 아니라 지구의 반대편, 혹은 지구의 부속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곳은 더 이상 달이라는 위성을 가진 지구가 아니다. 스스로 달의 위성으로 변한 지구이다. 그 땅의 넓은 가슴은ㅡ그 가슴이 호흡할 시간이었는데ㅡ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삼라만상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대낮에 빼앗긴 긴 베일을 다시 착용할 수 있게 된다. 나무 블라인드 틈새로 내게 밀려온 창백한 빛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불안 때문에 나는 잠을 설쳤다. 들락날락하면서 달은 내 잠을 토막 내버렸기 때문이다. 달이 방 한가운데 들어와 있을 때 잠에서 깨면, 나는 그 방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방은 달 이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벤야민, <달>, <<베를린의 유년시절>> 중.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풍부하게(다른 의미를, 다른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낳는다는 의미에서) '달빛'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걸까. 번역자의 번역에 조금 더 유려했다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한다. 조금 이질적인 느낌의 글이 주는 이국성도 매력일 수 있으니까. 오늘도 그의 글쓰기에 대한 질투는 거세질 뿐이다. 벤야민이 유년시절을 보냈을 저 방도 몹시 탐난다.
습하거나 건조한 달빛, 유혹하거나 관조하거나 물리치는 달빛. 그 어느 것조차도, 언제 어느때라도 모두 매력적이다. 서울은 광해(光害)가 심하기 때문에, 달빛이 강렬할 때 조차도 빛을 느끼기가 너무 어렵다. 그러나 가끔은, 오래된 캐러멜 같은 가로등 빛을 뚫고 달빛이 몸에 내려 앉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왜 늑대인간(werewolf)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달빛을 뜻하는 '문샤인(moonshine)'은 '밀수입한 술' 혹은 '밀조한 술'이라는 의미도 있다. 엄격한 금주령에 굴하지 않고 밤에 술을 몰래 빚어 달 밝은 밤에 들이켰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잔하면서도 또 즐겁다. 빛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 혹은 빛이 세상을 지배해야만 하는 시대 이전에는 밤이 얼마나 길고 달빛이 밝았을까.
달빛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주 어릴 적이었는데.. 나는 뒷산에 동네 또래들이랑 쥐불놀이를 하러 올라갔었다. 그날은 정월대보름이었다. 마침 뒷산엔 교회를 짓고 있었고 우리는 쥐불놀이를 하다 말고 춥다는 이유로 폐자재로 불을 때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담력테스트를 하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뒷산 공동묘지로 올라갔다. 그날은 달빛이 너무나 환해서 불을 켜고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한 명이 없어졌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묘지에 올라가서 이리 저리 살피는데- 없어졌던 한 명이 갑자기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혼비백산. 정작 우리가 모두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그 한 명도 덩달아 혼비백산. 그렇게 숨 차오르게 뛰어 산을 내려왔을 때 내 눈 앞에 그 환한 달이 들어왔다. 크고 둥글었다. 세상은 온통 은은하고 차가운 은빛이었다. 그러나 왠지 따뜻한 느낌이었다.
달빛을 한껏 쬐고 싶은 밤이다. 왜 일광욕이라는 말밖에 없는 것이냐. 내일은 월요일이렷다.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ㅡ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ㅡ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글을 잘 쓴다는 것」,『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p. 26
이 짧은 글에도 분석할 만한 여러가지 전제가 들어 있지만, 그 전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 없이 글 모두에 동의할만 하다. 글을 쓸 때 두고두고 참고할만한 구절이어서 마침내 옮겨 둬 본다. 그런데 자기가 글 쓰는 스타일을 <잘 쓴다는 것>으로 규 정짓는 것 같아 피식피식 ㅋ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사진)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다. 프랑스 지식계를 뒤흔들었던 1960년대 실존주의-구조주의 논쟁의 진원이 된 저작이기도 하다. 1960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 1권(한국어판 1·2권) 출간 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 저서를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논쟁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논쟁을 타고 이른바 ‘구조주의 시대’가 열렸다. 미완으로 남은 <변증법적 이성 비판> 2권(한국어판 3권)은 사르트르 사후인 1985년에 유고 상태로 출간됐다. 1권이 출간된 지 50년 만에 이 기념비적 저작 전체가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한국사르트르연구회 소속 전공자 네 사람의 공동 노력의 소산이다.
이 저작의 번역이 이렇게 늦어지게 된 것은 1400쪽에 이르는 원서의 방대한 분량에도 이유가 있지만, 한국의 사르트르 수용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1950년대 전후 상황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한국 지식인들의 황폐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지적 안정제 노릇을 했다. 전기 사르트르 사상을 대표하는 <존재와 무>(1943)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찍이 번역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그의 과격 좌익 활동이 알려지면서 ‘과격파 사르트르’가 외면받기 시작했고, 후기 사상이 집대성된 <변증법적 이성 비판>도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사르트르가 이 책을 쓴 것은 1957~1960년 사이 3년 동안이었다. 대작을 쓰는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건강을 잃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의 땅거미에 쫓겨 미친 듯이 글을 썼고, 각성제 코리드란을 끼고 살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때의 사르트르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펜을 휘갈겨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하루에 코리드란 한 튜브를 복용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이면 그는 녹초가 됐다. 그는 가끔 모호한 제스처를 하기도 했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쓰고도 대작을 완성하지 못했고, 다만 건강을 되찾았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사르트르 후기 사상을 대표한다는 말은 곧 그의 후기 활동을 종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차세계대전 와중에 그는 현실 자체와 마주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첫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종전 이후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소련의 ‘동반자’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2년 사르트르는 ‘두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공산주의와 자신을 거의 일치시켰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반공산주의자는 개다. 나는 평생 결코 공산주의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그는 다시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후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바로 이 20년에 걸친 정치적 실천이 사상으로 응축된 작품이다.
이 저작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57년의 실존주의 상황’을 주제로 한 글을 써 달라는 폴란드 잡지사의 요청이었다. 거기에 응해 쓴 글이 이 책의 서두에 놓인 ‘방법의 문제’다. 170쪽 분량의 이 글이 사실상 결론에 해당하는데, 그 뒤의 본문은 이 결론에 이르는 긴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방법의 문제’는 원제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였는데, 이 제목이 주장의 요체를 좀더 쉽게 파악하게 해준다.
사르트르의 관심은 마르크스주의에 실존주의를 수혈하는 데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마르크스주의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주체인 인간들 각각의 삶을 사물로, 대상으로만 취급할 뿐 살아 있는 실존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진단이었다. 세계를 창조하는 살아 있는 주체를 불러들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 창조의 주체인 인간에게 합당한 지위를 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런 구상에 입각해 이 책에서 세워나가는 것이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인간학’이다. 전기의 <존재와 무>가 나(개인)와 타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주제로 삼고 있다면, 이 후기의 대작에서는 그 개인이 집단적 주체를 이루어 역사적·사회적 지평에 선다. 이 인간 집단이 역사와 사회를 만들고 다시 역사와 사회가 인간 집단을 제약하고 형성하는 이중적 과정이 변증법적 과정이고, 이 변증법을 포착하는 이성이 ‘변증법적 이성’이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이 이성의 힘과 한계를 시험하고 탐구하는, 다시 말해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하는 저작이다.
그러나 이 웅장한 작품은 곧바로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출간 이듬해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 저서 <야생의 사고>의 한 장(‘제9장 역사와 변증법’)을 할애해 사르트르를 “자기 사유에 갇힌 포로”, 서구문화 안에 갇힌 존재라고 비판했다. 사르트르가 서구 문명인 사회만 ‘참된 변증법’의 대상으로 보고, 이른바 ‘미개사회’를 저차원으로 깔아뭉갰다는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사르트르의 주체였다. 사르트르가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라고 보았던 그 주체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구조의 효과’, 곧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로 보았던 것이다. 옮긴이들은 구조주의 맹위에 밀려 사르트르의 주체가 모욕받은 채 후퇴했지만, 이제 그 구조주의도 퇴각한 마당에 사르트르의 주체는 다시 주목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근대 서구의 '미적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의 과학과 미학에 그 연원을 둔다. 근대 과학의 이식론은 그때까지 사물에 부여되었던 의미들을 벗겨내고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18세기 후반의 낭만주의에서는 계몽주의의 전도가 일어난다. 대상에 미적 태도를 견지하고, 미적으로 평가하는 자세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루는 인식적 관심, 다른 하나는 선인가 악인가를 다루는 도덕적 관심, 마지막으로 쾌인가 불쾌인가 하는 취미 판단. 칸트는 세 가지 판단이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역이 분명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세 범주의 혼용 속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괄호 넣기"라는 개념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에서부터 연유한 것으로, '무관심'을 그 기본으로 한다. 즉 사물의 어떤 측면엔 관심을 잠시 꺼두고, 특정한 인식론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주관의 능동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미는 감각적 쾌적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무관심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방기하는 데서 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것은 칸트의 숭고론인데, 숭고라는 미적 판단은 감성적 유한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무한함에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숭고는 이성적 무한성을 자기와 대립하는 대상에서 찾는 '자기소외'이다. 여기서 얼핏 보기엔 불쾌한 대상에 대응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주관적 능동성이 적극적으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적 태도는 역사 속에서 구구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를 심미주의적인 태도라고 한다면, 인류학·민속학이라고 하는 쌍 개념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식민주의·제국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새디스틱한 지배로 간주되는 식민주의·제국주의는 미적 태도에서 자신의 최고조에 달한다. 타자를 오로지 미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심미주의자는 일견 반식민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주의의 실현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그 기원을 은폐하며,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괄호에 넣은 것들을 타자 그 자체나 타자에 대한 동경과 혼동한다. 파시즘 같은 경우도 일견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을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괄호를 벗기고 다시 괄호를 씌우는 비평적 과정이다. 페미니즘, 게이 이론은 통상의 남성 독자들이 괄호 속에 언제나 넣어두었던 것들, 그리고 괄호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괄호를 벗길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괄호를 벗긴다는 것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을 잠시 괄호에 넣고 다시금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럴 때에도 비판은 소거되지 않는다.
보부아르는 '여자(woman)'라는 것은 역사적 관념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문화적 해석 혹은 생물학적 사실성의 의미작용으로서의 젠더는 구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한 구분법에 따르자면 여성이라는 것(to be a female)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실성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분법에서 여자라는 것(to be a woman)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것(to become a woman)이며, 신체를 '여자'라는 역사적 관념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제한된 가능성에 신체를 복종시키고 물질화하는 것이며, 신체적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급진적인 의지의 창조적인 힘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라는 개념보다는, 젠더 수행이 언제나 그리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일종의 감금 상태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젠더는 문화적 생존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 전략으로서의 젠더는 징벌적 성격의 결과를 낳는 수행이다. 젠더는 하나하나의 개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humanize)' 동시대 문화의 한 부분이다. 사실, 젠더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한 이들은 규칙적으로 처벌받는다. 젠더가 표현하거나 외재화하는 '본질'이란 것도 없고 젠더가 갈망하는 객관적인 이상이란 것도 없으며 그리고 젠더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젠더의 다양한 실천은 젠더에 대한 관념을 생산하며 그러한 실천 없이는 젠더는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젠더는 규칙적으로 그 기원을 은폐하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문화적 픽션으로서 분리되고 양극화된 젠더를 수행하고 생산하고 유지하는 암묵적인 집단적 동의는, 그것이 생산하는 신빙성에 의해 애매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젠더의 저자는 젠더의 구성과정이 개인의 신념을 필연성과 자연성으로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다양한 신체적 양식을 통해 물질화된 역사적 가능성은, 단지 감금된 상태에서 체현되고 위장된 징벌적 규제를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_주디스 버틀러, <수행적 행위와 젠더의 구성>의 일부분
사실 글 자체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내가 과문하여 한국어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고 있다. 공유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참 많은데... 내 언어 실력에 한숨만 나오는 요즘.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접하는 과거의 버틀러는 여전히 매혹적. 누군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비록 타 학과에 속해있지만, 어쨌든 나는 인류학 전공을 희망하는 대학원생이( 될 예정이)다. 전공은 anthropology of education 이지만 나는 근본적으로는 인류학 지향이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교육학이나 인류학은 모두 인간의 문화화와 사회화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사회화하는데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사회를 인간화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건 교육학이라기보다는 인류학이라는 생각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난 후자를 택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알려진 어떤 인류학자는, 페미니스트 인류학은 젠더의 구성에 대해 묻는 학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제도들이 어떻게 젠더라는 프리즘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면 타당한 주장이다. 모든 사회 제도와 문화적·언어적 실천들은 모두 젠더라는 프리즘 없이는 제대로 구성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페미니스트 인류학인가? 그냥 젠더 연구지. 그의 관점에 따를 경우에도 젠더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화된다. 그리하여 젠더는 아무런 질문 없이 실체이자 본질이 된다.
반대로 버틀러는 그러한 실체화와 본질화 과정에 대해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했던 얼마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때론 잊고 지내도 결국엔 다시 돌아와 참조하게 되는게 바로 그녀의 글이다. 가끔은 유일하게 신뢰하며 읽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릴지라도 말이다.
덧) 보부아르가 한 유명한 말인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표현의 영역본은 "One is not born, but, rather, becomes a woman"이다. 한글 번역에서 "만들어진다"는 표현은 실존주의자로서의 보부아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을 인용하는 버틀러의 맥락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역본에 따르면 여자가 "된다"는게 맞다. 현상학적 실천, 제한된 가능성 속에서 주체의 극화된(dramatized) 실천으로서, 스스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번역이 어디 없을까?
그가 골수 수집가가 되는 것은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아마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어떻게 수집가의 특성이 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건 나에게 금시초문인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된다. 이 방면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것이 옛날부터 있어온 해묵은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다시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인용해보자. 어느날 그는 그의 서재를 보고 감탄하고는 으레 의무적으로 하는 물음, 즉 "당신은 이 책을 모두 읽었습니까?"라는 어느 속물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십분의 일도 읽지 못했습니다. 혹시 당신은 매일같이 본 차이나로 식사를 합니까?"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반성완 譯 에서
첫 번째 두려움은 독서의 의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머지않아 사라질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런게 사실이다. 특히 일정 수의 모범적 텍스트들이 그런 신성시의 대상ㅡ물론 그런 텍스트들의 리스트는 분야에 따라 다르다ㅡ이 되는데, 그런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금기이며 이를 어기면 눈총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두려움은 정독해야 할 의무로 불릴 수 있는데, 이는 첫 번째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읽지 않는 것도 눈총을 받지만, 후딱 읽어치우거나 대충 읽어버리는 것, 특히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로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어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ㅡ강의자들 대부분이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ㅡ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담론과 관계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한데 내가 경험해본 바로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 상대 역시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점차 보게 되겠지만,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기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하거나 평문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책읽기에 어떤 위험들이 들러붙는지를 부단히 강조해나갈 것이다. [...]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벤야민의 저 부분은 좀 웃겨서 퍼왔다. 원문엔 세브르 도자기라고 되어 있는데..
피에르 바야르의 책은 심심할 때면 펴보게 된다. 무엇보다 재밌다. 다른 책도 몇 권 번역되었는데 다른 것들은 별로고. 바야르의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지금 인용한 부분에도 등장하는 "눈총"이라는 말이 이 책의 핵심 단어인 것 같다. 그의 전공인 정신분석학에서도 그렇고.
버는 돈은 그다지 없는데 식비보다 책 구입비가 더 많이 나갈 수 있는 지금이, 그래도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서울 생활 시작하면 지금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할테니까. 밥도 대체로 사먹어야 될테고- 교통비도 많이 나올테고- 무엇보다 술값이 많이 들겠지. 그렇게 되면 통장 잔고를 끝없이 생각하며 필요한 책과 사고 싶은 책, 훔치고 싶은 책 따위를 끝없이 비교하며 갈등하게 되겠지.
그렇지만 책도 많이 사버릇해야 감식안이 생긴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땐 그래서 언제나 삐끗하기 마련이다. 최근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를 넘어 한국 동시대 소설을 섭렵(수집)하겠다는 의지로 소설책을 막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요샌 소설책도 양장본이 많고 비싸단 말이야.) 읽다가 재미없어서 내던져버린 책, 읽고 나니 너무 못써서 슬퍼진 책... 어떤 평론가는 나쁜 작품은 같은 이유로 나쁘고 좋은 작품은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좋다고 했는데, 나쁜 책에도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나쁜 경우도 있다. 이런 책이 열다섯권이 쌓일 때 쯤, 나는 비로소 쉽게는 출판사의 마케팅 스킴에 낚이지 않을 눈을 갖게 된 거 같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저자의 이력은 어떤지, 번역자의 이력은 또 어떤지, 출판사는 어딘지, 참고문헌은 무엇이 있는지 ,특히 유명한 저자들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책의 어느 부분에서 인용해 왔는지, 인용할 때의 태도는 어떤지, 서문의 분위기는 어떤지(저자의 철학적 입장이 나타난다), 으레 쓰는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따위로 내게 좋은 책인지 아닌지를 좀 더 쉽게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게 교양이라면 교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편협과 습관이라면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래도 아직 멀었지.
헌데 교양이란 말은 너무 넓은 말이고, 사실 내가 딱히 '교양' 있는 집에서 태어나 자란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교양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주눅들기 일쑤다. 근데 문제는 교양인이 되는 것도 좋고 교양을 쌓는 것도 좋지만, 쌓으려면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양 속물은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지. 통속적이고 진부한 지식을 단정적으로 젠체하면서 말하는 건 정말 티 난다구. 계속 그러면 진짜 솜털까지 서버린다고, 내가 다 부끄러워서. 이를테면 이런 것. 인류학을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제국의 학문이지, 미국에서나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것. 사회학이나 통계를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엘리트를 위한 학문이지. 뭐 이런 것들? ㅋ
사적인 젠더 관계에는 좀더 큰 사회에서 맺어진 양성 간의 유력한 합의라는 밑바탕이 있다. 전체적으로 여성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부부는 감정 교환의 기본적인 차원에서 이미 동등해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여성 변호사가 남편만큼 많은 돈을 벌고 존경을 받으며서 일하고 있고 남편도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여성 변호사는 여전히 남편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집안일에 동등하게 참여한다는 사실에 자신이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여성 변호사의 발언권은 남들이 보기에 눈에 띄게 센 것이고, 남편의 발언권은 눈에 띄게 약하다. 시장 상황 속에서 다른 배우자를 만난다면 남편은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좀더 큰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때, 이 여성 변호사는 남편을 잘 만난 것이다.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현실에 화가 나더라도 그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그 여성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Emotional Labor)>, 이매진, p. 116의 각주에서. 강조는 내가
이 각주를 읽고 나니 일전에 여성학 협동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접했던 여러모로 당혹스러웠던 발언들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가 될 것 같다. 당시 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기혼' 여성학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고 어색했었다. 그 태도를 요약하자면, 당신은 어떻게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런 일반적인 질문을 '기혼' 여성학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겼다. 왜냐면 대체로 '기혼' 여성학자들은 그런 질문 앞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을 얼버무리거나,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잘 모를 때 멋모르고 결혼을 했다고 말하거나, 아이 때문에 코가 꿰였다고 말하거나. 결혼 생활은 어떤 모종의 규범에 어긋난 것이므로, 감추고 '변명'해야하는, 어떤 수치였다. 물론 결혼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의 대립, 결혼의 제도성과 폭력성, 배타성 등에 대해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규범이 있다는 것도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걸 개인의 삶에 갖다 대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좀 미워하기도 했다.
사실 그걸 '공격'으로 이해했던 건,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주관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이 진짜로 인신 공격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이 위에 인용한 부분과 관련이 있는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기혼' + 여성학자라는 조합이 그만큼 예외적이고 눈에 띄는 공식이라는 것이며, 이는 비단 여성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전문적이라고 간주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해당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 말이다. 우리 사회의 부박한 성별 구조를 다시금 드러내고 증명하는.. (분절되어 따로 놀던 경험과 지식이 통합되는구나 ㅎㅎ)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구성된 세계를 창조하는, 그러니까, 불평등한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로 입힌 옷을 벗어버리고,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판타지일 것이다. 여전히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판타지. 물론 판타지라고 해서 나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게 아니다. 왜냐면 판타지는 낭만의 언어이자 비판과 가능성의 언어이며, 개인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형식이자, 하나의 유기체가 대중무리가 아닌 다른 개인 유기체를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도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성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어제는 어떤 대학원생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실천>에 대해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입학하는 대학원이다. 실제 시민사회운동을 하면서, 혹은 활동가 정체성을 강하게 지향하는 이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곳이다. 활동가에게도 학위가 요구되는 사회니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학위가 계급이 되는 사회니까. 어쨌든 그 블로그를 2시간이 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왠지 좀 초조해졌다.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보다는, 불평등이란게 무엇인지 그리고 불평등이 가능한 조건부터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매우 잘 알려진 심리학 실험 중에 하나다. 실험의 개요는 이렇다. 사람들을 실험실로 초대해서,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다고 배경을 깔아둔다. 초대된 사람은 '피험자'가 된다. 다른 초대자도 같이 등장하지만, 그는 '희생자'로 역할이 결정된 배우이다. '피험자'는 선생이 되어 희생자가 문제에 오답을 말할 경우 전기 충격을 주게 된다. 최소 15V에서 최대 450V까지 버튼이 있다. 물론 전기 충격은 가짜다. 희생자는 연기를 할 뿐이고, 피험자는 실험자의 사전 지시와 독려에 따라 버튼을 누르면 되는 일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사전 설문조사에서는 10%도 안되는 사람들이 최대 전압까지 충격을 줄거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엄청난 결과가 나왔다. 무려 65%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자에게 450V까지 충격을 줬던 것이다. 나머지 35%의 사람들도 실험 도중에 중단했을 뿐, 희생자에게 전기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복종 실험이다. 물론 그의 책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이 실험에 대한 자세한 소개, 그리고 실험 결과에 대한 그의 세세한 분석도 함께 수록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복종은 불가피한 것일까? 복종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날까? 복종의 맥락에 들어가면 개인들은 어떤 변화를 겪을까? 복종하는 개인은 자율적인 개인과 어떻게 다를까? 복종은 어떤 경우에 유지되며 어떻게 정당화 될까? 밀그램이 드러내는 바가 너무 많아서 요약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에서는 가치와 도덕이 행동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라는 점일 것이다. 즉 자신의 도덕적 신념이 어떻고, 자아이상이 어떠하든 상관 없이, 실제 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힘에 있어서, 가치는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성장배경, 권위체계, 이데올로기, 상황, 심리적 압박 등이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권위 있는 실험자(예일대 연구자, 하얀 제복, 과학자)의 지시에 따라 위험하다 싶을 정도의 전기 충격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희생자가 심장에 병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실험을 중단하라고 외쳐도, 심지어 기절한 것처럼 보여도 말이다.
밀그램이 분석하는 '복종의 선행조건'은 이렇다. 복종하는 개인은, ⓐ 가족(도덕적 명령을 처음 배우는 곳. 부모는 도덕적인 명령을 아이에게 하는 것을 통해 1) 구체적인 도덕적 내용을 2) 명령과 권위자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 제도적 환경(학교라는 제도적 권위와 선생과의 관계라는 일상적 권위체계 하에서, 아이들은 조직의 틀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 보상(복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체적 보상이 있다. 승진이 대표적인 예인데, 승진은 개인에게 만족감을 줌과 동시에 권위체계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제도이다)이라는 일반적인 선행 조건을 갖는다. 그리고 구체적인 맥락에 와서는 ⓐ 권위에 대한 지각(권위는 맥락 안에서만 유효하며, 이 권위는 개인이 가진 특성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부여하는 비인격적인 지위에 따라 부과된다), ⓑ 권위체계로의 진입(권위를 지각함과 동시에 나와 관련이 깊은 권위자라는 걸 인식하면 권위체계로 진입한다), ⓒ 권위자의 명령과 기능의 조화(권위자가 발휘하는 기능과 실제 명령은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아무리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도 사적인 애정까지 명령할 순 없다), ⓓ 강력한 이데올로기(상황의 통제자는 합법적이어야 한다.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은 훌륭한 합법적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의 자발적 복종을 확보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승인된 자발적 동의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으며, 거대한 비용지출 없이는 붕괴하지 않는다) 등에 의해 복종은 유지된다.
이렇게 복종하는 개인은, 자율적으로 기능하는(자신의 행동 자체에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는) 개인이기를 멈추고 밀그램이 <대리자적 상태(agentic state)>라 부르는 상태로 진입한다. 이런 상태에 진입한 개인은 평소의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되고, 이 개인들은 대리자적 상태에 진입한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기의 모습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일단 대리자적 상태에 들어서면 개인들은 권위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대리자적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 조율(권위자는 구체적인 일반 개인들보다 더 강한 초인적 특성을 가진 인간으로 재정의 되는 조율을 거친다. 반대로 폭력의 희생자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 권위자의 말만이 '들을 만한 것'으로 인지된다), ⓑ 상황의 의미를 재정의(권위자는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통제한다. 이는 공식적 해석이 되며, 한 번 상황이 정의되면 그 상황의 논리에 따라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를 '프레임'이라 봐도 좋다) 하며, ⓒ 책임감의 상실(복종하는 사람들은 권위자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지만, 지시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잃는다. 하급자는 권위자가 요구한 행동을 수행한 여부에 따라 수치심이나 성취감을 느낀다)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리자적 상태로 진입해 권위자에 복종하면서 책임감을 상실하게 된 개인들은, 어떻게 이 상황에 계속 구속되는 걸까? 밀그램은 크게 세 가지 정도를 지적한다. 하나는 ⓐ 행동의 순차적 특성이다. 즉 초기에는 권위자의 명령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행동을 반복함에 따라 그 행동을 계속하는데 불편함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인지불균형이론 같은 느낌을 주는데, 개인들은 상황과 신념이 모순되는 상황에 처하면, 모순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바꾸기 어려운 상황보다 훨씬 더 바꾸기 쉬운 신념을 바꾼다는 것이다. 신념을 바꾸면 모순은 쉽게 해소되고 상황은 정당화 된다. 그렇게 초기의 도덕적 불편함은 연쇄되는 후속 행동으로 중화되며, 이는 전기 충격이나 학살 같은 파괴적 행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다른 하나는 ⓑ 상황적 의무이다. 모든 상황에는 행동을 규제하는 상황적 불문율이 있는데, 일단 상황이 규정되면 그 상황에 대한 도전은 '도덕적 위반'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의무와 위반의 경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회화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복종하는 사람들은 대개 권위자(권위를 지녔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권위자를 거부하는 걸 지극히 어려워 한다. 이에 대해서는 밀그램이 제시하는 일상적인 실험도 있다. 대학생이라면 교수에게 찾아가서 '교수님'이라는 호칭 떼고 이름만 불러보라는 것이다(어이, 김 교수, 혹은 조XX씨!). 그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면, 상황적 의무가 개인들을 얼마나 구속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은 이 위반과 위반에 따르는 긴장을 피하기 위해 차선책으로 복종을 선택한다. 또한 권위자를 부정하는 것은 권위자보다는 피험자에게 감정적 동요를 주는 것으로, 피험자에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상처를 주는 일이다. 도덕적 위반일 뿐 아니라, 어떤 접대를 받아야 마땅할 권위자에게 해당하는 접대를 하지 않아서 상처를 줬다는 느낌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 불안이 있다. 권위자에 대한 규칙을 위반하는 건 개인들에게,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 위협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즉 나 혼자만 조직을 붕괴시키고 질서를 교란한다는 불안감이다.
책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이와 관련해서, 나치 독일에 복무한 사람들의 심리적 특성을 조사한 연구도 어디선가 봤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의식이나 개인적 신념을 중화(neutralization)시키는 심리적 매커니즘에 대한 연구였다. 기억나는대로만 써 보겠다. 먼저 ⓐ 책임감의 부정(denial of responsibility)이 있다. 즉 자신이 저지른 만행은,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지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밀그램 역시도 실험에서 이런 점을 지적하는데, 450V까지 전기 충격을 가한 피험자들은 오히려 희생자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탓하거나, 실험자와 맺은 계약을 이행할 의무 때문이라거나,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 전기 충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자기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희생의 부정(denial of victim). 희생자는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로 의미화되며, 따라서 희생자에 대한 공격은 학살이나 폭력이 아니라 정당방위가 된다. ⓒ 상해의 부정(denial of injury). '학살'이 아니라 '최종 해결책', '정화(cleansing)', '목표 제거', '목표 거부', '부수적 피해' 같은 단어들이 동원되어 피냄새를 감춘다. ⓓ 인간성의 부정(denial of humanity). 희생당한 이들은 희생당해 마당한 존재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비인간(subhuman), 짐승, 원숭이 같은 단어들을 동원하면서 희생자들의 인간성을 부정한다. ⓔ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condemning the condemners). 희생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난한다. 예컨대 과거사를 들먹이면서 너희들은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더 높은 가치에 호소하기(appealing to higher loyalties).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충성', '의무', '신성' 같은 가치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책임감과 도덕적 견실함을 유지한다. (이런 걸 보면 꼭 한국의 꼴보수우파들이 생각난다니까-_-)
당연히 이러한 실험을 보고 있자면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이히만 같은 독일 나치 전범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정신병자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믿기 싫은 주장. 그러나 이러한 실험과 분석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신념과 다르게 어떻게 복종에 충실히 복무하게 되며, 그 복종의 결과를 어떻게 부인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까지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체제가 저지르는 거대한 폭력과 권위 앞에서, 우리는 개인이기를 포기하고 권위자의 대리자가 되어야 할 뿐일까? 선택권 따위는 없을까?
스탠리 밀그램은 여러 차례 변형 실험을 통해, 단지 복종할 뿐인 개인이 아니라 저항하는 개인의 모습도 보여준다. 예컨대 처음에 말했던, 450V까지 충격을 가한 65%의 사람들은 희생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실험을 진행했다(원격조건). 희생자는 격리되어 있고, 피험자는 희생자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만 느꼈다. 여기서는 35%의 사람들만이 실험 도중에 저항했다. 상황이 조금 바뀌어 희생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자, 37.5%의 사람들이 저항했다(음성반응 조건). 희생자를 같은 방 안에 두자 60%의 사람들이 저항했으며(근접성 조건), 희생자가 전기 충격을 받기 위해서는 실험자가 직접 희생자의 몸을 만져야 되는 조건에서는 70%의 사람들이 저항했다(접촉-근접성 조건).
그리고 피험자들에게 전기 충격의 강도를 선택할 기회를 주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낮은 최소한의 전기충격만을 가했다. 한편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험 도중에 극도의 '긴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긴장은 피험자들이 실험에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과,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긴장은 피험자의 약점보다는, 오히려 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에서 실천되는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권위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권위자의 눈만 현장에 없으면 대체로 피험자들은 충격을 주기를 거부하거나 실험자를 속였다). 또한 밀그램은 '집단 효과'라는 희망도 보여준다. 동료를 추가해서 실험했을 경우, 동료가 저항을 시작하자 동조 효과에 의해 놀랍게도 40명 중에 36명이 실험에 반항했다. 밀그램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상호 지지하는 것은 과도한 권위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어벽"이라고 주장한다. 즉, 실험의 결과에 충격을 받을 순 있지만, 그들의 도덕성을 의심할 것 까지는 없다. 우리는 상황 속의 인간이지, 도덕적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아니므로.
그러나 밀그램은 또한 현대 관료사회에서는,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권위를 동원하더라도 <직접>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어 폭력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첫째로 과학이나 정치 같은 합법적인 권위가 폭력의 수행을 정당화 할 수 있으며, 둘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폭력에 참여하지는 않고 중간 관리자 같은 역할만을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체제에 들어가면 온전히 통합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분절으로만 존재한다. 여기서 책임감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권위가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명령에 따라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매우 폭력에 둔감하고 권위에 충실한 일부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일부를 비난하면서 우리의 도덕적인 견실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그 폭력과 권위를 지탱하는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도덕적 감정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 순수한 악인은 드물게 존재하고 대부분은 선량한 악인들이다. 우리는 복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고 태어났다. 그리고 "삐딱한 지적저항"은 권위와 폭력 앞에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기는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건 자위일 뿐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권위의 의지 실현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복종은, 반복 강조하지만, 심리가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자 그 결과이다.
그 밖에도 밀그램의 책에는 다소 묵시록적으로 읽히는 부분들도 굉장히 많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지금이 두 번째 독서이지만) 여전히 믿기 싫은 부분들도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이 대체로 남자들의 남자들에 대한 복종에 대한 것이라는 인식까지 오면, 조금은 더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쩌겠어. 다른 나라의 맥락에서 진행한 실험은, 오히려 복종율이 더 높게 나왔다는데. 한국에서는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텐데.
권위의 폭력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권위와의 관계를 아예 끊는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늘 새벽, 신경숙 소설가의 신간을 끝마침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썼다고 했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그 시간대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폈을 때는 어둑하고 눅눅한 새벽 3시였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 허리를 곧게 펴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제목과 소설이 정확히 상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아 좀 불만이기는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수작인 것 같다. 여느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을 읽기는 읽어도 늘 별다른 감동없이 읽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편집실에서, 낡디 낡은 보부아르의 책 앞면에 씌어있던 손글씨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 관계의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맺음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반전화와 편지와 전보만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던 시절의 청춘들은, 불가피하게 좀 더 깊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어도 관계도 좀 더 익을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내면에서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으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지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들ㅡ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와 퀵 메시지가 아니라, 어쩌면 침묵과 견뎌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재하거나 느리게 찾아오는 것들에 대한 환대.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해지는 것.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에게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말마따나 덥석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내가 이미 거쳐온 시간 혹은 지금도 거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관계의 부침(vicissitude)을,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여러 기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네에서 벤치에서 계단에서 혹은 누구도 앉자고 하지 못해 아예 선 채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들로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아침 해를 맞아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들.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온 신경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려하고 질투하고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간들. 그때의 냄새와 온도와 바람과 사소한 분위기나 오갔던 대화 같은 것들. 빈곤했던 기억에 얼마간 생생한 서사와 언어가 부여되면서- 기억이 비로소 재조립되고 있다. 그렇지. 기억이란 이렇게도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것이지. 그러므로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기억 뿐이겠지. 이것 외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이닥치는 기억을 견디느라 잠시 눈을 책에서 떼면, 머리 속으로 문장이 하나씩 깜빡깜빡 흘러갔다. 하나의 서술로도, 하나의 명제로도, 하나의 가설로도 문장은 재생되었다. 그 문장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책귀를 접어두는 걸로 갈음했다.
나의 20대 초중반은 '시시각각'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늘 바빴고 늘 일이 있었고 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망했지만, 늘 그 무게가 버거워 헐떡대며 꿇어 앉을까 벌렁 드러누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 단면이 지나면 다른 단면이 찾아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단면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시각각'은 점차 '시간'으로 누적되고, 누적된 시간이 임계점을 넘으면 '세월'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구잡이로 누적되어 쌓였던 나의 시간이 세월에 통합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점차 먹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진 청춘인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은 이제 시시각각이라기보다는 세월일 것임을 직감했다. 청춘 이후 세월 속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호품"은 어느 시인들이 말했던 대로 "그리움"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앞으로도 애도하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나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계속 사랑할 것이고 계속 질투할 것이고 계속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역사와 기억과 맥락과 그리움과 추억이 뒤섞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이며, 더 정직하고 더 여유롭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간다는 것. 천상의 혼례, 다양체의 다양체들. 모든 사랑은 앞으로 형성될 기관없는 몸체 위에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바로 이 탈개인화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비로소 누군가가 명명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이나 성(姓)을 얻고, 자신에게 속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다양체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가운데 가장 강렬한 식별 가능성을 획득한다. 얼굴 위에 있는 주근깨의 무리, 여자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년 무리, 샤를뤼스 씨에게서 들리는 소녀들의 재잘거림, 누군가의 목구멍 속에 있는 늑대 떼, 사람들이 골몰하고 있는 항문이나 입이나 눈 안에 있는 항문 다양체.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그토록 많은 몸체들을 지나간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p. 76
옛날, 그러니까 20대 초반이었을 때라면 분명 멋있다고 느꼈을 구절인데, 지금 같아선 건조하게 읽힌다. (그들은 실제 연애도 이렇게 했을까?)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략 알겠는데, 역시 감동이 전혀 없다. 대학원 지망하는데 그 교수가 가끔 이들의 개념을 인용하길래, 에라 모르겠다 도닦는 마음으로 봐보자,해서 그냥 사봤는데 힝ㅠ.ㅠ <천개의 고원> 사는 김에 ㅇㅈㄱ씨의 재판 찍은 책 한 권도 샀는데... 이거 정말 다투자는 거지? 재판을 찍어내면서 수정하기가 귀찮아서 몇 가지 첨부하고 넘겼다는 말이 버젓이 적혀 있어... 세상에... 이거 나는 낚인거지? 성의 없이 낸 책, 덥석 사버린 내가 잘못인거지? ㅠㅠ
어쨌든 들뢰즈와 가타리,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어떤 집단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지, 예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좀 훑어보니 이들이 쓰는 개념이 꽤나 화려하고 그럴싸하다는 것은 잘 알 것 같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 어울리는 개념이라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러나 정작 속은 맹맹한 느낌이다. 나로서는 읽고 나면 허무하기 그지 없다. 이들은 단지 옛날부터 잘 있었던 것을ㅡ이들의 표현법에 따르면ㅡ단지 재밌게 보이는 계열에 따라 배치한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기계라는 개념도 왜 이렇게 시종일관 별로지? 몇년 전 라캉 관련 서적을 열심히 읽었던 것도 점점 머리 속에서 지워져 가는 중에, 지금 같아서 그가 했던 말중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말은 딱 하나 남았다. 남자들은 마치 공기를 넣어 몸을 부풀리고 있는 개구리 같다고. 이 책을 읽는데, 꼭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지금은 이 두사람의 유행이 많이 지난 감도 있지만, 이들이 누린 인기는 과거 이상 시인이나 기형도 시인이 누렸던 인기와 비슷한 성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보다는, 이들의 특이한 이력이나 라이프스타일 이 더 중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그들의 분위기나 패턴을 공유할 수 없거나 거기에 거부감이 든다면, 사유와 표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뭐 그런.
어제 오늘해서 유명한 두 남자사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이고, 다른 하나는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이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분명 아름다웠다. 소설가로서 인문사회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소설도 분석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나는 존 쿳시의 책처럼 다소 분석적이고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이 '나쁜'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석적이고 도식적이면 또 어떤가. 여하튼 쿳시의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타자에 연루'되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 타자에게 연루되는지, 그 장면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우연한 계기라고 표현했지만, 한번 타자에게 연루된 후에는 타자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쿳시는 인간성이 차례로 박탈 당하는 과정(어떤 의례와 절차를 거쳐서 인간성은 박탈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성이 박탈되었을 때(그리하여 비로소 '비체'가 되었을 때)에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인간성은 어떻게 회복될 가능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아름답게 다룬다. 그리고 쿳시는 '적'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즉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적-타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가 얼마나 무용하며 위험한 일인지를ㅡ그리하여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상 식민지(약자)가 제국(강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강자)이 식민지(약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ㅡ아주 섬세한 문체로 폭로한다.
쿳시의 소설은 제국주의 (지식인) 남성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제국주의 남성 정체성과 젠더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쿳시는 일견 도덕적이고 범인간애적으로 보이는 제국주의 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상당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타자'에게서 인간(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들,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고 한들 그는 제국주의의 자장에서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보편-제국주의 주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타자-야만인'에게도 보편의 빛을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 보편의 빛은 상황 논리에 따라 얼마든 철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쿳시의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시선에서 '야만인-여성'은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이다. '야만인-여성'은 유독 '(제국의) 언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성적으로 분방하고 자유롭지만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국주의자-남성이라는 두개의 항에 의해 이중으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만인-여성'은 어느 때는 의존하고 복종하는 것 처럼 묘사되지만, (특히 성행위를 할 때에는) 종속되지 않는 이중적인 존재처럼 묘사된다. 쿳시의 남성 주체가 '타자에게 연루'되었고 또한 일견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윤리적으로 연루되는 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를 향할 때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남성 주체가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은, 오로지 성애화된 사랑 혹은 섹스가 걸려 있을 때 뿐인가? 남성 주체의 도덕적인 실천은 성애화된 타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가? (그 많던 '운동권 남자애'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도 종종 이런 징후를 읽는다.) 이에 관해서는 재미소설가 이창래 작가의 <제스처 라이프>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
물론 쿳시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 기꺼이 인식하고 분석한다.
덧) 이 소설을 읽고서 '50대 이상 남자'들의 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대다수 남성들의 정체성에서 남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많은 소설에서 50대 이상의 남자가 자신을 수컷으로 드러낼 때는 어김없이 이 남근 문제가 등장한다. 성적으로 문제를 겪음과 동시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몸의 근육과 피부의 탄력에 대한 인식 등이 어우러진다. 그 탓에 쿳시의 남성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50대 남성 인물들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갖 복잡함으로 뒤섞여 있다. 자기 몸이 더럽다는 인식(<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책을 보라), 자신의 성적 능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erection문제이지만)에 대한 자의식, 과거에 대한 향수 등등. 술자리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성적 소수자는 "4-50대, 대머리, 배 나온 화이트 칼라 남성"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다른 책,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학부 때 교육 쪽을 전공한 나로서는(나는 교육 자체보다는 내 전공을 무지 싫어했으니까), 가끔 교육관련 서적을 펴볼일이 있었다. 한국의 주류 교육학자들에게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ㅡ보통은 "학교 없는 사회"라고 번역하지만 오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리치는 그 스스로가 강조했듯 학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ㅡ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는 대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곤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일리치를 그저 그런 과격한 낭만적 급진주의 사상가로 생각했는데, 이번 대화집을 읽고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오히려 과격한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욕이 될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들 보다는 오히려 '정통파'에서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제도는 적당한 타협을 요구할 뿐, 과격한 근본주의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탓에 일리치는 온갖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범위와 폭이 놀라워 본받아야 할 정도다. 그를 문명 비평가라고 간주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국가 주도 공교육제도,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 조건, 건강의 '의료화', 표준 언어, '개발' 담론 등등 온갖 사회 체계에 내재한 복잡한 권력체계와 폭력을 일관되게 반대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제도로부터 미움 받기 딱 좋은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일리치는 세속적이며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내적 신념에 충실하고 경건한 신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그가 낭만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사상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사상의 가치체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폭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엔 평온하게 공생하는 자연스러운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는데, 국가 권력-자본주의-의료담론-공교육제도 등등이 일상을 폭력적으로 침탈했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식이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책인데도 여전히 "여권주의"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거 아직도 이렇게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고. 이와 관련해서 일리치에게 특별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역시 그의 젠더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에게 성별은 사회적으로 발명된 그 어떤 현상이라기 보다는,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획하는 근원이자 철학이다. 그렇기에 이쪽은 저쪽을 감히 넘보거나 이해할 수도 없고, 오직 은유와 상상으로만 연결될 수 있다. 이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다(이해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놀랍게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곳에서만 성차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성역할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에서는 차별 논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경건한' 상호의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좀 오버해서 말하면 자꾸 여자들이 남자 세계를 욕심내고 남자들이 여자 세계를 넘보려고 하니까 (자연질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이거 참 ^^;; 정말 일관적인 사람이야.
비록 멘토링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의 문제 행동을 제거하고 건강한 발달을 촉진”(Hamilton, 1991) 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자주 장려되고 있지만, ‘멘토’의 전통적인 역할이 청소년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게 적절하거나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위기의” 청소년들을 다루는 문헌에서 묘사되듯, ‘멘토’의 역할은 청소년들을 가르치거나 사회화하며, 그들을 위한 역할 모델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탈학교(dropout)나 ‘학교를 다니는 엄마들(school-age motherhood)’로서 위기에 처해 있는 도시 청소년 여성들에 대한 이 연구는, [청소년 여성들과] ‘여성들’의 영향력 있고 건강하게 유지되는 관계는 청소년들의 지식과 경험, 감정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고 정당화하는 ‘여성들’의 능력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제안한다. 청소년 여성들의 관점을 인지하고 존중하지 않은 채 무작정 가르치려들 경우, 그녀들의 경험과 지식을 강화하기 보다는 깎아내릴 수 있다. 또한 청소년 여성들이나 여성에게 해로운 사회적 관습을 사회화하려든다면 마찬가지로 파괴적일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 문학과 신화에서 유래한 멘토링 모델은, 청소년 여성들을 위해 널리 행해지고 있는 멘토링 모델의 한계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의 조언자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오래 떠나있는 동안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보살피고 교육해야할 책임을 맡는다. 이 멘토링에 대한 묘사는 멘토와 텔레마코스 관계의 중요한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멘토의 역할은 선생님이자 아버지의 대리자이며, 그리하여 멘토 관계는 대체로 성인 남성과 청소년 남성 사이의 관계가 된다. 내 연구는 멘토와 언어학적으로 뿌리가 같은 뮤즈를 다른 은유로 보여주고자 한다. 뮤즈는 영감의 원천이었던 신화 속의 여성들이다. 뮤즈의 역할은, 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천재성이나 예술성을 알아보고 그것에 불꽃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뮤즈라는 은유는 청소년 여성들의 내면의 자원이나 가능성으로 초점을 이동한다. 이는 청소년 여성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데 치중하는 관계에서는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강점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의 약점을 가정하는 멘토링이라는 조력 모델(helping model) 대신, 이 연구는 여러 배경에서 온 청소년 여성들의 다양한 요구와 자원을 인정하는 관계적 모델(relational model)을 제안한다. 또한 이 연구는, 청소년과 성인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vulnerabilities)과 동시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가정하며, 관계 속에서 이 두 파트너 모두의 공헌을 높이 평가한다.
Amy M. Sullivan, <From Mentor to Muse : Recasting the Role of Women in Relationship with Urban Adolescent Girls>, Urban Girls : Resisting Stereotypes, Creating Identities, p. 226-7의 번역.
note 번역 중 girl과 women의 구분이 조금 불편해서, girl은 '청소년 여성'이라고 했고 women은 성인 여성 혹은 그냥 여성이라고 바꿨다. school-age motherhood는 마땅한 번역어를 찾을 수 없다. 흔히 쓰는 말은 으레 '10대 미혼모' 일텐데, 이 말은 10대라는 말도 문제지만 미혼모라는 말도 문제여서 쓰지 않았다.
이야기/이미지 산업의 맥락에서 뮤즈는 대체로 더 이상 젊다고는 하기 어려운 중년 이상 남성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재현된다. 또한 대체로 뮤즈들은 남성 예술가들의 필요에 따라 쉽게 '용도 전환'된다. 보통은 제자나 팬으로 시작해서, 영감을 제공하면서 성적 관계를 맺고, 후에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심지어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식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아주 남자 중심적인 설명이고 프레임이다. 뮤즈들이 어떤 관심과 욕망을 가지고 그런 관계에 헌신했는지, 그 관계에서 뮤즈들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전략적으로 행동했는지, 그리고 뮤즈들의 욕망은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 가능하며 또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나쁘다면 어떻게 돌파할 수 있으며 때로는 해체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뮤즈는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인물일 뿐, 현실에 존재하는 남성 예술가와 그들을 옹호하는 문화적 맥락에서는 뮤즈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옴니버스 영화 <뉴욕 스토리>에서 한 번 뒤틀린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그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즐거웠었는데, 그 영화의 문제는 그 남성 예술가가 겉으로 보기에도 좀 찌질했었다는 점이다. 뭐, 사실 대다수가 그럴 수도 있고)
이러한 뮤즈는 에이미 설리번의 논문에 오면 아주 적극적인 주체로 모습을 바꾼다. 주로 남자-남자 모델, 혹은 남자-여자 모델을 가정하는 멘토링은, 뮤즈링(?)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수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자-여자 모델도 마찬가지로 멘토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소년과 (부모이든 부모가 아니든) 성인과 맺는 관계의 특징이나 수행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뮤즈링은 하나의 규칙이나 규범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행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설리번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일반적인 교육과정(10대는 학생이자 청소년)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에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0-50대면 어떻고 동년배면 또 어떻고.
이 글을 읽으니 떠오르는 경험.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잠깐 멘토링을 한 적이 있다. 인근 중학생들 중 사교육을 받기 힘든 아이들 3~4명을 멘토링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2번씩 2시간, 과외 시간처럼, 그 중학교를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 멘토링을 하는 거였다. 물론 페이도 받았다. 과외랑 똑같이. 8회 40만원. 같은 돈을 받고 과외 따위를 하느니 더 여러 아이들을 만나서 멘토링을 하는데 당연히 흥미를 가질 수밖에.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국엔 상담을 조금 가미한 과외로 굴러갈 가능성이 컸다. 물론 1달에 몇 번 멘토들이 모여서 슈퍼바이저와 함께 회의를 해야했는데, 당시 내가 보기에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관심은 어떻게 '결손된'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학교 질서와 사회에 편입시킬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관제 프로그램이었으니 그럴 법도.
그런데 심지어 어떤 남자 멘토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컸다. 애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멘토링을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니들부터 가르치고 사회화해야겠다 이놈들!) 정말 그런 광경은 끔찍했고, 사실 내가 만난 아이들도 그 관계를 관(官)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과외로 인식할 뿐이었다. 게다가 3~4명이었다. 1대 1도 아니고. 결국 빛 좋은 그룹 과외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도망쳤다. 미안하고 죄책감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내 나름대로 노력을 할 수도 있었고, 또 그때가 멘토링 프로그램 초기 단계였으니 시행착오 단계로 봐도 좋았다. 다른 멘토들이 저질이든 쓰레기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나만 잘하면 되었을 것을. 그때 이 논문을 읽었다면 진짜 좋았을 것 같은데...
차라리 활동비만 실비로 받고 따로 돈을 받지 않는 관계였다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뭐, 지금 같아서는 더 잘할 자신 있다. 하하하. 후, 열린 교실 또 한 번 하고 싶네... 분명 힘들었지만 정말 기쁘게 보냈던 시간. 지금도 기억에 뿌리 박힌 경험. 그리고 그 아이들. 이야, 이젠 대학생된 애들도 많겠네!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집단적인 담론 구조에서 혁명의 꿈은 개인의 시간으로 환치되고, 사랑의 열정과 사랑의 대상과 하나가 되었던 황홀한 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 앞에서 멈춰서버린다. 그래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꿈은 '청춘의 열병'으로, 혁명의 시간은 개인의 생애사적 시간 속의 빛나는 순간으로 그려진다. 이 서사는 지속되지 못한 혁명에 대한 사랑의 열병은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혁명을 살아남은 자의, 개인의 생애로 환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의 '좌절된 꿈'의 시간으로 환수된 혁명의 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와 환멸, 혹은 자기모멸의 시간 앞에서 멈춰 서버린다. 따라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사랑은 빛나는 순간 속에서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_권명아, <죽음과의 입맞춤 :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 사회 2010 봄, p. 298
이 글을 읽고 있자니 학부 때 알던 여러 남자들의 얼굴이 아주 새삼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저마다의 구호를 갖고, 저마다의 학정조(학생정치조직)등 집단의 후광을 두고, 가끔씩 일이 있으면 연례 사업처럼 깃발 들고 나가기도 하고, 술집에서는 과장된 영웅담이나 허세를 부리거나 고뇌를 연출하여 후배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선거철이 되었다 싶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수트를 빼입고 컬러 포스터 속에 등장하던 남자들. 그 남자들을 둘러싼 담화는 오직 뒷담화일 뿐이고, 그들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잠적하기 전까지는 매우 잘나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수없이 많은 연애를 했고, 그 연애의 끝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남자들만큼은 그 공동체 속에서 끝끝내 생존해 남았다. "혁명의 문법에서 사랑이 정치와 탈정치를 둘러싸고 젠더화된 위계를 구성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특정 주체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위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문법에서 청년의 열정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지만, 여성, 미성년, '무지한 대중'의 여정은 과잉되거나 부족한, 혹은 훼손되거나 결여된 것으로 간주된다. (같은 글, p. 295)" 음. 계속 다른 부분도 인용.
생애사의 리듬 속에서 혁명은 젊음의 열정, 젊은 날의 추억이 된다. 그 추억 속에서 첫사랑의 열병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지만, 결국 그 열병은 성장을 위해 누구나 겪는 성장통처럼, 통과제의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추억 속에서 혁명은 통과제의와 같은 자연사의 한 과정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생애사의 서사에서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자연 과정이 되어버리고, 현재가 아닌 과거의 몫이 된다.
또한 추억 속의 혁명은 혁명의 좌절에 대한 책임을 언제나 사랑의 대상에게 전가시키고, 추억의 주체는 혁명을 생애사의 원형적 기억으로 곱씹는다. 이렇게 추억이 된 혁명 속에서 변절은 언제나 타자의 몫이며, '나'는 혁명을 순수한 기억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배타적 소유권을 지닌 '순수한 주체'로 면죄된다. 추억이 된 혁명이 혁명에 대한 소유권, 혹은 혁명의 원본과 변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혁명을 생애의 "원형 기억"으로 추억하려는 욕망은 혁명을 과거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혁명의 좌절을 타자에게 전가한다.
_같은 글, pp. 300-1
권명아 평론가의 이 글은 4. 19에 대한 것이지만, 그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이는 단지 4. 19세대만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386세대", "87년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인 어떤 모종의 규칙이다.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젊음'과 사랑과 혁명과 열정과 섹스와 젠더의 결합 공식이랄까. 이 공식을 잘 풀어낸 사람들만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자격을 갖는다.
60년이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추억하는 서사들을 읽을 때 큰 불편함을 느꼈던 게 <정확히> 이런 점들 때문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도 매혹적인 배우들과는 별개로 불편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남자 작가들이 보여줬던 당시 세계는 분명히 예컨대 공지영 작가가 90년대 초반에 그려냈던 세계와는 다르다. 좀 더 생각과 독서를 이어나가야 할 주제.
시즌이 지날 때마다 <문학동네>랑 <문학과사회>의 주제를 보고 한 권씩 사모으곤 하는데, 이번 봄에는 두 계간지 모두 재밌어 보인다. <문학동네> 2010년 봄호는 지난 겨울호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 재밌게 읽을 글이 많다. 김연수 작가의 산문, 신형철 평론가의 소설론, 정이현 작가 인터뷰,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연설문, 한유주 작가의 단편소설, 등. 두꺼운 탓에 아직 눈길 한 번 두지 않은 페이지가 많다. 이번 <문학과 사회>는 일단 내리비치만 봐서는 한강 작가 인터뷰가 있다는 점, 그것 하나로만 기대하는 중! (왜 배송이 안오는그야..)
그리고 지금 방금은 헤르타 뮐러의 연설문을 읽었는데, 그는 시를 '썼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낱말을 모아 콜라주했다'고 표현한다. 이 말이 주는 느낌이 참 좋다. 시를 '쓴다'는 건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어쩌면 남자들이 경쟁하는 세계에 속한 것일지 몰라서, 연륜을 갖춘 남자들이 이성과 직관의 조합에 의해 정전에 오를 시들을 창조해내는 매커니즘을 가리키는 말일지 몰라. 그래서 시를 통해 정치와 역사와 더 거창하게는 철학을 쓰는 것이지. 아직 그럴 순번이 안되서 못하는 젊은 남자 시인들은 자의식과 욕망에 대한 시를 쓰겠지. 여기서 시의 대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씌어지는 것이겠지. 그렇게 '시를 쓴다'는건 사물에 대한 인식론이기도 하지. 또한 시를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읽는다는 것도, 전통적인 시 미학이 허용하는 규칙 속에서 쓰고 읽을 수 있을때 가능한 일이 되지. 그렇다면 선생에 대한 존경(그리고 동시에 그를 배반해야 내가 산다는 숙명)은 '시를 쓰는' 행위 자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시를 쓰지 않고 헤르타 뮐러처럼 '낱말을 모아 콜라주'하는 건 어떨까. 그 행위는 시를 쓴다는 표현에 대한 지극히 정당한 항거가 아니었을까. 헤르타 뮐러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작가들의 모임 악치온스그루페 바나트의 유일한 여성 멤버였다고 했다. 이랬던 그의 삶의 흔적이 시를 쓰는게 아니라 '낱말을 모아 콜라주'한다고 표현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레 상상하게 된다. 그건 사물을 다루는, 또 다른 인식론일테니.
<게릴라걸스의 서양미술사>를 통해 읽은 '다다의 마마' 한나 회히도 베를린 다다이스트들 중에서 얼마 안되는(혹은 유일한?) 여성 멤버였다고 했다. 그런데 회히는 다다의 마마였으므로 모임에서 샌드위치도 제공해야했고 유지비용도 대야 했다. 그랬는데도 첫 국제 전시회에서 회히는 제외되었고, 회히는 "아내가 설거지를 하라고 했을 때 정신발작을 일으키는 남자 예술가(ㅋㅋㅋㅋㅋㅋ)를 조롱하는" 연극을 공연해서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독일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현대적인 예술가라고 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 동지들은 오랜 기간 우리 여성 예술가들을 매력적이고 재능 있는 아마추어 쯤으로 여겼지요. 전문적인 지위를 부정한 채 말입니다."
뮐러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면 좋겠는데. 이상하게 작품을 읽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연설문에서 좋았던 구절 한 문단.
할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곧잘 아들 마츠에 대해 비통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래, 깃발이 나부끼면 이성은 트럼펫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법이지." 할아버지는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경고는 나치즘에 이어 나타난 독재, 나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그 독재에도 맞아 떨어졌습니다. 크고 작은 이익을 좇는 사람들의 이성이 트럼펫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날마다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트럼펫을 불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p. 422)
헤르타 뮐러씨, 저도 트럼펫을 불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은지 좀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어요. 트럼펫을 불지 않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자꾸만 말도 꼬이고 일상도 꼬여요. 봄 바람을 맞아 마음만 싱숭생숭.
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이 책[<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 정황의 차이가 그 책읽기의 차이를 부른 것이리라 생각한다." (89)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96)
생애 말년에 쓴 일기를 엮었다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아저씨'의 이미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배는 볼록도 아니고 불룩하게 튀어나와 늘어졌으며 목과 턱이 구분되지 않아 살집이 두둑하지만, 다리는 몸집에 비하면 얇은 그런 아저씨.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고 유행 한참 지난 고지식한 양복을 입으며 구두 역시 마찬가지다. 셔츠는 늘 꼭 윗단추까지 모두 잠그기에, 접시 위에 얹힌 돼지 머리를 상기시킨다. 바지는 늘 배바지다. 손목엔 금시계. 양말은 흰색이거나 검정색인데 늘 종아리 중간까지 올려 신으며 무좀 치료를 위한 발가락 양말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머리에 든건 많은데 그 학식이 땀으로만 배출되는지 봄 중순부터 가을 중순까지 몸을 움직일 때는 늘 땀을 흘리며 행여 식당에서 기름기 둥둥 떠있는 매운 찌개를 먹을 땐 티슈를 한통씩 써버리기 마련이다(그렇지만 맵고 짠 찌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산에라도 올라가서 찌개를 끓여 먹다가는 그 자리에서 나무아미타불 할지도 모른다. 물론, 젊었을 때엔 클레릭 이미지였을수도 있다.
책 읽기가 단지 책 읽기가 아니라 상황 읽기라는 그의 말, 그리고 사유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내 육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물론 그의 말에는 어폐가 좀 있다. 육체는, 어떤 초유기체적인 '나'가 있어서 '내'라는 소유격 명사를 통해 소유할 수 있는 대상(문법의 환상)이 아니라, 그냥 나 자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한국 남자 지식인들이 그랬고 그래왔으며 지금도 그렇듯이 정신주의자였던 셈이다.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김현은 데카르트 흉내를 내고 있지만(생각하다가 생각에 도달한다? 이 얼마나 @#$!한 표현인지), 의미심장하게도 뒤에 인용한 문단에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사회적 맥락의 냄새를 풍긴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많이 안좋았다고 한다. 누구나 말년이면, 별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상 건강이 안좋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육체)를 둘러싼 관계의 질서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가피하게 의존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건강한 그의 동료와 친구들이, 건강이 악화된 그를 어떻게 배려하고 도와주는지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앞서 인용한 96쪽에서 여기에 따오지 않은 내용을 보면, 젊었을 적 그의 육체는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을 때엔 육체가 그런 사고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적, 합리적, 비의존적 <사유>라는 환상은 건강한-이성애-개인-남성-육체에 의해 지배되고 관장된다. 그건 하나의 문화적 각본일 것이다. 그 환상이 생산하는 글 역시 어떤 육체 조건에 기반한 것이리라. 그런 각본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진다는 건 상당한 불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바치는 '후배'의 말을 보면, 그 후배 역시도 이 불운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자신의 육체적 징후들을 통해 몸 속 깊이 번져가는 죽음의 증식을 보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아무도 예측을 못한 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깊이, 그 응시와 사유의 궤적들을 글로 드러내왔었다."
그에 반해 시인 김수영은 좀 더 명민하다 할 수 있다. "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낙타과음(駱駝過飮) 중에서) 어떤 사람이 창작에 몰두할 때, 그 사람의 몸을 한 번 보자. 그는 빼어난 머리와 빠른 손으로 창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온 몸으로 창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뛰어난 비평가와 뛰어난 작가의 차이는, 이런 지점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서부터 나타나는게 아닐까?
여하간 그의 책은 신기하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지금은 전혀 알 수도 없고 거론되지도 않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 작가가 수두룩 하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100년은 갈것 같은데.. 이 책을 보니 역시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김현은 또 이렇게 적었다. "르네 샤르가 죽었다. 이제 대가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가보다." (148) 그러나 대가들은 늘 존재했고, 얼마 전에도 우리는 여러 대가를 떠나보냈다. 대가들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막 읽기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은 '현상학적 사랑관'을 보여준다. 사교 모임 같은 자리에서 자기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사교계의 불량품"들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한편 의외성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접근해야 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이 아니라, '그 같은 사람이 (내가) 이럴 때 이곳에 나타나다니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인 셈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은 '그'와 '멋있음' 사이에 수없이 깔린 우주적인 연결고리를 사랑한다. 이는 두 단어 사이의 공간을 넓히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엔 오로지 우연 뿐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도 인식으로 남아야 한다.
이러한 사랑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얼까? 일단 '낭만적 사랑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울 메이트'에 대한 열망, 하루키 단편 소설의 표현에 따르자면 "100%의 여자 아이"라든가 하는 식의 완벽함에 대한 희구가 늘 존재한다. 또한 지금 내가 마주하는 모든 비루한 것들 너머에 진정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랑 그 자체도 유예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나타났다고 믿게 되는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기꺼이 투기(投己)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도 존재한다. 최상의 경우에 다다랐을 때, 낭만적 사랑관은 현상학적 사랑관과 반대로 '그는 참 멋있어'라는 문장과 만난다. 이는 '그'와 '멋있음' 사이의 우주를 축소하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에 필연의 질서가 비집고 들어온다. 낭만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 곧 존재가 된다.
나는 이 두 극단 어디에 서 있을까? 아마도 고원원과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과 유사한 유형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직한 일일 것이다)
어떤 작가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단점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누군가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의 단점을 마음에 두고 동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한때 매력을 느꼈던 사람에게서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매혹이 곤혹이 되고, 진담이 부담이 되고, 열정이 치정이 되고, 환상이 환멸이 되고, 사랑이 사죄가 되고, 진실이 진부가 되는 순간이다.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오로지 인격수련이다. 이 인격수련은 어쩌면 윤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사실 담배에 불을 붙일 때까지만 해도 아주 많은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목이 쓰라리고 기침이 나오고 눈이 매워지면서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그런 부작용들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담배의 첫 모금을 빨아들였을 때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워온 사람처럼 담배연기가 쑤욱 몸 안으로 들어왔다. 순하고 부드럽게,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그때 많이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쉽다니, 이렇게 별거 아니었다니……. 마음에서 어떤 벽 하나가 툭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편견과 관습과 자아의 작은 벽이.
김형경, <사람풍경>, pp. 129-30
내가 담배를 처음 피웠던게 언제였더라. 2005년 2월의 어느날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04학번이던 나는 '첫 후배'를 맞이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새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 결국 새터 D-Day가 되었고 나는 새벽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대감' 때문은 아니었고 단지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새터 준비하는 과/반 사람들은 <올리브>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고 나는 잠을 자고 싶었기에 짜증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와중에 여차저차 하여 나는 갑작스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아 하게 되었다. 역사 관련 교양 프로그램이었던가. 자의 반 타의 반 이었을 것이다. 그때 시간은 새벽 3시 경. 9시~10시면 학교에서 출발이었는데.
물론 나는 그 일을 맡은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성격과 달리 데드라인이 코 앞에 닥친 급박한 상황을 즐겨하는 편이다. 내 성품은 그걸 싫어라 하는 것은 물론이오, 그런 방식이 내 기질과 맞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뭐 어떤가. 사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투덜거릴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특권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나 진짜 바빠. 갑자기 일이 커졌단 말이지. 아 진짜 죽을 것 같애 ㅠㅠ" 이런 식으로. 물론 그런 투정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그 때, 모두가 피곤하고 잠을 자고 싶어했던 그 때에 내 투정을 들어줄 사람은 당연히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아침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땐 그냥 혼자 있는게 낫다. 하여 나는 <올리브>에서 먼저 나와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가는 길은 5분 남짓. 어쨌거나 사위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고 조용했고 그래서 나는 좀 외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재목은 아니었고 물론 지금도 아니다.
그래서 자취방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좀 더 걸었다. 잠시 뒤에 자취생 생활용품과 필수품의 만신전, <패밀리마트>의 초록 간판이 눈에 확, 하니 들어왔다. 한겨울 새벽, '사연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맥주를 사 마시면 왠지 간지가 흐르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 편의점엘 들어갔고, 잠시 뒤에 내 손에는 맥주 대신 시중에 깔린지 얼마 안 된 담배인 "더 원"과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아마 왠지 '맥주보단 담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정확히 위에 인용한 문단대로 일을 치렀다.
어렸을 때 아빠 근처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고, 집 수리를 하러 온 아저씨들이 며칠 동안 머물며 뿜었던 담배 연기도 싫어했고, 담배를 소유한 것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랑스러워 하는 초/중등학교 때의 아이들을 싫어했었던 내가, 내가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술은 마셔도 담배는 안 해! 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과거는 단지 과거가 되었다. 꼭 담배가 나를 위해, 바로 이 순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니, 드디어 내가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는 느낌이었다. 담배소명설.
이상하게도 그 해의 봄엔 과/반에 유달리 흡연 인구가 많았더랬다. 과/반에서만 스물 몇 명이었던가로 기억한다. 2004년엔 담배 안 피우는게 자랑이었던 과/반이었는데. 04학번 동기 중 딱 1명을 제외하곤 모두 비흡연자였는데. 그 해는 참 이상했긔…. 참으로 이상했긔…….
When an authoritarian regime approaches its final crisis, its dissolution as a rule follows two steps. Before its actual collapse, a mysterious rupture takes place: all of a sudden people know that the game is over, they are simply no longer afraid. It is not only that the regime loses its legitimacy, its exercise of power itself is perceived as an impotent panic reaction. We all know the classic scene from cartoons: the cat reaches a precipice, but it goes on walking, ignoring the fact that there is no ground under its feet; it starts to fall only when it looks down and notices the abyss. When it loses its authority, the regime is like a cat above the precipice: in order to fall, it only has to be reminded to look down…
권위주의 정권이 마지막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정권의 붕괴는 대개 2개의 절차를 따른다. 실제로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균열이 시작된다. 갑자기 사람들이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다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정권이 단지 정당성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집행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공포에 입각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화의 고전적인 장면을 알고 있다. 고양이는 절벽에 다다른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발 밑에 땅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해서 걷는다. 고양이가 밑을 바라보고 심연을 발견했을 때가 되어서야 고양이는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정권이 권위를 잃으면 정권은 이렇게 절벽 위의 고양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붕괴하기 위해서는, 밑을 내려다 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이 정권에 대한 분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분석들에는(그 분석을 집행하고 널리 알릴 채널이 없으니) 당연히 힘이 없고 그만큼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런 냉소주의 중에 가장 악질이 '국개론'일 것이고, 가장 평이한 것으로는 다음 총선(혹은 다음 보궐선거) 내지는 대선을 기약하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 공통적인게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정권은 무능하다" 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찰이나 검찰이 휘두르는 무기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눈앞에 어른대는 서슬퍼런 흉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그 반작용은 두려움, 공포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복종도 있을리 없다.
그러니까,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여러 가지 이유로 간혹 서울을 떠났지만 매번 곧 돌아왔다. 도시 전체가 옛 시대의 유산인 곳이나 빼어난 절경을 가진 곳에서도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내 서울이 그리워졌고 돌아오면 안도했다. 서울이 전적으로 태평하고 무사한 도시여서가 아니었다. 대개의 삶이 그렇듯, 그런 날은 일부에 불과했다. 안도감이나 그리움은 서울을 벗어나 있을 때에나 가능했다.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서울은 나와 가장 닮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 편혜영, 「크림색 소파의 방」서문(???), p. 211
그 도시는 나의 유년시절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철없이 논다.
- 윤성희,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서문(???), p. 184
소설집을 들춰보다가 어쩔 수 없이 깊이 공감하게 된 문장. 그랬다. 안도감, 그리움은 서울에 있을 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철없이 놀 수 있었고 철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덧붙여 편혜영씨의 말에 토를 조금 더 달자면,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하기만 한 나와 가장 닮았을 뿐 아니라,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나를 가장 받아들여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을 배경으로 <테마 소설집>이 얼마 전 나왔다. 나로서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로 읽혀서 책을 샀는데 솔직히 말해 서울은 너무나도 '서울'이기에 다른 문학에서도 충분히 서울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특별히 이 소설이 '서울 테마 소설집'이라고 느끼진 못하겠다. (난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인터넷 그림을 볼 땐 소설집의 '쿨'하고 '감각적인' 북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첫 인상에 비해 쪼오금은 실망할 수밖에.
소설집에서는 '서울성(性)'이랄까 'seoulness'랄까, 하는 무언가에 대한 직접적인 사유를 읽어 내기 힘들었다. 내가 기대했던건 어쩌면 이것이었을테다. 다시 말해, 결국 내가 가진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에 합치하는 소설은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조각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면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어떤 총체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이게 곧, 서울인가?). 내 소설 편식증 때문에 전혀 읽히지 않는 소설도 있었고.. 조금은 아쉽다.
그래도 일단 잘 읽히고 재밌는 소설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건졌다. 몽땅 필사해 뒀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