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매우 잘 알려진 심리학 실험 중에 하나다. 실험의 개요는 이렇다. 사람들을 실험실로 초대해서,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다고 배경을 깔아둔다. 초대된 사람은 '피험자'가 된다. 다른 초대자도 같이 등장하지만, 그는 '희생자'로 역할이 결정된 배우이다. '피험자'는 선생이 되어 희생자가 문제에 오답을 말할 경우 전기 충격을 주게 된다. 최소 15V에서 최대 450V까지 버튼이 있다. 물론 전기 충격은 가짜다. 희생자는 연기를 할 뿐이고, 피험자는 실험자의 사전 지시와 독려에 따라 버튼을 누르면 되는 일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사전 설문조사에서는 10%도 안되는 사람들이 최대 전압까지 충격을 줄거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엄청난 결과가 나왔다. 무려 65%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자에게 450V까지 충격을 줬던 것이다. 나머지 35%의 사람들도 실험 도중에 중단했을 뿐, 희생자에게 전기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복종 실험이다. 물론 그의 책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이 실험에 대한 자세한 소개, 그리고 실험 결과에 대한 그의 세세한 분석도 함께 수록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복종은 불가피한 것일까? 복종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날까? 복종의 맥락에 들어가면 개인들은 어떤 변화를 겪을까? 복종하는 개인은 자율적인 개인과 어떻게 다를까? 복종은 어떤 경우에 유지되며 어떻게 정당화 될까? 밀그램이 드러내는 바가 너무 많아서 요약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에서는 가치와 도덕이 행동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라는 점일 것이다. 즉 자신의 도덕적 신념이 어떻고, 자아이상이 어떠하든 상관 없이, 실제 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힘에 있어서, 가치는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성장배경, 권위체계, 이데올로기, 상황, 심리적 압박 등이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권위 있는 실험자(예일대 연구자, 하얀 제복, 과학자)의 지시에 따라 위험하다 싶을 정도의 전기 충격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희생자가 심장에 병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실험을 중단하라고 외쳐도, 심지어 기절한 것처럼 보여도 말이다.
밀그램이 분석하는 '복종의 선행조건'은 이렇다. 복종하는 개인은, ⓐ
가족(도덕적 명령을 처음 배우는 곳. 부모는 도덕적인 명령을 아이에게 하는 것을 통해 1) 구체적인 도덕적 내용을 2) 명령과 권위자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
제도적 환경(학교라는 제도적 권위와 선생과의 관계라는 일상적 권위체계 하에서, 아이들은 조직의 틀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
보상(복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체적 보상이 있다. 승진이 대표적인 예인데, 승진은 개인에게 만족감을 줌과 동시에 권위체계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제도이다)이라는 일반적인 선행 조건을 갖는다. 그리고 구체적인 맥락에 와서는 ⓐ
권위에 대한 지각(권위는 맥락 안에서만 유효하며, 이 권위는 개인이 가진 특성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부여하는 비인격적인 지위에 따라 부과된다), ⓑ
권위체계로의 진입(권위를 지각함과 동시에 나와 관련이 깊은 권위자라는 걸 인식하면 권위체계로 진입한다), ⓒ
권위자의 명령과 기능의 조화(권위자가 발휘하는 기능과 실제 명령은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아무리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도 사적인 애정까지 명령할 순 없다), ⓓ
강력한 이데올로기(상황의 통제자는 합법적이어야 한다.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은 훌륭한 합법적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의 자발적 복종을 확보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승인된 자발적 동의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으며, 거대한 비용지출 없이는 붕괴하지 않는다) 등에 의해 복종은 유지된다.
이렇게 복종하는 개인은, 자율적으로 기능하는(자신의 행동 자체에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는) 개인이기를 멈추고 밀그램이 <대리자적 상태(agentic state)>라 부르는 상태로 진입한다. 이런 상태에 진입한 개인은 평소의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되고, 이 개인들은 대리자적 상태에 진입한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기의 모습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일단 대리자적 상태에 들어서면 개인들은 권위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대리자적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
조율(권위자는 구체적인 일반 개인들보다 더 강한 초인적 특성을 가진 인간으로 재정의 되는 조율을 거친다. 반대로 폭력의 희생자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 권위자의 말만이 '들을 만한 것'으로 인지된다), ⓑ
상황의 의미를 재정의(권위자는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통제한다. 이는 공식적 해석이 되며, 한 번 상황이 정의되면 그 상황의 논리에 따라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를 '프레임'이라 봐도 좋다) 하며, ⓒ
책임감의 상실(복종하는 사람들은 권위자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지만, 지시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잃는다. 하급자는 권위자가 요구한 행동을 수행한 여부에 따라 수치심이나 성취감을 느낀다)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리자적 상태로 진입해 권위자에 복종하면서 책임감을 상실하게 된 개인들은, 어떻게 이 상황에 계속 구속되는 걸까? 밀그램은 크게 세 가지 정도를 지적한다. 하나는 ⓐ
행동의 순차적 특성이다. 즉 초기에는 권위자의 명령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행동을 반복함에 따라 그 행동을 계속하는데 불편함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인지불균형이론 같은 느낌을 주는데, 개인들은 상황과 신념이 모순되는 상황에 처하면, 모순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바꾸기 어려운 상황보다 훨씬 더 바꾸기 쉬운 신념을 바꾼다는 것이다. 신념을 바꾸면 모순은 쉽게 해소되고 상황은 정당화 된다. 그렇게 초기의 도덕적 불편함은 연쇄되는 후속 행동으로 중화되며, 이는 전기 충격이나 학살 같은 파괴적 행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다른 하나는 ⓑ
상황적 의무이다. 모든 상황에는 행동을 규제하는 상황적 불문율이 있는데, 일단 상황이 규정되면 그 상황에 대한 도전은 '도덕적 위반'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의무와 위반의 경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회화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복종하는 사람들은 대개 권위자(권위를 지녔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권위자를 거부하는 걸 지극히 어려워 한다. 이에 대해서는 밀그램이 제시하는 일상적인 실험도 있다. 대학생이라면 교수에게 찾아가서 '교수님'이라는 호칭 떼고 이름만 불러보라는 것이다(어이, 김 교수, 혹은 조XX씨!). 그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면, 상황적 의무가 개인들을 얼마나 구속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은 이 위반과 위반에 따르는 긴장을 피하기 위해 차선책으로 복종을 선택한다. 또한 권위자를 부정하는 것은 권위자보다는 피험자에게 감정적 동요를 주는 것으로, 피험자에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상처를 주는 일이다. 도덕적 위반일 뿐 아니라, 어떤 접대를 받아야 마땅할 권위자에게 해당하는 접대를 하지 않아서 상처를 줬다는 느낌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
불안이 있다. 권위자에 대한 규칙을 위반하는 건 개인들에게,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 위협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즉 나 혼자만 조직을 붕괴시키고 질서를 교란한다는 불안감이다.
책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이와 관련해서, 나치 독일에 복무한 사람들의 심리적 특성을 조사한 연구도 어디선가 봤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의식이나 개인적 신념을 중화(neutralization)시키는 심리적 매커니즘에 대한 연구였다. 기억나는대로만 써 보겠다. 먼저 ⓐ
책임감의 부정(denial of responsibility)이 있다. 즉 자신이 저지른 만행은,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지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밀그램 역시도 실험에서 이런 점을 지적하는데, 450V까지 전기 충격을 가한 피험자들은 오히려 희생자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탓하거나, 실험자와 맺은 계약을 이행할 의무 때문이라거나,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 전기 충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자기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희생의 부정(denial of victim). 희생자는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로 의미화되며, 따라서 희생자에 대한 공격은 학살이나 폭력이 아니라 정당방위가 된다. ⓒ
상해의 부정(denial of injury). '학살'이 아니라 '최종 해결책', '정화(cleansing)', '목표 제거', '목표 거부', '부수적 피해' 같은 단어들이 동원되어 피냄새를 감춘다. ⓓ
인간성의 부정(denial of humanity). 희생당한 이들은 희생당해 마당한 존재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비인간(subhuman), 짐승, 원숭이 같은 단어들을 동원하면서 희생자들의 인간성을 부정한다. ⓔ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condemning the condemners). 희생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난한다. 예컨대 과거사를 들먹이면서 너희들은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더 높은 가치에 호소하기(appealing to higher loyalties).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충성', '의무', '신성' 같은 가치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책임감과 도덕적 견실함을 유지한다. (이런 걸 보면 꼭 한국의 꼴보수우파들이 생각난다니까-_-)
당연히 이러한 실험을 보고 있자면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이히만 같은 독일 나치 전범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정신병자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믿기 싫은 주장. 그러나 이러한 실험과 분석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신념과 다르게 어떻게 복종에 충실히 복무하게 되며, 그 복종의 결과를 어떻게 부인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까지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체제가 저지르는 거대한 폭력과 권위 앞에서, 우리는 개인이기를 포기하고 권위자의 대리자가 되어야 할 뿐일까? 선택권 따위는 없을까?
스탠리 밀그램은 여러 차례 변형 실험을 통해, 단지 복종할 뿐인 개인이 아니라 저항하는 개인의 모습도 보여준다. 예컨대 처음에 말했던, 450V까지 충격을 가한 65%의 사람들은 희생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실험을 진행했다(원격조건). 희생자는 격리되어 있고, 피험자는 희생자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만 느꼈다. 여기서는 35%의 사람들만이 실험 도중에 저항했다. 상황이 조금 바뀌어 희생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자, 37.5%의 사람들이 저항했다(음성반응 조건). 희생자를 같은 방 안에 두자 60%의 사람들이 저항했으며(근접성 조건), 희생자가 전기 충격을 받기 위해서는 실험자가 직접 희생자의 몸을 만져야 되는 조건에서는 70%의 사람들이 저항했다(접촉-근접성 조건).
그리고 피험자들에게 전기 충격의 강도를 선택할 기회를 주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낮은 최소한의 전기충격만을 가했다. 한편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험 도중에 극도의 '긴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긴장은 피험자들이 실험에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과,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긴장은 피험자의 약점보다는, 오히려 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에서 실천되는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권위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권위자의 눈만 현장에 없으면 대체로 피험자들은 충격을 주기를 거부하거나 실험자를 속였다). 또한 밀그램은 '집단 효과'라는 희망도 보여준다. 동료를 추가해서 실험했을 경우, 동료가 저항을 시작하자 동조 효과에 의해 놀랍게도 40명 중에 36명이 실험에 반항했다. 밀그램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상호 지지하는 것은 과도한 권위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어벽"이라고 주장한다. 즉, 실험의 결과에 충격을 받을 순 있지만, 그들의 도덕성을 의심할 것 까지는 없다. 우리는 상황 속의 인간이지, 도덕적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아니므로.
그러나 밀그램은 또한 현대 관료사회에서는,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권위를 동원하더라도 <직접>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어 폭력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첫째로 과학이나 정치 같은 합법적인 권위가 폭력의 수행을 정당화 할 수 있으며, 둘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폭력에 참여하지는 않고 중간 관리자 같은 역할만을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체제에 들어가면 온전히 통합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분절으로만 존재한다. 여기서 책임감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권위가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명령에 따라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매우 폭력에 둔감하고 권위에 충실한 일부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일부를 비난하면서 우리의 도덕적인 견실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그 폭력과 권위를 지탱하는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도덕적 감정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 순수한 악인은 드물게 존재하고 대부분은 선량한 악인들이다. 우리는 복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고 태어났다. 그리고 "삐딱한 지적저항"은 권위와 폭력 앞에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기는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건 자위일 뿐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권위의 의지 실현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복종은, 반복 강조하지만, 심리가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자 그 결과이다.
그 밖에도 밀그램의 책에는 다소 묵시록적으로 읽히는 부분들도 굉장히 많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지금이 두 번째 독서이지만) 여전히 믿기 싫은 부분들도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이 대체로 남자들의 남자들에 대한 복종에 대한 것이라는 인식까지 오면, 조금은 더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쩌겠어. 다른 나라의 맥락에서 진행한 실험은, 오히려 복종율이 더 높게 나왔다는데. 한국에서는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텐데.
권위의 폭력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권위와의 관계를 아예 끊는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