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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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2008/03/28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중에서
독서노트 / 2010/09/05 23:47
달에서 흘러 내리는 빛은 한낮의 우리 삶이 벌어지는 무대를 비추는 것이 아니다. 달빛이 의심스럽게 빛을 던지는 구역은 지구가 아니라 지구의 반대편, 혹은 지구의 부속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곳은 더 이상 달이라는 위성을 가진 지구가 아니다. 스스로 달의 위성으로 변한 지구이다. 그 땅의 넓은 가슴은ㅡ그 가슴이 호흡할 시간이었는데ㅡ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삼라만상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대낮에 빼앗긴 긴 베일을 다시 착용할 수 있게 된다. 나무 블라인드 틈새로 내게 밀려온 창백한 빛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불안 때문에 나는 잠을 설쳤다. 들락날락하면서 달은 내 잠을 토막 내버렸기 때문이다. 달이 방 한가운데 들어와 있을 때 잠에서 깨면, 나는 그 방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방은 달 이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벤야민, <달>, <<베를린의 유년시절>> 중.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풍부하게(다른 의미를, 다른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낳는다는 의미에서) '달빛'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걸까. 번역자의 번역에 조금 더 유려했다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한다. 조금 이질적인 느낌의 글이 주는 이국성도 매력일 수 있으니까. 오늘도 그의 글쓰기에 대한 질투는 거세질 뿐이다. 벤야민이 유년시절을 보냈을 저 방도 몹시 탐난다.

습하거나 건조한 달빛, 유혹하거나 관조하거나 물리치는 달빛. 그 어느 것조차도, 언제 어느때라도 모두 매력적이다. 서울은 광해(光害)가 심하기 때문에, 달빛이 강렬할 때 조차도 빛을 느끼기가 너무 어렵다. 그러나 가끔은, 오래된 캐러멜 같은 가로등 빛을 뚫고 달빛이 몸에 내려 앉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왜 늑대인간(werewolf)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달빛을 뜻하는 '문샤인(moonshine)'은 '밀수입한 술' 혹은 '밀조한 술'이라는 의미도 있다. 엄격한 금주령에 굴하지 않고 밤에 술을 몰래 빚어 달 밝은 밤에 들이켰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잔하면서도 또 즐겁다. 빛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 혹은 빛이 세상을 지배해야만 하는 시대 이전에는 밤이 얼마나 길고 달빛이 밝았을까. 

달빛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주 어릴 적이었는데.. 나는 뒷산에 동네 또래들이랑 쥐불놀이를 하러 올라갔었다. 그날은 정월대보름이었다. 마침 뒷산엔 교회를 짓고 있었고 우리는 쥐불놀이를 하다 말고 춥다는 이유로 폐자재로 불을 때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담력테스트를 하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뒷산 공동묘지로 올라갔다. 그날은 달빛이 너무나 환해서 불을 켜고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한 명이 없어졌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묘지에 올라가서 이리 저리 살피는데- 없어졌던 한 명이 갑자기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혼비백산. 정작 우리가 모두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그 한 명도 덩달아 혼비백산. 그렇게 숨 차오르게 뛰어 산을 내려왔을 때 내 눈 앞에 그 환한 달이 들어왔다. 크고 둥글었다. 세상은 온통 은은하고 차가운 은빛이었다. 그러나 왠지 따뜻한 느낌이었다.

달빛을 한껏 쬐고 싶은 밤이다. 왜 일광욕이라는 말밖에 없는 것이냐. 내일은 월요일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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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8/20 10:00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ㅡ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ㅡ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글을 잘 쓴다는 것」,『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p. 26


이 짧은 글에도 분석할 만한 여러가지 전제가 들어 있지만, 그 전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 없이 글 모두에 동의할만 하다. 글을 쓸 때 두고두고 참고할만한 구절이어서 마침내 옮겨 둬 본다. 그런데 자기가 글 쓰는 스타일을 <잘 쓴다는 것>으로 규 정짓는 것 같아 피식피식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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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7/12 12:17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82359.html>
그런데 너무 비싸... 그리고 읽다 보면 돌아버릴지도.


실존주의-구조주의 논쟁 촉발한 ‘그’ 책
사르트르 후기 대표작 50년만에 번역
20년 정치적 실천의 ‘사상적 응축’

고명섭 기자 

〈변증법적 이성 비판 1·2·3〉
장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변광배·윤정임·장근상 옮김/나남·각 권 3만8000원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사진)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다. 프랑스 지식계를 뒤흔들었던 1960년대 실존주의-구조주의 논쟁의 진원이 된 저작이기도 하다. 1960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 1권(한국어판 1·2권) 출간 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 저서를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논쟁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논쟁을 타고 이른바 ‘구조주의 시대’가 열렸다. 미완으로 남은 <변증법적 이성 비판> 2권(한국어판 3권)은 사르트르 사후인 1985년에 유고 상태로 출간됐다. 1권이 출간된 지 50년 만에 이 기념비적 저작 전체가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한국사르트르연구회 소속 전공자 네 사람의 공동 노력의 소산이다.

이 저작의 번역이 이렇게 늦어지게 된 것은 1400쪽에 이르는 원서의 방대한 분량에도 이유가 있지만, 한국의 사르트르 수용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1950년대 전후 상황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한국 지식인들의 황폐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지적 안정제 노릇을 했다. 전기 사르트르 사상을 대표하는 <존재와 무>(1943)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찍이 번역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그의 과격 좌익 활동이 알려지면서 ‘과격파 사르트르’가 외면받기 시작했고, 후기 사상이 집대성된 <변증법적 이성 비판>도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사르트르가 이 책을 쓴 것은 1957~1960년 사이 3년 동안이었다. 대작을 쓰는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건강을 잃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의 땅거미에 쫓겨 미친 듯이 글을 썼고, 각성제 코리드란을 끼고 살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때의 사르트르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펜을 휘갈겨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하루에 코리드란 한 튜브를 복용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이면 그는 녹초가 됐다. 그는 가끔 모호한 제스처를 하기도 했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쓰고도 대작을 완성하지 못했고, 다만 건강을 되찾았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사르트르 후기 사상을 대표한다는 말은 곧 그의 후기 활동을 종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차세계대전 와중에 그는 현실 자체와 마주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첫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종전 이후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소련의 ‘동반자’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2년 사르트르는 ‘두 번째 개종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공산주의와 자신을 거의 일치시켰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반공산주의자는 개다. 나는 평생 결코 공산주의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그는 다시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후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바로 이 20년에 걸친 정치적 실천이 사상으로 응축된 작품이다.

이 저작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57년의 실존주의 상황’을 주제로 한 글을 써 달라는 폴란드 잡지사의 요청이었다. 거기에 응해 쓴 글이 이 책의 서두에 놓인 ‘방법의 문제’다. 170쪽 분량의 이 글이 사실상 결론에 해당하는데, 그 뒤의 본문은 이 결론에 이르는 긴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방법의 문제’는 원제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였는데, 이 제목이 주장의 요체를 좀더 쉽게 파악하게 해준다.

사르트르의 관심은 마르크스주의에 실존주의를 수혈하는 데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마르크스주의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주체인 인간들 각각의 삶을 사물로, 대상으로만 취급할 뿐 살아 있는 실존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진단이었다. 세계를 창조하는 살아 있는 주체를 불러들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 창조의 주체인 인간에게 합당한 지위를 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런 구상에 입각해 이 책에서 세워나가는 것이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인간학’이다. 전기의 <존재와 무>가 나(개인)와 타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주제로 삼고 있다면, 이 후기의 대작에서는 그 개인이 집단적 주체를 이루어 역사적·사회적 지평에 선다. 이 인간 집단이 역사와 사회를 만들고 다시 역사와 사회가 인간 집단을 제약하고 형성하는 이중적 과정이 변증법적 과정이고, 이 변증법을 포착하는 이성이 ‘변증법적 이성’이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이 이성의 힘과 한계를 시험하고 탐구하는, 다시 말해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하는 저작이다.

그러나 이 웅장한 작품은 곧바로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출간 이듬해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 저서 <야생의 사고>의 한 장(‘제9장 역사와 변증법’)을 할애해 사르트르를 “자기 사유에 갇힌 포로”, 서구문화 안에 갇힌 존재라고 비판했다. 사르트르가 서구 문명인 사회만 ‘참된 변증법’의 대상으로 보고, 이른바 ‘미개사회’를 저차원으로 깔아뭉갰다는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사르트르의 주체였다. 사르트르가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라고 보았던 그 주체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구조의 효과’, 곧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로 보았던 것이다. 옮긴이들은 구조주의 맹위에 밀려 사르트르의 주체가 모욕받은 채 후퇴했지만, 이제 그 구조주의도 퇴각한 마당에 사르트르의 주체는 다시 주목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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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7/11 12:32
근대 서구의 '미적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의 과학과 미학에 그 연원을 둔다. 근대 과학의 이식론은 그때까지 사물에 부여되었던 의미들을 벗겨내고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18세기 후반의 낭만주의에서는 계몽주의의 전도가 일어난다. 대상에 미적 태도를 견지하고, 미적으로 평가하는 자세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루는 인식적 관심, 다른 하나는 선인가 악인가를 다루는 도덕적 관심, 마지막으로 쾌인가 불쾌인가 하는 취미 판단. 칸트는 세 가지 판단이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역이 분명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세 범주의 혼용 속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괄호 넣기"라는 개념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에서부터 연유한 것으로, '무관심'을 그 기본으로 한다. 즉 사물의 어떤 측면엔 관심을 잠시 꺼두고, 특정한 인식론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주관의 능동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미는 감각적 쾌적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무관심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방기하는 데서 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것은 칸트의 숭고론인데, 숭고라는 미적 판단은 감성적 유한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무한함에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숭고는 이성적 무한성을 자기와 대립하는 대상에서 찾는 '자기소외'이다. 여기서 얼핏 보기엔 불쾌한 대상에 대응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주관적 능동성이 적극적으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적 태도는  역사 속에서 구구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를 심미주의적인 태도라고 한다면, 인류학·민속학이라고 하는 쌍 개념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식민주의·제국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새디스틱한 지배로 간주되는 식민주의·제국주의는 미적 태도에서 자신의 최고조에 달한다. 타자를 오로지 미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심미주의자는 일견 반식민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주의의 실현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그 기원을 은폐하며,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괄호에 넣은 것들을 타자 그 자체나 타자에 대한 동경과 혼동한다. 파시즘 같은 경우도 일견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을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괄호를 벗기고 다시 괄호를 씌우는 비평적 과정이다. 페미니즘, 게이 이론은 통상의 남성 독자들이 괄호 속에 언제나 넣어두었던 것들, 그리고 괄호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괄호를 벗길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괄호를 벗긴다는 것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을 잠시 괄호에 넣고 다시금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럴 때에도 비판은 소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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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7/09 22:29

보부아르는 '여자(woman)'라는 것은 역사적 관념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생물학적 사실성으로서의 섹스와 문화적 해석 혹은 생물학적 사실성의 의미작용으로서의 젠더는 구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한 구분법에 따르자면 여성이라는 것(to be a female)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실성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분법에서 여자라는 것(to be a woman)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것(to become a woman)이며, 신체를 '여자'라는 역사적 관념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제한된 가능성에 신체를 복종시키고 물질화하는 것이며, 신체적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급진적인 의지의 창조적인 힘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라는 개념보다는, 젠더 수행이 언제나 그리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일종의 감금 상태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전략'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젠더는 문화적 생존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 전략으로서의 젠더는 징벌적 성격의 결과를 낳는 수행이다. 젠더는 하나하나의 개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humanize)' 동시대 문화의 한 부분이다. 사실, 젠더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한 이들은 규칙적으로 처벌받는다. 젠더가 표현하거나 외재화하는 '본질'이란 것도 없고 젠더가 갈망하는 객관적인 이상이란 것도 없으며 그리고 젠더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젠더의 다양한 실천은 젠더에 대한 관념을 생산하며 그러한 실천 없이는 젠더는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젠더는 규칙적으로 그 기원을 은폐하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문화적 픽션으로서 분리되고 양극화된 젠더를 수행하고 생산하고 유지하는 암묵적인 집단적 동의는, 그것이 생산하는 신빙성에 의해 애매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젠더의 저자는 젠더의 구성과정이 개인의 신념을 필연성과 자연성으로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다양한 신체적 양식을 통해 물질화된 역사적 가능성은, 단지 감금된 상태에서 체현되고 위장된 징벌적 규제를 강제하는 문화적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_주디스 버틀러, <수행적 행위와 젠더의 구성>의 일부분


사실 글 자체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내가 과문하여 한국어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고 있다. 공유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참 많은데... 내 언어 실력에 한숨만 나오는 요즘.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접하는 과거의 버틀러는 여전히 매혹적. 누군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비록 타 학과에 속해있지만, 어쨌든 나는 인류학 전공을 희망하는 대학원생이( 될 예정이)다. 전공은 anthropology of education 이지만 나는 근본적으로는 인류학 지향이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교육학이나 인류학은 모두 인간의 문화화와 사회화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사회화하는데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사회를 인간화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건 교육학이라기보다는 인류학이라는 생각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난 후자를 택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알려진 어떤 인류학자는, 페미니스트 인류학은 젠더의 구성에 대해 묻는 학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제도들이 어떻게 젠더라는 프리즘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밝혀내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면 타당한 주장이다. 모든 사회 제도와 문화적·언어적 실천들은 모두 젠더라는 프리즘 없이는 제대로 구성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페미니스트 인류학인가? 그냥 젠더 연구지. 그의 관점에 따를 경우에도 젠더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화된다. 그리하여 젠더는 아무런 질문 없이 실체이자 본질이 된다.

반대로 버틀러는 그러한 실체화와 본질화 과정에 대해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했던 얼마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때론 잊고 지내도 결국엔 다시 돌아와 참조하게 되는게 바로 그녀의 글이다. 가끔은 유일하게 신뢰하며 읽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릴지라도 말이다.


덧) 보부아르가 한 유명한 말인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표현의 영역본은 "One is not born, but, rather, becomes a woman"이다. 한글 번역에서 "만들어진다"는 표현은 실존주의자로서의 보부아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을 인용하는 버틀러의 맥락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역본에 따르면 여자가 "된다"는게 맞다. 현상학적 실천, 제한된 가능성 속에서 주체의 극화된(dramatized) 실천으로서, 스스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번역이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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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6/28 22:18
그가 골수 수집가가 되는 것은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아마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어떻게 수집가의 특성이 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건 나에게 금시초문인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된다. 이 방면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것이 옛날부터 있어온 해묵은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다시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인용해보자. 어느날 그는 그의 서재를 보고 감탄하고는 으레 의무적으로 하는 물음, 즉 "당신은 이 책을 모두 읽었습니까?"라는 어느 속물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십분의 일도 읽지 못했습니다. 혹시 당신은 매일같이 본 차이나로 식사를 합니까?"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반성완 譯 에서


첫 번째 두려움은 독서의 의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머지않아 사라질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런게 사실이다. 특히 일정 수의 모범적 텍스트들이 그런 신성시의 대상ㅡ물론 그런 텍스트들의 리스트는 분야에 따라 다르다ㅡ이 되는데, 그런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금기이며 이를 어기면 눈총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두려움은 정독해야 할 의무로 불릴 수 있는데, 이는 첫 번째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읽지 않는 것도 눈총을 받지만, 후딱 읽어치우거나 대충 읽어버리는 것, 특히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로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어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ㅡ강의자들 대부분이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ㅡ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담론과 관계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한데 내가 경험해본 바로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 상대 역시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점차 보게 되겠지만,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기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하거나 평문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책읽기에 어떤 위험들이 들러붙는지를 부단히 강조해나갈 것이다. [...]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벤야민의 저 부분은 좀 웃겨서 퍼왔다. 원문엔 세브르 도자기라고 되어 있는데..
피에르 바야르의 책은 심심할 때면 펴보게 된다. 무엇보다 재밌다. 다른 책도 몇 권 번역되었는데 다른 것들은 별로고. 바야르의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지금 인용한 부분에도 등장하는 "눈총"이라는 말이 이 책의 핵심 단어인 것 같다. 그의 전공인 정신분석학에서도 그렇고.

버는 돈은 그다지 없는데 식비보다 책 구입비가 더 많이 나갈 수 있는 지금이, 그래도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서울 생활 시작하면 지금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할테니까. 밥도 대체로 사먹어야 될테고- 교통비도 많이 나올테고- 무엇보다 술값이 많이 들겠지. 그렇게 되면 통장 잔고를 끝없이 생각하며 필요한 책과 사고 싶은 책, 훔치고 싶은 책 따위를 끝없이 비교하며 갈등하게 되겠지.

그렇지만 책도 많이 사버릇해야 감식안이 생긴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땐 그래서 언제나 삐끗하기 마련이다. 최근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를 넘어 한국 동시대 소설을 섭렵(수집)하겠다는 의지로 소설책을 막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요샌 소설책도 양장본이 많고 비싸단 말이야.) 읽다가 재미없어서 내던져버린 책, 읽고 나니 너무 못써서 슬퍼진 책... 어떤 평론가는 나쁜 작품은 같은 이유로 나쁘고 좋은 작품은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좋다고 했는데, 나쁜 책에도 저 나름의 이유 때문에 나쁜 경우도 있다. 이런 책이 열다섯권이 쌓일 때 쯤, 나는 비로소 쉽게는 출판사의 마케팅 스킴에 낚이지 않을 눈을 갖게 된 거 같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저자의 이력은 어떤지, 번역자의 이력은 또 어떤지, 출판사는 어딘지, 참고문헌은 무엇이 있는지 ,특히 유명한 저자들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책의 어느 부분에서 인용해 왔는지, 인용할 때의 태도는 어떤지, 서문의 분위기는 어떤지(저자의 철학적 입장이 나타난다), 으레 쓰는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따위로 내게 좋은 책인지 아닌지를 좀 더 쉽게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게 교양이라면 교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편협과 습관이라면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래도 아직 멀었지.

헌데 교양이란 말은 너무 넓은 말이고, 사실 내가 딱히 '교양' 있는 집에서 태어나 자란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교양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주눅들기 일쑤다. 근데 문제는 교양인이 되는 것도 좋고 교양을 쌓는 것도 좋지만, 쌓으려면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양 속물은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지. 통속적이고 진부한 지식을 단정적으로 젠체하면서 말하는 건 정말 티 난다구. 계속 그러면 진짜 솜털까지 서버린다고, 내가 다 부끄러워서. 이를테면 이런 것. 인류학을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제국의 학문이지, 미국에서나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것. 사회학이나 통계를 공부하겠다하면, 아 그거 엘리트를 위한 학문이지. 뭐 이런 것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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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6/17 13:52
사적인 젠더 관계에는 좀더 큰 사회에서 맺어진 양성 간의 유력한 합의라는 밑바탕이 있다. 전체적으로 여성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부부는 감정 교환의 기본적인 차원에서 이미 동등해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여성 변호사가 남편만큼 많은 돈을 벌고 존경을 받으며서 일하고 있고 남편도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여성 변호사는 여전히 남편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집안일에 동등하게 참여한다는 사실에 자신이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여성 변호사의 발언권은 남들이 보기에 눈에 띄게 센 것이고, 남편의 발언권은 눈에 띄게 약하다. 시장 상황 속에서 다른 배우자를 만난다면 남편은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좀더 큰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때, 이 여성 변호사는 남편을 잘 만난 것이다.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현실에 화가 나더라도 그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그 여성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Emotional Labor)>, 이매진, p. 116의 각주에서. 강조는 내가



이 각주를 읽고 나니 일전에 여성학 협동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접했던 여러모로 당혹스러웠던 발언들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가 될 것 같다. 당시 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기혼' 여성학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고 어색했었다. 그 태도를 요약하자면, 당신은 어떻게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런 일반적인 질문을 '기혼' 여성학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겼다. 왜냐면 대체로 '기혼' 여성학자들은 그런 질문 앞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을 얼버무리거나,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잘 모를 때 멋모르고 결혼을 했다고 말하거나, 아이 때문에 코가 꿰였다고 말하거나. 결혼 생활은 어떤 모종의 규범에 어긋난 것이므로, 감추고 '변명'해야하는, 어떤 수치였다. 물론 결혼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의 대립, 결혼의 제도성과 폭력성, 배타성 등에 대해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규범이 있다는 것도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걸 개인의 삶에 갖다 대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좀 미워하기도 했다.

사실 그걸 '공격'으로 이해했던 건,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주관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이 진짜로 인신 공격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이 위에 인용한 부분과 관련이 있는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기혼' + 여성학자라는 조합이 그만큼 예외적이고 눈에 띄는 공식이라는 것이며, 이는 비단 여성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전문적이라고 간주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해당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 말이다. 우리 사회의 부박한 성별 구조를 다시금 드러내고 증명하는.. (분절되어 따로 놀던 경험과 지식이 통합되는구나 ㅎㅎ)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구성된 세계를 창조하는, 그러니까, 불평등한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로 입힌 옷을 벗어버리고,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판타지일 것이다. 여전히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판타지. 물론 판타지라고 해서 나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게 아니다. 왜냐면 판타지는 낭만의 언어이자 비판과 가능성의 언어이며, 개인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형식이자, 하나의 유기체가 대중무리가 아닌 다른 개인 유기체를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도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성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어제는 어떤 대학원생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실천>에 대해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입학하는 대학원이다. 실제 시민사회운동을 하면서, 혹은 활동가 정체성을 강하게 지향하는 이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곳이다. 활동가에게도 학위가 요구되는 사회니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학위가 계급이 되는 사회니까. 어쨌든 그 블로그를 2시간이 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왠지 좀 초조해졌다.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보다는, 불평등이란게 무엇인지 그리고 불평등이 가능한 조건부터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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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6/15 09:13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매우 잘 알려진 심리학 실험 중에 하나다. 실험의 개요는 이렇다. 사람들을 실험실로 초대해서,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다고 배경을 깔아둔다. 초대된 사람은 '피험자'가 된다. 다른 초대자도 같이 등장하지만, 그는 '희생자'로 역할이 결정된 배우이다. '피험자'는 선생이 되어 희생자가 문제에 오답을 말할 경우 전기 충격을 주게 된다. 최소 15V에서 최대 450V까지 버튼이 있다. 물론 전기 충격은 가짜다. 희생자는 연기를 할 뿐이고, 피험자는 실험자의 사전 지시와 독려에 따라 버튼을 누르면 되는 일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사전 설문조사에서는 10%도 안되는 사람들이 최대 전압까지 충격을 줄거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엄청난 결과가 나왔다. 무려 65%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자에게 450V까지 충격을 줬던 것이다. 나머지 35%의 사람들도 실험 도중에 중단했을 뿐, 희생자에게 전기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복종 실험이다. 물론 그의 책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이 실험에 대한 자세한 소개, 그리고 실험 결과에 대한 그의 세세한 분석도 함께 수록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복종은 불가피한 것일까? 복종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날까? 복종의 맥락에 들어가면 개인들은 어떤 변화를 겪을까? 복종하는 개인은 자율적인 개인과 어떻게 다를까? 복종은 어떤 경우에 유지되며 어떻게 정당화 될까? 밀그램이 드러내는 바가 너무 많아서 요약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에서는 가치와 도덕이 행동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라는 점일 것이다. 즉 자신의 도덕적 신념이 어떻고, 자아이상이 어떠하든 상관 없이, 실제 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힘에 있어서, 가치는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성장배경, 권위체계, 이데올로기, 상황, 심리적 압박 등이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권위 있는 실험자(예일대 연구자, 하얀 제복, 과학자)의 지시에 따라 위험하다 싶을 정도의 전기 충격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희생자가 심장에 병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실험을 중단하라고 외쳐도, 심지어 기절한 것처럼 보여도 말이다.


밀그램이 분석하는 '복종의 선행조건'은 이렇다. 복종하는 개인은, ⓐ 가족(도덕적 명령을 처음 배우는 곳. 부모는 도덕적인 명령을 아이에게 하는 것을 통해 1) 구체적인 도덕적 내용을 2) 명령과 권위자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 제도적 환경(학교라는 제도적 권위와 선생과의 관계라는 일상적 권위체계 하에서, 아이들은 조직의 틀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 보상(복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체적 보상이 있다. 승진이 대표적인 예인데, 승진은 개인에게 만족감을 줌과 동시에 권위체계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제도이다)이라는 일반적인 선행 조건을 갖는다. 그리고 구체적인 맥락에 와서는 ⓐ 권위에 대한 지각(권위는 맥락 안에서만 유효하며, 이 권위는 개인이 가진 특성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부여하는 비인격적인 지위에 따라 부과된다), ⓑ 권위체계로의 진입(권위를 지각함과 동시에 나와 관련이 깊은 권위자라는 걸 인식하면 권위체계로 진입한다), ⓒ 권위자의 명령과 기능의 조화(권위자가 발휘하는 기능과 실제 명령은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아무리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도 사적인 애정까지 명령할 순 없다), ⓓ 강력한 이데올로기(상황의 통제자는 합법적이어야 한다.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은 훌륭한 합법적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의 자발적 복종을 확보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승인된 자발적 동의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으며, 거대한 비용지출 없이는 붕괴하지 않는다) 등에 의해 복종은 유지된다.

이렇게 복종하는 개인은, 자율적으로 기능하는(자신의 행동 자체에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는) 개인이기를 멈추고 밀그램이 <대리자적 상태(agentic state)>라 부르는 상태로 진입한다. 이런 상태에 진입한 개인은 평소의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되고, 이 개인들은 대리자적 상태에 진입한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기의 모습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일단 대리자적 상태에 들어서면 개인들은 권위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대리자적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 조율(권위자는 구체적인 일반 개인들보다 더 강한 초인적 특성을 가진 인간으로 재정의 되는 조율을 거친다. 반대로 폭력의 희생자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 권위자의 말만이 '들을 만한 것'으로 인지된다), ⓑ 상황의 의미를 재정의(권위자는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통제한다. 이는 공식적 해석이 되며, 한 번 상황이 정의되면 그 상황의 논리에 따라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를 '프레임'이라 봐도 좋다) 하며, ⓒ 책임감의 상실(복종하는 사람들은 권위자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지만, 지시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잃는다. 하급자는 권위자가 요구한 행동을 수행한 여부에 따라 수치심이나 성취감을 느낀다)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리자적 상태로 진입해 권위자에 복종하면서 책임감을 상실하게 된 개인들은, 어떻게 이 상황에 계속 구속되는 걸까? 밀그램은 크게 세 가지 정도를 지적한다. 하나는 ⓐ 행동의 순차적 특성이다. 즉 초기에는 권위자의 명령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행동을 반복함에 따라 그 행동을 계속하는데 불편함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인지불균형이론 같은 느낌을 주는데, 개인들은 상황과 신념이 모순되는 상황에 처하면, 모순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바꾸기 어려운 상황보다 훨씬 더 바꾸기 쉬운 신념을 바꾼다는 것이다. 신념을 바꾸면 모순은 쉽게 해소되고 상황은 정당화 된다. 그렇게 초기의 도덕적 불편함은 연쇄되는 후속 행동으로 중화되며, 이는 전기 충격이나 학살 같은 파괴적 행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다른 하나는 ⓑ 상황적 의무이다. 모든 상황에는 행동을 규제하는 상황적 불문율이 있는데, 일단 상황이 규정되면 그 상황에 대한 도전은 '도덕적 위반'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의무와 위반의 경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회화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복종하는 사람들은 대개 권위자(권위를 지녔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권위자를 거부하는 걸 지극히 어려워 한다. 이에 대해서는 밀그램이 제시하는 일상적인 실험도 있다. 대학생이라면 교수에게 찾아가서 '교수님'이라는 호칭 떼고 이름만 불러보라는 것이다(어이, 김 교수, 혹은 조XX씨!). 그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면, 상황적 의무가 개인들을 얼마나 구속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은 이 위반과 위반에 따르는 긴장을 피하기 위해 차선책으로 복종을 선택한다. 또한 권위자를 부정하는 것은 권위자보다는 피험자에게 감정적 동요를 주는 것으로, 피험자에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상처를 주는 일이다. 도덕적 위반일 뿐 아니라, 어떤 접대를 받아야 마땅할 권위자에게 해당하는 접대를 하지 않아서 상처를 줬다는 느낌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 불안이 있다. 권위자에 대한 규칙을 위반하는 건 개인들에게,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 위협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즉 나 혼자만 조직을 붕괴시키고 질서를 교란한다는 불안감이다.


책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이와 관련해서, 나치 독일에 복무한 사람들의 심리적 특성을 조사한 연구도 어디선가 봤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의식이나 개인적 신념을 중화(neutralization)시키는 심리적 매커니즘에 대한 연구였다. 기억나는대로만 써 보겠다. 먼저 ⓐ 책임감의 부정(denial of responsibility)이 있다. 즉 자신이 저지른 만행은,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지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밀그램 역시도 실험에서 이런 점을 지적하는데, 450V까지 전기 충격을 가한 피험자들은 오히려 희생자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탓하거나, 실험자와 맺은 계약을 이행할 의무 때문이라거나,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 전기 충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자기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희생의 부정(denial of victim). 희생자는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로 의미화되며, 따라서 희생자에 대한 공격은 학살이나 폭력이 아니라 정당방위가 된다. ⓒ 상해의 부정(denial of injury). '학살'이 아니라 '최종 해결책', '정화(cleansing)', '목표 제거', '목표 거부', '부수적 피해' 같은 단어들이 동원되어 피냄새를 감춘다. ⓓ 인간성의 부정(denial of humanity). 희생당한 이들은 희생당해 마당한 존재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비인간(subhuman), 짐승, 원숭이 같은 단어들을 동원하면서 희생자들의 인간성을 부정한다. ⓔ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condemning the condemners). 희생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난한다. 예컨대 과거사를 들먹이면서 너희들은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더 높은 가치에 호소하기(appealing to higher loyalties).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충성', '의무', '신성' 같은 가치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책임감과 도덕적 견실함을 유지한다. (이런 걸 보면 꼭 한국의 꼴보수우파들이 생각난다니까-_-)

당연히 이러한 실험을 보고 있자면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이히만 같은 독일 나치 전범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정신병자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믿기 싫은 주장. 그러나 이러한 실험과 분석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신념과 다르게 어떻게 복종에 충실히 복무하게 되며, 그 복종의 결과를 어떻게 부인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까지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체제가 저지르는 거대한 폭력과 권위 앞에서, 우리는 개인이기를 포기하고 권위자의 대리자가 되어야 할 뿐일까? 선택권 따위는 없을까?


스탠리 밀그램은 여러 차례 변형 실험을 통해, 단지 복종할 뿐인 개인이 아니라 저항하는 개인의 모습도 보여준다. 예컨대 처음에 말했던, 450V까지 충격을 가한 65%의 사람들은 희생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실험을 진행했다(원격조건). 희생자는 격리되어 있고, 피험자는 희생자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만 느꼈다. 여기서는 35%의 사람들만이 실험 도중에 저항했다. 상황이 조금 바뀌어 희생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자, 37.5%의 사람들이 저항했다(음성반응 조건). 희생자를 같은 방 안에 두자 60%의 사람들이 저항했으며(근접성 조건), 희생자가 전기 충격을 받기 위해서는 실험자가 직접 희생자의 몸을 만져야 되는 조건에서는 70%의 사람들이 저항했다(접촉-근접성 조건).

그리고 피험자들에게 전기 충격의 강도를 선택할 기회를 주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낮은 최소한의 전기충격만을 가했다. 한편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험 도중에 극도의 '긴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긴장은 피험자들이 실험에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과,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긴장은 피험자의 약점보다는, 오히려 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에서 실천되는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권위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권위자의 눈만 현장에 없으면 대체로 피험자들은 충격을 주기를 거부하거나 실험자를 속였다). 또한 밀그램은 '집단 효과'라는 희망도 보여준다. 동료를 추가해서 실험했을 경우, 동료가 저항을 시작하자 동조 효과에 의해 놀랍게도 40명 중에 36명이 실험에 반항했다. 밀그램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상호 지지하는 것은 과도한 권위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어벽"이라고 주장한다. 즉, 실험의 결과에 충격을 받을 순 있지만, 그들의 도덕성을 의심할 것 까지는 없다. 우리는 상황 속의 인간이지, 도덕적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아니므로.


그러나 밀그램은 또한 현대 관료사회에서는,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권위를 동원하더라도 <직접>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어 폭력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첫째로 과학이나 정치 같은 합법적인 권위가 폭력의 수행을 정당화 할 수 있으며, 둘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폭력에 참여하지는 않고 중간 관리자 같은 역할만을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체제에 들어가면 온전히 통합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분절으로만 존재한다. 여기서 책임감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권위가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명령에 따라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매우 폭력에 둔감하고 권위에 충실한 일부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일부를 비난하면서 우리의 도덕적인 견실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그 폭력과 권위를 지탱하는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도덕적 감정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 순수한 악인은 드물게 존재하고 대부분은 선량한 악인들이다. 우리는 복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고 태어났다. 그리고 "삐딱한 지적저항"은 권위와 폭력 앞에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기는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건 자위일 뿐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권위의 의지 실현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복종은, 반복 강조하지만, 심리가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자 그 결과이다.

그 밖에도 밀그램의 책에는 다소 묵시록적으로 읽히는 부분들도 굉장히 많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지금이 두 번째 독서이지만) 여전히 믿기 싫은 부분들도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이 대체로 남자들의 남자들에 대한 복종에 대한 것이라는 인식까지 오면, 조금은 더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쩌겠어. 다른 나라의 맥락에서 진행한 실험은, 오히려 복종율이 더 높게 나왔다는데. 한국에서는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텐데.

권위의 폭력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권위와의 관계를 아예 끊는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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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한 구절  (0) 2010/05/20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24 12:41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늘 새벽, 신경숙 소설가의 신간을 끝마침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썼다고 했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그 시간대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폈을 때는 어둑하고 눅눅한 새벽 3시였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 허리를 곧게 펴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제목과 소설이 정확히 상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아 좀 불만이기는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수작인 것 같다. 여느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을 읽기는 읽어도 늘 별다른 감동없이 읽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편집실에서, 낡디 낡은 보부아르의 책 앞면에 씌어있던 손글씨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 관계의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맺음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반전화와 편지와 전보만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던 시절의 청춘들은, 불가피하게 좀 더 깊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어도 관계도 좀 더 익을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내면에서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으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지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들ㅡ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와 퀵 메시지가 아니라, 어쩌면 침묵과 견뎌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재하거나 느리게 찾아오는 것들에 대한 환대.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해지는 것.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에게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말마따나 덥석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내가 이미 거쳐온 시간 혹은 지금도 거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관계의 부침(vicissitude)을,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여러 기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네에서 벤치에서 계단에서 혹은 누구도 앉자고 하지 못해 아예 선 채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들로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아침 해를 맞아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들.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온 신경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려하고 질투하고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간들. 그때의 냄새와 온도와 바람과 사소한 분위기나 오갔던 대화 같은 것들. 빈곤했던 기억에 얼마간 생생한 서사와 언어가 부여되면서- 기억이 비로소 재조립되고 있다. 그렇지. 기억이란 이렇게도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것이지. 그러므로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기억 뿐이겠지. 이것 외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이닥치는 기억을 견디느라 잠시 눈을 책에서 떼면, 머리 속으로 문장이 하나씩 깜빡깜빡 흘러갔다. 하나의 서술로도, 하나의 명제로도, 하나의 가설로도 문장은 재생되었다. 그 문장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책귀를 접어두는 걸로 갈음했다.

나의 20대 초중반은 '시시각각'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늘 바빴고 늘 일이 있었고 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망했지만, 늘 그 무게가 버거워 헐떡대며 꿇어 앉을까 벌렁 드러누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 단면이 지나면 다른 단면이 찾아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단면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시각각'은 점차 '시간'으로 누적되고, 누적된 시간이 임계점을 넘으면 '세월'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구잡이로 누적되어 쌓였던 나의 시간이 세월에 통합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점차 먹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진 청춘인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은 이제 시시각각이라기보다는 세월일 것임을 직감했다. 청춘 이후 세월 속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호품"은 어느 시인들이 말했던 대로 "그리움"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앞으로도 애도하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나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계속 사랑할 것이고 계속 질투할 것이고 계속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역사와 기억과 맥락과 그리움과 추억이 뒤섞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이며, 더 정직하고 더 여유롭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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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20 21:29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간다는 것. 천상의 혼례, 다양체의 다양체들. 모든 사랑은 앞으로 형성될 기관없는 몸체 위에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바로 이 탈개인화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비로소 누군가가 명명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이나 성(姓)을 얻고, 자신에게 속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다양체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가운데 가장 강렬한 식별 가능성을 획득한다. 얼굴 위에 있는 주근깨의 무리, 여자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년 무리, 샤를뤼스 씨에게서 들리는 소녀들의 재잘거림, 누군가의 목구멍 속에 있는 늑대 떼, 사람들이 골몰하고 있는 항문이나 입이나 눈 안에 있는 항문 다양체.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그토록 많은 몸체들을 지나간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p. 76


옛날, 그러니까 20대 초반이었을 때라면 분명 멋있다고 느꼈을 구절인데, 지금 같아선 건조하게 읽힌다. (그들은 실제 연애도 이렇게 했을까?)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략 알겠는데, 역시 감동이 전혀 없다. 대학원 지망하는데 그 교수가 가끔 이들의 개념을 인용하길래, 에라 모르겠다 도닦는 마음으로 봐보자,해서 그냥 사봤는데 힝ㅠ.ㅠ <천개의 고원> 사는 김에 ㅇㅈㄱ씨의 재판 찍은 책 한 권도 샀는데... 이거 정말 다투자는 거지? 재판을 찍어내면서 수정하기가 귀찮아서 몇 가지 첨부하고 넘겼다는 말이 버젓이 적혀 있어... 세상에... 이거 나는 낚인거지? 성의 없이 낸 책, 덥석 사버린 내가 잘못인거지? ㅠㅠ

어쨌든 들뢰즈와 가타리,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어떤 집단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지, 예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좀 훑어보니 이들이 쓰는 개념이 꽤나 화려하고 그럴싸하다는 것은 잘 알 것 같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 어울리는 개념이라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러나 정작 속은 맹맹한 느낌이다. 나로서는 읽고 나면 허무하기 그지 없다. 이들은 단지 옛날부터 잘 있었던 것을ㅡ이들의 표현법에 따르면ㅡ단지 재밌게 보이는 계열에 따라 배치한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기계라는 개념도 왜 이렇게 시종일관 별로지? 몇년 전 라캉 관련 서적을 열심히 읽었던 것도 점점 머리 속에서 지워져 가는 중에, 지금 같아서 그가 했던 말중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말은 딱 하나 남았다. 남자들은 마치 공기를 넣어 몸을 부풀리고 있는 개구리 같다고. 이 책을 읽는데, 꼭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지금은 이 두사람의 유행이 많이 지난 감도 있지만, 이들이 누린 인기는 과거 이상 시인이나 기형도 시인이 누렸던 인기와 비슷한 성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보다는, 이들의 특이한 이력이나 라이프스타일 이 더 중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그들의 분위기나 패턴을 공유할 수 없거나 거기에 거부감이 든다면, 사유와 표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뭐 그런.

물론, 이들이 그냥 내 취향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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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19 20:02
어제 오늘해서 유명한 두 남자사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이고, 다른 하나는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이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분명 아름다웠다. 소설가로서 인문사회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소설도 분석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나는 존 쿳시의 책처럼 다소 분석적이고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이 '나쁜'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석적이고 도식적이면 또 어떤가. 여하튼 쿳시의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타자에 연루'되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 타자에게 연루되는지, 그 장면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우연한 계기라고 표현했지만, 한번 타자에게 연루된 후에는 타자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쿳시는 인간성이 차례로 박탈 당하는 과정(어떤 의례와 절차를 거쳐서 인간성은 박탈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성이 박탈되었을 때(그리하여 비로소 '비체'가 되었을 때)에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인간성은 어떻게 회복될 가능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아름답게 다룬다. 그리고 쿳시는 '적'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즉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적-타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가 얼마나 무용하며 위험한 일인지를ㅡ그리하여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상 식민지(약자)가 제국(강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강자)이 식민지(약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ㅡ아주 섬세한 문체로 폭로한다.

쿳시의 소설은 제국주의 (지식인) 남성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제국주의 남성 정체성과 젠더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쿳시는 일견 도덕적이고 범인간애적으로 보이는 제국주의 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상당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타자'에게서 인간(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들,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고 한들 그는 제국주의의 자장에서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보편-제국주의 주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타자-야만인'에게도 보편의 빛을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 보편의 빛은 상황 논리에 따라 얼마든 철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쿳시의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시선에서 '야만인-여성'은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이다. '야만인-여성'은 유독 '(제국의) 언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성적으로 분방하고 자유롭지만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국주의자-남성이라는 두개의 항에 의해 이중으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만인-여성'은 어느 때는 의존하고 복종하는 것 처럼 묘사되지만, (특히 성행위를 할 때에는) 종속되지 않는 이중적인 존재처럼 묘사된다. 쿳시의 남성 주체가 '타자에게 연루'되었고 또한 일견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윤리적으로 연루되는 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를 향할 때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남성 주체가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은, 오로지 성애화된 사랑 혹은 섹스가 걸려 있을 때 뿐인가? 남성 주체의 도덕적인 실천은 성애화된 타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가? (그 많던 '운동권 남자애'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도 종종 이런 징후를 읽는다.) 이에 관해서는 재미소설가 이창래 작가의 <제스처 라이프>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

물론 쿳시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 기꺼이 인식하고 분석한다.

덧) 이 소설을 읽고서 '50대 이상 남자'들의 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대다수 남성들의 정체성에서 남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많은 소설에서 50대 이상의 남자가 자신을 수컷으로 드러낼 때는 어김없이 이 남근 문제가 등장한다. 성적으로 문제를 겪음과 동시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몸의 근육과 피부의 탄력에 대한 인식 등이 어우러진다. 그 탓에 쿳시의 남성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50대 남성 인물들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갖 복잡함으로 뒤섞여 있다. 자기 몸이 더럽다는 인식(<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책을 보라), 자신의 성적 능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erection문제이지만)에 대한 자의식, 과거에 대한 향수 등등. 술자리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성적 소수자는 "4-50대, 대머리, 배 나온 화이트 칼라 남성"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다른 책,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학부 때 교육 쪽을 전공한 나로서는(나는 교육 자체보다는 내 전공을 무지 싫어했으니까), 가끔 교육관련 서적을 펴볼일이 있었다. 한국의 주류 교육학자들에게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ㅡ보통은 "학교 없는 사회"라고 번역하지만 오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리치는 그 스스로가 강조했듯 학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ㅡ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는 대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곤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일리치를 그저 그런 과격한 낭만적 급진주의 사상가로 생각했는데, 이번 대화집을 읽고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오히려 과격한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욕이 될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들 보다는 오히려 '정통파'에서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제도는 적당한 타협을 요구할 뿐, 과격한 근본주의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탓에 일리치는 온갖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범위와 폭이 놀라워 본받아야 할 정도다. 그를 문명 비평가라고 간주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국가 주도 공교육제도,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 조건, 건강의 '의료화', 표준 언어, '개발' 담론 등등 온갖 사회 체계에 내재한 복잡한 권력체계와 폭력을 일관되게 반대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제도로부터 미움 받기 딱 좋은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일리치는 세속적이며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내적 신념에 충실하고 경건한 신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그가 낭만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사상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사상의 가치체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폭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엔 평온하게 공생하는 자연스러운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는데, 국가 권력-자본주의-의료담론-공교육제도 등등이 일상을 폭력적으로 침탈했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식이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책인데도 여전히 "여권주의"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거 아직도 이렇게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고. 이와 관련해서 일리치에게 특별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역시 그의 젠더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에게 성별은 사회적으로 발명된 그 어떤 현상이라기 보다는,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획하는 근원이자 철학이다. 그렇기에 이쪽은 저쪽을 감히 넘보거나 이해할 수도 없고, 오직 은유와 상상으로만 연결될 수 있다. 이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다(이해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놀랍게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곳에서만 성차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성역할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에서는 차별 논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경건한' 상호의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좀 오버해서 말하면 자꾸 여자들이 남자 세계를 욕심내고 남자들이 여자 세계를 넘보려고 하니까 (자연질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이거 참 ^^;; 정말 일관적인 사람이야.



공부하기 싫으니까 이런 뻔한 잡글이나 쓰고...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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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27 12:22
비록 멘토링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의 문제 행동을 제거하고 건강한 발달을 촉진”(Hamilton, 1991) 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자주 장려되고 있지만, ‘멘토’의 전통적인 역할이 청소년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게 적절하거나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위기의” 청소년들을 다루는 문헌에서 묘사되듯, ‘멘토’의 역할은 청소년들을 가르치거나 사회화하며, 그들을 위한 역할 모델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탈학교(dropout)나 ‘학교를 다니는 엄마들(school-age motherhood)’로서 위기에 처해 있는 도시 청소년 여성들에 대한 이 연구는, [청소년 여성들과] ‘여성들’의 영향력 있고 건강하게 유지되는 관계는 청소년들의 지식과 경험, 감정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고 정당화하는 ‘여성들’의 능력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제안한다. 청소년 여성들의 관점을 인지하고 존중하지 않은 채 무작정 가르치려들 경우, 그녀들의 경험과 지식을 강화하기 보다는 깎아내릴 수 있다. 또한 청소년 여성들이나 여성에게 해로운 사회적 관습을 사회화하려든다면 마찬가지로 파괴적일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 문학과 신화에서 유래한 멘토링 모델은, 청소년 여성들을 위해 널리 행해지고 있는 멘토링 모델의 한계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의 조언자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오래 떠나있는 동안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보살피고 교육해야할 책임을 맡는다. 이 멘토링에 대한 묘사는 멘토와 텔레마코스 관계의 중요한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멘토의 역할은 선생님이자 아버지의 대리자이며, 그리하여 멘토 관계는 대체로 성인 남성과 청소년 남성 사이의 관계가 된다. 내 연구는 멘토와 언어학적으로 뿌리가 같은 뮤즈를 다른 은유로 보여주고자 한다. 뮤즈는 영감의 원천이었던 신화 속의 여성들이다. 뮤즈의 역할은, 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천재성이나 예술성을 알아보고 그것에 불꽃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뮤즈라는 은유는 청소년 여성들의 내면의 자원이나 가능성으로 초점을 이동한다. 이는 청소년 여성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데 치중하는 관계에서는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강점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의 약점을 가정하는 멘토링이라는 조력 모델(helping model) 대신, 이 연구는 여러 배경에서 온 청소년 여성들의 다양한 요구와 자원을 인정하는 관계적 모델(relational model)을 제안한다. 또한 이 연구는, 청소년과 성인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vulnerabilities)과 동시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가정하며, 관계 속에서 이 두 파트너 모두의 공헌을 높이 평가한다.

Amy M. Sullivan, <From Mentor to Muse : Recasting the Role of Women in Relationship with Urban Adolescent Girls>, Urban Girls : Resisting Stereotypes, Creating Identities, p. 226-7의 번역.

note 번역 중 girl과 women의 구분이 조금 불편해서, girl은 '청소년 여성'이라고 했고 women은 성인 여성 혹은 그냥 여성이라고 바꿨다. school-age motherhood는 마땅한 번역어를 찾을 수 없다. 흔히 쓰는 말은 으레 '10대 미혼모' 일텐데, 이 말은 10대라는 말도 문제지만 미혼모라는 말도 문제여서 쓰지 않았다.


이야기/이미지 산업의 맥락에서 뮤즈는 대체로 더 이상 젊다고는 하기 어려운 중년 이상 남성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재현된다. 또한 대체로 뮤즈들은 남성 예술가들의 필요에 따라 쉽게 '용도 전환'된다. 보통은 제자나 팬으로 시작해서, 영감을 제공하면서 성적 관계를 맺고, 후에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심지어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식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아주 남자 중심적인 설명이고 프레임이다. 뮤즈들이 어떤 관심과 욕망을 가지고 그런 관계에 헌신했는지, 그 관계에서 뮤즈들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전략적으로 행동했는지, 그리고 뮤즈들의 욕망은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 가능하며 또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나쁘다면 어떻게 돌파할 수 있으며 때로는 해체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뮤즈는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인물일 뿐, 현실에 존재하는 남성 예술가와 그들을 옹호하는 문화적 맥락에서는 뮤즈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옴니버스 영화 <뉴욕 스토리>에서 한 번 뒤틀린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그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즐거웠었는데, 그 영화의 문제는 그 남성 예술가가 겉으로 보기에도 좀 찌질했었다는 점이다. 뭐, 사실 대다수가 그럴 수도 있고)

이러한 뮤즈는 에이미 설리번의 논문에 오면 아주 적극적인 주체로 모습을 바꾼다. 주로 남자-남자 모델, 혹은 남자-여자 모델을 가정하는 멘토링은, 뮤즈링(?)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수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자-여자 모델도 마찬가지로 멘토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소년과 (부모이든 부모가 아니든) 성인과 맺는 관계의 특징이나 수행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뮤즈링은 하나의 규칙이나 규범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행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설리번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일반적인 교육과정(10대는 학생이자 청소년)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에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0-50대면 어떻고 동년배면 또 어떻고.

이 글을 읽으니 떠오르는 경험.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잠깐 멘토링을 한 적이 있다. 인근 중학생들 중 사교육을 받기 힘든 아이들 3~4명을 멘토링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2번씩 2시간, 과외 시간처럼, 그 중학교를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 멘토링을 하는 거였다. 물론 페이도 받았다. 과외랑 똑같이. 8회 40만원. 같은 돈을 받고 과외 따위를 하느니 더 여러 아이들을 만나서 멘토링을 하는데 당연히 흥미를 가질 수밖에.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국엔 상담을 조금 가미한 과외로 굴러갈 가능성이 컸다. 물론 1달에 몇 번 멘토들이 모여서 슈퍼바이저와 함께 회의를 해야했는데, 당시 내가 보기에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관심은 어떻게 '결손된'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학교 질서와 사회에 편입시킬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관제 프로그램이었으니 그럴 법도.

그런데 심지어 어떤 남자 멘토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컸다. 애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멘토링을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니들부터 가르치고 사회화해야겠다 이놈들!) 정말 그런 광경은 끔찍했고, 사실 내가 만난 아이들도 그 관계를 관(官)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과외로 인식할 뿐이었다. 게다가 3~4명이었다. 1대 1도 아니고. 결국 빛 좋은 그룹 과외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도망쳤다. 미안하고 죄책감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내 나름대로 노력을 할 수도 있었고, 또 그때가 멘토링 프로그램 초기 단계였으니 시행착오 단계로 봐도 좋았다. 다른 멘토들이 저질이든 쓰레기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나만 잘하면 되었을 것을. 그때 이 논문을 읽었다면 진짜 좋았을 것 같은데...

차라리 활동비만 실비로 받고 따로 돈을 받지 않는 관계였다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뭐, 지금 같아서는 더 잘할 자신 있다. 하하하. 후, 열린 교실 또 한 번 하고 싶네... 분명 힘들었지만 정말 기쁘게 보냈던 시간. 지금도 기억에 뿌리 박힌 경험. 그리고 그 아이들. 이야, 이젠 대학생된 애들도 많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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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23 22:00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집단적인 담론 구조에서 혁명의 꿈은 개인의 시간으로 환치되고, 사랑의 열정과 사랑의 대상과 하나가 되었던 황홀한 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 앞에서 멈춰서버린다. 그래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꿈은 '청춘의 열병'으로, 혁명의 시간은 개인의 생애사적 시간 속의 빛나는 순간으로 그려진다. 이 서사는 지속되지 못한 혁명에 대한 사랑의 열병은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혁명을 살아남은 자의, 개인의 생애로 환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의 '좌절된 꿈'의 시간으로 환수된 혁명의 시간은 배신에 대한 증오와 환멸, 혹은 자기모멸의 시간 앞에서 멈춰 서버린다. 따라서 세계를 성애화된 비유로 표상하는 서사에서 사랑은 빛나는 순간 속에서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_권명아, <죽음과의 입맞춤 :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 사회 2010 봄, p. 298

이 글을 읽고 있자니 학부 때 알던 여러 남자들의 얼굴이 아주 새삼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저마다의 구호를 갖고, 저마다의 학정조(학생정치조직)등 집단의 후광을 두고, 가끔씩 일이 있으면 연례 사업처럼 깃발 들고 나가기도 하고, 술집에서는 과장된 영웅담이나 허세를 부리거나 고뇌를 연출하여 후배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선거철이 되었다 싶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수트를 빼입고 컬러 포스터 속에 등장하던 남자들. 그 남자들을 둘러싼 담화는 오직 뒷담화일 뿐이고, 그들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잠적하기 전까지는 매우 잘나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수없이 많은 연애를 했고, 그 연애의 끝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남자들만큼은 그 공동체 속에서 끝끝내 생존해 남았다. "혁명의 문법에서 사랑이 정치와 탈정치를 둘러싸고 젠더화된 위계를 구성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특정 주체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위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문법에서 청년의 열정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지만, 여성, 미성년, '무지한 대중'의 여정은 과잉되거나 부족한, 혹은 훼손되거나 결여된 것으로 간주된다. (같은 글, p. 295)" 음. 계속 다른 부분도 인용.

생애사의 리듬 속에서 혁명은 젊음의 열정, 젊은 날의 추억이 된다. 그 추억 속에서 첫사랑의 열병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지만, 결국 그 열병은 성장을 위해 누구나 겪는 성장통처럼, 통과제의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추억 속에서 혁명은 통과제의와 같은 자연사의 한 과정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생애사의 서사에서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자연 과정이 되어버리고, 현재가 아닌 과거의 몫이 된다.

또한 추억 속의 혁명은 혁명의 좌절에 대한 책임을 언제나 사랑의 대상에게 전가시키고, 추억의 주체는 혁명을 생애사의 원형적 기억으로 곱씹는다. 이렇게 추억이 된 혁명 속에서 변절은 언제나 타자의 몫이며, '나'는 혁명을 순수한 기억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배타적 소유권을 지닌 '순수한 주체'로 면죄된다. 추억이 된 혁명이 혁명에 대한 소유권, 혹은 혁명의 원본과 변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혁명을 생애의 "원형 기억"으로 추억하려는 욕망은 혁명을 과거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혁명의 좌절을 타자에게 전가한다.

_같은 글, pp. 300-1

권명아 평론가의 이 글은 4. 19에 대한 것이지만, 그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이는 단지 4. 19세대만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386세대", "87년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인 어떤 모종의 규칙이다.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젊음'과 사랑과 혁명과 열정과 섹스와 젠더의 결합 공식이랄까. 이 공식을 잘 풀어낸 사람들만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자격을 갖는다.

60년이나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추억하는 서사들을 읽을 때 큰 불편함을 느꼈던 게 <정확히> 이런 점들 때문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도 매혹적인 배우들과는 별개로 불편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남자 작가들이 보여줬던 당시 세계는 분명히 예컨대 공지영 작가가 90년대 초반에 그려냈던 세계와는 다르다. 좀 더 생각과 독서를 이어나가야 할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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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15 23:05
시즌이 지날 때마다 <문학동네>랑 <문학과사회>의 주제를 보고 한 권씩 사모으곤 하는데, 이번 봄에는 두 계간지 모두 재밌어 보인다. <문학동네> 2010년 봄호는 지난 겨울호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 재밌게 읽을 글이 많다. 김연수 작가의 산문, 신형철 평론가의 소설론, 정이현 작가 인터뷰,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연설문, 한유주 작가의 단편소설, 등. 두꺼운 탓에 아직 눈길 한 번 두지 않은 페이지가 많다. 이번 <문학과 사회>는 일단 내리비치만 봐서는 한강 작가 인터뷰가 있다는 점, 그것 하나로만 기대하는 중! (왜 배송이 안오는그야..)

그리고 지금 방금은 헤르타 뮐러의 연설문을 읽었는데, 그는 시를 '썼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낱말을 모아 콜라주했다'고 표현한다. 이 말이 주는 느낌이 참 좋다. 시를 '쓴다'는 건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어쩌면 남자들이 경쟁하는 세계에 속한 것일지 몰라서, 연륜을 갖춘 남자들이 이성과 직관의 조합에 의해 정전에 오를 시들을 창조해내는 매커니즘을 가리키는 말일지 몰라. 그래서 시를 통해 정치와 역사와 더 거창하게는 철학을 쓰는 것이지. 아직 그럴 순번이 안되서 못하는 젊은 남자 시인들은 자의식과 욕망에 대한 시를 쓰겠지. 여기서 시의 대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씌어지는 것이겠지. 그렇게 '시를 쓴다'는건 사물에 대한 인식론이기도 하지. 또한 시를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읽는다는 것도, 전통적인 시 미학이 허용하는 규칙 속에서 쓰고 읽을 수 있을때 가능한 일이 되지. 그렇다면 선생에 대한 존경(그리고 동시에 그를 배반해야 내가 산다는 숙명)은 '시를 쓰는' 행위 자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시를 쓰지 않고 헤르타 뮐러처럼 '낱말을 모아 콜라주'하는 건 어떨까. 그 행위는 시를 쓴다는 표현에 대한 지극히 정당한 항거가 아니었을까. 헤르타 뮐러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작가들의 모임 악치온스그루페 바나트의 유일한 여성 멤버였다고 했다. 이랬던 그의 삶의 흔적이 시를 쓰는게 아니라 '낱말을 모아 콜라주'한다고 표현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레 상상하게 된다. 그건 사물을 다루는, 또 다른 인식론일테니.
 
<게릴라걸스의 서양미술사>를 통해 읽은 '다다의 마마' 한나 회히도 베를린 다다이스트들 중에서 얼마 안되는(혹은 유일한?) 여성 멤버였다고 했다. 그런데 회히는 다다의 마마였으므로 모임에서 샌드위치도 제공해야했고 유지비용도 대야 했다. 그랬는데도 첫 국제 전시회에서 회히는 제외되었고, 회히는 "아내가 설거지를 하라고 했을 때 정신발작을 일으키는 남자 예술가(ㅋㅋㅋㅋㅋㅋ)를 조롱하는" 연극을 공연해서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독일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현대적인 예술가라고 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 동지들은 오랜 기간 우리 여성 예술가들을 매력적이고 재능 있는 아마추어 쯤으로 여겼지요. 전문적인 지위를 부정한 채 말입니다."

뮐러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면 좋겠는데. 이상하게 작품을 읽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연설문에서 좋았던 구절 한 문단.

할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곧잘 아들 마츠에 대해 비통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래, 깃발이 나부끼면 이성은 트럼펫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법이지." 할아버지는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경고는 나치즘에 이어 나타난 독재, 나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그 독재에도 맞아 떨어졌습니다. 크고 작은 이익을 좇는 사람들의 이성이 트럼펫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날마다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트럼펫을 불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p. 422)

헤르타 뮐러씨, 저도 트럼펫을 불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은지 좀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어요. 트럼펫을 불지 않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자꾸만 말도 꼬이고 일상도 꼬여요. 봄 바람을 맞아 마음만 싱숭생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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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3/10 23:26
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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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2/23 23:37

"이 책[<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 정황의 차이가 그 책읽기의 차이를 부른 것이리라 생각한다." (89)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96)


생애 말년에 쓴 일기를 엮었다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아저씨'의 이미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배는 볼록도 아니고 불룩하게 튀어나와 늘어졌으며 목과 턱이 구분되지 않아 살집이 두둑하지만, 다리는 몸집에 비하면 얇은 그런 아저씨.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고 유행 한참 지난 고지식한 양복을 입으며 구두 역시 마찬가지다. 셔츠는 늘 꼭 윗단추까지 모두 잠그기에, 접시 위에 얹힌 돼지 머리를 상기시킨다. 바지는 늘 배바지다. 손목엔 금시계. 양말은 흰색이거나 검정색인데 늘 종아리 중간까지 올려 신으며 무좀 치료를 위한 발가락 양말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머리에 든건 많은데 그 학식이 땀으로만 배출되는지 봄 중순부터 가을 중순까지 몸을 움직일 때는 늘 땀을 흘리며 행여 식당에서 기름기 둥둥 떠있는 매운 찌개를 먹을 땐 티슈를 한통씩 써버리기 마련이다(그렇지만 맵고 짠 찌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산에라도 올라가서 찌개를 끓여 먹다가는 그 자리에서 나무아미타불 할지도 모른다. 물론, 젊었을 때엔 클레릭 이미지였을수도 있다.

책 읽기가 단지 책 읽기가 아니라 상황 읽기라는 그의 말, 그리고 사유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내 육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물론 그의 말에는 어폐가 좀 있다. 육체는, 어떤 초유기체적인 '나'가 있어서 '내'라는 소유격 명사를 통해 소유할 수 있는 대상(문법의 환상)이 아니라, 그냥 나 자체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한국 남자 지식인들이 그랬고 그래왔으며 지금도 그렇듯이 정신주의자였던 셈이다.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김현은 데카르트 흉내를 내고 있지만(생각하다가 생각에 도달한다? 이 얼마나 @#$!한 표현인지), 의미심장하게도 뒤에 인용한 문단에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사회적 맥락의 냄새를 풍긴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많이 안좋았다고 한다. 누구나 말년이면, 별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상 건강이 안좋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육체)를 둘러싼 관계의 질서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가피하게 의존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건강한 그의 동료와 친구들이, 건강이 악화된 그를 어떻게 배려하고 도와주는지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앞서 인용한 96쪽에서 여기에 따오지 않은 내용을 보면, 젊었을 적 그의 육체는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을 때엔 육체가 그런 사고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적, 합리적, 비의존적 <사유>라는 환상은 건강한-이성애-개인-남성-육체에 의해 지배되고 관장된다. 그건 하나의 문화적 각본일 것이다. 그 환상이 생산하는 글 역시 어떤 육체 조건에 기반한 것이리라. 그런 각본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진다는 건 상당한 불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바치는 '후배'의 말을 보면, 그 후배 역시도 이 불운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자신의 육체적 징후들을 통해 몸 속 깊이 번져가는 죽음의 증식을 보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아무도 예측을 못한 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깊이, 그 응시와 사유의 궤적들을 글로 드러내왔었다."

그에 반해 시인 김수영은 좀 더 명민하다 할 수 있다. "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낙타과음(駱駝過飮) 중에서) 어떤 사람이 창작에 몰두할 때, 그 사람의 몸을 한 번 보자. 그는 빼어난 머리와 빠른 손으로 창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온 몸으로 창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뛰어난 비평가와 뛰어난 작가의 차이는, 이런 지점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서부터 나타나는게 아닐까?


여하간 그의 책은 신기하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지금은 전혀 알 수도 없고 거론되지도 않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 작가가 수두룩 하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100년은 갈것 같은데.. 이 책을 보니 역시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김현은 또 이렇게 적었다. "르네 샤르가 죽었다. 이제 대가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가보다." (148) 그러나 대가들은 늘 존재했고, 얼마 전에도 우리는 여러 대가를 떠나보냈다. 대가들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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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1/14 00:22

얼마 전부터 막 읽기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은 '현상학적 사랑관'을 보여준다. 사교 모임 같은 자리에서 자기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사교계의 불량품"들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한편 의외성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접근해야 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이 아니라, '그 같은 사람이 (내가) 이럴 때 이곳에 나타나다니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인 셈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은 '그'와 '멋있음' 사이에 수없이 깔린 우주적인 연결고리를 사랑한다. 이는 두 단어 사이의 공간을 넓히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엔 오로지 우연 뿐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도 인식으로 남아야 한다.
 
이러한 사랑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얼까? 일단 '낭만적 사랑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울 메이트'에 대한 열망, 하루키 단편 소설의 표현에 따르자면 "100%의 여자 아이"라든가 하는 식의 완벽함에 대한 희구가 늘 존재한다. 또한 지금 내가 마주하는 모든 비루한 것들 너머에 진정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랑 그 자체도 유예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나타났다고 믿게 되는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기꺼이 투기(投己)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도 존재한다. 최상의 경우에 다다랐을 때, 낭만적 사랑관은 현상학적 사랑관과 반대로 '그 참 멋있어'라는 문장과 만난다. 이는 '그'와 '멋있음' 사이의 우주를 축소하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에 필연의 질서가 비집고 들어온다. 낭만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 곧 존재가 된다.
 
나는 이 두 극단 어디에 서 있을까? 아마도 고원원과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과 유사한 유형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직한 일일 것이다)


어떤 작가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단점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누군가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의 단점을 마음에 두고 동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한때 매력을 느꼈던 사람에게서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매혹이 곤혹이 되고, 진담이 부담이 되고, 열정이 치정이 되고, 환상이 환멸이 되고, 사랑이 사죄가 되고, 진실이 진부가 되는 순간이다.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오로지 인격수련이다. 이 인격수련은 어쩌면 윤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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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9/07/05 23:59

사실 담배에 불을 붙일 때까지만 해도 아주 많은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목이 쓰라리고 기침이 나오고 눈이 매워지면서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그런 부작용들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담배의 첫 모금을 빨아들였을 때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워온 사람처럼 담배연기가 쑤욱 몸 안으로 들어왔다. 순하고 부드럽게,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그때 많이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쉽다니, 이렇게 별거 아니었다니……. 마음에서 어떤 벽 하나가 툭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편견과 관습과 자아의 작은 벽이.

김형경, <사람풍경>, pp. 129-30


내가 담배를 처음 피웠던게 언제였더라. 2005년 2월의 어느날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04학번이던 나는 '첫 후배'를 맞이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새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 결국 새터 D-Day가 되었고 나는 새벽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대감' 때문은 아니었고 단지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새터 준비하는 과/반 사람들은 <올리브>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고 나는 잠을 자고 싶었기에 짜증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와중에 여차저차 하여 나는 갑작스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아 하게 되었다. 역사 관련 교양 프로그램이었던가. 자의 반 타의 반 이었을 것이다. 그때 시간은 새벽 3시 경. 9시~10시면 학교에서 출발이었는데.

물론 나는 그 일을 맡은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성격과 달리 데드라인이 코 앞에 닥친 급박한 상황을 즐겨하는 편이다. 내 성품은 그걸 싫어라 하는 것은 물론이오, 그런 방식이 내 기질과 맞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뭐 어떤가. 사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투덜거릴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특권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나 진짜 바빠. 갑자기 일이 커졌단 말이지. 아 진짜 죽을 것 같애 ㅠㅠ" 이런 식으로. 물론 그런 투정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그 때, 모두가 피곤하고 잠을 자고 싶어했던 그 때에 내 투정을 들어줄 사람은 당연히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아침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땐 그냥 혼자 있는게 낫다. 하여 나는 <올리브>에서 먼저 나와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가는 길은 5분 남짓. 어쨌거나 사위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고 조용했고 그래서 나는 좀 외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재목은 아니었고 물론 지금도 아니다.

그래서 자취방 건물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좀 더 걸었다. 잠시 뒤에 자취생 생활용품과 필수품의 만신전, <패밀리마트>의 초록 간판이 눈에 확, 하니 들어왔다. 한겨울 새벽, '사연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맥주를 사 마시면 왠지 간지가 흐르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 편의점엘 들어갔고, 잠시 뒤에 내 손에는 맥주 대신 시중에 깔린지 얼마 안 된 담배인 "더 원"과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아마 왠지 '맥주보단 담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정확히 위에 인용한 문단대로 일을 치렀다.

어렸을 때 아빠 근처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고, 집 수리를 하러 온 아저씨들이 며칠 동안 머물며 뿜었던 담배 연기도 싫어했고, 담배를 소유한 것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랑스러워 하는 초/중등학교 때의 아이들을 싫어했었던 내가, 내가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술은 마셔도 담배는 안 해! 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과거는 단지 과거가 되었다. 꼭 담배가 나를 위해, 바로 이 순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니, 드디어 내가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는 느낌이었다. 담배소명설.

이상하게도 그 해의 봄엔 과/반에 유달리 흡연 인구가 많았더랬다. 과/반에서만 스물 몇 명이었던가로 기억한다. 2004년엔 담배 안 피우는게 자랑이었던 과/반이었는데. 04학번 동기 중 딱 1명을 제외하곤 모두 비흡연자였는데. 그 해는 참 이상했긔…. 참으로 이상했긔…….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9/06/28 17:57

출처 : http://www.thecommentfactory.com/will-the-cat-above-the-precipice-fall-down-slavoj-zizek-on-iran-2259/comment-page-1

When an authoritarian regime approaches its final crisis, its dissolution as a rule follows two steps. Before its actual collapse, a mysterious rupture takes place: all of a sudden people know that the game is over, they are simply no longer afraid. It is not only that the regime loses its legitimacy, its exercise of power itself is perceived as an impotent panic reaction. We all know the classic scene from cartoons: the cat reaches a precipice, but it goes on walking, ignoring the fact that there is no ground under its feet; it starts to fall only when it looks down and notices the abyss. When it loses its authority, the regime is like a cat above the precipice: in order to fall, it only has to be reminded to look down…

권위주의 정권이 마지막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정권의 붕괴는 대개 2개의 절차를 따른다. 실제로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균열이 시작된다. 갑자기 사람들이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다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정권이 단지 정당성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집행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공포에 입각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만화의 고전적인 장면을 알고 있다. 고양이는 절벽에 다다른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발 밑에 땅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해서 걷는다. 고양이가 밑을 바라보고 심연을 발견했을 때가 되어서야 고양이는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정권이 권위를 잃으면 정권은 이렇게 절벽 위의 고양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붕괴하기 위해서는, 밑을 내려다 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이 정권에 대한 분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분석들에는(그 분석을 집행하고 널리 알릴 채널이 없으니) 당연히 힘이 없고 그만큼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런 냉소주의 중에 가장 악질이 '국개론'일 것이고, 가장 평이한 것으로는 다음 총선(혹은 다음 보궐선거) 내지는 대선을 기약하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 공통적인게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정권은 무능하다" 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찰이나 검찰이 휘두르는 무기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눈앞에 어른대는 서슬퍼런 흉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그 반작용은 두려움, 공포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복종도 있을리 없다.

그러니까,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얼마 안 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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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스토리텔링?  (2) 2008/12/16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9/06/24 21:16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중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간혹 서울을 떠났지만 매번 곧 돌아왔다. 도시 전체가 옛 시대의 유산인 곳이나 빼어난 절경을 가진 곳에서도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내 서울이 그리워졌고 돌아오면 안도했다. 서울이 전적으로 태평하고 무사한 도시여서가 아니었다. 대개의 삶이 그렇듯, 그런 날은 일부에 불과했다. 안도감이나 그리움은 서울을 벗어나 있을 때에나 가능했다.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서울은 나와 가장 닮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 편혜영, 「크림색 소파의 방」서문(???), p. 211


그 도시는 나의 유년시절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철없이 논다.

- 윤성희,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서문(???), p. 184



소설집을 들춰보다가 어쩔 수 없이 깊이 공감하게 된 문장. 그랬다. 안도감, 그리움은 서울에 있을 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철없이 놀 수 있었고 철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덧붙여 편혜영씨의 말에 토를 조금 더 달자면, 서울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수선하기만 한 나와 가장 닮았을 뿐 아니라,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나를 가장 받아들여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을 배경으로 <테마 소설집>이 얼마 전 나왔다. 나로서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로 읽혀서 책을 샀는데 솔직히 말해 서울은 너무나도 '서울'이기에 다른 문학에서도 충분히 서울을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특별히 이 소설이 '서울 테마 소설집'이라고 느끼진 못하겠다. (난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인터넷 그림을 볼 땐 소설집의 '쿨'하고 '감각적인' 북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첫 인상에 비해 쪼오금은 실망할 수밖에.

소설집에서는 '서울성(性)'이랄까 'seoulness'랄까, 하는 무언가에 대한 직접적인 사유를 읽어 내기 힘들었다. 내가 기대했던건 어쩌면 이것이었을테다. 다시 말해, 결국 내가 가진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에 합치하는 소설은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조각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면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어떤 총체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이게 곧, 서울인가?). 내 소설 편식증 때문에 전혀 읽히지 않는 소설도 있었고.. 조금은 아쉽다.

그래도 일단 잘 읽히고 재밌는 소설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건졌다. 몽땅 필사해 뒀다는! ^^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2/16 00:17

오늘 루틀리지에서 나온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개론서를 읽다가, 나로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던 접근 방식을 읽었다. 한나 아렌트는 특히 (정치)철학, 그리고 그녀의 삶의 맥락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서양)현대사, 홀로코스트 연구(Holocaust studies), 유대인 연구(Jewish studies) 등에서 알려진 인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거의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 같은 경우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을 포함한 몇 권의 국역본을 갖고 있지만, 꽤나 많이 알려진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의 마지막 장 정도와 <정치의 약속> 일부를 읽고는 너무나 읽기 뻑뻑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주목 받고 있는 (독특한(?)) '아렌트'에 대해서는, 랑시에르 같이 한국에서 '최신 유행'인 이들의 글을 읽어서, 대략적으로만, 아주 간략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우파'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안티-페미니스트'로서 평가받던 아렌트가 최근 들어서 왜 이렇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만(이에 대해 다룬 글을 읽은 적 있다)... 이는 오늘 끄적이고 싶은 주제가 아니므로 패스.

어쨌든 이 개론서의 저자는 정치철학자로서의 아렌트가 아닌, 문학 연구의 맥락에서 아렌트를 읽자고 제안한다. 아렌트가 문학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서사(literary narrative)를 말이다. 심지어 아렌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어떠한 철학도, 의미의 강렬함과 풍족함이라는 측면에서, 잘 서술된 이야기(properly narrated story)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기존의 고전적인 정치 개념으로는 당시에 새로이 등장하던 유례없는 전체주의ㅡ나는 이를 어떤 현대 철학자가 그랬듯 '절대 악'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ㅡ를 이해할 수도 없으며 심각한 왜곡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그녀의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듯, 예술과 서사, 그리고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는, '이론(theory)'에 대한 불신, 내지는 '이론'의 '몰락'이라는 특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 있다. 조금 현대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테리 이글턴이 지적했듯(그러나 약간은 새삼스럽게도), 특히 21세기 초의 엄청나게 급격한 변화를 겪는 전지구적 상황의 맥락에서, 이론과 이론가들은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춰가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미국적인 상황에서 이론은 쉽게 낡은 것이 되거나 현실과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 역시도 당시 현실에 도래하고 있었으며 이미 도래했던 전체주의와 근본주의를 목격하면서, 이론과 서구 철학의 죽음을 읽었다. 간단히 말해 서구 문화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정적인(static) 이해 모델인 반면ㅡ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ㅡ, 스토리텔링은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모델이다. 특히 아렌트는 그녀의 선생이자 연인이기도 했던 모 철학자가 1930년을 즈음하여 나치에 가입했던 유명한 사건을 두고도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토록 철학적 명민함(subtlety)을 가진 사람이, 나치 정권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들을 갖지 못했다는, 그 놀랍지만 놀랍지 않은 선명한 대조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 2000년을 내려온 서구 철학 전통의 추상적 이론화 경향이 어떻게 공적 세계와 사유행위 그 자체에 폭력을 가해왔는지 의문을 쏟아 놓는다.

그에 반해 스토리텔링은 전통적인 이론들이 읽어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젖힌다. 아렌트에게 스토리텔링은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비극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스토리텔링은, "정의의 오류(the error of defining)"를 저지르지 않고 다른 의미들을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은 지식인의 '독백'에 가깝고 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언제나 편집증적일 수밖에 없는 '이론'과는 달리, '커뮤니티community'를 가정한다는 점에 아렌트는 주목했다(커뮤니티를 흔히 하듯 '공동체'로 번역하는 것은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를 심각하게 제한한다는 생각이다. community는 commune이라는 동사에서 볼 수 있듯, 친교와 교제와 우정과 공감의 의미도 함께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동체는 '하나의 신체'라는 뜻이다. 너무나 낡고 진부한 유기체적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온갖 위계질서와 기능주의적인 설명이 덧붙여진다. 심지어는 '한 솥 밥을 먹고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식의 가족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이해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즉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the teller of the story)", "(이야기 속) 행동의 행위자(the hero of action)", "그 이야기를 심판하고 이야기에 반응하는 청자 혹은 독자"를 늘 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론으로 설명되면 이해될 수 없는 사건들이,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형상으로 묘사되면 더 넓은 청중과 커뮤니티에 의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 즉, '인지가능한(intelligible)' 사건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를 참조하여, 그녀의 정치적 이상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문학적인 방법들에 주목한다..



아렌트의 책을 제대로 읽은 바 없는 나로서도,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아렌트의 사유 체계를 부분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쉽게 지우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아렌트의 이러한 접근은 '정치적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스토리텔링 행위는 '현실' 자체의 문제에 개입하고, 그 지평을 이해함과 동시에 확장(내지는 그 지평 자체의 붕괴)을 시도하려는 끈질긴 노력의 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지배적인 상징 체계에 저항함으로써ㅡ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공포를 증언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우파적인 수정주의적 입장은 얼마나 끔찍한가?ㅡ잊혀져 가는 오랜 기억들을 잊혀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도 회자되고 있는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스토리텔링과는 전연 다른 차원의 스토리텔링일 것이며, 김연수가 얘기한 바 있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스토리텔링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와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은 나로서는 매력적이었다. '이론'이냐 '현장'이냐 하는 식의 이분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이론'에 많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말이다. 또한 나는,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문학적 글쓰기'라고 믿고 있다. 또한, 피에르 마슈레 식으로 말하면, 한 작품 혹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 뿐 아니라, 작품 내지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고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이, 주위의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면서 평생 공부하는 사람들의 임무라면 임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서사, 내지는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러한 내 믿음과 연결되는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우기 힘든 고민들이 남는다.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정치적인 실천이 될 것인가? 어떤 스토리텔링이 '정치적'인가? '정치적' 스토리텔링을 규정하는 속성을 우리는 정의할 수 있는가? 만약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쉽게 정의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이라고 '느끼는가'? '정치'란, 바디우같은 이들이 말하듯, '메시아적'이고 '섬광'과도 같은, 그런 급진적인 단절/도약의 순간, 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윤리적 명령을 가진 어떤 '사건에 충실'하면 되는 것인가? 거기에서 스토리텔링의 위상은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많이 필요할 것 같으므로 패스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어떠한가. 어떻게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이미지화되거나 스펙터클화되지 않고 그 자체의 유효성과 독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을 정도로 홀로코스트 역시도 자본주의의 엄청난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 만화 등은,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고유한 사건 특유의 정서적 소통 능력을 갖지 못하고, 하나의 끔찍한 사건, 혹은 구경거리로 전락해서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저 먼 곳에서 일어난 어떤 비극'이라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했듯, 드보르로부터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사람들이 늘 말해온 바대로 어떤 사건이 이미지화되고 스펙터클화되는 과정에서, '지시체referent'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70년대 흑인 혁명노동자 연맹(the League of Black Revolutionary Workers)의 디트로이트에서의 일시적/부분적 승리와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짤막하게 분석하면서 이야기했듯 말이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은, 애초에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결국엔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 외에 몇 가지는 생략... ;ㅅ;



덧) 만약 정말 아렌트가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를 참조했다면... 나로서는 웃음만 나올 일이다 ㅋㅋ 왜냐면 내가 학부 시절에 가장 읽고 싶었지만 가장 읽을 수 없었던 책의 주인공들이 바로 허먼 멜빌과 조셉 콘라드이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은 단어와 문법 양면에서 모두(바다와 어선에 관련된 '끔찍한' 어휘들을 보면 알 것이다. 심지어 허먼 멜빌 작품용 딕셔너리도 있다-_-;;), 콘라드는 문법의 측면에서 읽기 너무 힘들고 뻑뻑했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는, 지금 내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탐색하고 조사하고 해부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기에... 결국 다 포기하고 국역본만 읽었다네~ㅎㅎ 아렌트의 책들이 뻑뻑한 이유도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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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2/06 23:57

벨 훅스의 신간, <경ㄱ 넘기를 가르치기>의 초반부를 뒤적이다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읽어도 크게 와닿지 않으리라는 판단하에 일단은 잠시 접어 두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제약하는 경험의 폭 때문에도 그렇고, 현재 나의 '신분' 때문에도 그렇다 -_-


분명 '해방적 교육'이라느니,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이라느니 하는 개념들은 매력적이다. 여기서 매력적이라는 말은, 그 개념들이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하나 불가능한 것에 불과하다고 (암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될 수 없는 어떤 것,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어떤 것, 그러면서도 나를 확 잡아 끈다는 의미에서(많이 오버하자면, '소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ㅋㅋ) 매력적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더.

"가르치지를 원치 않는 교사"와 "배우기를 원치 않는 학생"이 있는 교육이란 대체 무엇일까. 벨 훅스가 말한 것처럼, "은행 출납식 교육"ㅡ교사가 전해준 지식만을 학생들은 그저 은행에서 빼다 쓰듯 훗날 사용할 수 있다는ㅡ이 대학에서도 주류 중의 주류인 지금, 대체 '교육'의 위상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 걸까.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 맑시스트들의 개념이나 소위 '비판 사회학' 같은 흐름에서 쓰이는 '사회과학'적 어휘들을 갖다 붙여서 뭐라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심정적으로 답답하고 갑갑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나에게 있어 "해방적 교육",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어디까지나 '맛만 봤다'는 얘기). 그렇다고 그 대학이 그 자체로 해방적이고 자유의 공간이었냐, 하면 다들 알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의가 다루는 것들은, 말 그대로 강단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에게 흥미도, 의미도, 전연 주지 못했다. 정말 단 한 냥의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다. 영어교육이었던 전공 강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강의들은, 너무나 단순했던 내 견해들ㅡ예컨대 평준화 찬성, 고교등급제 반대 등등ㅡ에 대해서 너무나 단편적이고 표면적이긴 했지만 지지하는 말들을 해주곤 했던 고등학교 논술 선생의 말들 보다도 힘이 없었다. 물론 때때로 재밌는 강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들과 지식을 만날 수 있었던 ㅇㄹㅎ 개론, 한국 현대사 입문 같은 강의들. 그러나 1년에 한 강의 정도? -_- 그나마도 수강자들의 태도 탓에 금방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수업은 2학년 말이었던가? 페미니즘의 미학과 예술이라는 수업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학회 세미나 등을 통해서 봤던 책들이 해방감과 자유로운 느낌을 주곤 했었지만(세미나 자체는 아니었다! 그 뒤의 수다가 그랬지), 대학 강의실에서는 처음이었다. 수업이, 그리고 교수자가 흥미롭다고 느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수업만은 시시하지 않았고, (벨 훅스가 강조하는) 흥(excitement)이 났다ㅡ물론 기말고사 시즌에는... 흑. 그 뒤로 수업의 연장선에서 방학 간 학기 간 안가리고 몇 년간 진행했던 세미나도 내게는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다. 교수자인 ㅇㅎㅅ 쌤은 여느 강사들과는 많이 달랐고, 수업 스타일도 당연히 다른 수업들과는 꽤나 달랐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점도 있었지만, 일단 '분위기'등이 달라서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발제를 맡거나 하면 의무감에 늦은 밤까지 시달리기도 했지만-_-) 수업과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버틀러의 사유들도 그 세미나에서 만난 거고.

그 다음으로는 풀집에서 들었던 정희ㅈ 선생님의 강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의 기대보다는 늘 수강자가 차고 넘쳐서, 애초에 의도했던, '책상 모아 놓고 썰 푸는' 강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 강의에 온 수강자들의 열정, 그리고 때때로 들을 수 있었던 정ㅎ진쌤을 포함한 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내게 큰 의미였다. 그리고 내 좁디 좁은 인식에 충격을 주어 확장시키는 이야기들을 강의 시간 내내 전해주는 ㅈ희진쌤의 이야기들은 노트에 기록해두고 지금도 틈나는대로 보고 있다(고작 노트한 것 가지고도 empower될 수 있다!). 그 덕에 이젠 왠만한 '쎈' 담론 아니면 자극 받지도 않는다. 너무 잰체하고 폼만 잡는 남성 학자들의 강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의. 그 다음으로는 여이연에서 들었던 ㅇㅅㅇ 강의도 있지만... 이 강의에 대해서는 일단 패스.

결과적으로 보면, 내게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은 결국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을 다루었다고 해서 어떤 교육의 장이 "자유의 실천"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떤 독문과 교수가 맡았던 어떤 강의는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사회학적' 인식틀로만 페미니즘을 다루었던 어떤 강의도 정말이지 재미없었다.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그 교육의 장 내부에 있던 '관계의 질서'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교육의 장에서 당사자들이 '무엇을 습득하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들이 모여서 어떻게 습득하는가' 역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해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여러 학문이나 인식론들을 공부하는 모임들에 종종 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지긋지긋함을(때로는 공포를) 느끼면서 뛰쳐나왔다. 지식이 '해방적'이면 뭘하나, 그 지식을 공부하고 써먹는 사람들이 '해방적'이지 않은 걸.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자의식과 자기 연민으로만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교육의 장에서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진행되는 교육의 장이, 대학에서 유행하는 '실용적 지식'이나 "은행 출납식 교육" 보다 도대체 나은 점이 있었을까?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은 천천히 완독하도록 하자 ㅎㅎ

덧) 내가 좋아했던 강의나 모임에서, 나 스스로가 그 내부의 관계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느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편안함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뿐. 내가 그 모임들에 어떤 폐를 끼쳤는지는, 알 듯 말 듯 모르겠다. 흑.

덧2) 난 너무 관계에 있어 소심하고, 또 너무 자주 관계에 소홀해지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이거, '생각'만 할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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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11/25 00:42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홍성흡 옮김, 이학사, 2005)를 보고 있다.. 첫 장은 나름대로 흥미진진 했는데... 4장 쯤 가니까 갑자기 흥미가 조금은, 아주 조금 뚝, 했지만 일단 끝까지 봐야지 싶다는. (사실 흥미만 뚝, 하면 괜찮은데, '이게 뭥미?' 싶은 구절들도 눈에 띄어서... 그치만, 60년대에 쓴 글이니 pass, pass!)

재밌는 얘기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냥 짧은 '의문'이 든 것 중에 하나만.

[...]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 없는 사회이고 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적인 사회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다. 이러한 배열은 역사 없는 사회들을 권력 없는 사회로 취급하는 권력에 대한 현재의 사고와는 매우 다르다. [...] (p. 32) [강조는 원문.]


뭐, 일단 여기에 쓰인 '역사적'이라는 개념(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무엇인지?)과 '비/강제적'이라는 개념, 그리고 '정치''권력'이라는 개념에 대한 보다 명료한 정의(definition)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혼동이 되어서 말야.

어쨌든, 만약 여기서 쓰인 '강제적 정치권력'이라는 말을, '(군)주권 권력(sovereign power)'정도로 이해해도 좋다면, 결국 클라스트르가 '역사'와 '(군)주권'의 깊은ㅡ어쩌면, 필연적이자 불가분의ㅡ유대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고 읽힌다. 그렇다면 '역사'란, 결국 주권의, 주권에 의한, 주권에 대한 담론일 뿐이란 이야기일까? 다시 말해, 주권 권력을 (새로이) 쓰면서 그 근원과 정초foundation를 (탐색 및) 창조해 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주권 권력의 정통성legitimacy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정당화하는, 그저 그렇게 이러쿵저러쿵한 담론이란 이야기? 

과연 '역사'라는 담론은, 이러한 의미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비강제적"인 사회는 역사를 쓰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가졌다고 말해질 수 있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여기서 푸코를 좀 불러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지만(사실은 어느 정도 불러온 것 같지만), 깊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므로 일단 접어두자.

그런데 "역사 없는 사회"와 "역사적인 사회"라는 말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한 걸까? 그러니까, "역사적인"이란 말은 정확히 "역사 있는"이라는 의미인건지? (그럴 경우 '있는'이라는 말도 상당히 문제적이겠군) "역사적인"이라는 것은ㅡ어떤 집단, 혹은 어떤 형태의 권력에 의해서ㅡ문자로 꼼꼼하게 기록되고 영구토록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것에 붙이는 말인지? 혹은 어떤 형태든지 기록이 남을 경우에ㅡ우연이든 혹은 특정한 노력의 산물이든ㅡ붙이는 말인지? 아니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암튼 의문 가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라니까; 그냥 읽자면 그냥 읽겠지만, 궁금해지잖아..)

지저분한 의문, 하나만 더. "역사적인"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상관없이 여기서 과학적 사실 진술을 하듯 말하고 있는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혁신', '변화', '동인'이라는 말들이 어우러지면서 너무나 진보주의적(개량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냄새가 나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도 하고..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과 "역사적인"ㅡ어쩌면 인터넷을 하고 있는 우리는 '역사적인' 사회에 이미 살고 있는 셈 아닐까?ㅡ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부분에서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주권 권력을 구성하는 '정초적 폭력'이니, '성스러운 테러'니 하는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말들은 종종 들을 수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 (정치) 권력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괜찮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설득력 있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이런 경향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영 찜찜하기만 해서 말야.

물론 현재까지 '생존'해 있고 또 널리 기록되고 보존되어온 '역사'를 가진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와 현재엔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볼수도 없고 기록도 보존도 되지 못한 '역사'를 가진 역시 수많은 (정치)권력체들의 정치/사회 구조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단절, 차이, 균열이 분명히 있겠지. 근데 그러한 단절이나 차이점들을 설명할 때, '폭력'과 '강제'라는 말을 넣어서 코딩하는 것에는 여전히 거부감을 느낀다. '폭력'과 '강제'라는 말의 뜻도 엄청 애매하거니와, 그 말들이 애매한 채로(사실은 애매하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특권화 되고, 재생산되고, 특정한 정치 권력의 모델을 옹호하는 것만 같아서 말야.


결론 : ... 아 모르겠다. -_- (무책임한 주인장은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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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08/09/19 00:34

만약 그 공동체가 바로 인종주의적 배제를 통해 구성된다면, 인종주의적 발언의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데 그 공동체를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 「문화의 보편성」.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p. 81.



마사 너스봄(누스바움)의 책을 읽다가 인용.

버틀러가 "만약"이라고 말했지만, 이를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오늘날 "인종주의적 배제"의 매커니즘을 갖지 않은 '공동체'가 과연 존재할까(국가는 말할 것도 없으니까)? 심지어 무한히 다양한 국가와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모인ㅡ따라서 더 이상 지배적인 인종이 없는 특별한ㅡ'공동체' 속에서도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종주의를 경유하지 않은 발화를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인종주의를 경유하지 않은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인종주의에 단순히 반대한다고, 우리는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는 순진한 다문화주의적 리버럴 좌파 인종주의자들과 거리를 둘 때 조차도,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은밀한 인종주의자들은 아닐까?

인종주의는 진짜 어려운 주제란 말이야 (..)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나오는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은,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것 이었다. 여태까지 볼 수 있었던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고 방법이었으니. 특히 인종주의 하면 딱 '흑인' 과 '라틴', 혹은 '홀로코스트' 운운하는 이야기들에 피곤해지기도 했고. 전부 다 미국-유럽산(産) 담론들. 한국에서도 뭐,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본격적으로 한국의 인종주의에 대해서 언급하는 글들은 찾기 힘든 것 같다. 다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폐지', 혹은 뭐 '인권', '다문화' 등등의 어휘로 그것들을 에둘러 풀어낼 뿐. 아마 인종주의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나 보다. 아마, 다들 그렇게 믿고 싶겠지.

푸코가 그 책에서 얘기하는 것은 인종주의 탄생의 역사적 비화랄까? 푸코가 보기에 인종주의의 탄생은 기존의 '주권적 역사'와 구분되면서, 16, 17세기 들어서 등장했다고 보는 넓은 범위에서의 "종족 투쟁의 역사" 내지는 "반역사"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족 전쟁의 역사" 관점 이후에 등장하였던(하지만, 푸코가 찬양하는ㅡ그러나 나중에 철회하는ㅡ"종족 투쟁의 역사"와 인종주의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가 '인종주의'라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국가'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반드시 '국가 인종주의'다. 또한 푸코는 이러한 "종족 투쟁의 역사" 이전에도 있었던, 예컨대 유대인에 대한 차별 같은 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놀라운 주장을 편다. 이러한 푸코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인종주의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담론을 세밀하게 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듯 하다. 사실 푸코가 인종주의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분석이 다소 미약하기는 하다마는..

물론, 게다가, 아직 이 책을 다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이어, Security, Territory, Popul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의(이건 세미나에서 다 같이 구해뒀음)와 그 이후의 The Birth of Biopolitic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의(아직 영역본이 출판되지도 않았다 한다)로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들을 다 보아야 하고, 『성의 역사』 1권의 5장 등을 꼼꼼히 참조해야겠지. 어쨌건 재미있고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는 분석들이라는 생각. 그리고 결국 이 일련의 세 강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니까(이기도 하니까), 꼼꼼히 읽어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건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 지반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치밀하게 알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 쿨럭 -_-


어쨌건... 마사 너스봄의 짧은 논문, 그리고 이 논문에 응답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답변을 모은 이 책, 은근히 재미있는 것 같다. 물론 짜증스러운 글들도 있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 책의 부제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애국주의"라는 말은,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 폐기 처분해줘야한다는 생각을 했을텐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너스봄의 센세이셔널한 질문, "순화된(purified) 애국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녀가 주장하듯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흐억.


덧) 버틀러의 이 짧은 글에서 "실행의 모순"이라고 번역된 "performative contradiction"은 일반적으로 "수행적 모순"이라고 번역하는 걸로 알고 있다. "실행의 모순"이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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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ritte, <Les Amants>


한 손이 어떤 열매, 꽃 또는 갑자기 타오르는 꽃잎을 향해 내뻗친다.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그 시도는 열매의 무르익음, 꽃의 아름다움, 꽃잎의 불타오름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에서 그 손이 대상을 향해 충분히 움직였을 때, 또 다른 손이 열매로부터, 꽃으로부터, 꽃잎으로부터 튀어나와, 우리의 손을 맞잡기 위해 내뻗친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의 손은 열매의 닫힌 충만함 속에서, 꽃의 열린 충만함 속에서, 작열하는 손의 폭발 속에서 응결된다. 이 순간 발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구멍 뚫린 시트의 사례」(김영찬 외 역, 『성관계는 없다』, 211-2).



주판치치의 이 말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으로는...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컨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 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donner ce qu'on n'a pas,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l'aiment, 즉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l'aimé , 즉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 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55-6.



일전에 넬 4집 앨범인가 나왔을 때, <어떻게 생각해>라는 노래를 들으며 꽤나 슬퍼했던 적이 있었다. 그 가사는 이렇게 된다.

당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내 몸을 맡기고
믿음으로 무장한 관계인것처럼.
하지만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나의 마음 속에 날 가득 채우곤
마치 나는 없고 온통 당신 뿐인것 처럼.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설명해.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
열리지 않는 마음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주판치치와 보조비치의 언급들은, 오히려 이런 불일치와 결여야 말로 사랑의 필수 (구성)요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더 이상 이런 노래의 가사를 보면서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앙가주망'인 셈이다. 다시 말해 관계의 지속은 섣부른 '이해'와 '앎'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관계는 죽어버린다(그러고보면 내가 가장 싫어하고 상처를 많이 받는 말 중 하나는 "너는 ~이다."라는 식의 말이다. 나는 그게 아닌데... 그 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그 결여가 칼날이 되기도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잘 안다고(자식이 부모를 잘 안다고) 너무나 쉽게 착각하고 있듯. 그러면 서로에 대한 '앙가주망'은 철회된다. 그 대신 남는건 더 극심한 허무, 고통, 허울 좋은 의무들 뿐(오히려 이게 신파와 상처의 근원이겠지). 그 대신 나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구속,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의지와 참여와 책임.. 그리고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처와 결여와 공백에 나를 열어두기, 그러면 그 상처와 결여와 공백은 오히려 무한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상처없이 관계는 열릴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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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08/05/01 15:29

Slavoj Žižek, "Multiculturalism, or, the Cultural Logic of Multinational Capitalism", New Left Review(225: 1998), p. 42에서 일부를 대강 번역. 좀 어색한 번역이지만 ^^;

‘어메리칸 드림’의 점진적인 붕괴ㅡ아니 오히려 그 실체의 상실은ㅡ헤겔이 기술한 바 일차적인 정체성(primary identity)으로부터 이차적인 정체성(secondary identity)으로의 이행이, [오늘날]예기치 않게 전도(reverse)된다는 사실의 목격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들의 ‘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이차적 정체성이라는 ‘추상적’인 설정은 점차 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 주지 못하는, 현상적이자 순전히 형식적인 틀로 경험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점차 더 작은 정체성ㅡ종족적이고 종교적인ㅡ의 형식인 ‘근본적인premornial’것에서 지원받기를 원한다. 그러한 정체성의 형식이 심지어 민족 정체성보다 더 ‘인위적’일 때라도ㅡ게이 커뮤니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ㅡ그러한 정체성들은 특정한 ‘삶의 방식way of life’ 안에서 개인들을 보다 즉각적이고 압도적으로 붙들어 맨다는 점에서 더 ‘직접적immediate’이다. 이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시민이라는 자격 속에서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추상적’인 자유를 제한한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다루고 있는 것은 근대 초기의 민족/국가Nation 구성의 전도된 과정이다. 즉 ‘종족성의 민족화’ㅡ탈종족화de-ethnicization, 종족성의 민족성으로의 ‘지양(Aufhebung)’ㅡ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지금 ‘종족의 뿌리’에 대한 재탐구(혹은 재구성)와 함께 ‘민족성의 종족화’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차적인 정체성의 형식으로부터 ‘유기적인’ 커뮤니티를 가진 ‘근본적인(원시적인)’ 정체성으로의 ‘퇴행’은, 이미 [세계시장자본주의에 의해] ‘매개되어mediated’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그 배경background에 저항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출발 배경은 민족국가Nation-State] 그 지형terrain에서 발생하는 세계 시장의 보편적인 차원에 대한 반응(reaction)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이러한 현상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퇴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확히 정반대되는 것의 출현 형태이다. 즉, [헤겔이 말한]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on’의 한 종류로서, 이러한 ‘근본적인’ 정체성이 오늘날 거듭 언명된다는 점은, 유기적-실체적인 조화unity의 상실이 이제 완전히 완성되었다는 것을 지시한다.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



지젝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부정의 부정", 알듯 하면서도 알듯 말듯 =_= 역시 철학 공부를 시작하려면 딴 경로를 들르기 보다는 직접 칸트와 헤겔로 가야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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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4/25 21:56

Terry Eagleton. The Idea of Culture. Oxford: Blackwell, 2002. 14-5. 의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삶의 모든 형식들은, 그것이 반대하는 사람들(dissident)[*]이나 소수자 그룹의 것일 경우에는 찬미할 만한 것이 되지만, 반면 다수의 것일 경우에는 응징되어야만 할 것이 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의 정치학'은 레즈비어니즘은 포함하지만 내셔널리즘은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포스트모던한 급진주의자들에 반대되는 낭만주의적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완전히(wholly) 비논리적인 운동이다. [이글턴은 앞에서 낭만주의 혁명기와 20세기 혁명기를 비교 했음] 정치적 혁명기를 살아왔던 낭만주의적 급진주의자 진영은, 다수의 운동이나 합의가 언제나 무지몽매하다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반면, 나중에 번창하였으며 같은 역사 속에서 덜 행복했던 국면을 거친 포스트모던한 급진주의자 진영은 급진적인 대중 운동의 신념을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소중한 운동들을 거의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이론적으로 봤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위대한 20세기 중반의 국가 독립 운동의 이후에 나타났으며, 이는 마치 지진처럼 터져나왔던 정치적인 대 격변을 기억하기에는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너무나도 어리다/미숙하다.

[*] dissident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에 강하게 동의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 특히 이러한 종류의 행동이 이 사람을 위험으로 몰고갈 수 있는 나라에서."이다.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하지^^;


가끔씩 이글턴의 책을 읽을 때 "교양주의자"라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렇게 글을 쓸 줄은 몰랐는걸(번역 안된 원서로는 처음 접하는데). 사실 그의 책을 보면 단어도 쉬운 단어를 쓰지 않는 편이라, 단어의 수준만 보면 정말 '교육 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될 때가 많다.. 어쨌거나 사실 이 부분을 읽고서는 좀 불쾌해 졌다. 특히 "미숙하다(young)"는 표현에서는. 정말 "교양주의자" + "어르신"스럽다.

정말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어쨌다는걸까? 사실 정체성의 정치학에 관심을 보이거나 하는 사람이, 테리 이글턴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할 듯한 '계급 투쟁'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에 관심을 갖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물론 실제적인 행위나 운동의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될텐데. 또한 '이론적인' 정체성의 정치학들은 사실상 맑스주의에도 큰 빚을 지고 있다. 이글턴은 상당히 LGBTQ 운동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알고(만) 있는 LGBTQ 액티비스트들은 반전 집회에도 나가고, 대운하 반대도 하고, 자본주의에도 열심히 반대하더라(물론 다 그런 건 아니야...). 게다가 고기를 잘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흥, 전통 맑시스트들 보다는 훨씬 아름답지 않은감?

대체 이글턴은 누굴 보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마 구체적인 대상이 없을 것 같다.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러고보니, 며칠 전 대강 훑어보았던 Geraldine Harris의 Beyond Representation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생각을 본 적이 있다. Harris는 포스트모던 정치학을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정치학, 혹은 친-자본주의적 정치학으로 박음질 한다. 확실히 포스트모던이 '욕'이긴 '욕'으로 취급되는구나...;


덧) 확실히 나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런 논의들을 보면 갈수록 혼란만 더해간다. 며칠 전에 Oxford 대학에서 나오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총서 중에 <Racism>, <Postmodernism>, <Poststructualism>, <Ideology>, <Postcolonialism> 5권을 주문 했는데, 요 책들이 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기본 어휘들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 시리즈는, 조나단 컬러의 <Literary Theory>가 괜찮게 읽히길래(이건 동문선에서 나온 번역본으로 구했음) 다른 책들도 주문했는데, 제법 괜찮은 총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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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4/07 12:04

Fritz Klein, The Bisexual Option: A Concept of One Hundred Percent Intimacy (1978), Mell Storr, Bisexuality, NY: Routledge, 1999, pp.38-48에서 재인용 및 번역.

정신병리학자들이 질문해 온 오래된 낭만적인 질문 중의 하나는, 한 남자가 혹은 한 인간이 두명의 여성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 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 이다. 인간이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 이는 개인들이 가진 충실함의 기준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녀들은 피상적이거나 일시적인 걸 뛰어넘어, 관계 속에서 진실된 신뢰라는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녀들은 이중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스파이'가 되는가?

[...]

우리들의 사회에서, 친밀감에 대한 공포는 부분적으로 헤테로포비아와 호모포비아 또는 양쪽 모두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공포와 혼란의 중요한 이유는, 섹슈얼리티와 친밀감이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필연적으로 같이 가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상보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독립적인 감정이다. 그 감정들의 양립가능성은, 개인적인 환경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존한다.

병원에 누워있는 좋은 친구와 가까워지면 섹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순수하고' 100% 친밀감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 간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섹스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친밀감은 병원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다. 혹은, 두 명의 사람이 일치감을 공유하기 위해 한번 서로를 안아 주는 것ㅡ성적이든 감정적이든ㅡ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황을 가정해보라. 만약 그 포옹이 개인적이나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거부된다면, 그 두 사람은 100% 친밀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들에 자유롭게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강좌 교재 였던 책. 클레인이 보기에 감정적인 층위에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양성애적' 층위에서 움직인다. (요약하자면) 결국 그래서 클레인은 양성애야말로 100% 친밀함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말한다. (허허허 ^^;) 갑자기 너무나 낭만적인 이야기들을 끌고 들어오기도 하고. 그러니까 태초에 우리는 하나였으나 신이 우리를 찢어 놓았다는, 그런 식의 말 이랄까(이게 클레인의 말은 아님). 나이브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클레인의 생각을 한국의 맥락에 그대로 끌고 들어오면 곤란하다. 적어도 클레인이 이 책을 쓴 미국에서는 G/L 집단과 B집단 사이에 여러 가지 알력이 많이 있었고, 그 과정의 산물이니까. HIV에 대한 공포가 미국을 휩쓸 때 나온 이야기기도 하니까. 한국은 뭐, 내가 알기론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호모 포비아'가 전면에 나선 것도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특히 B집단 같은 경우엔 '전무全無'에 가깝잖아? 게다가 당시에는 클레인 같은 사람들이 내놓은 생각들이 여피족스러운 '쿨한 유행'으로 다루어졌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유력 일간지 등을 통해서도 보도가 된... "왜 하나만 해? 둘 다 할 수 있는데?" 뭐 이런 -,ㅡ

이런 쿨한 맥락에서 "그녀애자" 혹은 "그남애자"라는 말도 성립하게 된다. 자기는 그녀나 그남을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사랑하는거지, 내가 G나 L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이런 탈정치도 문제적일 것이다. 예컨대, 왜 굳이 자기가 G나 L이 아니라는 걸 덧붙이는가? 어떤 성적 규범 속에서 그런 말을 덧붙여야'만' 하는가? 그건 '-포비아' 때문은 아닌가? 동시에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굳이 정치화하는 것도 문제적일 순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개인들을 추상화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추상화 과정 자체에서 배제와 인식론적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까.

멜 스토어의 책에는 너무 적게 인용이 되어 있어서(그래도 5장 정도는 된다마는), 클레인이 쓴 full text로 읽으면 재밌을 것도 같다.


덧) 이런 글을 읽으면 꼭 이런 글을 쓴 이의 성적 지향이 무얼까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ㅎㅎㅎ. 그런 것도 또한 현재 우리들이 속한 성 제도(sexual regime)의 효과겠지. 이성애/동성애/(양성애)라는 단순하고 명쾌 투명한 구도로 섹슈얼리티를 재단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빈곤하면서도 동시에 폭력적인 제도. 또 한편으로는 정체성의 정치학에서는 필요할 수밖에 없는..

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4/05 21:33

칸트는 과학의 원리가 그 어떤 학문의 원리들보다 심오하다고 믿었으며, 과학적 논리와 과학적 방법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어떤 점에서든 열광적이거나 혼란스러운 것 모두를 싫어했다. 그가 좋아한 것은 논리와 엄밀함이었다. 그는 이러한 성질들에 반대하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나태한 이들로 치부했다. 논리와 엄밀함은 인간 정신의 고된 훈련이었으며, 이런 일들이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른 곳에서 반대의 이유를 생각해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강유원 나현영 역, p. 114. 강조는 내가.


굳이 벌린의 칸트를 가지고 이야기 할 것은 없지만, 예전에 읽고 지나쳤던 부분이었는데 어떤 글을 읽고는 문득 생각나버려서...

자기의 입장에 반대되는 입장을 만나면,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아주아주 짜증나면서도 무서운 유형의 사람들이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엔 더더욱 그렇다. 예컨대 이런 사고의 흐름은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런 경쟁이 자기 자신에게 너무 고되고 힘들고 벅차기 때문에 반대한다, 는 식으로... 이런 관점이 관대한 휴머니스트적 관점, 혹은 국가주의적 관점 등과 맞물리면, 인간 개조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나.

그나저나 "혼란스러운 것 모두를 싫어"한 칸트의 책을 보면, 마구 혼란스러워지는 사람들도 많은데 ㅎㅎ 나를 비롯하여. 그래서 이런 책도 있잖아. T.K.Seung, Kant: A Guide for the Perplex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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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08/03/28 22:13

피에르 바야르,『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김병욱 역, 여름언덕, pp.204-5

특정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 책을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두 진영으로 양단하려는 것은 독서 행위의 불확실성을 모르는 소치다. [...]

그렇다면 '타자가 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ㅡ여기서 '타자'란 곧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ㅡ이야말로 우리가 읽었건 읽지 않았건 책들에 대해 좋은 여건에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일차적 조건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책들에 대한 담론에서 문제의 그 앎이란 불확실한 앎이며, '타자'란 우리의 대화 상대들에게 투영된 우리 자신의 불안한 형상이다. 학교 교육이 선전하는 교양 같은 존재, 그 허구성이 우리의 삶과 사유를 방해하는 흠결 없는 교양 같은 존재가 타자인 것이다.

'타자'가 알 거라는 생각이 주는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진정한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다. 타자가 읽었으리라는 생각, 그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 하는 생각은, 창작을 비독자가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부득이 의존하는 수단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 책의 핵심이라면 '핵심'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어서 옮겨둔다. ^^;

무엇보다 이 책은 재밌다. 문학 작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렇게 인용을 많이 하면서도 이 책이나 저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용이 된 원래의 책을 봐야겠다는 의심이 들지 않게 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쓰여진 책인 것 같다. 그만큼 '속아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인용은 속임과 속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게임이고 거기에서 비로소 의미가 만들어지니까. 사실 '그럴싸함plausible'을 텍스트에서 구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문학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라는데, 딱 그 느낌의 책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해법'도 거의 모두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내가 아는) 프랑스에서 이 책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이, 너무나 자연스러워보이는..

예전에 한 교수의 연구실에 찾아가서 면담했을 때 일부러 이런 질문을 던진적 있었는데. "연구실 여기에 있는 책, 쭉- 다 보신거에요?" 사실 대화를 나누다가 좀 조금 뒤틀려 버린 마음에서 했던 말이기는 했지만. 그 교수는 내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그걸 왜 걱정하니? 역시 ㅇㅇ대 애들은... 이런 말투;) 넘어가버렸다. 때문에 나는 이 말이 교수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좀 옹졸....; 이 책을 보고 나니, 그 때 의도했던 것 보다 그 교수에게 더 큰 실례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다 :)

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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