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카테고리

전체보기 (484)
일기 (198)
조각들 (74)
독서노트 (79)
스크랩 (57)
영화 (44)
음악 (0)
문학 (17)
번역 (14)
(0)
기타 (1)
미공개 (0)

'2010/03/16'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3/16 김연수 작가 인터뷰 중에서!
  2. 2010/03/16 무서운 할아버지들 (2)
스크랩 / 2010/03/16 14:53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2007&article_id=59962 에서 몇개만...

-산문과 소설을, 가볍게 쓰는 글과 힘주어 쓰는 글을 뚜렷이 구분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각별히 경건한 것 같습니다.

=천재의 소설이냐 소설이 아니냐가 아니라 진짜 훌륭한 소설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늘 그와 비슷한 소설을 추구하지만 항상 실패하죠. 그리고 다음에는 더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에세이는 평상시의 자아로 쓰는 글인데, 소설을 쓸 때는 개인으로서 쓴 적이 없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는 저보다 인생 전반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이야기를 해석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책도 많이 보고 기술적인 것도 배우고 경험도 하죠. 그대로의 저는 제가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 자신이 점점 소설 쓰는 자아로 변했고 제가 나아지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간증을 할 수도 있어요. (웃음)
 
-보통은 그냥 “작가로서 성숙했다”고 표현할 텐데 복잡하네요. 같은 사람이지만 소설을 쓰는 순간의 자신은 다른 존재라고 여기시나 봅니다.

=왜 소설 쓰는 자아와 제 자아가 다르냐면 창작하는 과정에 단절이 있어요. 처음 사회적 자아로서 뭘 쓰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먼저 스토리를 만드는데 쓰레기 같은 것들이 나와요. 평소의 내가 얼마나 후진 생각을 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죠. 마감을 앞두고 잠도 안 자고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고쳐 쓰다 뻗어버리는데, 내 자만심도, 습득한 지식도 다 부정하고 아무것도 없이 깡그리 벗겨진 그 상태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예요. 그러니 평상시의 저와는 다른 존재가 썼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대표적인 예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에요. 그 작품을 끝내는 순간에는 “이것은 소설임에 틀림없다”는 환희가 들었어요. 독자들도 제 에세이와 소설이 다르다는 걸 알아요. 에세이와 평소의 저를 좋아하지만 소설은 어려워하는 분도 있어요. 저 역시 독자들을 만나 소설을 설명할 때면 이미 평소의 자아로 돌아가 있기 때문에 남이 쓴 작품을 말하듯 어색해요. 문예지에 연재할 때는, 첫회가 제일 쉬워요. 마감하고 한달 놀고 한달 자료 찾고 마지막 달에 2회분을 쓰려고 첫회를 읽어보면 너무 잘 썼어요. 도저히 이렇게 쓸 수가 없고 남이 써줬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겠다 싶어요. 그렇게 비참해하다가 간신히 쓰죠. 그리고 3회에 가면 또 가까스로 썼다고 여긴 2회분이 훌륭해 보여요. 그 상황이 반복되는 거죠. (웃음)

-역사소설을 쓸 때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하십니다. 고증에서 상상력으로 갈아타는 지점을 어떻게 정하세요?

=상상력 자체가 자료에 기초해요. 자료로 더이상 알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자료를 보죠. <꾿빠이 이상> 같은 경우 마지막 순간에 이상이 갖고 있었던 마음이 가장 중요한데 그건 자료가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에요. 그 부분을 제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읽는 이들이 자료로 써진 부분을 읽으면서 유추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게 제가 한 작업이었어요. 그게 인문학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어떤 진실의 순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쓰지 못해요. 방계의 정황들로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으면 제일 좋다고 생각하죠. 

-사료나 옛날 신문의 중립적이고 짤막한 기록을 볼 때 가장 궁금한 부분이 무엇인가요?

=구체적 감각이 와닿는 사건들이죠. 예를 들어 고문이 있었다면 고문방법의 종류는 자료에 다 나와요. 그러나 제가 궁금한 건 1인칭화된 고문이에요. 당연히 아픔이 있었겠지만 아픔은 그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 게 없죠. 고문당하는 와중에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일까? 그건 고문 자체의 고통이 아닐 수도 있어요. 김근태씨의 경험담을 보면 고문자들이 애들 교육문제를 잡담하는 소리였다죠. 그것만 해도 많이 들어간 건데 전 그것도 성에 안 차요.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 당사자조차 모르는 무엇을 알아내야 해요. 그리고 사람들은 제가 취재를 한다고 하면 옛날 인물의 복식 같은 걸 찾는다고 생각하는데 좀 달라요. 예컨대 1940년에 태어나 60년에 대학 들어간 인물을 쓴다면 그 무렵 그가 읽었을 법한 책을 무작위로 읽어 그의 교양수준, 접했던 어휘, 감각적으로 노출됐던 폭력, 인식의 지평을 체화해야 해요. 그렇게 인물의 상태를 파악한 다음, 극적인 상황에 던져놓아야 고유한 행동이 나와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에 대한 권리  (2) 2010/06/16
이단들을 위한 자리  (2) 2010/03/23
김연수 작가 인터뷰 중에서!  (0) 2010/03/16
[스크랩]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와 계통 발생  (2) 2010/03/06
6. 9 작가 선언  (2) 2009/06/09
Posted by 소이연
조각들 / 2010/03/16 13:55

1.

2008년 봄여름, 광화문에 나갈 때 제일 무서웠던 건, 사실 경찰이라기보다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들이었다. 참전유공자의 붉은 띠를 몸에 두르고, 군복을 맞춰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할아버지들. 월남참전용사회, 뭐 이런 이름의 단체였던가? 고엽제 전우회였던가? 아무튼 이 할아버지들에게 언제 어떻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 행진 대열을 마주치면 괜히 저만치 돌아서 도망가버리던 기억이 많다. 할아버지들에게 정당하게 또박또박 항의하던 사람들은 온갖 욕설과 호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경찰들은 이 할아버지들이 원군이라도 되는 양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사람들에게 못되게 구는 경찰들은 밀쳐도 되고 항의해도 되고 심지어 욕해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할아버지들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방패를 쿵쿵 울리며 고함을 질러대는 무리 앞에서 덜덜 떨었어도 괜찮았고 물대포를 맞아 감기 걸렸던 것도 괜찮았고 발암물질이라는 소화기 가루 흡입해도 괜찮았고 도망치다가 진압봉이나 방패로 한두 대 쯤은 맞아도 다 괜찮았지만, 도대체 이 무서운 할아버지들의 욕설과 호통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할아버지'였으니까. 할아버지들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다. 당시엔 솔직히 말해 그냥 집에서 쉬시지, 손녀 손자도 없나, 이런 나쁜 생각까지 들었다. (에고고;;)

이건 나의 나이주의 탓이기도 하겠지? 근데 나 혼자 나이주의를 집어 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주의는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엮어 주는 사회적 논리이며 사람들이 서로와 관계맺는 방식이니까. 그건 어쩌면 미/추 혹은 쾌/불쾌를 다루는 감성(미학)의 차원에 속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깨기 어려운.

2.

그런데 지난 주 한겨레21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요즘 들어 자주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단체에 대한 르포 기사였다(도대체 어떻게 취재를 다녀올 수 있었을까? 참 대단해). 단체 이름이 대한민국 어버이회였던가? 계란 투척부터 시작해서 온갖 욕설에 모욕에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어디까지나 강퍅한 '남성' 노인들이 모인 단체.. 가장 재밌는 말은 "여기 나와야 그나마 숨통이 트여"라는 말이었다. 또 "노인네들 빨리 죽으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나."라는 말도, "우리는 애국자야. 그런데 요즘 우리가 받는 대접이 뭐야.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한국 사람인데 우리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고."라는 말도, "거기 청년들이 우리더러 '어디서 돈 받고 왔느냐'고 묻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까지는 안 했어."라는 말도, 모두 정말 많은 것을 드러내는 말들인 것 같다(생애사 연구해도 재밌을 것 같다. 내가 할 맘은 없지만). <'과격한 어르신들'의 속사정>이라는 커버스토리에 딱 들어 맞는달까.

물론 기사 자체에 공감하며 읽지는 않았다. 이 기사는 진보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몽적 말투로 이 어버이회 회원들을 분석하고 또 처방하고 있으니까. 예컨대 이 '어르신들'이 삶의 과정에서 반공사상만을 주입받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단점을 비교해가며 스스로 가치판단을 해볼 수 있는 교육을 박탈당한 세대"라며 이들도 "시대의 피해자"라고 이야기하는 걸 읽고 있자면, 잠시 아연해지면서 너무 단순한 분석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특히 "이들도 시대의 피해자"라니. 이런 알량한 온정에 고마워하기라도 해야할까? 이 기사의 말미에서 어떤 진보자유주의자 교수는 "굴절된 인식을 가진 이 노인들에게 그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합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그럼 할아버지들에게 다른 가치관을 교육하면 되나? (어디까지나 가치판단이 함축된 단어인) 올바르고 정당한 정보를 제공하면 학습자들은 그걸 스폰지처럼 습득하게 되는 걸까? 그렇게 정당하게 간주되는 정보를 만들어내고 제공/강요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걸까? 정말 사람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일상에 대해서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

3.

이런 기사를 읽으면 사회의 '성원권'이라고 불러야 할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성원권은 개인의 지위를 결정하는 수없이 많은 요인들(출신 지역, 성별, 성정체성, 정치적 성향, 경제력, 학벌, 문화자본 등등등)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러한 요인들을 정당한 것으로 납득시키고 설득하고 강요하는 규범화/주체화의 논리와 테크닉들, 그리고 더 중요하게, 그렇게 규정된 지위와 성원권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속사정, 즉 <마음>에 대한 고려까지 포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세넷의 말을 바꾸어서 말하자면 "성원권의 숨겨진 상처(hidden injuries of the membership)"까지 말이다. 이 할아버지들의 "과격"하고 "날 선 주장"은 기사에서 표현되듯 "소외감"과 "모순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은 상처입고 취약한 언어를 구사해야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누구의 언설인가? 피해자의 정치학.

사회/정치 분석이 단지 학술적, 저널리즘적 언어로 표현되는 <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 또 사회적인 인정과 그 인정과 관련된 사람들의 상처도 고려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오랜 기간 관찰하고 소통하면서 발견되는 <행동>의 차원일 것이다. 그런 상처를 애써 봉합하지 않으면, 얼마든 그 상처는 여러 다른 조건에 의해 다른 폭력으로 촉매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들이 좌파, 빨갱이, 친북 등을 논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 분들이 계몽이 덜되서 그런게 아니라, 행동을 정당화 할 때 인용할 수 있는 한국의 역사적 내러티브 자체가 그정도 밖에 안되니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내러티브는 인종이나 계급, 성별, 성정체성 등 어떤 내용으로도 대체가 가능할 것이다. 이제 내러티브 분석은 충분하다고 믿는다.

4.

사실 제일 궁금한건,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의 차이다. 왜 무서운 할머니라기 보다는 무서운 할아버지들이 광장에 나타나는 걸까? "위안부 여성"은 흔히 "위안부 할머니"로 재현되지만, 이들 "할아버지"들은 "어르신"이나 "어버이"로 재현되는데, 이 차이는 도대체 뭘까? 풀어내고 싶은 젠더 연구 과제도 정말 많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조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론 공부  (0) 2010/04/13
외모를 어찌 말해야할지  (0) 2010/03/19
무서운 할아버지들  (2) 2010/03/16
글쓰기, 호흡  (0) 2010/01/28
냉소주의, 윤리, 버틀러  (0) 2010/01/10
Posted by 소이연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 2010.0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