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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3/09 아우라(Aura)와 명사(名詞)
  3. 2010/03/08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에게
  4. 2010/03/07 클로이 (2)
  5. 2010/03/06 어웨이 위 고
  6. 2010/03/06 [스크랩]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와 계통 발생
  7. 2010/03/05 귀책
  8. 2010/03/01 100301
  9. 2010/03/01 밀크
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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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서 온기가 빠져나간다.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낸다. 우리는 공공연한 저항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저 은밀한 저항을 극복하는 엄청난 일을 행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이 말은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것과 맞물려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우라는ㅡ조악하게 구분하자면ㅡ 주관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만약 아우라가 사회역사적인 조건위에서 가능하다면, '아우라의 상실'은 특정한 물적 기반이나 생산 기반, 혹은 여러 제도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조건 위에서 아우라의 상실은 불가항력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 선택지가 남는다. 아우라가 살아 있던 과거ㅡ아우라의 상실 이전ㅡ를 동경하거나, 혹은 아예 아우라라는 경험 자체를 포기하거나. 이런 세계에서 아우라의 상실을 거부하는 행위는, 어디선가 니체가 구분한 3개의 역사관 중에 '기념비적 역사관'(영화로운 과거가 현재에도 재생될 수 있다는, 혹은 재생되어야 한다는 회고적/복고적인 관점)이나 '골동품적 역사관'(과거는 단지 과거의 냄새를 풍기는 문화재와 다름 없는 그 무엇이다)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영성주의 운동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탁월한 수집가 혹은 미술관/박물관의 열정적인 관람객이 되거나.

그렇다면 우리는 아우라의 상실을 기어코 인정해야 할까? 무한한 복제가능성, 무한한 생산과 소비의 연쇄 속에서,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내"는 과정을 인내해야 할까? 상실된 아우라를 애도하고 한줌짜리 체험을 하기 위해 한가람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지에서 개최하는 12,000원짜리 전시회에 가야할까?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우라는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혹은 주관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앞서 언급한대로 사회역사적인 조건이 아우라의 상실을 결과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겐 얼마간 주관적인 조건으로 돌아와 볼 수 있다. 너무 많이 읽혀 말하기도 민망한 시지만 김춘수의 시 <꽃>은 이를 잘 예시하지 않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이런 명명(naming)작업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퇴근길에(아 5개월만 더 참으면 돼) 소가 살고 있는 외양간을 지나야 한다. 얼마 전엔 귀여운 송아지까지 낳았다. 지금까지 소 가족은 단지 껌뻑이는 그 큰 눈들이 예뻤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소 두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를 본다면 어떨까? 수컷은 얼럭소고 암컷은 누렁소다. 얼럭소는 새앙뿔이다. 새끼는 아직 엇송아지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언어가 점점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간주되는 상황에서 다채로운 명사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오죽하면 (이를테면) 300개 표현만 알면 70% 정도의 일상 회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책까지 나올 정도일까. 한국어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많은 명사가 있다. 정말 찾아보기 전엔 몰랐을 뿐이다. 명사를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는 건 아우라를 경험하고 사물에 온기를 보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아닐까 싶어진다. 사물의 빛은 사물을 지칭하는 적확한 언어를 찾을 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사회역사적인 아우라의 상실과는 관련없이 주관적으로 그러나 상호주관적으로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 흐이... 소설가들이 좀 더 분발해줬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한글 단어 모음 스크랩을 위한 뻘글이었고 그렇다면 이쯤에서 역시 ctrl +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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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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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_백석,「북방에서-정현웅에게」中
 
이 부분을 두고 백석 연구자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했다고 했다. '민족주의' 국문학자들은 3행, 즉 "숭가리를"에 마침표를 찍어서 1행의 "떠났다"를 서술어로 간주했다. 시의 화자는 비록 떠났지만, 숙신이나 여진, 요, 금 같은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민족사'의 일부인 부여와 발해를 "배반하지"는 않았으니 백석을 '민족문학사'의 일부로 넣으려는 학자들로서는 그게 훨씬 편이로웠을테다. 화자가 "배반"한 것은 고작 "범과 사슴과 너구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지금 읽고 있는 백석 연구자의 해석은 이보다 더 한걸음 나아간다. 단지 추정되었을 뿐인 유사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나'를 무려 고구려와 동일시한다. 잠시 아연해지고.. 아 어떻게 이 시를 그런식으로.. 부여까진 그렇다 쳐도 발해, 여진, 요, 금은 어쩌고? 그런 역사학적 해석을 뛰어 넘는 훨씬 아름다운 시인데.. 책 전반이 다 재밌다가 마지막 장에서 삐끗해버렸다.
 
한국을 무려 반만년 역사로 보려는 국가민족주의적 국사학의 움직임탓에, 한국에서 근대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말하는 건 과장해서 말하면 바보가 되어버리는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모든 역사 서술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국에서, 아니 동북아에 있어 통용되는 상식은 그렇지 않나?
 
물론 이건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고작 스물 세살에 걸출한 논문을 썼지만, 네이션의 산물인 '사적 언어학'이 태동하던 프랑스에서의 교수자리를 고사해버리고, '중립국'인 스위스의 작은 대학교에서 평생 책 한권 제대로 내지 않았던 소쉬르를 생각해보면. 소쉬르가 남긴 강의에는 네이션 언어학에 대한 경계심이 녹아 들어있다고 했다.

백석이 지금 한국에 살았다면 진작에 "배반하고" "떠났"을거라고. 백석의 저 시는 단지 모든 유배자/유랑자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노래로 바쳐져야 해.

시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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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TAG 백석, , 역사

클로이

영화 2010/03/07 22:17

<클로이>는 이른바 '콜 걸'에 대한 영화적이거나 서사적인 '전통'이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면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콜 걸'이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어떤 문화적인 각본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또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사랑'과는 별개로 다루어야 하는 '러브 어페어(Love Affair)'라는 주제는 대체로 중간 계급 이상의 계급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다루어지므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낭만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한 중간계급 이상의 가족을 배경으로 하는 설정 역시도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배경 탓에 잘난 미중년 남편과 역시 남편을 닮아 잘난 청소년 아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중년 여성이 편집증에 빠진다는 설정도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설정 탓인지 어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로이>는 분명 후반까지는 별다른 특색을 찾아볼 수 없는 영화다. 클로이의 눈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빼면 말이다. 또한 스릴러 장르라고 선전은 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초반부터 영화의 결말이 예상 가능하다. 우선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문화적 재현물에서 '팜므 파탈'로 그려지는 인물이 결말 부분에 가면 대개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클로이의 미래를 쉽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클로이가 캐서린에게 의뢰를 받아 데이비드에게 접근한 뒤 접근 내용을 보고하는 장면 역시도, 클로이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감추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빛을 발한다. 벤야민은 "운율이 맞게 구상되었으면서 나중에 어느 한 구절에서 리듬이 빗나간 글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일방통행로』 중에서). 우리는 벤야민의 말에서 '운율'에 맞게 산문을 쓴다는 표현을, 작가의 신성한 창의력에 따른, 혹은 뮤즈의 불가해한 부름에 따른 작품의 무기반적 '창조'가 아니라, 작품 자체의 흐름을 어떤 언어적 전통이나 문법, '질서'와 조율한다는 의미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클로이>는 전통을 무조건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섣부르게 감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전통적인 몇몇 규칙과 문법을 적절히 합성하고 변주하며 따르다가 재빠르게 약간은 뒤틀린 모습을 하고 결말로 질주한다. 그 만듦새가 제법 좋다. 또 캐서린이 마지막 파티 장면에서 클로이가 준 핀을 머리에 꽂고 있는 장면이 상징하는 것도 좋다. 캐서린은 더 이상 이전의 캐서린이기를 멈추고 비로소 무언가를 뚫고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남는 하나의 의문. 왜 영화 속의 '팜므 파탈'들은 언제나 '소실하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의 역할만을 하냐는 것이다. 클로이는 영화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단지 서사를 이끌어 가기 위한 가상의 인물 혹은 단순한 하나의 장치처럼 보인다. 많은 영화들은 '팜므 파탈'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 가에 대해 설명할 때도, 유사 정신분석학적으로 간단히 어릴 적 트라우마나 부모와의 뒤틀린 관계에서 찾을 뿐, 다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팜므 파탈'을 일상적인 의미로는 이해를 전혀 할 수 없는, 그러나/그렇기에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그 무엇으로 그려낼 뿐인 셈이다. '팜므 파탈'을 만나 주인공의 일상은 파괴되지만, '팜므 파탈'은 결국 죽어 버리거나 어딘가로 사라지기 마련이고 주인공의 생사나 몰락과는 큰 상관없이, 질서는 되찾아진다.


덧1) 오늘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완전 득템! +_+ 한강의 신작 장편소설이 나왔다!!!!!!! 흑흑 그저 감사합니다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웅얼웅얼...

덧2) 클로이가 캐서린의 아들 마이클 스튜어트에게 들려주는 노래가 좀 좋았다ㅎㅎ 캐나다의 인디 밴드 Raised by Swans의 노래라는데, 백조가 키워냈다고 믿기엔 좀...; 어쨌거나 동영상 링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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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어웨이 위 고

영화 2010/03/06 16:41


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만났다. 가슴 한쪽 구석부터 차오르는 따뜻함, 그리고 다른 한쪽에 남아버린 씁쓸함. bittersweet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적절한 것 같다. 영화는 얼마간 전형적인 로드무비다. 다소 답답해진 일상을 벗어나서 길따라 여행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은 뒤에 마지막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렇게 돌아온 집은 이전의 집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은 뚜렷하지만 '직업'이 뚜렷하지는 않은 커플, 버트와 베로나는 버트의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다. 베로나는 그 방문이 마뜩찮기는 하지만 아이의 출산이 임박했기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이제 아이가 생겨날 두 사람은, 이 둘 외에 이 관계를 살피고 도와줄, 그들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가족 같은 것" 아니면 "친구 같은 것", "친분 같은 것", "우리가 아는 사람 같은 그런 것"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찾아간 곳에서 버트의 부모님은 2년간 벨기에로 떠나버린다고 뉴스를 전하고, 집도 임대를 놓아버렸다고 한다. 충격. 그럼 이제 이미 떠나온 길을 따라 길을 더 갈수밖에.

피닉스(Phoenix) - 투손(Tucson) - 매디슨(Madison) - 몬트리얼(Montreal) - 마이애미(Miami) - 집의 코스를 밟으면서 이들은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사람들과 사건에서 자신들의 <현재> 모습을 읽어낸다. 피닉스에서는 왜 결혼한 커플들이 자신들처럼 사랑하지 않을까를 궁금해하고(결혼은 관계의 파탄일 것이다. 베로나는 끝끝내 버트와의 결혼을 거부하던 중이었다), 투손에서는 베로나의 동생을 만나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애틋하고 얼마간은 애증이었던 관계를 떠올린다(자신이 부모가 될 때에, 비로소 부모라는 것에 대해 진지해질 계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매디슨에서는 정말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던 버트의 이를테면 사촌인 엘렌을 만나고, 엘렌의 뉴에이지 일상에 충격을 받는다(부모와 태어난 아이와는 '적절한' 거리와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몬트리얼에서는 옛 대학 동기였던 부부를 만나는데, 그들에게서 버트와 베로나 두 사람에게는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방패막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두 사람<만의> 삶은 없어지고 책임감과 인내라는 중요한 가치가 두 사람의 관계를 덧칠하게 된다.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침내 "친구 같은 것"을 찾아냈다고 생각해서 몬트리얼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던 두 사람은, 버트의 형이 전한 급한 연락을 받고 마이애미로 떠난다. 마이애미에서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형네 부부는 이미 파경이었다. 와이프는 이미 떠나서 잠적한 상태고, 버트의 형은 관계와 신뢰, 무엇보다도 평범한(정상적인) 삶이 무너졌다고 절망한다(결혼 생활 중이라도 얼마든 관계는 무너질 수 있고 세계는 붕괴할 수 있다. 아이가 있든 없든. 관계와 세계는 어쨌든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다소 작위적인가?

특히 마이애미에서 버트는 눈에 띄게 불안해 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무너진 커플의 신뢰 앞에서, 버트는 영 자신감이 없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야밤에 콩콩이를 뛰던 버트는 베로나와 인상깊은 장면을 연출한다. 속삭이듯 따뜻한 대화의 연속..

-(버트) 최소한, 결혼은 해줄 수 있겠어? / =(베로나) 절대 안 해. 그러나 절대 너를 떠나진 않을거야. / -(버트) 그래... / =(베로나) 약속할게 / -(버트) 그래 알겠어. 너는 나랑 절대 결혼을 하지 않을거야. 원하지 않으니까. 네 부모님이 결혼식 자리에 없으면 넌 절대 결혼하지 않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날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 할 수 있어? 우리의 이 아이를 절대 안 떠날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그럼(I do). / [... 중략 ...] / =(베로나) 우리 딸이 뭔가를 말하려 할 때 진심으로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특히, 아이가 두려워 할때 말야. 그리고 아이가 싸울 때면 마치 자기 싸움인 것처럼 아이 편을 들어줄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 -(버트) 응(I do). 내가 부끄럽게 죽든 진부하게 죽든, 우리 딸한테는 아버지가 850명의 체첸 고아들을 구해주려다가 러시아 군인들과 맨손 격투를 벌인 끝에 죽었다고 말해줄거라 약속할 수 있어? / =(베로나) 응. 체첸 고아들, 알겠어. 응.

보통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보는 사람은 진부한 사랑의 맹세를 늘어놓고 커플에게 "네(I do)"라고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진부한 결혼식 대신, 그들은 사회문화경제적인 이익을 주는 '제도권' 결혼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거행한 셈이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에 "우리는 비현실적이야", "우리는 망할 수도 있어"라고 자조하기도 하고 "꼬꼬마야? 혼란스러워? 미숙해? 미국적이야?"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얼마간 성장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추운 날씨에도 히터를 켜면 전기가 나가는 집이기는 하지만... 정말 사랑스럽다.


덧)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고 살찌는 것 가지고 베로나를 괴롭히던, 그래서 얼마간은 거북함이 들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던, 어벙꺼벙하고 우유부단하며 썰렁한 유머를 구사하던, 키만 껑충하게 큰(191cm) 버트 역을 맡은 존 크래진스키의 인터뷰 중에서 이런 말이. "제 이름은 원래 존 콜린스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재능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이름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크래진스키라는 폴란드 계관시인의 이름을 빌려왔어요. 완전히 쇼비즈니스계를 위한 이름이더라니까요." 아 이 배우 뭐냐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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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  (0) 2009/08/01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0) 2009/05/10
Posted by 비앙
예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스크랩 했던 건데, 우연히 발견해서.. 예전엔 참 재밌게 읽었는데. 언젠가 다시 읽고 싶어지지 않을까해서 여기에도 옮겨둠 +_+


마초이즘은 현재 한국 남성(+일정 나이 이상의 여성)의 정신구조에서 끈질긴 고착성과 감염율을 보이는 문화(文化) 유전인자(遺傳因子)이다. 이 인자(因子)는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점유하지 못한 모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이 인자의 영향력 바깥의 사유를 구경하지 못하고 산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대학시절의 일부 기간 동안 페미니즘이라는 반마초적인 문화 유전인자의 세례를 받는다. 이것의 고착성과 감염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흘러야 논의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이 안티-마초 유전인자는 마초 인자의 세례로부터 사람들을 막아낼 만큼 많은 시간동안 사람들을 점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자(文字) 유전인자로의 페미니즘은 마초이즘 보다 수만 배의 성공적인 증식(增殖)을 이루고 있으나, 문화 유전인자로서의 페미니즘은 아직 마초이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여하튼 중요한 건 일반적인 사람들은 마초이즘이 뇌수 하나하나를 다 끄집어내서 축축하게 담글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그것의 영향력 안에서 보내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초이즘이라는 인자가 항구적인 존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다른 문화 유전인자에 편승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마초이즘의 강력한 고착성과 감염율 덕에 이것은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변종(變種)을 만들고 있기에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지금부터 이것을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마초이즘의 다양한 양상들을 "계통 발생"이라고 부르자. 아래의 예시는 필자의 경험에서 나온 실례이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께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다른 표류물들을 덧붙여 주면 감사하겠다.

* 해악도는 무한소를 0, 무한대를 100으로 지정, 상대성을 숫자화했다.
* 계산은 일반적인 평균치를 기본으로 했으며, 편차가 너무 클 경우 계산을 포기했다.
*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편의상 계통이 아닌 개체로 표류물들을 분류했다.
* 이 고찰은 문화적 표류물들에 초점을 맞춰 그 숙주(=마초)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 이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증상을 알고 싶은 분은 타인에게 부탁해 주시길 바란다. 자기진단은 짜가다.


A 부류
온순한 마초 (비교적 독성이 적은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0-20

1. 마초 메저키스트(피학성 변태) 자기억압형
"나는 마초가 아니양....."
해악도 5.
자신의 마초이즘을 부정하면서 발병을 억누르고 있다. 가끔 자신의 마초성이 드러날 경우 "술취해서" "흥분해서" "화나서" 그랬다고 깨끗이 사과한다. 이 말을 대충 믿어주는 것이 인간관계를 위해 편리하다. 본인 스스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다른 이들에게 나쁘지는 않다. 다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2. 마초 커밍아웃 자기억압형
"저 마초 맞습니다...."
해악도 10.
내면의 마초이즘을 인정한 후 치유 혹은 확산금지를 위해 노력하는 주의. 가장 건전하고 발전가능성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다수는 현 상태에 체념을 하는 동시에, 다른 마초들에게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기에 발전이 정체된다. 낙제점 조금 넘는 점수로 학급 1등이라고 기뻐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소심하다고 판단되면 "마초 커밍아웃 자기발산형"으로 진전할 가능성이 있다.

3. 마초 의무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조건 없이."
해악도 15.
순수 마초 부류 중에서 해악도가 가장 낮다. 마초의 덕목 중에서 권리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의무에만 "싸나이"의 근성을 걸고 정진하는 부류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죄"로 스트레스를 주긴 하지만, 그 이상의 혜택이 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나, 아쉽게도 숫자가 많지 않다.

4. 마초 커밍아웃 자기발산형
"나 마초 맞다. 그래서? 죄만 안 짓고 살면 되지."
해악도 20.
1번 2번 3번 유형에 비해 좀더 많은 숙주를 보유하고 있는 인자이다. '죄만 안 지으면 되지'라고 말은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나쁜 짓 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에 다른 인자만 덧대어 가지고 있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말도 통하고 잘 지낼 수 있다.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사람이다.) 만약 친구가 대단히 섬세하다면, "무의식적인 나쁜 짓"을 지적해서 이 부류에게 정신적 혼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2번에서 발전해온 부류는 이제 그런 공격에 끄떡하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적 기준이 있어서 이 이상 수준으로 발전 안 하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B 부류
: 짜증나는 마초 (어느 순간 대화의 단절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21-50

5.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표현형
"글쎄, 그냥 편견없이 생각해도 여자애들이 별로 안 잘났더라구."
해악도 25.
사회적 요건 쏙 빼놓고 판단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자기들이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부류다. "지금 현실"의 상황을 분석하며, 가능한 상황을 상정해 보지 않는다. (가령 문화적 편견 없이, 똑같이 교육시키면 그래도 "여자애"들이 별로 안 잘났을까라는 문제.) 실제로 얼마나 잘난 놈이냐에 따라서 내공 수위가 결정된다. 별로 안 잘난 놈은 잘난 여자에게 초전박살나고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방어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더 품위 있는 축은 잘난 여자를 발견하면 이 유형에서 깨어난다. (명탐정 셜록 홈즈를 생각해 보길.)

6.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방어형
"너와 내가 불평등한 건 성(性) 문제가 아니고, 개체의 능력 문제야."
해악도 30.
4번 유형이었다가 잘난 여자에게 박살난 후 원한을 품고 온 부류와, 성결정론을 옹호하기를 포기하고 개인적으로 체화한 부류의 연합이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객관적으로 "잘남"을 평가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잘남"을 확인하려 들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여성들의 발언권과 자기 표현기회를 교묘하게 억압한다. 자기 말 다 외치고 마이크를 끄는 건 이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앞에서 폼잡고 뒤에 가서 사정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아줌마"의 오일권을 상기할 것.) 자기표현형은 가끔 하는 짓이 귀여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 부류로 넘어가면 주위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상승한다.

7. 마초 로맨티스트
"아, 수컷의 섹시함이여, 영원하라!"
해악도 35.
상당히 자생적인 부류이다. 이들은 주로 문화예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난 남자다"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거나, 영화 "친구"를 보며 의리를 다짐한다든지. 일부는 락 매니아Rock Mania와도 결합되어 있다. 개인주의적인 마초 로맨티스트의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그닥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깊숙한 대화를 나누다가 어긋나는 부분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8. 마초 논리주의자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다 해결되지 않겠어?"
해악도 40.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는 의지는 있는데, 그 능력이 수반되지 않는 부류의 증상이다. 이들은 동태 상황과 정태 상황을 구별 못하며 (이 점에선 나르시스트들과 같다. 그런데 나르시스트들이 개인적인 면에서 이 분석을 중지하는데 비해, 이들은 그것을 사회수준에까지 끌어들인다. 가끔 일부 나르시스트들이 이 부류로 "진화"한다.) 가능하는 논리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논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마초 다위니스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9. 마초 순수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대신 넌 요리해."
해악도 45.
마초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 모범적인(?) 마초 부류이다. 그래도 능력있는 녀석들의 경우 바깥일은 신경 안 써도 확실하고 화끈하게 처리해준다. 단순반복노동에 취미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면 큰 해악을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이들은 설득이 힘들다. 그러나 딸을 낳은 후 딸이 이뻐서 부엌에 들어가는 경우는 있다. 딸이 조금 잘났을 경우 극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평균값쳐서 해악도를 45로 계산했다.

10. 마초 중심주의자
"나는 마초도 싫지만, 극렬 페미니스트들도 싫어."
해악도 50.
이들의 중심을 잡으려는 의지를 고려하여, 딱 중심에 위치하는 해악도를 선정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 것이다. 이들은 보통 자신들이 대립하는 두 사물이 있을 때 딱 중간에 위치한다고 야무지게 착각한다. 실제로도 이들이 대립하는 두 사물의 중간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통 만유인력의 법칙을 받아들여 질량이 큰 쪽에 가까이 있다. (간단한 수학계산을 해보면 이들의 입장이 어디쯤 위치해 있을 지 알 수 있다.)


상편을 서술한 후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몇몇 독자 분들로부터 제보를 받을 수 있었다. 성원에 감사드린다. 또 몇몇 분들은 상편을 보고 상심했다고 하는데, 상편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분들은 대단히 건전한 분들이기 때문에 안심해도 되겠다. 이제 해악도 높은 마초들을 다룰 차례다. 이들에 비하면 상편의 마초들은 "마초도 아니"다. 슬슬 시작해 보기로 하자.


C 부류
위험한 마초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51-80

11. 마초 근본주의자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여자애랑,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남자애들 재수없더라. 그게 뭐람?"
해악도 55.
남성성과 여성성을 분리하고, 생물학적 성이 반드시 문화적 성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심리다. 문화적 성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한 남성 혹은 여성, 그리고 성적 소수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휘두른다. 완곡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축과,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는 축이 있다. 그래도 제대로 지적해 주는 친구만 있다면 독성을 상당히 뺄 수 있는 부류이기도 하다. 독성이 빠질 경우, 자신의 의견이 편견임을 알면서도 머리의 인식("저래도 돼.")과 가슴의 감정("재수없다.")의 괴리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된다. 최근 하리수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이 역 괴리(머리="재수없다." 가슴="꼴린다;;;") 현상을 보이며 이 증상에서 구출되었다는 설도 있다.

12. 마초 비교우위론자
"내가 집안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니가 훨씬 더 잘하잖아? 사람이 잘하는 일을 해야지."
해악도 60.
이들은 자신이 가사노동에 소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남성들이 잘하는 일, 망치질이나 가구 운반을 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일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 중 일부는 단순반복노동의 품위없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설하지만, 대다수는 조용히 이렇게 외친다. "시범을 보여줘." 그리고 대단히 나쁜 학생이 된다. 이들의 나쁜 성적이 소질없음에서 연유하는지 의도적인 태만에서 연유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의도추정을 해선 안되겠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들이 집안일을 지지리도 안한다는 것이다.

13. 마초 도덕주의자
"여자도 담배 필 수 있게 해달라구? 세상에, 허파 시커매지는 것도 평등이니?"
해악도 65.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남성은 그 엄격한 도덕률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폐암 발병률에 대한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똑같은 짓을 해도 왜 누구는 묵인받는데 왜 다른 누구는 비난받느냐다. 이들은 이 문제를 회피하고, "이제부터" 그 엄격한 도덕률을 남성들에게 적용할 거라고 주장한다. 혹은, 남성들이 어기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여성들이 같이 어겨야 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대충 맞는 말이긴 한데, 역시 위에서 말한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다.) 그 근저에는 "욕망"을 여성성에 결부시키고, 그것에 "절제"라는 금제를 뒤집어씨우는 오래된 문화적 관념이 숨어있다. 이 점을 파헤쳐줄 경우 극히 일부가 교정의 가능성이 있다.

14. 마초 다위니스트(자연선택론자)
"인류의 역사를 통해 언제나 남성이 우월한 성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해악도 70.
힘의 논리 이외의 도덕윤리를 체화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이 들러붙는 표류물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우월이 단지 "힘의 우월"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정태성만 보고 동태성을 보지 못하던 마초 나르시스트, 마초 합리주의자 들이 진화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다. 이들은 힘의 논리 이외의 도덕윤리를 체화하고 있지 않기에 윤리적으로 설득하기가 무척 힘들다. 여성성이 더 우위에 있는 일부 문화인류학적 자료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승리는..."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조금 치사하지만 침팬지와 보노보 등 유인원의 사례를 들이미는게 훨씬 효력이 있다. 즉, '침팬지는 암컷이 따로따로 노니까 막 두들겨 패던데, 보노보는 암컷이 연대하니까 함부로 못 패더라, 그러니 여권운동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약자 두들겨 패는 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겨우 납득을 하는 부류다. (그래도 이건 세계관의 문제라 잘 치유가 안된다.) 이들이 인류역사에 "끝까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오래살며 두고 볼 일이다.

15. 마초 부도덕주의자
"너는 왜 그렇게 고루하니? 좀 만지면 어때서."
해악도 75.
마초 도덕주의자는 이들에 비하면 천사다. 성윤리 해방운동을 남성의 이득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문화인자이다. 이 부류의 극한은 인습과 도덕을 우습게 여기는 "문화혁명가"이며, 이 위대한 과업에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동참할 것을 "여성 동지"들에게 요구한다. 이 부류의 일반은 여자친구들의 고루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당신의 여자친구, 당신의 딸, 당신의 아내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이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논리의 일관성을 지키는 연습을 끊임없이 시키면 구제의 가능성이 있는 부류이다.

16. 마초 소피스트(상대주의자)
"마초라는 말은, 여성이 자신이 싫어하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해악도 80.
한국 땅에서 남녀차별이라는 현상이 없고, 이미 여남 평등의 과업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될 것이다. 혹은, 그러한 "현상"이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그러한 일이 어째서 "과업"인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일 것이다. 첫째, 이 부류는 구제의 여지가 없다. 둘째, 이 부류와는 여성에 대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셋째, 이 부류는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과 결부할 가능성이 크다. 넷째, 이 부류는 서술할수록 서술자가 괴롭다....


D 부류
사악한 마초 (주변 사람들을 심각하게 다치게 하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80-100

17. 마초 권리주의자
"난 남자고, 남자는 하늘이고....."
해악도 85.
"마초 의무주의자"의 반대. "마초 의무주의자"(해악도 15)와 이 "마초 권리주의자"(해악도 85)를 섞은 것이 바로 "마초 순수주의자"(해악도 45)인데, 그 평균이 그래도 "의무" 쪽에 치우쳐진다는 점에서 "마초"의 따뜻함(?)을 찾아야 할까? 여하튼, 이 부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초",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능력없는 가부장이며, 실속없는 폭군 남편이며, 여성들을 억압하는 직접적인 기제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떠받들여 주기를 바라지, 그들을 괴롭히면서 쾌감은 얻지 않는다는 데에 지고의 악, "마초 사디스트"와의 차이점이 있다.

18. 마초 사디스트
"........."
해악도 95.
이들은 "말"이 없다. "폭력"은 동원될 수도 동원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은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더 이상 서술하지 않는다.

19.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
"나는 마초가 아니다. 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이다."
해악도 100.
지고의 악, "마초 사디스트"의 해악도를 능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 이들은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이다. 자생적인 부류와, 가장 해악도가 낮은 마초인 마초 메저키스트 자기억압형에서 발전한 부류가 있다. 이들은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아마도 이들은 쿨한 남자친구, 그럭저럭 괜찮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 이들은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인 파급력으로 무한대의 해악도를 발휘한다. 마초이즘의 땅, 대한민국에서, 마초이즘은 자신의 유일한 적인 "페미니즘"인자에 기생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이것은 마초이즘의 표류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도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인자의 전염력은 대단히 높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온갖 마초 짓을 다 하면서도 마초성을 인정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를 가르치려고 들거나, 페미니스트에 합류한 마초이즘, 마초 생존술의 극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F 부류
상대적 마초 (해악도 측정이 힘든 마초이즘의 표류)

20. 마초 귀차니스트
"내가 너 무시해서 일 안하냐....귀차나서 안하지....."
해악도 측정 불가.
귀찮아서 안 움직이는 마초이즘의 표류. 여자친구가 얼마나 부지런하냐에 따라 해악도가 천차만별이다. 만약, 여성 역시 귀차니스트라면 가사 분업은 완벽하게 이룩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결벽증이라도 있다면 마초 귀차니스트는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하게 여성을 착취할 것이다.

21. 마초 니힐리스트
"남녀 평등? 난 원리는 안 믿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해악도 측정 불가.
어떠한 도덕윤리도 믿지 않는 마초이즘이다. 그러나 "마초 다위니스트"와는 달리, "힘의 윤리"에도 감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시 해악도가 천차만별이다. 여성분들께서는 이 부류의 남성을 만날 경우 "마초 다위니스트"로 빠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상대해야 겠다. "그래, 남녀평등하라는 법 없지. 근데 남녀차별하라는 법도 없잖우?" "어, 그건 그러네." "그러니까 원칙을 일단 제껴두고 생각한다면, 우리 둘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만들면 되겠지?" "어, 그것도 그러네." "그럼 그런 방법을 찾아보자." "어, 그래." 이 부류의 해악도를 줄일 수 있는 필승해법이다. 이들을 위해 잠시 "유물론자" + "쾌락주의자"가 되시라.


후기
여성분들께는, 이 현상을 희화화시킴으로써 문제를 가볍게 본다는 느낌을 드린 것에 대해 사죄드린다. 이것은 농담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분들은 뒤의 사과를 보고 필자의 의도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뒤의 사과는 이런 것이다. 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 마초분들께는, 이견이 있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는 "유머"라는 형식으로 이렇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으로 여러분을 비난(!)한데 대해 깊은 사과를 드린다. 필자의 의도를 알았다면 반박하지 마시길. 사실 많은 남성들이 이글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언짢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언짢음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찾아보지도 않고 화낸다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땅에 사는 마초로써, 나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리의 일단을 상기하게 하는 곤란을 겪게 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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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귀책

생각 2010/03/05 21:06
어떤 부부가 게임에 중독되는 바람에 아이가 굶어 죽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 으레 나오는 반응은 신문 기사에 나왔던 어떤 경찰의 말대로 "자기 자식이 우선이지, 내 자식은 굶고 있는데 인터넷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는데 빠져 내 자식을 굶어 죽게 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어떤 평론가는 블로그에서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을 문제 삼았다. 그 평론가는 이 말에서 '사회의 부재'를 읽는다. 이 사건에서 사회는 무능했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사회는 개인을 구제해야 한다) 개인은 이러한 사회를 닮았다는 것이다. 즉 개인을 배려하고 개인들의 행위를 책임지는(사회는 개인을 조형하고 영향을 미치므로 개인의 과오는 곧 사회의 책임이다)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 평론가는 이러한 종류의 사건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니라, 한 철딱서니 없는 부부 '개인'들에게 귀책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이야기를 맺는다. 그 평론가에게 있어서, 이 사건과 그 사건 뒤에 오간 담론은 한국 사회의 고유한 윤리적 초상을 그려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 평론가는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를 소환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전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개인 대 사회'라는 구도는 오래된 '자유주의' 언어의 토양 위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개인 대 사회'라는 말은, 수없이 많은 근대 문학의 주제이기도 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전제인 '개인과 사회의 대립'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유주의는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벗은 주체(사회가 부과하는 권리나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투명한 모나드적 개체)가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이것이 '개인'이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개인' 이라는 <주체>는 신체의 폐쇄성에 의해 최후로 지탱된다. 사회가 아무리 침투하려고 해도 모나드에 가까운 신체의 자율성마저 훼손할 수는 없다. 신체는 그 자체로 '개인'의 개체성을 보증하는 담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가정하는 '개인'은 외부로 노출된 신체부위는 있어도 보는 눈, 말하는 입, 듣는 귀, 느끼는 피부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주의적 '개인'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개인과 대립하는 '사회'라는 개념이 없으면, 개인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탄생할 수 없다. 이 개인에 사회의 의무나 권리 따위가 덧칠해지면서 개인은 비로소 가시화되고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개인'이라는 말을 쓰려면 필연적으로 '사회'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는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조형하고 그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주의해야 할 점은, 자유주의라고 해서 흔히 오해하듯 '개인 만세'는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적 토대에서, 개인과 사회는 늘 대차대조표 위에서 계산기를 두드릴 수 있어야 한다. 제 멋대로 날뛰는 개인은 사회의 모럴(도덕)을 준수해야 하며, 폭압하는 사회는 개인의 개체성과 자유의지(라는 말이 문제가 될지라도)를 보증해야 한다. (흔히 이기주의로 쓰이는 용법대로의) 개인주의가 규제없이 발호해도 안되지만[아노미], 사회가 개인을 잡아 먹어 전체주의 사회로 흘러가도 안된다[파시즘]. 많은 경우 근대적인 주체들은 모두 이러한 자유주의를 공유한다. 신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자유주의를 통과해야 가능한 주체들이다. 거기엔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물론 라캉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그 평론가의 보캐뷸러리에서 사회라는 단어는 특별한 위상을 가진다. 라캉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사회라는 단어는 자유주의의 사회라는 단어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평론가가 블로그에 남긴 글은 화합되기 어려운 자유주의의 언어와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의 언어가 특별한 구별없이 어우러져 혼잡하게 읽힌다. 다만 그 글을 읽으면서, 그 평론가도 자유주의의 전제를 얼마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평론가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방점을 찍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평론가는 다소 어지럽게 글을 풀어낸 뒤, 잠깐 라캉주의 이야기를 하다가, '(상상된) 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은 결국 우리의 책임이라고 자유주의적인 도덕적 결론을 내리고야 만다. 이건 스타일 탓인가, (글쓰기의) 정치적 의도 탓인가, 혹은 단지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흔히 쓸 수 있는 말이 자유주의의 언어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단지 자유주의의 언어와는 다른 방식의 귀책 방법을 알고 싶을 뿐이다. 킁킁.
그리고 난 다른 데 읽혀야 할 글을 써야는데ㅠ 이런 뻘한 글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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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100301

일기 2010/03/01 23:18

# 편혜영 소설가의 신간 장편을 읽었다. 예전에 출간된 작품은 읽기가 힘들었는데 이번 작품은 재밌게 잘 읽힌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인 <토끼의 묘>를 읽고 부터 갑자기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계속 후속작을 기다려봐도 좋을 것 같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상하지만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공간의 이미지가 잘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별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묘사도 충분한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작품이 원래 노린 효과인가?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와 '메시지'는 남지만, 구체적인 세계를 그려내기 어렵다. 그렇게 읽는 도중에 나 스스로가 어딘가 떠버린 느낌이어서 작품을 '체험'할수가 없다. 소설이 어쨌든 작가의 주관으로 그려낸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해도, 깜빡 나의 현실인 것인양 혹은 내가 처해야 하는 상황인양 '체험'하는 경우가 정말 가끔 있는데…. 이건 유명한 외국 소설을 읽고 난 느낌과 비슷하다. 아무리 대문호의 작품이라고 해도 필름 이론에서 말하는 '이야기 세계(diegesis)'를 내가 구체적으로 그릴 수가 없으면 그냥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책 하나 읽고 서가에 꽂아둔 결과 밖에 안되는 것이다.

#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워낙 사람을 안보고 살아서 그런지, 요즘에는 사람들마다 스스로 쳐놓은 벽이 더 자주 더 많이 보인다. 벽의 종류도 여럿이고 높이와 두께도 제각기다. 벽이 예전에는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 더 또렷하게, 더 완고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건 내 또래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나이를 하나둘 먹어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점점 더 경계하기 시작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보는 눈이 달라진 탓일까. 어쨌든 또렷히 보이는 벽 탓에 이제는 좀 더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게 된 것 같다. 어차피 영원한 관계는 없다. 지금까지도 많은 관계를 잃었다. 그래도 결국엔 잃을 걸 잘 알지만, 아직은 좀 더 던지고 싶은데…. 근데 이런 종류의 느낌이 항상 그렇듯, 결국엔 나 혼자만 벽을 치고 있다는 사실.

# 나는 아직도 감정의 구분이 명확히 안되는데, 이런 사실은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도 지지받지도 못했다. 가까운 이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늘 내 감정을 명확하게 구분하라고 주문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나는 그게 정말 안된다. 감정을 명확히 한다는 건 제 욕구를 사회적 요구에 맞추고 그에 따라 관계의 질서 역시 조절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감정에 명확해지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늘 내가 힘들다. 자기들도 잘 구분하지 못하면서, 왜 자꾸 그런 일에 공을 들이는 것이며 나에게도 왜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는 정유미의 캐릭터가 가장 좋았다. 정유미의 행동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되려 나쁘다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나는 영화에서 정유미가 감정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화속 그녀는 어찌보면 다소 우유부단하고 선을 긋지 않아 애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독점적 이성애주의(모든 행위를 모노가미적 섹스주의로 환원하는)에 맞지 않는(그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관계 패턴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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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밀크

영화 2010/03/01 19:08
예술은 현실 정치를 다뤄야 할까, 혹은 다루지 말아야 할까? 현실 정치를 다루면 예술이 아니고 프로파간다인가? 누군가는 예술이 곧 정치라고 주장하며, 예술화(미학화)된 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정치화된 예술(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겠지만.

'선거' 만큼 진부한 운동 방식은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차피,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한국의 지방자치기구는 끼리끼리모여 쌈싸먹고 나눠먹는 허울 좋은 제도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또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선거 관련 부정부패비리는 너무나도 뿌리 깊은 것인데다, 출마하는 남자들의 면면과 야심 자체도 꼴불견인 경우가 많이 보였다. 그래서 선거 당일이 되면 (그나마) 선호하는 당을 보고 투표를 하거나 아니면 기권을 하는 것(그러나 투표장에는 반드시 가는 것)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모 정당에 일반 당원으로 가입해 적은 돈이지만 당비를 납부할 때도, 해당 정당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충분히 민주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급진과 민주주의가 뭐길래.

어제는 영화 <밀크>를 정말 감명깊게 봤다. 많이 울었고, 많이 흔들렸고, 많이 무서웠다. 몇가지 흐름이 개연성 없이 보이는 장면도 조금 있었지만(예컨대 스캇과 하비가 뉴욕의 지하철 입구 계단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라든지, 댄 화이트가 갑자기 눈에 광기가 서린 인물로 나타나는 장면이라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고, 전체적으로는 큰 무리 없는 설정이었다. 또 하비 밀크가 최초의 게이 정치인으로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이라는 약간의 이력 외에는, 어떤 성격을 가졌고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었으며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여줬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기 때문에, 2시간 5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선거'와 '의정 활동'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밀크>를 보면서 처음 느꼈다. 물론 그 과정을 단지 '아름답다'고 타자화(=미학화)하는 일은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소수자 운동에 대해 보통의 남성 진보 지식인들이 보내는 찬사와 격려 따위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선거 운동의 지난하고 숨막히는 과정은 물론, 의정 활동에 마주하는 수없이 답답한 상황을 어쨌든 헤쳐 나가는 밀크의 모습에 푹 빠져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가 청중을 향해 연설을 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벌떡 일어나서 그가 외치는 구호에 당장 동참하고 싶었다. "Gay Rights Now! Gay Rights Now!"
 
미국 보수 기독교 집단의 온갖 협박과 협잡은 치졸하고 유치한 것이었지만, 그랬기에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밀크는 처음 받은 살해 협박 종이를 아예 냉장고에 붙여 놓으면서, 그 종이를 숨기거나 찢어 버리자는 애인 스캇에게 이런 종이를 어디에 숨기거나 한다면 더 무서워질 뿐이지만 이렇게 붙여놓고 계속 본다면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자기에게 불리한 장소에서 공개 토론회를 거침없이 제안한다. 마이크를 잡으면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는 엽서를 받아도, 그는 마이크를 잡고 감명 깊은 연설을 한다(그는 타고난 선동가였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예감한 밀크는 자신의 정치사, 생애사를 담은 육성 테이프를 남긴다(그가 원고를 써서 녹음을 했다는 것에 마음이 무너졌다. 외부의 폭력에 암살을 예감하고 유서를 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상상할 수도 없어서). 그러한 모습은 낭만적 액티비스트의 모습 그대로였다.

불모지에 가까웠던 카스트로 구역을 명소로 만드는 과정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그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 내가 어떤 공간에 붙박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악FM이나 마포FM같이 지역 라디오 방송사가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고, 라디오는 없더라도 적당한 문화 인프라(관제가 아닌)가 있는 곳에서 잠자는 방과 서재 혹은 작업실로 쓸만한 방, 부엌, 개인 화장실을 갖춘 집에서 살면서 애착을 가질만한 지역 공간을 만드는 일을 언제나 꿈꿔왔었으니.

가장 좋았던 장면은 게이 인권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권리로 가자며 밀크를 설득하는 사람들의 말에 밀크가 단호하게 대응하는 장면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타협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자꾸 숨어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왜 게이의 권리이면 안되는가. 왜 인권이라는 두루뭉수리한 말로 현실을 감추어야만 하는가. 또 기억에 남는 다른 장면. 댄 화이트가 밀크 당신은 이슈가 많아 정치인으로서는 축복 받았다고 질투하는 장면에서, 밀크는 분개하면서 그건 단지 하나의 '이슈'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고 삶의 문제이며, 나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몇 가지 개인적으로 불편했던 점이 있었는데(단지 영화에 그치지 않는)... 그에 대한 생각은 벤야민을 인용하는 것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전통에 적대적인 사람일수록 다가올 사회적 상황의 입법기관으로 떠받들고자 하는 규범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의 개인적 삶을 영위할 것이다. 아직 어디서도 실현되지 못한 그러한 규범들의 모범을 적어도 자신의 고유한 삶의 영역 안에서라도 보여줄 의무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신분과 민족의 아주 오래된 전통과 자신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적 생활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원칙과는 대조적인 사생활을 때때로 과시한다. 하등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는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마치 그가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원칙의 확고한 권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도 되는 듯 은밀히 찬양한다." <일방통행로>. 김영옥, 윤미애, 최성만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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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밀크,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