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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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10/05/30 23:03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즉각 느끼는 정서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조건화된 행동ㅡ정신분석학에서 관심을 두는 내면 세계의 역동과는 관계없이, 오로지 겉으로 관찰 가능한ㅡ에 가깝다. 특히 행동주의의 고전적 조건화 모델에서 설명하는 정서의 학습은, 특정한 자극에 유기체의 반응이 연합을 일으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관계에서 심각하게 배신당하거나 좌절한 사람은, 이후 비슷한 관계를 마주 했을 때 이전 관계에서 느꼈던 정서를 상기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여러 가지 포비아도 마찬가지다. 몸은 정서를 학습하고, 또 삶의 어느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것을 재생한다.

의식-(전의식)-무의식을 도식적으로 나누면서 정신분석학은 대체로 몸 보다는 정신세계의 역동에 관심을 두고 정신세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신뢰하는데서 출발하지만, 그 정신세계의 역동과 가능성이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온갖 모호하고 난해한 개념들이 암시하듯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정신세계는 원래부터 왜곡하고 과장하고 축소하는데다 온갖 방어기제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로든 심상으로든 정신세계를 끄집어 내야 분석을 할 수 있을진대, 그 매개가 되는 언어와 이미지라는 매체 자체도 한 차례 왜곡(재현)되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의 반응은 매우 적실하고 정직하게 무의식을 재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학습된 몸의 반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의식이 아닌가 할때가 있다. 권위자와 폭력 앞에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식은 땀이 나는 것, 특정한 자극에 성적인 욕구든 연민이든 느끼는 것,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면 이유없이 분노하거나 공포나 사랑을 느끼는 것 같은 그 모든 것들은, 과거의 흔적이자 퇴적이자 무의식이다. 과거에 경험한 사건, 사건에서 느꼈던 정서는 정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몸이 학습하게 되고, 그것이야말로 곧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무의식이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에 남은 흔적들의 정신적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ㅡ설령 그것이 상상된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도움이 된다기만 한다면야ㅡ혼란스러운 언어와 이미지의 쓰레기장에서 분투하겠지만, 그러한 분투는 때로 자기파괴적인 충동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인 관심을 오로지 몸의 반응에 대한ㅡ그래서 관찰이 가능한ㅡ관심으로만 돌린다면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잘못된 연합의 고리를 끊으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몇 가지 프로그램을 돌려서 일정 기간 몸을 훈련시키면 된다. 몸은 그것도 학습할 수 있다. 우울증의 치료를 위해 기나긴 상담을 받으며 고통을 연장할 필요 없이 그냥 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근원적이지는 않겠지만 즉각 결과를 주니까. 부작용을 견디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일에 중독되든, 가족에게 헌신하든, 알콜과 니코틴과 카페인에 의존하든.

무의식이라는 심연은 너무나 진지하기에 차라리 우스꽝스러운 진실인 것 같다. 개인에게는 진정하고 진실된 것이라고 해도, 그 개인과 가장 가까운 이에게조차도 믿기 어려운 거짓이자 심지어 수치이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는 이들에게, 그러면서도 사회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심연은 부담스러운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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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27 15:24
1. 어제 오랫동안 웹서핑을 해서 6월 2일에 찍을 사람들을 대략 정했다. 여기는 인구도 적고 후보도 많지 않은데다, 지지하는 정당에서 공천한 후보는 있지도 않으니 대략적인 이력과 공약으로만 찍을 수밖에... 도지사는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도의원, 군의원, 군수 선거 후보들이 최악이다. 반면 다행히 교육감과 교육의원은 찍을 만한 사람이 있다. 교육감 후보는 2명인데, 한명은 교육감 시절 비리로 실형이 선고되는 바람에 도중 하차한 사람이니까 찍을 이유가 없고, 다른 한명은 현임 교육감인데 그나마 무리 없는 사람이라 찍을만 하다. 교육의원은 3명이 후보로 나왔는데, 2명은 교육관료 출신으로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명이 얼마 전 전교조 해직 사태때 이름을 올렸던 후보이다. 그런데 여전히 교육의원 선거는 의문. 4개 시군을 하나로 뭉쳐서 교육의원을 뽑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발상인지 모르겠다. 하아...

2. 지금 하고 있는 어떤 일 때문에 대규모로 이메일을 보냈는데, 계속 신경쓰이고 걱정된다. 메일로 요청한 내용이 사실은 좀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또 한편 '공공'에 글을 게재할 것을 요청한 것이니 이것도 부담이 되는 건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배려를 한다고 했는데, 그리 배려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역시 친구들이 말했듯 원래부터 다소 무리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A가 말했던대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게 5문 5답 이런 식으로 했어야 했나? 얼마전 씨네21 홍상수 특집에서, 홍상수 감독과 관계를 했던 사람들이 공통질문 몇개에 답하는 형식이 있었는데 꽤 괜찮아 보였거든... 메일 보낸 것에 하나둘씩 수신 확인하는게 보이긴 하는데 과연 얼마나 답장을 주실지는 모르겠다. 이제 와서 좀 손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데, 지금 기력도 없고, 이미 늦었다는 생각도 든다. (better late than never? kk)

3. 방 구석에 조그만 플라스틱 책상용 서랍이 있다. 뭐가 들었는지도 몰라 너무 혼잡해서 이사를 할 때 아예 봉인해둔 채로 지금까지 열지도 않았던 서랍인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봉인을 풀고 버릴 것들은 모두 버렸다.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주로 학부 1학년 때의 흔적들. 그래서 손편지와 롤링페이퍼와 스티커 사진과 폴라로이드 사진들. 그때의 관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ㅡ그러나 더이상 나는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지. 그리고 따라 나오는 질문들. 내 인생에서 앞으로 손편지를 쓸일이 얼마나 될까? 앞으로 만날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깊은 밤 잔뜩 취한 채 낯뜨거운 롤링페이퍼를 쓸 수 있을까? 이제 곧 스티커 사진을 찍기엔 다소 민망해지지 않을까? 폴라로이드를 갖고 다니기엔 이미 낭만을 포기하진 않았을까? 20대 초반에나 가능했던 것들, 20대 중후반에는 조금 민망하게 느껴지는 것들. 앞으로 민망함을 깨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고, 나는 그런 민망함을 깰 수 있는 관계를 만나면 환호작약할지도 모르겠다. 나이주의와 정신연령의 노쇠를 깨부수는 활력이 필요해. 내 안의 초딩에 산소를 공급하는 일.

4. 트위터 시작. 아 이런 신세계군요 +_+ I'm tweeting on www.twitter.com/namunn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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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일기
조각들 / 2010/05/26 20:54
1.

얼마 전에 아빠가 강아지를 데려왔다. 동생이 나이 들면서 이빨이 다 빠지고 냄새가 나는 해피를 싫어하기 때문에... 새로온 강아지는 예전에 얼마간 같이 살다가 엄마에게 쫓기듯 떠날 수밖에 없었던(ㅠㅠ) 지용이(GD)와 비슷하게 생긴 강아지다. 자그맣고 눈이 축 처진 탓에 착하고 애틋해뵈는 강아지. (그러나 식성은... 어휴)

강아지는(이름을 아직 못지었다) 눈치를 살피느라 그랬는지 처음 왔을 때는 되게 조용했다.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몸이 굳은 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너무 조용한 건 아닐까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얼마간 손을 좀 댔더니, 그제야 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밤새 낑낑대기 시작했다(강제로 입양된 강아지라면 처음엔 다 그런 것 아닌가?).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서 강아지가 있던 곳을 보았더니 어제 처음 만난 그 상태 그대로였다. 몸이 굳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 이상하다 싶어 아빠에게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봤더니, 아빠는 똥을 아무데나 싸고 하도 낑낑대기에 몇 대 때렸다고 했다. 그랬더니 조용해졌다고, 더 이상 낑낑대지 않지 않냐고, 그렇게 나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귀여운 것을 보는 눈빛으로, 폭력에 시들어버린 작은 몸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우리 집에서 아빠만큼 강아지를 잘 챙겨주는 사람도 없다. [한국의 아빠들은 젊을 때는(아이들이 어려서 집에 붙어 있을 때) 낚시를 하다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아이들이 집을 떠나 주 생활공간이 가정 밖이 되면) 반려동물이나 식물에 애정을 쏟기 시작한다] 다른 가족들은 대체로 강아지에 관심을 덜 쏟는다. 그에 반해 아빠는 늘 해피의 밥을 챙겼고, 지금 새로 입양된 강아지의 밥도 따로 챙기고 똥을 기꺼이 치운다(난 태어나서 아빠에게 맞거나 나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 아주 어릴 때, 엉덩이 몇 번 맞은 딱 한 번 빼고는. 동생들이 사고를 쳐도 때리거나 욕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민주적'이지 않냐고 할 정도로.). 그런데 강아지를 때렸다니.


2.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체계화된 폭력으로 유명한 학교였고(기숙사의 정기적인 단체 기합, 일상적인 구타와 욕설 등), 이에 많은 학부모들의 신임을 얻는 학교였다. 파이프, 부러진 테니스 라켓, 텐트의 지지대, 야구방망이등 살벌한 무기를 선생이라면 누구나 소지하고 다녔고 누구나 휘두를 수 있었다. 바닥에 껌을 뱉다 걸리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혀로 그 껌을 다시 주워먹어야 했고, 침을 뱉어도 엎드려 고인 침을 마셔야만 했다. 학생들은 '학생'이라기보다는 고프만이 말한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에 입소한 재소자(inmate)에 가까웠고, 입학 한 뒤로 몇 달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인격을 박탈당해야 했다. 1학년은 2, 3학년에게, 2학년은 3학년에게, 3학년은 교사들에게, 위계에 따라 차례로 폭력이 하향식으로 가해졌다. 2, 3학년은 '지주보다 마름이 더 무섭다'는 말을 상기시킬 정도로 중간 관리자의 치밀함과 악독함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나름의 합리성(폭력을 정당화하는 억견)과 체계성을 갖춘 것이었고, 그 몇 달의 과정을 통과하면 비로소 학생들은 '북일인'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한대도 맞지 않고 곱게 졸업한 모범생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늘 모욕을 감내하고 맞아야만 했다. (처음에 나는 전자라기 보다는 후자에 가까웠고, 성적이 오르면서 전자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후자라고 해도 학교와 끈끈한 결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학년을 참고 견딘 아이들은 2, 3학년 중간 관리자가 되었고, 그에 따라 선배후배와 더욱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구타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교사들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은, "맞고 나간 애들이 나중에 학교를 더 잘찾아온다"는 말이었다. 모범생들은 졸업해서 명문대에 가면 고등학교 기억을 헌신짝처럼 집어 던지지만, 학교에서 교사들과 일상적으로 치고 받고 다투고 했던 애들은 나중에 박카스라도 사들고 학교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이들이 헛소리까지 지껄이는구나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졸업 후에 실제로 이루어졌던 일이었다.



3.

우리는 몸-존재 이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폭력에 노출된다고 하는 어느 현상학자의 말을 들먹일 것도 없이, 폭력은 우리의 존재 조건이며 우리는 늘 폭력에 노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출발해 관념적으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있겠지만, 폭력에도 정도와 종류가 있어 구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때로 폭력이 애정과 결합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어떤 기준과 어떤 목적으로 폭력을 구분하며 정당화하는가의 문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식 차이에 있어, 우리는 결코 합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폭력에 대한 잠정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말 안 통하는 강아지는 때려야 하며, 고집 부리는 아이들에게는 매를 좀 대도 되고, 공부 안하고 학교에 반항하는 학생들에게는 '사랑의 매'가 약이며, 체벌이 금지된 요즘 군대는 군기가 빠져 군대도 아니며, 요즘에도 아내를 때리는 남편들이 있다. 요약하자면, "애들은 좀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자"이자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러한 가치가 적용되지 않는 인간들의 범주를 우리는 늘 발명해 왔다. 놀랍지도 않은 사실은, 본인 스스로도 폭력의 희생자였기에 폭력을 증오했던 희생자들조차, 그 긴 시기를 빠져 나와서 더 이상 폭력을 당하지 않아도 될 때가 되면, 스스로를 가해자 정체성으로 구성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누구나 일정한 폭력을 인정하고 '필요악'으로서의 폭력을 이야기한다.

이는 여전히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매"가 관계를 잇고 유지하는 중요한 방식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 같다. 매를 맞는 사람과 매를 휘두르는 사람은, 매를 매개로 관계를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매는 아무렇게나 휘둘러서는 곤란하다. 폭력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고통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때릴 때는 이유를 설명하고 때린 뒤에는 꼭 안아주어야 하며, 학생들을 마구 구타한 뒤에도 반드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야 하며, 선임에게 맞은 군인은 반드시 구타 후 선임이 건넨 담배를 받아 피워야 하며, 아내를 때린 남편은 다음 날 꽃을 사들고 간다. 이러한 구차한 몇가지 의례로 가해자의 상처받은 양심은 치유되고, 피해자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전히 관계와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얻는다. 그 둘은 폭력 이전보다 훨씬 더 끈끈하게 결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또한 너무나 쉽게 재생산된다. 매를 맞는 사람들은 매를 맞는 시기를 견디면 곧 매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물론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자기가 맞았던 시절의 기억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 물론 매만 그런 것은 아니다. 계급과 직급이 수직 위계로 구성된 조직에서라면 어디에서나 오만 종류의 폭력은 비슷한 방식으로 정당화되고 재생산되고, 그 폭력 안에서 사람들은 관계를 맺는다.


4.

폭력은 언제나 섬세하다. 얼핏 거칠고 혼란스러운 일상의 폭력들도 나름의 이유와 합리성을 가지고 실행된다. 또한 폭력은 폭력행위의 순간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이전과 이후에 이어지는 어떤 흐름 속에서도 강한 의미를 갖는다. 폭력은 불가피한 것이고, 심지어 우리의 존재조건이기까지 하다면 폭력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기획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 된다(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빼빼 마른 교수가 비평의 맨 앞에 쓴 말)"와 같은 불가능한 주장의 형태를 띌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폭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역시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전히 고기를 보면 식욕이 돌고, 온갖 부당한 것을 만나면 피지컬한 충동을 느끼고, 폭력을 전하는 뉴스를 봐도 감흥없이 볼때가 많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충동과 절제, 혹은 충동과 억압 사이에서 영원히 분쟁하겠지만, 그러한 사실이 폭력을 반대하지 않는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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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TAG 폭력
독서노트 / 2010/05/24 12:41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오늘 새벽, 신경숙 소설가의 신간을 끝마침 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 썼다고 했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서 그 시간대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폈을 때는 어둑하고 눅눅한 새벽 3시였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 허리를 곧게 펴며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 또 제목과 소설이 정확히 상응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아 좀 불만이기는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수작인 것 같다. 여느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을 읽기는 읽어도 늘 별다른 감동없이 읽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편집실에서, 낡디 낡은 보부아르의 책 앞면에 씌어있던 손글씨 편지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 관계의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맺음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반전화와 편지와 전보만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던 시절의 청춘들은, 불가피하게 좀 더 깊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어도 관계도 좀 더 익을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내면에서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으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지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들ㅡ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와 퀵 메시지가 아니라, 어쩌면 침묵과 견뎌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재하거나 느리게 찾아오는 것들에 대한 환대.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해지는 것.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에게 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이 드러난 말마따나 덥석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내가 이미 거쳐온 시간 혹은 지금도 거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관계의 부침(vicissitude)을,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여러 기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네에서 벤치에서 계단에서 혹은 누구도 앉자고 하지 못해 아예 선 채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들로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다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아침 해를 맞아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시간들.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채 묻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온 신경을 써서 비집고 들어가려하고 질투하고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간들. 그때의 냄새와 온도와 바람과 사소한 분위기나 오갔던 대화 같은 것들. 빈곤했던 기억에 얼마간 생생한 서사와 언어가 부여되면서- 기억이 비로소 재조립되고 있다. 그렇지. 기억이란 이렇게도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것이지. 그러므로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기억 뿐이겠지. 이것 외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이닥치는 기억을 견디느라 잠시 눈을 책에서 떼면, 머리 속으로 문장이 하나씩 깜빡깜빡 흘러갔다. 하나의 서술로도, 하나의 명제로도, 하나의 가설로도 문장은 재생되었다. 그 문장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쉬운대로 책귀를 접어두는 걸로 갈음했다.

나의 20대 초중반은 '시시각각'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늘 바빴고 늘 일이 있었고 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망했지만, 늘 그 무게가 버거워 헐떡대며 꿇어 앉을까 벌렁 드러누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 단면이 지나면 다른 단면이 찾아오고, 그걸 처리하면 또 다른 단면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시각각'은 점차 '시간'으로 누적되고, 누적된 시간이 임계점을 넘으면 '세월'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구잡이로 누적되어 쌓였던 나의 시간이 세월에 통합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점차 먹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진 청춘인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은 이제 시시각각이라기보다는 세월일 것임을 직감했다. 청춘 이후 세월 속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호품"은 어느 시인들이 말했던 대로 "그리움"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앞으로도 애도하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나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계속 사랑할 것이고 계속 질투할 것이고 계속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역사와 기억과 맥락과 그리움과 추억이 뒤섞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흔들릴 것이며, 더 정직하고 더 여유롭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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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20 21:29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간다는 것. 천상의 혼례, 다양체의 다양체들. 모든 사랑은 앞으로 형성될 기관없는 몸체 위에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바로 이 탈개인화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비로소 누군가가 명명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이나 성(姓)을 얻고, 자신에게 속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다양체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가운데 가장 강렬한 식별 가능성을 획득한다. 얼굴 위에 있는 주근깨의 무리, 여자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년 무리, 샤를뤼스 씨에게서 들리는 소녀들의 재잘거림, 누군가의 목구멍 속에 있는 늑대 떼, 사람들이 골몰하고 있는 항문이나 입이나 눈 안에 있는 항문 다양체.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그토록 많은 몸체들을 지나간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p. 76


옛날, 그러니까 20대 초반이었을 때라면 분명 멋있다고 느꼈을 구절인데, 지금 같아선 건조하게 읽힌다. (그들은 실제 연애도 이렇게 했을까?)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략 알겠는데, 역시 감동이 전혀 없다. 대학원 지망하는데 그 교수가 가끔 이들의 개념을 인용하길래, 에라 모르겠다 도닦는 마음으로 봐보자,해서 그냥 사봤는데 힝ㅠ.ㅠ <천개의 고원> 사는 김에 ㅇㅈㄱ씨의 재판 찍은 책 한 권도 샀는데... 이거 정말 다투자는 거지? 재판을 찍어내면서 수정하기가 귀찮아서 몇 가지 첨부하고 넘겼다는 말이 버젓이 적혀 있어... 세상에... 이거 나는 낚인거지? 성의 없이 낸 책, 덥석 사버린 내가 잘못인거지? ㅠㅠ

어쨌든 들뢰즈와 가타리,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어떤 집단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지, 예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좀 훑어보니 이들이 쓰는 개념이 꽤나 화려하고 그럴싸하다는 것은 잘 알 것 같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 어울리는 개념이라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러나 정작 속은 맹맹한 느낌이다. 나로서는 읽고 나면 허무하기 그지 없다. 이들은 단지 옛날부터 잘 있었던 것을ㅡ이들의 표현법에 따르면ㅡ단지 재밌게 보이는 계열에 따라 배치한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기계라는 개념도 왜 이렇게 시종일관 별로지? 몇년 전 라캉 관련 서적을 열심히 읽었던 것도 점점 머리 속에서 지워져 가는 중에, 지금 같아서 그가 했던 말중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말은 딱 하나 남았다. 남자들은 마치 공기를 넣어 몸을 부풀리고 있는 개구리 같다고. 이 책을 읽는데, 꼭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지금은 이 두사람의 유행이 많이 지난 감도 있지만, 이들이 누린 인기는 과거 이상 시인이나 기형도 시인이 누렸던 인기와 비슷한 성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보다는, 이들의 특이한 이력이나 라이프스타일 이 더 중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그들의 분위기나 패턴을 공유할 수 없거나 거기에 거부감이 든다면, 사유와 표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뭐 그런.

물론, 이들이 그냥 내 취향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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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독서노트 / 2010/05/19 20:02
어제 오늘해서 유명한 두 남자사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이고, 다른 하나는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이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분명 아름다웠다. 소설가로서 인문사회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소설도 분석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나는 존 쿳시의 책처럼 다소 분석적이고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이 '나쁜'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석적이고 도식적이면 또 어떤가. 여하튼 쿳시의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타자에 연루'되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 타자에게 연루되는지, 그 장면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우연한 계기라고 표현했지만, 한번 타자에게 연루된 후에는 타자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쿳시는 인간성이 차례로 박탈 당하는 과정(어떤 의례와 절차를 거쳐서 인간성은 박탈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성이 박탈되었을 때(그리하여 비로소 '비체'가 되었을 때)에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인간성은 어떻게 회복될 가능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아름답게 다룬다. 그리고 쿳시는 '적'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즉 "악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말처럼, 적-타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가 얼마나 무용하며 위험한 일인지를ㅡ그리하여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상 식민지(약자)가 제국(강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강자)이 식민지(약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ㅡ아주 섬세한 문체로 폭로한다.

쿳시의 소설은 제국주의 (지식인) 남성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제국주의 남성 정체성과 젠더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쿳시는 일견 도덕적이고 범인간애적으로 보이는 제국주의 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상당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제국주의 주체가 '야만인-타자'에게서 인간(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들,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고 한들 그는 제국주의의 자장에서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보편-제국주의 주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타자-야만인'에게도 보편의 빛을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 보편의 빛은 상황 논리에 따라 얼마든 철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쿳시의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시선에서 '야만인-여성'은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이다. '야만인-여성'은 유독 '(제국의) 언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성적으로 분방하고 자유롭지만 제국주의 남성 주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국주의자-남성이라는 두개의 항에 의해 이중으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만인-여성'은 어느 때는 의존하고 복종하는 것 처럼 묘사되지만, (특히 성행위를 할 때에는) 종속되지 않는 이중적인 존재처럼 묘사된다. 쿳시의 남성 주체가 '타자에게 연루'되었고 또한 일견 도덕적인 실천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윤리적으로 연루되는 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이중으로 폐제된 타자를 향할 때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남성 주체가 도덕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은, 오로지 성애화된 사랑 혹은 섹스가 걸려 있을 때 뿐인가? 남성 주체의 도덕적인 실천은 성애화된 타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가? (그 많던 '운동권 남자애'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도 종종 이런 징후를 읽는다.) 이에 관해서는 재미소설가 이창래 작가의 <제스처 라이프>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

물론 쿳시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 기꺼이 인식하고 분석한다.

덧) 이 소설을 읽고서 '50대 이상 남자'들의 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대다수 남성들의 정체성에서 남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많은 소설에서 50대 이상의 남자가 자신을 수컷으로 드러낼 때는 어김없이 이 남근 문제가 등장한다. 성적으로 문제를 겪음과 동시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몸의 근육과 피부의 탄력에 대한 인식 등이 어우러진다. 그 탓에 쿳시의 남성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50대 남성 인물들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갖 복잡함으로 뒤섞여 있다. 자기 몸이 더럽다는 인식(<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책을 보라), 자신의 성적 능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erection문제이지만)에 대한 자의식, 과거에 대한 향수 등등. 술자리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성적 소수자는 "4-50대, 대머리, 배 나온 화이트 칼라 남성"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다른 책,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학부 때 교육 쪽을 전공한 나로서는(나는 교육 자체보다는 내 전공을 무지 싫어했으니까), 가끔 교육관련 서적을 펴볼일이 있었다. 한국의 주류 교육학자들에게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ㅡ보통은 "학교 없는 사회"라고 번역하지만 오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리치는 그 스스로가 강조했듯 학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ㅡ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는 대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곤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일리치를 그저 그런 과격한 낭만적 급진주의 사상가로 생각했는데, 이번 대화집을 읽고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오히려 과격한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욕이 될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들 보다는 오히려 '정통파'에서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제도는 적당한 타협을 요구할 뿐, 과격한 근본주의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탓에 일리치는 온갖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범위와 폭이 놀라워 본받아야 할 정도다. 그를 문명 비평가라고 간주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국가 주도 공교육제도,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간 조건, 건강의 '의료화', 표준 언어, '개발' 담론 등등 온갖 사회 체계에 내재한 복잡한 권력체계와 폭력을 일관되게 반대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제도로부터 미움 받기 딱 좋은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일리치는 세속적이며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내적 신념에 충실하고 경건한 신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그가 낭만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사상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사상의 가치체계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폭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엔 평온하게 공생하는 자연스러운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는데, 국가 권력-자본주의-의료담론-공교육제도 등등이 일상을 폭력적으로 침탈했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식이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책인데도 여전히 "여권주의"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거 아직도 이렇게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고. 이와 관련해서 일리치에게 특별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역시 그의 젠더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에게 성별은 사회적으로 발명된 그 어떤 현상이라기 보다는,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획하는 근원이자 철학이다. 그렇기에 이쪽은 저쪽을 감히 넘보거나 이해할 수도 없고, 오직 은유와 상상으로만 연결될 수 있다. 이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다(이해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놀랍게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곳에서만 성차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성역할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에서는 차별 논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경건한' 상호의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좀 오버해서 말하면 자꾸 여자들이 남자 세계를 욕심내고 남자들이 여자 세계를 넘보려고 하니까 (자연질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이거 참 ^^;; 정말 일관적인 사람이야.



공부하기 싫으니까 이런 뻔한 잡글이나 쓰고...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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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17 21:46
1. 요즘엔 읽고 있는 책은 많은데, 뭔가를 쓰고 싶도록 하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재미있는 책들도 많기는 한데 이상한 일이다. 책을 읽고 정리해보는 습관은 갖게된 것 같은데, 쓸 욕심은 아무래도 안난다. 쓰고 나면 늘 바보 같아 보인다. 그냥 지금은 input이 더욱 필요한 시기일 뿐이려나? 예전엔 인풋도 없으면서 미친척하고 아무거나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샌 일기 밖에 못쓰겠어. 예전에도 이런 내용으로 포스팅 했던게 기억나는 것 보면, 아무래도 순환과 리듬의 문제인 것 같다.


2. 요즘엔 막연한 덩어리들 사이에 실마리가 이어지면서, 옛날에 ㅅㄷㅈ 샘과 했던 세미나의 문제 의식과 연결되는 부분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 언어학/사적 언어학 분석, (세미나에서 읽었던) 푸코의 근대국가/권력 형성 분석, 얼마 전 다시 한 번 일독한 <지도의 상상력>의 주제, 제국과 제국주의 국가의 구분, 그리고 최근에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있는 책에서 본 어떤 구절이 뒤섞이면서 어떤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오랜만에 탈식민주의 텍스트를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몇 달만의 경험이라 상당히 소중함 ㅎㅎ (그러나 별 다른게 아니네)


3. 요즘엔 생물학에 대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것 같다. 옛날에는 젠더를 다룰 때 생물학 이야기만 나오면 근본주의/본질주의라고 바로 욕했던 것 같은데. 요즘 같아선 생물학과 관련해서 생리학, 실험심리학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검지와 약지 길이의 비율 계산으로 성격과 젠더를 짐작할 수 있다니 뭐 이런 엉뚱생뚱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이다. 아동의 행동과 인지에 대한 최근 실험들도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다. 뭔가 나름의 통찰은 준다. 물론 지금처럼 잠깐 흥미는 가더라도, 오래가는 재미는 못느낄 주제들이기는 하지만... nature vs. nurture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신념과 실천의 문제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난 무조건, 일관되게 후자 지향.


4. 요즘엔 내가 가진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은 아니고, 좀 더 질투와 갈망이 세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빼앗고 싶거나 흡수하고 싶다. 꼭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못사는 책을 서점의 서가에서 몇 분이고 서서 바라볼 때 같은 느낌. 상당히 오랜 기간 마음 속에 누적되어 폭발할 듯 말듯 무언가가 있는데, 계기를 아직 못만난 것 같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 탓이라면 상황 탓일테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줄 관계를 못만난 탓이라면 그것 탓일테다. 여하튼 아슬아슬하게 찰랑찰랑대고 있다는 것. 위험한 충동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이럴 때는 "Protect me from what I want."를 주문처럼 되새김질 하는 수밖에.


5. 요즘엔 자꾸만 내가 예전에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 말에 따르면 예전에 나는 신념에 찬 '애정분배주의자'였다.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해서다. 연애 관계든 아니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집약적인 심적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주변 관계에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연애 관계에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면서, 다른 관계나 일상 생활 자체가 뒤흔들리는 걸 사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올바르지 않다'고까지 여긴 적이 있다. 특히 여이연 강좌 들으면서 바이섹슈얼리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는 말이다(이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살았는지).

그러나 사실 이는 생존전략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대학 시절에만 하더라도 내가 하기 싫거나 귀찮은 일을 해야할 때가 많았고, 그때만 되면 늘 소진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만 하더라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일이 가능했다(이게 생각대로 하면 되고~도 아니고. 이제와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근근히 '일상'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그리고 이는 성적표에 반영 되기도 했다; 애정을 철회해야 할 때면 급락하는 성적표 숫자...;). 하기 싫은 일, 그리고 주변 관계에, 그 에너지를 공평하게 분배해서 말이다. 

지독히 나르시시스틱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도 이도저도 아닌 선택이었는데다, 어쩌면 천성에 반하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는 탓에,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방어기제였다는 생각도 들고. 요즘엔 좀 바뀐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6. 요즘엔 어떤 다른 글쓰기 양식에 대한 욕심도 부쩍 커지고 있다. 앞서 3번에서 말한 게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영화 <시>를 보고 나서 정말 크게 느꼈던 부분이었다. 내가 자주 썼떤 글은, 기껏해야 의미(meaning)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려들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고 의미있는 글쓰기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러한 글쓰기는, 이를테면 'sense'를 전달해야 한다. '센스'는 감각과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 그러므로 태생부터 결핍으로 시작하는 논문식 문체 같은 걸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일전에 영화 <시>를 보고 여기에 썼던, 그리고 이내 지웠던 글이 한없이 부족하고 한심해 보였다면, <시>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어떤 '의미'를 설명하고 재현represent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시>는 'sense'를 내 앞에 '제시present'ㅡ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이밀어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ㅡ했다. 그러므로 내가 택했던 글쓰기 방식은 완전히 틀렸던 셈이다. <시>에 대해 쓰려면, 완전히 다른 글쓰기를 택해야 한다. 내가 갖지 못한 어떤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차라리 문학적인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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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15 20:45

오늘 오후엔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마당에 오도카니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흘려보내며 시간을 보냈다. 왠지 선심을 쓰고 싶은 마음에 같이 살고 있는 할머니강아지에게 소세지를 사주었는데, 이상하게 잘 먹지를 않았다. 오늘은 왜 안 드시나요,하는 궁금증을 담아 눈빛을 쏘아보내는데 강아지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먼 풍경만 바라보았다. 특유의 아련한 표정을 하고는. 나는 아련하니 싸-한 강아지님의 그 표정이 너무 좋다. 도대체 그 표정을 하고 무엇을 바라보는지.

내가 마음 속 깊이 좋아하는 것들은 한결같이 이런 존재들이었다. 쓸쓸해뵈지만 도도하고, 외로워뵈지만 당당하고, 슬퍼뵈지만 웃을 줄 알고, 포기한 듯 뵈지만 지푸라기는 결코 놓지 않는 존재들. 충동적이지만 헌신하는 존재들. 무엇인가 잃었지만 잃은 게 뭔지는 잘 모르고, 그럼에도 잃은 것을 그리워할 줄 아는 존재들. 가끔 너무 배고플때면 기억과 슬픔과 추억을 폭식해 마음을 지방간으로 만드는 존재들. 그러므로 어딘가 엇나가 있거나, 뿌리 뽑혀 있는 존재들. 절망이 얼마나 안전한 은신처인지 알기에 다른 용기를 내는 존재들. 에고를 지탱하려다 에고에고 힘들어 놓아버리는 존재들. 별자리가 그리는 지도에 위안 받는 존재들. 개구리와 지렁이 냄새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존재들. 그렇기 때문에 집안의 천치들, 조직의 수치들, 사회의 얼간이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척하려고 안간힘을 짜내는 존재들. 안간힘의 흔적을 제대로 지우지 못하는 존재들.

지난 몇 달간 나는 어울리지 않게 흔들렸고, 아무 것에도 위안받지 못했다. 모든 것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이미 내것이 아니라 생각했던 하나에 부질없게도 조그마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기대 때문에 침몰하고 있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끝내 부인했다. 어느 때보다도 위안이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늦었고, 돌이킬 수 없이 침몰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혹은 너무 가까이 하려고 한 대가로 새까맣게 타버렸거나.

나는 아마도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에 <끝>이라고 기록할 것이다.


다행히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오후 늦게부터 지금까지, 오랜만에 그들의 생존을 확인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술을 마시고, 사랑을 그리워하고, 시나 소설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사람들. 혹은 혼자 쓰는 방이 싫어 갈데가 없음에도 밖으로 끝없이 나도는 사람들. 그들은 고른 치열을 갖기 위해 교정을 하는 대신, 차라리 웃을 때면 드러나는 덧난 치열을 손바닥으로 감추기로 한 이들이다. 오랫동안 못봤던 미소가 뜬금없이 보고 싶다. 

그들은 어쩌면 나의 나르시시즘의 조각들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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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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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2010/05/14 22:51

1. 

<시>에 대한 감상을 쓰다가 그만뒀다. 한글2007로 A4 3장이 넘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지워버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는데, 정작 그렇게 쓰고나니 굉장히 싫어졌다. 길게 중언부언 늘어놓는 일이 의미 있는 것 같지 않아서다. 글을 짧게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신념'을 갖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 생각들이 겹친다. 정치나 정체성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커리어'가 곧 자기의 인생이 된 사람들. 자기가 택한 일이 너무 좋아서 거기에 미쳐버린 사람들. (보통 남자들이 많다지?)

얼마 전에 면담한 교수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 교수는 해당 하위 학문 분야에 있어서는 한국의 최고 권위자이자 '아버지'이다('아버지'라는 말의 부정적 어감도 약간 포함해서). 물론 그에게도 학문적인 '선친(先親)'이 있기는 하지만, 그 뒤를 이어 받아(심지어 연구실도 물려 받았다 했다) 그 학문 분야의 모양새를 그럴싸하게 갖춘 주역이 바로 그라는 느낌을 준다. 그가 '아버지'라는 말은, 요즘 그 학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제 논리체계의 정당화를 위해 인용하는 인물이 바로 그라는 얘기다. 그는 자기가 공부하는 영역이 너무나 좋다고 했다. 공부도 너무 좋고 이 분야도 너무 좋아서 미쳐서 공부했다고. 심지어 다음 생에 태어나면 지금의 파트너와 같이 살지는 못해도 이 공부를 계속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할게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할게 많긴 한데, 그런 말을 하는 그는 정말 어딘가 틈이 없어보였다. 적어도 이야기하는 도중에는 말이다.

원래 단단한 걸 보면 자꾸만 깨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인지라, 면담 중에 내가 했던 질문이라고 해봐야 그의 커리어에 대한 신념을 에둘러 의심하는 것 밖에 없었다(사실 별로 궁금한 게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개종'이라는 표현까지 쓰셨는데, 원래 이 분야만 공부하셨나요?" 라든지 "원래 공부하면서 이런 저런 다른 생각이 들기 마련이잖아요?" 라든지 "공부를 하시기 전엔 뭐 하셨나요?" 뭐 그런. 그러나 답변은 계속 견결했다. 결국 자기도 한 때 '꿘'이었기에 잠시 다른 일을 할까 고민하기는 했다는 답변을 얻고 만족해야 했다 ㅋㅋㅋ 

3.

정말 내 인생 걱정된다. 일단 눈앞에 닥친 입시에 합격해도 걱정, 못해도 걱정. 내 친구들은 정말 다들 훌륭해서 조만간 다 자리 잡고 쭉쭉 나갈 것 같은데, 난 절대 안 그럴거 같애. 배고픈 일 하는 건 전혀 걱정 안되는데, 일단 거기 가서 섞일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워낙 작은 동네라 못 어울리면 안되는데여 ㅠㅠ 찌질대며 사는 건 아닐까.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면서 살아야는데... 이상하게 살 것 같으면 콱 죽어버릴거야.

4.

<테이킹 우드스탁>은 정말 재밌는 책이다. 어떤 공간을 그려내고, 그 역사와 역동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안 그래도 마음을 빼앗는 사건을 그리는 실화바탕 소설인데, 디테일도 세밀하고 섹시해서 쿵쾅쿵쾅 마음 졸이며 읽다가 눈물 찔끔 흘리며 읽다가 했다. 물론 우드스탁이라는 특별한 배경이 없었으면 평이한 소설이었겠지만, 그걸 이렇게 그려내는 것도 정말 용한 일이다. 게다가 정말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유려하고 위트있게 번역을 할 수 있었던건지 놀랍다. 소설을 읽고 난 유일한 부작용이 있다면, 아무래도 마이클 랭 같은 광야의 초인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점..?ㅋ 그리고 엘리엇 타이버가 엄청 부러워졌다는 점? 저에게도 우드스탁과 앙드레 에르노트를 내려주세요 오오

5.

S가 스치면서 했던 얘기는 정말 충격이었다. 내가 배척했던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따르면 나는 진지하거나 간절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너무 작거나 비겁했거나, 혹은 마음 속 뿌리부터 아예 믿지 않았거나. 그 말을 듣고는 진심으로 S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는 나의 무감과 불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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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2010/05/13 19:25
1. 원서를 내러 잠깐 휴가 냈던 게 오늘로 끝. 다시 일상으로.. (꽥) 한숨을 쉬며 일기나 써볼까..


2. 월요일엔 학교에 갔다가 정말 의외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월요일엔 학관 계단에서 JH를 만났고, 이어서 JH과 밥약속이 있던 JE도 만났다. 그리고는 5개월 만에 YK를 만났고, 이어서 꽃집 앞에서 SH를 만났다. YK랑 헤어지고 R을 만나러 가는데, 거의 2년 만에 Y를 만났다. Y는 이제 석사 5학기로 논문학기라 했다. Y와 잠시 환담을 하고 R을 만나 벤치에서 얘기했다. R을 만나는 중에, 활동을 같이 하진 않았지만 같은 동아리였던 C씨와 인사를 했다. R과 헤어지고 교수와 잠깐 면담을 했다. 생각보다 활기차고 자기 영역에 대한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사도 안하는 사이였는데 나보고 착하다고 하셨던 D씨를 길 위에서 봤다. 버스를 타고 J회의를 하러 학교 밖으로 가는데 버스 창 밖으로 TH를 만나 조금 얘기했다. 잡지 발간을 기다리게 됐다. 여하튼 헑,소리나는 월요일의 오후. 1년 동안 만난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버렸으니.

참 이날엔 휴가 기간이면 내가 머물곤 하는 이모네 집에서 아기 100일 파티가 있었다. 이종사촌 아들의 100일. 나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짐풀러 갔다가 급당황했다.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파티엔 가지 못했지만, 왠지 모를 압박감에 백화점을 유령처럼 떠돌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샀다 아하하... ㅠㅠ 도대체 아기 100일엔 뭘 해줘야는거지? 생활무능력자ㅠ


3. 화요일엔 덕수궁 미술관에 기획전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를 보러 갔다. 이번 전시는 내가 갔던 덕수궁 미술관 전시 중에서 가장 공간 활용이 좋았다. 이번 전시에 설치 작품이 많았던 탓인지는 몰라도, 빛의 활용이나 어쿠스틱이 공간감을 잘 살리고 있는 듯 했다. 물론 덕수궁 미술관이 좀 비좁은 곳이니까 한계는 있겠지만.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번 전시에서는 소설가 한강의 최근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에 등장하는 인상 깊은 작업을 볼 수 있었다. 한은선 작가의 작품인데 제목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2전시관에서 나오니 작가의 인터뷰도 볼 수 있게 해놓아서 오도카니 앉아 두 번 봤다.

미술관을 나오는데 빗방울이 투두둑,떨어지기 시작했다.


4. 수요일엔 학교 축제에 갔다. 졸업생 이후로 처음 간건데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거야. 복잡한 길 위에서 오래 못만날 것 같았던 사람들도 우연히 만났다. D와 M, 그리고 또 JE와 Y. W와 JH와는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여하튼 잔디밭에 죽치고 앉아 신기한 사람들 구경도 했고, JI, SS, R, YK, H와 술도 마셨다(취하진 않았다). 그러나 자리를 만들었던 S는 오지 않았다(ㅠㅠ)

와플을 먹을 때만 해도 더 학교에 다녀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했었건만, 스타 리그 하는 학교 축제장을 보고 있자니 과연 더 다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이창동 감독의 <시>를 봤다. 처음엔 그냥 중소도시의 문인에 대한 그런저런 이야기일 줄 알고 봤는데, 이 감독이 <밀양>의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다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 <밀양>에 비해서 덜 종교적이었지만, 더 웅숭깊어졌다. 화면도 그렇고 서사도 그렇다. 조만간 리뷰를 써야지.


6. 유년 시절, 기억의 늪이 있다. 그런 기억은 쉽게 부채감으로 전이된다. 그 부채감은 내가 영원히 갚지 못할 것인데, 가끔은 그 부채를 상환해야할 순간이 갑자기 찾아 온다. 이를테면 J회의 중에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숨이 너무 무거웠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말을 더듬고 말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죄송,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부담스럽다. 말을 아끼다가 다음으로 약속을 미뤘다. 기약 따위는 없었다. 그냥 다음, 다음이 좋겠다,였을 뿐이다. 진작에 집 전화번호는 스팸 리스트에 넣었다. 이제는 계속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다... 이젠 왜 전화를 안 받느냐는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밉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7. 기억할 만한, 아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1초, 길어야 2초 남짓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엔 무언가 두려워서 시선을 빨리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도 쉽게 연루되는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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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0/05/12 10:14
(특히 지난 몇 년 간 발표된) 홍상수 영화에서 모든 대사와 행동은 일종의 '수(手, move)'로 읽힌다. <하하하>도 마찬가지다. 홍상수 감독은 게임의 창조자, 중재자, 관조자, 개입자이다. 영화의 등장 인물들은 제각기의 목적과 욕망을 가지고 게임에 참여한 '말'들이며, 그들은 자신의 '수'에 따라 게임 판 위를 쉴새없이 움직인다. 홍상수 감독은 게임의 이면이나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은 채, 오로지 주어진 게임과 상황 속에서 목적과 욕망에 따라 '순간'을 살아간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속물'이며, 그들의 대사와 행동은 놀라우리만치 '상투'적이다. 그의 영화에서 흔히 지식인이나 전문가로 간주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속물성은 그들이 참가한 게임의 장에서 쉽게 비루한 맨얼굴을 드러내고야 만다. 또한 그의 영화에는 커플들(현재 커플이거나 커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줄곧 내뱉는 "사랑한다"는 고백조차도 어딘가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정말 예쁘냐'고 묻는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 분)의 애인 연주(예지원 분)에게 중식은 계속 예쁘다, 정말 예쁘다고 얘기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어떤 긴장과 상투성을 읽어낼 수 있다. '너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할 때 조차도 마찬가지다. '진정성'을 탈수기에 넣고 탈탈 짜내버린 우리 시대는, '연애'에서 유일한 진정성의 근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므로 섹스와 연애 이야기가 모든 낭만성과 진정성을 흡수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홍상수 감독은 연애 관계에서조차 진정성을 기꺼이 제거해 버린다.

우리의 탈진정성의 시대에 대적하고 대립하는 유일하는 사유가 있다면, 아마도 '실존주의'일 것이다. 그래서 이 감독에게 실존주의는 대척점에 있는 사유가 아닐까,생각해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하하>에서는 실존주의가 직접 언급된다. 중식은 시인 후배 정호에게, 너는 너무 어리다며, 너의 우울과 사유는 가짜라며, 너는 실존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물론 중식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들은 이게 모두 중식의 허세라는 사실을 잘 안다). 진정성, 낭만성은 어린 것, 가짜인 것,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그러나 <하하하>는 11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다. 물론 이전 영화들도 그랬다. 인물 관계 서사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일관되게 재미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홍상수 감독이 이 상투성을 잘 알고 있으며 재미있게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상투성과 탈진정성은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이기에 오히려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모든 창작자들이 상투성으로부터 예술의 영역을 지킬 방법을 고민하는 견결한 국경수비대라면, 홍상수 감독은 이들과는 달리 국경을 슬며시 열어둘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번 영화 <하하하>에서는 인물과 관계의 상투성이 밝은 유머로 승화된다. 홍상수 감독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그의 영화에 독창적인 방식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전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들은 한결같이 불편한 '수컷'사람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그런 불편함마저 제거해버리고 그들의 일상적이고 근본적인 찌질함을 과장해서 보여준다. 또한 인물들의 상투성도 이전 영화에 비해 훨씬 더 과장된다. 말과 행동과 '수'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웃을 수 있다. 즐겁다.

이제 홍상수 감독은 어쩌면 구름 위에 올라탄 '배추도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감독의 외모도 그렇게 변하지 않았나? ㅎㅎ). 탈진정성 시대에 게임 판 위에서 제 눈 앞 한길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배추도사는 이들이 정말 귀엽지 아니하냐며 '하하하' 웃어 제낀다. 탈진정성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어쩌면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귀여움일 것이다. 이번 씨네21은 홍상수 감독 특집이었다. 진지하게 쓴 긴 글이 많이 실렸다. 나는 이번 씨네21을 보며 정말 많이 웃었는데,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온 나도 배추도사님과 같이 구름 위에서 귀엽기 짝이 없는 필진들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홍상수 감독에게는 어쩌면 게임판 위의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악의는 없다.

물론 배추도사가 옳은(좋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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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08 12:59

3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새벽 1시 타임 근무에 들어갔더니,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어제 인근에서 또 구제역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야 했고.

이전 근무지와는 달리 새 근무지에는 가스 난로도 있어서, 밖은 추웠지만 정미소 내 천막의 공기는 매우 훈훈했다. 그랬던 탓에 나는 얼마간 혼곤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매미가 찌르릉찌르릉 우는 초여름의 어느 오후, 독한 감기약을 먹고 지루한 고등학교 수학 수업시간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넌 대체 낮에 뭐했길래 이렇게 계속 잠만 자냐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니(잠시 눈 좀 붙이라는 얘기는, 계속 자라는 얘기는 아니었다는 것).

그렇게 꼬박꼬박 조는데 아저씨들이 갑자기 나랑 다른 사람들을 깨웠고 나는 멍하게 일어나서 밖에 나갔다. 저쪽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이상하게 몸집만 거대한 차량 두 대가 들어와 있엇다. 불빛이 향하는 곳에는 소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그 큰 소가 스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보는 '안락사'였다. 잠이 벼락처럼 쏟아지는 듯 소는 조금씩 무너져내려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소는 그 와중에도 꼬리를 계속 흔들었다. 꼬리 만은 죽음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차량들은 그런 소에게 밧줄을 연결해 들어올린 뒤,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떠나는 차의 백라이트 불빛은 망막에 잔상을 남겼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들은 소가 참 안됐다고 했다. 불쌍하다고, 차에 실릴 때까지 소는 꼬리를 계속 흔들었다고, 눈은 몹시도 졸려보였다고. 그러나 어쩌겠냐고,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쟤들이 뭘 어쩌겠냐고, 그래도 옛날처럼 생매장 당하던 것은 아니니 괜찮은 것 아니겠냐고, 뭐 다 그런 것 아니겠냐고. 흠뻑 때려주고 싶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고작 그런 것일까. 시시하고 시덥잖고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다 그런 것 아니겠냐는 말을 떠받들어야만 버틸 수 있게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뭐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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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2010/05/07 15:00

1.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은 잘 틀리지 않는다. 가끔은 이런 예감이 병인듯한 때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확률상으로 잘 맞는다는 얘기다. 나쁜 예감이 하나 둘 누적되면 확신이 되고, 확신이 되는 순간 결정적 증거를 찾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린다. 여느 때와 같은 싸이클이다. 결말은 항상 같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예컨대 이런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바사니오는 금상자, 은상자, 납상자 중에 한 상자를 열어야 한다. 금상자에는 "나를 택하는 자는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라 써있고, 은상자에는 "나를 택하는 자는 그 가치에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고 써있고, 납상자에는 "나를 택하는 자는 그 가진 바 모든 것을 주고 모험을 해야 하노라."라고 써 있다. 그 상자 중에 단 하나만 포셔의 초상화가 들어있다. 금상자에는 해골이 들어 있고, 은상자에는 바보의 그림이 들어 있다. 주인공 바사니오는 당연히 납상자를 열고, 그 안에는 포셔의 초상화가 있다. 선택의 순간에, 나는 언제나 납상자를 열지 않는다. 내가 여는 건 금상자 아니면 은상자다. 그 안에는 늘 해골이나 바보가 들어있다. 해골은 두 번 만났고, 바보는 셀 수도 없다. 예감이 맞아 떨어진 것만 기억해서 그런가? 아무튼.


2. 문화적 취향은, 당연히 그 취향을 가진 사람 자체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특정한 인물이나 음악, 사조, 장소 따위를 좋아한다고해서, 그 사람이 그 인물이나 음악, 사조,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깨지고 바스러지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결국에는 영 싫어진다(정말 무서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 사람이 가진 문화적 취향 때문에 좋아하게 된 사람에게는 언제나 배반당하기 마련이다. 글을 읽고 좋아하게 된 사람을 만나면 늘 실망하게 되듯이.
 
그러나 문화적 취향은 사람을 판단하는데 매우 간편한 준거가 되기도 한다. 취향은 그 사람이 가졌다고 가정되는 것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 취향이 대화와 관계에서 권력이 되는 순간이 생긴다. 누군가의 입을 막고 누군가의 귀를 열어주는 취향, 그리고 취향을 말할 수 있는 권력도.


3. 소설을 읽다가 내가 '고독'하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독'은 삶에서 선택가능한 한 형식이고, 그러므로 고독은 '외로움'과는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고독을 택한 인물이라고 외로움을 못/안 느끼지는 않는 거다.) 그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유가 없을 때' 운다. 그들에게 눈물은, 지나치게 늦게 찾아오거나, 혹은 지나치게 일찍 찾아온다. 이를테면 부모나 애인, 친구 등 소중한 타자가 죽거나 헤어졌을 때, 이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지정되고 공인되는 의례의 장소(장례식장, 장지, 죽은 이의 방 같은 곳)에서 결코 울지 않는다.

이들은 울음과 슬픔이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내보이지 않으면 자기가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눈물은 이를테면 인간성의 지표이기 때문이다(아무리 악독하고 사회적인 패악을 일으킨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는 순간 용서가 곳곳에서 발생한다. 그의 눈물은 그 역시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가들은 이 사실을 잘 이용한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야만 그는 '사람들'에게 소속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울음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순간 자기들이 <빼앗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즉, 타자와 내가 내밀하게 공유하던 영토를 약탈당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건 고독한 이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러다가 울음은 어느 순간, 이들의 삶 어딘가의 코너에서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다. 그러나 여기엔 이유가 없다.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빗방울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서 운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이 너무 아파서, 조각이 찔러서 운다. 책을 읽다가 활자의 획이 회칼처럼 가슴을 길게 찢어서 운다. 또 어느 50대 남자의 흰 머리칼을 보고 운다. 어느 30대 여자의 마른 어깨를 보고 운다. 그리고 어떤 감정의 폐허와 만난다. 그러나 이유를 찾을 순 없다. 그렇게 그들은 고독을 선택했고, 또 고독에 선택당했다. 고독은 개체성/관계/감정/내밀한 영토를, 언어/사회/의례에 맞서 보존하기 위한 투쟁struggle이다.


4.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다음 주 4일 동안의 짧은 휴가에는 J회의, 면담, 오랜만에 만나는 Y를 제외하곤 별다른 일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또 이틀 사이에 금방 차버렸다. 꽉 채워서 재밌게 보내야지. 그리고 정신 놓고 지내는 사이에 보고 싶은 영화가 많이 개봉했다. <하하하>, <경>, <시스터 스마일>, <원 나잇 스탠드> 외 몇 개. 그리고 전시회 한두 개? 이거 다 섭렵하고 올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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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일기 / 2010/05/04 19:13
구제역 때문에 생활이 완전히 불규칙하게 뒤엉켜버렸다. 그동안 내가 이토록 규칙적인 삶에서 안정감을 찾았었던가, 싶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어떤 날은 자정, 어떤 날은 저녁 6시, 어떤 날은 새벽 6시, 어떤 날은 오후 1시에 출근이니까. 시간 비는대로 짬짬이 과외도 2개 해야하고. 적어도 7시간은 자야 하루 동안 심리적 육체적으로 안정이 되는 나로서는 이 생활이 정말 버겁다. 난 낮에는 잠을 못잔단 말이야. 피부도 막 거칠어지고 트러블도 생기고. 요새 일상이 이래서인지 별일 아닌 일에 화도 많이 나고, 내가 이 퍼블릭 서비스를 하면서 가장 하기 싫었던 일도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고, 여하간 정말 싫다. 이 생활하면서 느낀건데, 난 정말 공공형 인간이 아니다. 돈을 억만금을 준대도 공공형 인간은 못될거야. 5월 15일까지 별 일 안나서, 그때면 이 상황이 완전히 끝나길 바랄 밖에. 에휴.

어제는 근무를 서면서 김소연 시인의 시집 <눈물이라는 뼈>를 완독했다. 사둔지는 꽤 된 시집이거든. 집이나 사무실 같이 산만한 환경에서는 시를 읽을 수 없었는데, 구제역 근무 서는데가 워낙 조용한 곳이다 보니 술술 곱씹어가며 잘 읽혔다. 음, 시를 '읽는다'고하면 실례가 되려나? 여하튼. 이번 시집에도 좋은 문장이 정말 많았다. 예전에 몇번 들춰본 산문집 <마음사전>도 그랬었는데(이 책은 처음부터 통독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사전'처럼 읽는게 좋다. 심란한 밤, 설레는 밤, 슬픈 밤, 우울한 밤 가릴 것 없이 마음이 뒤숭숭해서 마음을 다스려야 잠이 올 것 같은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뒤적이면 좋은 책이다). <눈물이라는 뼈> 뒤에 실린 해설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마음사전 놀이"라고 표현했던 놀이는, 나도 정말정말 해보고 싶었는데..ㅋ 슬프게도 같이 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안 떠올라서 포기했었는데. 그런 놀이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니 평론가님은 복받으신거예요. 오늘 오후에는 시집에서 시를 몇개 옮겨두고 싶었는데, 옮겨보려고 시집을 다시 들추니 왠지 감춰두고 몰래 보고 싶어서 그만두기로.

오늘은 오랜만에 벅스에 들어갔더니, 김윤아 새 앨범이 나왔더라. 노래를 듣는데 왠지 모르게 어딘가 조금 어색했다. 대체 내가 그녀에게 가졌던 이미지가 뭐였길래? 여하튼 어떤 노래를 듣고 있자니, 아이와 같이 산다는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게 된다. 오늘 과외 하고 오는 밤길에서는 어떤 엄마와 아이를 봤다. 둘이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아이는 불꺼진 상점을 보며 무서워,무서워,라고 반복했고, 엄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럼 이제는 엄마랑 같이 안나올거야?,라고 말했고,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즐겨찾기에 등록한 블로그는 많지만, 갈때마다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블로그는 정말 적다. 그 중에 요새 닫는 블로그도 좀 있는데, 다들 안 그러시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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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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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2010/05/04 12:58
1. 감상에 젖지 않을 것
2. 징징 대지 않을 것
3. 말을 믿지 말고 말을 아낄 것
4. 타인에게 연루되지 않을 것
5. 화를 내지 않을 것(그러나 안 낼 수 있을까?)

일단 당분간만 잘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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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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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2010/05/02 18:11
요 며칠 이상한 캠프에 다녀와야 했고, 그에 바로 이어서, 갑자기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구제역'이 발생해버렸다. 반강제 계약직 퍼블릭 서비스에 종사하고 있는 처지에, '아직 또렷한 대책은 없지만 전 공무원 일단 출동!'하면 예예, 하고 가야지 뭐. 구제역이 끝날때까지는 '매일출근주말반납'은 도저히 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 대책도 없고 장비도 없고 돈도 없으면서 일단 나가라고 한다. 그래도 내 일상에 닥친 더 큰 위기는 겨우 모면. 이걸로 일단은 OK.

어쨌든 이 탓에 소와 돼지가 몰살 당하고 있다. 규모도 엄청나 수천마리에 이른다. TV에서 종종 구제역 뉴스를 볼 땐 숫자로만 실감했던 것들이, 이제 내 일상에 가까이 오니 다른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수없이 많은 소와 돼지들은, 질병에 걸렸거나 혹은 걸릴 위험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절하게 하루 아침에 학살당하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개활지에 보이던 환한 불빛과 바삐 움직이던 포크레인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싼값에, 혹은 무료로 한우의 뒷다리를 먹을 수 있지 않겠냐며 군침을 삼킨다. 심지어 매립지에서는 이미 소고기를 굽고 있었다. 소를 40여 마리 키우고 있다는 어제 만난 한 축산업자는, 이번 구제역 발생지역 선포로 인해 자신의 꿈이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해, 자기가 어릴 때부터 소를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비싼' 안락침을 맞아야 하는 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도 표현하지 않았다. 소들은 허망하게 죽어버리거나, 500kg 나가는 600여만원 짜리 '재산'일 뿐인 것이다.

예전에 소위 '광우병' 파동이 있었을 때, 가장 절실하게 공감했던 표현은 '미친소'가 아니라 '병든소'라는 표현이었다. 광우병은 결국 거대 축산기업 네트워크와 효율성 논리에 의해 탄생한 재앙이었다. 그 병을 만든건 소가 아니라 결국 인간이었고, 그럼에도 정말 많이 아팠던 건 소들이었고, 그럼에도 인간에게 미친 영향의 원인은 '미친소'에게로 귀결되었다. 이번 구제역의 경우는 또 어떨까? 고기를 더욱 싼 값에 먹겠다는 시장의 욕망은 결국 축산농가의 밀집화, 기업화, 효율화를 이끌었을 뿐, 그런 열악하다못해 처절한 환경에서 돼지와 소가 어떻게 성장하고 자라나고 학살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소와 돼지, 닭 같은 '인기 품목'이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는 가본 사람만이 안다. 그렇게 밀집된 환경 속에서 구제역은 더욱 쉽게 전염된다. 적어도 축산 농가 주변에 목초지만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도, 발생지역 3km이내 무조건 모든 소 돼지 학살은 없을 것이라 했다.

지하철, 버스 따위에서 과도한 밀집은 사람을 정말 미치게 한다. 사람들은 1.5평짜리 독서실에서 우울증에 쉽게 빠진다. 어떤 동물행동학자는 과밀로 인한 총체적인 행동의 왜곡을 '싱크(sink)'라고 표현했다. 28개월 동안 5마리의 쥐는 5만 마리의 쥐떼가 될 수 있지만, 일정 크기의 공간에 사는 쥐들은 결코 일정 개체수를 넘어서 번식하지 않는다. 일정 수를 넘어서 과밀이 발생하면, 쥐들은 서로 꼬리를 물어 뜯어가며 싸우고 태어난 새끼를 죽인다. 소와 돼지, 닭(한국에서만 닭은 하루에 70만 마리, 월드컵 기간엔 200만 마리가 도살당한다)에게 유독 전염병이 빠르게 전파되고 치명적이었던 이유를 다시 짐작하게 한다. 출퇴근 시간에 인사를 건네곤 했던 소들이 생각난다. 다시 한 번, 육식을 하지 않아야겠다. 이건 최소한으로 지킬 수 있는 삶의 윤리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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