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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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8/02 기억은 차라리 망각의 한 형식
일기 / 2010/08/25 22:25
휴가를 나와 이사한 집에서 머물던 동생이 갑자기 뇌수막염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 친척들과 부모님 집들이하랴, 병원 왔다갔다 하랴, 정신없이 보냈던 며칠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동생이 퇴원해서 국군병원으로 간다. 야간엔 눈이 잘 안보이고, 처음 가는 서울 길을 무서워하고, 오래 운전하면 너무 피곤해서 자주 조는, 또 이제는 50 중반 들어선 아빠는, 내일 아침 일찍 동생을 홍천 국군병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서울 집에 와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내 방에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나는 아마 오늘 밤 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묻지마 세트를 잔뜩 보냈고, 나와 동생은 그것들을 정리하다가 조금 짜증이 났다. 도대체 아무도 먹지도 않는 곶감은 왜 가져왔냐며, 변하니까 도로 가져가지도 못하지 않냐며, 제발 좀 미리 물어보고 주든지 말든지 하라고 대놓고 역정을 내는 자식들에게, 아비는 순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삼촌과 소주를 마시고 눈이 벌개져 돌아온 아비가 외삼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궁금해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어지러워 아무 책이나 집고 폈는데, 하필이면 그게 공지영 작가의 옛 소설책이었다. 그 소설책의 몇 소설들은, 90년대식 부채감을 가진 자아로 80년을 회상한다. 90년대식 부채감을 가진 소설의 자아는 '살아남았고', 약간의 죄의식으로 '잘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혹은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전에 두 번 읽었던 이 소설책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구절들을 인상 깊게 읽고 책귀를 펴고 접는다. 오늘 만났던 A에게, '삶이 간결해지고 있다',고 말했던 건 실은 이 책에서 읽었던 표현이었다. 원작 소설과는 다른 맥락이었지만 말이다. 이 소설책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혹은 지나간 것들의 이름으로 현재를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소재는 다르지만, 요즘의 내 상태와 책의 정서 구조는 밀접하다. 영원히 정리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무엇인가가 정리되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는 차곡차곡 정리되어 내 과거의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에 전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여야만 하는데, 혹은 원래 오늘 가려고 했던 심포지엄의 주제인 어느 철학자의 표현을 조금 빌자면, 오래 지속되는 미래이어야만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하나 둘 씩 자연스럽게 과거가 된다. 지금의 내게 남은 게 별로 없다는 느낌이다. 내일은 S와 이태원에 가기로 했다. J도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했다. 만나면 좋겠는데. 약속 시간은 늦은 저녁이다. S를 만나기 전엔 오랜만에 종로에서 청춘을 다룬 영화 한편을 볼 것이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커피 체인점에 잠시 앉아 있어야 겠다. 이태원에 가서는 술을 마시겠지만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과음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내일이다.

길었던 8월이 마침내 가고 있다. 비가 많이 온다. 더위도 좀 해결이 되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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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8/23 22:28
1.

벤야민은 기억이라는 단어의 어원에는 매개물(medium)이라는 뜻이 있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해, 벤야민의 '기억'은 과거에 체험했던 것을 '발굴'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이다. 그렇다면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많은 부분에 '기억'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을 한 때 하나로 묶어주었던 과거의 체험을, 기억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재의 장에 소환하는 것. 그리하여 각자의 일상에 충실하느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관계를 재건하고, 체험의 공백에 다리를 놓으려는 것. 같이 체험을 했다는 것은, 어떤 시간과 공간을 '의미있게' 보냈다는 것, 그리하여 각자의 몸에 서로를 새겨 넣는다는 것, 다시 말해 경험을 체현했다는 것.

그런데 그렇다고 기억이 체험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사고하는데 익숙하지만, 오로지 형식만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보증할 수 있을 때가 많다. 형식이자 내용으로서의 형식,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로서의 어떤 <무엇>이 있다(그 <무엇>을 우리는 어떤 책의 제목을 따라 <영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야민을 따라 기억이 매개라고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그 기억이 체험과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억이라는 행위(형식)은 곧 체험(내용)이다. 기억하는 방식, 기억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체험 조차도 결정짓는다. 몸에 체현한 경험들은 기억에 의해 다시 배치되기 마련이고 우리의 <무엇(영혼)>도 변한다. 그러므로 오랜 관계도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얼마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2.

여기서 '기억'이라는 의미를 지닌 영단어(remember)를 조금 더 뜯어보면 어떨까? 의미상으로 remember는 re/member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member는 무슨 뜻인가? '어느 집단의 일원'이라는 뜻 아닌가?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것은 벤야민의 '기억'의 의미에 덧대어보면 집단의 성원권을 '재re'확인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일원이 아닌 사람들이, 다시(re) 어느 모임의 일원(member)이 된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기억하는 행위의 일상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member에는 '신체의 사지'라는 뜻도 있다. 그리하여 dis/member는 '팔다리를 절단하다'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re/member는 이렇게 절단된 사지를 다시 접합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폭력에 의해 절단되었던 사지를 비로소 잇는다는 것.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감히 기억하는 자만이 고통 끝에 잘려나간 신체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억하는 행위의 정치적인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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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8/20 10:00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ㅡ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ㅡ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글을 잘 쓴다는 것」,『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p. 26


이 짧은 글에도 분석할 만한 여러가지 전제가 들어 있지만, 그 전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 없이 글 모두에 동의할만 하다. 글을 쓸 때 두고두고 참고할만한 구절이어서 마침내 옮겨 둬 본다. 그런데 자기가 글 쓰는 스타일을 <잘 쓴다는 것>으로 규 정짓는 것 같아 피식피식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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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19 22:03
요 며칠 중요한 신변의 변화가 생겼고, 이 급격한 변화는 기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기 때문에 변화 자체에서 혼란을 느끼지는 않고 있다. 변화한 뒤의 여러 날을 미리 살아왔다는 듯이. 하긴 뭐 상징적인 의미만 클 뿐, 실질적인 변화는 아니라고 보아도 좋으니까. 여하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해야겠다고만 생각했던 것들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핑계가 모두 사라졌으니까. 일상을 조금 더 조여도 좋을 것이다. 느슨한 건 가끔이면 족하다.

오늘 책 정리를 끝으로 이사를 모두 마쳤다. 이번 이사는 그냥 원룸이 아니라, 방 2개(+ 작은 방 하나) 세를 얻어 들어오는 것이어서 살림살이를 모두 마련해야 해서 일이 컸다. 아니, 일이 컸다고 말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대부분은 구입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집에 이것저것을 설치하고 갔다. 이렇게 서울에 다시 살게 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히 기업에 고용되어 있는 경우엔 사람들이 한없이 친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치가 끝나고 갈 때는 전화가 오면 친절하게 설치를 받았다고 한 마디만 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이 엄청난 더위에, 온 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싫은 내색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 무시무시한 감정의 조절, 통제, 그리고 감정을 둘러싼 여러 규율들. 얼마 전까지 살았던 동네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다. 거기서는 택배가 온다는 시간도 들쑥날쑥하고, 집에 있겠다고 했다가 잠시 외출이라도 했다치면 전화로 욕을 먹기(?) 일쑤였는데. 그러나 나는 후자가 더 좋다. 나쁜 소리를 들으면 당연히 기분이 나빠지지만, 나는 서울에서 느끼는 어떤 황송함 내지는 부자연스러움이 너무 싫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건지. 피부로 느끼기엔 이런 시스템이 2008년보다 훨씬 더 한데.

간만에 생활인이 되고 나니까 예전엔 귀찮았던 것들을 척척, 하게 되는 것 같다. 빨래도, 설거지도, 쇼핑도, 청소도 미루지 않고 척척, 하게 되었다. 이불도 일어나면 척척, 갠다. 식사도 대충 라면이나 끓이거나 참치나 김 따위로 때우지 않고, 뭔가를 가열하고 요리해서 먹게 되었다. 반찬도 조금씩 만들어보고 있다. 반찬도 보관통채로 꺼내서 먹지 않고, 적당히 먹을 양을 접시에 덜어서 먹는다. 자기 전에는 쌀을 씻어 아침밥 취사 예약을 해놓고 잔다. 이 생활패턴이 자리 잡히면 영양학도 신경쓸 것이고, (지금도 거의 채식이지만) 채식 위주의 식단도 연구해봐야지. 이제 적당한 운동만 시작하면 되는데, 일단은 돈이 들지 않는 러닝을 해볼까 생각중이다. 2분 거리에 학교 운동장이 있으니까. 이렇게 해야 우울하지 않게, 또 건강하게, 성실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당분간은 충실하게 실천해보려고 한다. 막상 행동으로 옮기면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예전처럼 미루면서 해야한다는 사실에 스트레스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유명한 이론가들을 읽고 그것을 재맥락화하여 글로 옮기는 것, 그리고 '독창적인' 사유를 하고 글을 쓰는 것,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게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얼마 전까지는 정신분석학(특히 지젝)을 인용하는 글을 보면 부끄럽고, 랑시에르나 바디우, 푸코를 인용한 글을 보면 그저 피곤해지고, 맑스나 알튀세 등등을 인용한 글을 보면 왠지 모르게 입안이 텁텁해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건 내가 그 이론가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거장들을 읽는 건 자칫하면 '사유능력의 과부하(마치 인용하는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굴다가 글이 자기 통제력을 넘어버리는 것)' 혹은 '사유의 자판기 효과(어떤 현상을 이론적 자판기에 집어 넣으면 자동으로 그 현상을 진단하는 글이 요리되어 나오는 것)'를 낳는다. 그렇다고 그 반대축으로 가버리면 어떨까? 문자 그대로 '독창적인' 사유와 글이 과연 있을까. 외면상 인용이 없다고 한들, 그 글이 과연 거장들을 현란하게 인용하는 글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가장 바라는 건, 나 스스로도 쓰면서 즐겁고 독자들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현상과 맥락에 맞는 사유를 하는 일인데. 다시 말해 좋은 글을 읽고 쓰고 읽히고 듣는 일인데. 모든게 너무 어렵다. 왜 나는 글을 잘 못쓸까? 앞으로 본격적으로 학교에서 공부 하면서는 심히 노력을 하는 수밖에... 모르는 걸 창피해 말고 내가 가진 것들 사이에서 길을 잘 찾아야지. 적어도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는 서서히 보이고 있다. 아직 명징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좋은 징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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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13 00:08

창문을 모두 열어 놓으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노래도 물을 흠뻑 먹은 듯 질퍽대며 어딘가 힘겨워 잘 들리지 않는다. 김현 평론가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산울림의 <청춘>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뒀는데, 폭우 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들기 전까지 무한반복해 들을 예정이다. 이 노래가 어쩐지 스물 아홉에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서른 넘어갈 즈음에... 비가 과연 쏟아지는 중이다.

황정은의 소설집을 완독했다. 너무 좋아서 어느 작품은 두 번 세 번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백의 그림자> 해설에서 이 소설집을 발표한 순서대로 읽어보라고 하기에 그렇게 읽었다. 그러자 과연 이 작가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게 느껴졌다. 부러울만한 속도로 말이다. 사실 초기 작품인 <마더>나 <소년>은 조금 평이하다고 느꼈지만(그래도 좋은 작품), 그 이후에 발표한 작품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좋았다. 내가 느끼기엔 신형철 평론가가 좋아할만한 스타일ㅡ평소에 하던 이야기에 부합하는 스타일, 즉 나 역시 좋아할만한 스타일ㅡ을 갖춘 작가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작가가 명사(특히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이 작가는 배수아를 좋아할까?). 같이 구입한 <백의 그림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한나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뒹굴거릴 수 있을 때 읽으려 한다.

대가족적인 삶에 대해 동경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왜냐면 어렸을 적 꽤나 오래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까), 최근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재)발견한 동영상 몇개를 보면서 그것도 꽤나 좋을 때가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2006년 겨울 <열린 교실> 때였는데... 점심 때 아이들과 함께 김밥을 싸먹고 비빔밥을 해먹던 때였다. 언제나 시끌벅적 했다. 어느 손은 당연하다는 듯 서툴게, 어느 손은 김밥을 좀 팔았는지 능숙하게 밥을 펴고 재료를 깔고 둘둘둘.. 물론 맛있었다. 그리고 큰 양철에 고사리며 도라지며 콩나물이며 참치며 참기름이며를 듬뿍 넣고 사깡에서 사온 공기밥을 털어 넣고 고추장을 넣어 슥슥비벼서 입안 한가득 넣던 10명의 사람들. 내 컴플렉스인 목소리가 많이 들려서 민망했지만 어쨌든.

짐멜의 에세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을 읽고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했던 건데... 아이들에게 예쁜 걸 입히고 좋은 걸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는게 과연 아이에게 좋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반응에 민감하기 때문에, 부모 욕심이라는게 보이면 그것에 은근슬쩍 응해버리기 쉽다. 그건 결국 아이의 감성을 부모의 감성대로 패턴화하는 것, 아이를 작은 부모로 만들어 버리는 것, 달리 말해 자극을 처리하는 방법을 (시행착오 끝에) 아이 스스로 터득할 가능성을 막아 버리고 이미 한 번 처리된 자극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아이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부모들이 조금 거북하다. 아이들마저 레디-메이드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어릴 때는 '촌스러울'수록 좋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회사에서 만들어 파는 장난감을 줄 필요도 없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아이들은 모든 사물에서 장난감을 발견하니까. 옷도 예쁜 새옷을 입히느니, 어디서 받아와 성장의 흔적이 묻은 헌옷을 입히는 게 좋다고 믿는다. 또 아이의 조기 교육이 필요하다면 학원에 보내고 비디오를 보일 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된다. 미메시스의 원칙.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 특별히 잘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듯 기다리면서. 그리고 아이들 특유의 변덕을 인내하면서. 여기 덧붙인 사진은 나는 아니고 동생 어릴 때인데, 모두 어디서 받은 낡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예쁘잖아.

결국 저마다의 방식이란 게 있는 법이어서, 예전 같으면 이기적인 행동 아니냐고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를 어떤 방식에 대해 납득하게 되어버렸다. 납득하게 되었다는 건 나를 그 방식에 던져 넣는 것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게 과히 나쁘지 않다. 관계에 이기적인 건 어디에도 없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결국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니까. 어쩐지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덧) 이게 앞서 언급한 김밥 씬. 이런 동영상이 몇 개 더 있는데... 아 배가 고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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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10 17:32
어쩐지 트위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 같아서는 쓸말도 없고, 타임라인에서 읽을 말도 없다. 현직 작가들이나 뮤지션들을 많이 팔로잉 했는데, 그들이 구름 위에서 노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는 왠지 시시해졌다. 몰랐던 바가 아니지만, 실망했던 것 보면 나름 어떤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난 자기의 문제(상처, 사랑하는 방법, 기억 등등)를 작품화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윤리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타인의 문제를(혹은 자기 문제라도 보편으로서 설득할 수 있는) 소설과 시와 노래로 쓰는 사람을 알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문 것 같다. 결여와 결핍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조건이니까 조금은 다른 가능성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어차피 휴대전화를 바꾸면서 요금제가 달라져 휴대폰으로 트위터에 접속할 수도 없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마음으로 트위터와 얼마 간 절연해 보기로 했다.

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가입했던 주택 청약 통장은, 매달 10일이면 꼬박꼬박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 간다. 당분간 수입이 없을 나로서는 너무 큰 부담이기 때문에, 이걸 해지하지는 않더라도 매달 인출 금액을 최소 한도로 맞춰놓고 싶었다. 부모님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왜 그러냐며 반대하신다. 나는 수입이 없는 대학원생이라고, 어차피 난 부유하게 못 살 것이고 그러므로 내 인생에서 집을 구입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얘기했더니, 문자 그대로 펄쩍 뛰면서 그런 소리 말라신다. (그런데 어쩌나, 정말 그럴 것 같은데) 집을 구입하기 위해선 누구나 무리하는 거라고, 누구나 빚을 내면서까지 사는 거라고 설득한다. 대출금 원금과 이자로 뭉텅뭉텅 통장이 잘려 나가고, 행여나 잔금이 모자랄라치면 밤낮 걱정하면서, 다른 데도 아니고 은행에 저당잡힌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얘기까진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서울에 가는 버스 안에서 <1박 2일>을 봤다. 내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예능인데,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프로그램의 감수성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착한 도덕주의 프로그램은 독도에 찾아가서 경비대원들에게 자장면을 만들어줬다. 경비대원들은 계급 순으로 줄을 서서 자장면을 받아야 했고, 결과적으로 수경과 상경 계급은 일찍 다 자장면을 먹었지만, 일경이나 이경 계급은 군침을 삼키며 노심초사 자장면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카메라는 그걸 매우 재밌는 일인양 담았다. 계급 사회에서 이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그리고 이런 게 참 재미있지 않냐는 듯. 나라면 씨팔, 이딴 자장면 안처먹고 말아, 라고 했을 법한 (나로서는) 모욕스러운 장면이었다. 한국의 계급(남성)사회에서 하급자에 대한 인격적 모욕은 이렇게 재미있는 것, 추억이 될만한 것으로 정당화 된다. 하급자도 상급자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언어폭력이나 구타가 많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서점에서 뒤적인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인데, 프루스트는 지인들로부터 최고의 친구(사교적이고 사려깊고 친근한 느낌을 주고 쿨한 직업을 가졌고 게다가 유명하기까지 한)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우정에 대한 회의를 표현하고 피플들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시간을 꿈꾸곤 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소설가인지 나로서는 읽지 못했으므로 사실 알지 못하지만(물론 그는 정전(canon)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이다), 당대 사교계의 톱스타급 '지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체스터톤은 어디선가 "교육을 찬양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교육에 대해 얼마간 경멸하지 않고서는 누구의 교육도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프루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정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의 생로병사를 경험하고, 그것의 허망함에 대해 아는 사람만이, 그것에 대해 진정으로 깨닫고 있다고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야만 대상을 관조할 수 있는 '거리'가 생기고, 그 때 우리는 그것의 완성을 본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대문 사진 밑에 보면 작은 글씨로 'history'라고 쓰인 게 있는데, 그걸 누르면 여태까지 썼던 대문 사진과 글이 모두 나온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다이어리야 폴더 비공개로 돌리면 간단한 문제지만, 이건 대책이 없어서 죄다 지워버렸다. 더 어릴 적엔 왜 그렇게 싸이월드에 집착했었는지, 한 페이지에 5개 히스토리가 나오는데 이 페이지가 총합 250여 페이지였다. 모두 수동으로 지워야 했으니까 나는 클릭과 스페이스를 최소 1250회 이상 누른 것이다. 왜 지웠냐고? 너무 '쪽팔려서'. 왜 쪽팔리냐면, 그때의 기억들과 행동과 감정들이 모두 그때엔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 지난 진정성만큼 창피한 것도 없다. 짝/사랑의 기억,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온갖 고민들, 배신감, 정체감, 공허감, 허세(니체나 체 게바라를 들먹이는), 유치함 따위가 뒤섞인 싸이월드 히스토리를 보는 건 창피한 걸 넘어 정말 미칠 것 같은 일이다. 결국 30분 걸려서 다 지웠다. 대단해.

요즘엔 레이 초우의 글을 자주 읽고 있다. 그의 글이 매력적인 이유는 섣부른 보편주의도 아니고 맹목적인 특수주의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로만 보편주의/특수주의라는 쌍둥이 이분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야 많지만, 레이 초우만큼 이 이분법 너머에서 사유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문화연구라는 매력적인 이론적 도구의 이상적 조합을 보는 것 같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비평가들도 대개 내가 좋아하는 비평가들이다. 당분간은 계속 읽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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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8/03 23:40
인생의 사이클에 갈수록 둔감해지는 걸 느낀다(이 뭐 애늙은이 같은 소리람). 이를테면 생일이라든지, 계절이라든지, 혹은 주말이라든지, 한달한달의 흐름이라든지. 나이 먹는 것도 스물다섯이 지나 스물여섯이 된 거에서 차이를 못느낀다. 스물에서 서른으로 넘어갈 때가 되면 이 차이를 크게 느끼려나?

이건 일요일 아침부터 오늘까지 약 3일째 아무데도 나가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다. 오후 4시 쯤 맥주나 공급해야겠다 싶어서 마트에 잠깐 걸어가는 길에 마주한 더위에 협박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런데도 마트에 가고 싶냐고. 감각으로 말하는 날것의 협박. 면류에 지쳤으므로 주먹밥 거리를 사와서 주먹밥을 해먹었다. 갓한 밥이 뜨거운게 싫어서 얼음물에 식혔다. 내일까지는 그냥 집에 콕 박혀 있어야겠다.

요즘엔 안 본 영화를 보는 일이 말 그대로 '일'처럼 여겨진다. 영화관에 굳이 찾아가지 않으면, 안 본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요새는 그냥 복습을 한다. 요즘엔 굿 다운로더니 뭐니 해서 얼마의 돈을 내면 영화 파일을 쉽게 소유할 수 있다(그래서 외장하드도 하나 샀다). 이전에 봤던 영화를 또 보고, 거기서 이전에 보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좋아한다. (오늘은 무엇을 볼까나)

이런 현상은 위에서 말한바, 인생의 사이클에 둔감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다. 요즘엔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돌아보거나 내가 잃어온 것들을 자꾸 추수하게 된다. 아마 남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그래서 내 나이 또래로 숨바쁘게 사는 친구들을 보면 대단해보인다. 나는 이렇게도 느리고 더딘데, 나는 주말과 방학이 필요한 사람인데.

요즘 나는 시간이 많지만 고민이 많지는 않다. 고민이란 건 어디까지나 미래지향적(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든 불안으로 그저 상상해 낸 미래이든)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내가 해야할 행위에 대한 생각이니까. 시간이 많은 요즘 내가 하는 고민이라봐야 아주 사소하다. <1Q84>는 하루키의 대표작일 수 없으며 또 절대로 좋은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1권과 2권을 사버렸으니 세트를 완성하기 위해 출간한 3권을 사봐야 하는가, 같은 고민. 사지 않으면 절대 보지 않을 책이므로(돈 아까우니까 보겠지).

시간이 넉넉하다보니 심지어는 요즘 이런 생각도 하고 있다. 정말로 필요한 건 이 세상에 없다는 거. 책이든, 관계든, 물건이든, 돈이든. 어느 정도만 충족되면 된다는 것. 왠지 모를 압박에 센 척 하고 욕망하며 사느니, 그냥 내가 조금 더 작아지면 되는 문제라는 거. 이건 약간 윤리적인 이유다. 끝끝내 3인칭을 거부하고 1인칭으로만 소설을 쓰는 사람들처럼(giving an account of oneself!).

느긋해보이겠지만, 뭐. 사실 어쩐지 폭풍전야 같다는 느낌도 든다.


목요일에는 서울에 갔다가 금요일엔 학회 워크샵에 처음 간다. 나는 그냥 구경가는거다. 애정이나 조금이라도 생기려나 모르겠다. 120여명이 온다는데, 앞으로 좋아할만한 사람 둘셋만 있어도 대성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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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일기
조각들 / 2010/08/03 00:27
최근 몇 년간 내가 락페에 가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언제나 동경하면서도 말이다.

1. 관람 문화가 싫다.
특히 락 페스티벌에 가면 슬램이니 뭐니 해서 정신없이 뛰어들 노는데, 나는 내가 다칠까봐 엄청 무섭기도 하지만 또 익명의 땀 묻은 살결이 닿는게 끔찍하게 싫다. 또 좋은 공연에 과하게 신이 난 사람들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자체를 말아 먹는 꼴을 보고 있으면(동시에 그걸 또 정당화 한다) 피지컬한 나쁜 충동을 느낀다.

2. 좋은 자리 잡는 게 어렵다.
이어폰/헤드폰으로 듣는 음악은 최고의 음질은 아니지만 일정한 음질은 보장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라이빗한 감상을 지원한다. 그러나 페스티벌에 갈 경우 음향이 좋은 자리에 있는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리를 잡는게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정석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앞서 말한 슬램 따위나 밀집한 관중들 때문에 구석진 자리로 몰려나고나면, 내가 음악을 들으러 온건지 혹은 나중에 블로그 따위에 페스티벌에 갔다 왔다고 인증하려고 온건지 헷갈려진다.

3. 락페에 온 20대라면 락페의 모든 부분을 좋아해야 하는 것 같은 분위기.
나는 음악 들으러 가는 거지 '락페'를 즐기려고 가는 건 아니다. 난감한 사람들에게 항의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는 것도 싫다. 그리고 나는 유스 컬쳐가 싫다. 락페는 마치 유스 컬쳐인 것처럼 이해된다. 10대 후반~20대 혹은 30대 일부를 포괄하는 사람들이라면 즐길 수 있는 문화처럼. (사실 그런 방식으로 호명된 모든 하위문화들이 싫다. 청소년문화는 청소년문화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노년 문화도 노년 문화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뭐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락페엔 언제나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_- 듣기 싫은 음악(예컨대 지루하거나 나쁜 음악)이나 시간을 죽이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들어야한다는지 하는 문제는 그리 나쁘진 않다.


아마 결국 난 앞으로도 락페엔 영영 못갈거야. 스무살 대 초반에 갔다온 걸로 만족해야지. 나는 그냥 분위기 좋은 작은 공연장에서 자리를 잡고 맥주를 홀짝이며 조곤조곤 노래하는거나 들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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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8/02 17:46

기억과 망각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고 모순적인 관계이기 쉽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 잊어버린 것은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나의 형편없는 기억력에 좌절한다. 또 기억하기 위해 쏟아붓는 시간도 아까워 한다. 학부에 다닐 때는 일부러 객관식 시험이 없는 수업만 골라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이런 인식은 기억을 특권화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 관심범주는 늘 제한되어 있기에 모든 국면을 총체적으로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다는 사실, 또 우리 뇌의 기억력은 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좋은 기억력은 늘 부러운 대상이었다.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에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차라리 망각일 때가 있고, 망각했던 것이 차라리 기억일 때가 있다. 특히 경험과 역사를 언어화할 때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부분적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이 발화되는 순간 그 기억이 거짓일 수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때때로 기억은 순전히 어떤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서 존재할 때도 있다. 그렇게 기억은 차라리 망각의 한 형식일 때도 있다. 또한 망각도 기억의 한 형식일 수 있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수정하고, 동시에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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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기억,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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