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일기 2010/01/31 00:13
<몰락의 에티카>를 뒤적뒤적. 좋아하는 소설책의 뒤 해설에 보면 자주 나오는 이름이고 글도 썩 마음에 들고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예전부터 누군가 궁금했었는데... 아무튼 반가운 평론집이다. 평론집이니 심심할 때 아무데나 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저께 도착한 <로쟈의 인문학 서재> 같은 다소 인터넷스러운 '산만한' 구성ㅡ블로그blog+북book=블룩blook이란다ㅡ보다는, 여전히 이런 어느 정도는 전통적인 글묶음이 좋다. <로쟈>의 경우엔 이현우씨보다도 편집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가 더 많이 보인다.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출판하는 마음은 아직 잘 이해가 안된다. 발표한 글을 모으는 블로그라면 모를까. 아예 물적 기반이 다르다보니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과 출판된 글은 호환이 잘 안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하는 잡지 프로젝트도 사실 많이 걱정 된다. 웹진 기반의 글쓰기와 실제 출판하는 글 사이의 크레바스는 어떻게 건널 수 있을지.
  
난 여전히 이런 평론가들의 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는 애증에 가깝다. 그들의 글이 좋은 이유는, 그러면서 한편에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들의 세련된 보편성 때문이다. (신형철의 경우엔 보편성을 거부하고 압도적인 특수성 내지는 매력적인 주관성을 추구하고 싶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이러한 보편성은 그들의 문체나 정치적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젠더) 포지션 혹은 그들이 택한 장르적 형식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그들의 글에서는 매일 마주하지만 종종 피하고 싶기만 한 일상의 비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요리책을 뒤적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엘레강스하고 스타일리쉬한 셰프들은 대개 남자들이다. 그들의 파스타, 피자, 와인은 보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일상의 비루함을 덮는다. 그들의 요리는 '라이프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리연구가라고 알려진 여자들의 책은 다른 느낌을 준다. 콕 집어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하간 읽어보면 매우 다르다. 요리연구가들의 책은 요리가 누군가를 위한 노동이라는 점을 미리 가정한다. 사진, 글, 모든 것에서 그 냄새가 난다. 그건 말하자면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이러한 젠더 차이는 여행책에서도 드러난다. 여행은 보편이 아니라 특수를 지향한다. 개별적인 장소와 시간에서 개별적인 관계를 맺고 개별적인 경험을 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이를테면 인류애나 에티카, 혹은 여행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여행을 가지는 않는 것이다(물론 서경식씨 같은 경우나, 알랭 드 보통 같은 경우는 예외가 되겠다). 남자 저자들이 실용적이고 감성적인 여행책에서 죽을 쑤는 건 이런 것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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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호흡

생각 2010/01/28 00:24

글쓰기를 다루는 책을 보면 종종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보라는 조언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에도 문장의 리듬을 내심 느낀다는 이유다. 묵독을 할때조차 음성은 영향을 미친다. 고로 소리내어 읽기 좋은 문장은 눈으로 읽기에도 좋다. (그렇다고 구어체로 글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예전엔 이 말이 무슨 말일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새는 어떤 의미인지 알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 어떤 외국인이 한국어가 아름답다고, 시적이라고 얘기한 적 있었다. 많은 문장들이 "다."로 끝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각운이 들어간다는 이유다. 그때는 잘 모르는 소리라고 가볍게 그냥 지나쳤는데, 이제는 한국어가 가장 예쁜 음성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요즘 나를 놀라게 한 건 이런 얘기가 문장에만 해당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문장 말고 문단에도, 물론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소설론을 다룬 어떤 책에서는 문단 나눔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한 소설의 일부를 인용한다. 전쟁, 무기, 싸움, 남자들의 전우애를 다루는 내용인지라 내용에는 호감이 없었지만, 한줄 한줄 읽어 문단을 끝마치는 부분에 다다랐는데 이상하게 호흡이 무척 가빠진 걸 느꼈다. 그리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면 그 가빠진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고, 계속 문장을 읽어 나가면서 호흡은 다시 가빠졌다. 놀라운 것은 그게 번역문이었단 점이다. 문단의 길이도 사람의 호흡시간에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번역문이었으니 길어질 수밖에). 짧지 않은 인용이었는데 단숨에, 단박에 읽어내려갔다. 신비경이었다.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건 비상한 상상력도, 아름다운 단어도, 독창적인 구상도 아니라, 아마 어느 정도는 이런 생물학적 측면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겠지만, 최근에 나오는 멋진 과학 이슈들에도 관심이 점점 생긴다. 특히 뇌과학이나 신경과학 같은 거. "진화"라는 접두어가 붙은 건 종교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싫지만. 내가 그런 것을 생산하고 싶은건 아니고, 인문학의 기반에서 해석하고 응용하고 인용하고 싶다. 그건 "생물학으로 대동단결"을 외치는 개념인 '통섭'과는 다른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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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든다"는 것이, 자기 뿐 아니라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경제적/심리적/물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나이에 일찌감치 "철"들어 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 과외를 하고 있는 남자 아이는(그리고 내 여동생의 경우) 내가 보기엔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아이다. 경제적 능력도 없고, 모든 일상이 부모와 학교에 의해 짜여져 있는 상황에 몹시 답답해 하면서도, 정작 '청소년'이자 '10대'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찾기보다는 남의 시선과 심리적 빚 때문에 끝없이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가 되었다.
 
아빠의 권위를 싫어하면서도 아빠의 체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기를 먹여 살려주지 않냐는 생각, 엄마의 간섭, 관심, 학업 성취에 대한 기대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보살핌과 애정을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 또래 집단 남자 친구들의 몰상식과 폭력적인 집단 문화를 경멸하면서도 그래도 자기는 반장이고 그들은 친구 아니냐는 생각, 수학과외 선생을 증오하면서도 그래도 그 사람은 선생 아니냐는 생각 등등. 그러면서도 그렇게 싫은 것들 속에서도 웃어야 한다는 생각, 관계를 유지할 감정노동은 결국 자기가 해야 한다는 생각.
 
어느 때였던가 이런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낸 뒤로, 이 아이는 틈나는대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디가서는 이런 뒷담화를 얘기할 곳이 전혀 없다는 듯. 이런 얘기를 나눌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이 없냐는 질문에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해하고 외로워 하던 모습을 본 뒤로는, 나는 더 이상 이런 얘기를 귀찮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아이 편에 서서 상대방 욕을 할수도 없는 노릇이기에(그 아이는 그들과의 관계을 셈에 넣고 있으니 내가 그들을 욕하게 되면 사실은 그 아이를 욕보이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얘기를 들어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기숙사가 있거나 자취를 해야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물리적 독립부터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줄 뿐이었다. 일단 물리적으로 독립하고 나면, 비록 힘들겠지만 심리적 독립의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고, 또 나이를 조금씩 더 채워나가다 보면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가 올 것이며, 그렇게 되면 네가 괴로워하는 것들은 차츰 옅어질 것이라고. 옅어지지 않더라도 너 스스로 옅어지게 만들어야지, 안그러면 노예가 될 뿐이라, 넌 지금 "착한아이 컴플렉스"다. 고작 이 정도 말 밖엔 해줄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립(我立)이란게 마치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사실 "착한 아이"들은 많은 경우 일찌감치 철들어 버린 아이들이다. "착한 아이"들은, 정말 착하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타인, 특히 부모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자신을 조율하는데 능숙해진 아이들을 뜻한다. 부모의 한숨, 짜증, 슬픔, 실망, 웃음, 기쁨에 민감해지고, 자기의 감정도 그에 동화되어 자기의 행동을 규율한다. 부모는 그런 아이를 보며 기뻐한다. 그런 아이들의 일상은 늘 피곤하고 외롭다. 그런 일상, 관계가 싫다는 생각에 죄의식마저 느낀다. 심리적 종속의 소용돌이... 그걸 벗어나지 못하면 언젠가 네가, 그리고 앞으로 네가 만나 가장 소중히 여길 사람이 질식해 죽을지도 모른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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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아이, 일기,

얼마 전부터 막 읽기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은 '현상학적 사랑관'을 보여준다. 사교 모임 같은 자리에서 자기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사교계의 불량품"들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한편 의외성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접근해야 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이 아니라, '그 같은 사람이 (내가) 이럴 때 이곳에 나타나다니 참 멋있어' 같은 인식인 셈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은 '그'와 '멋있음' 사이에 수없이 깔린 우주적인 연결고리를 사랑한다. 이는 두 단어 사이의 공간을 넓히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엔 오로지 우연 뿐이다. 현상학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도 인식으로 남아야 한다.
 
이러한 사랑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얼까? 일단 '낭만적 사랑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울 메이트'에 대한 열망, 하루키 단편 소설의 표현에 따르자면 "100%의 여자 아이"라든가 하는 식의 완벽함에 대한 희구가 늘 존재한다. 또한 지금 내가 마주하는 모든 비루한 것들 너머에 진정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랑 그 자체도 유예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나타났다고 믿게 되는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기꺼이 투기(投己)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도 존재한다. 최상의 경우에 다다랐을 때, 낭만적 사랑관은 현상학적 사랑관과 반대로 '그 참 멋있어'라는 문장과 만난다. 이는 '그'와 '멋있음' 사이의 우주를 축소하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우연의 공간에 필연의 질서가 비집고 들어온다. 낭만적 사랑관의 인식은 최상의 경우에 곧 존재가 된다.
 
나는 이 두 극단 어디에 서 있을까? 아마도 고원원과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과 유사한 유형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보다 정직한 일일 것이다)


어떤 작가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단점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누군가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의 단점을 마음에 두고 동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한때 매력을 느꼈던 사람에게서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매혹이 곤혹이 되고, 진담이 부담이 되고, 열정이 치정이 되고, 환상이 환멸이 되고, 사랑이 사죄가 되고, 진실이 진부가 되는 순간이다.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오로지 인격수련이다. 이 인격수련은 어쩌면 윤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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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사실 뭔지를 몰랐거든요. 정말 원했던 것이 있다면 오로지 관계, 다시 말해 매력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싶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옮길 수는 없었지요)
 
내가 거기서 잘 할 수 있을지, 거기에 잘 어울릴 수 있을지, 내가 거기에 어울리는지 하는 문제는 응당 나의 응답책임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었습니다. 일단 부딪혀 보면 되는 문제라 생각했죠. 가보면 알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회의가 듭니다. 내가 가진 '조건'들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주관의 의지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다만 주변의 상황에 따라 얼마간 유동적일수는 있는, 그런 조건들 말입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최대의 억압입니다. 평생을 싸워나가고 싶은, 그래서 공부(혹은 글쓰는 이)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그런 억압입니다. 그래요, 나는 평소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간에 본질적으로는 낭만주의자 입니다.
 
경계는 어떤 경우 최상의 자유와 보호막이 되지만, 어떤 경우엔 최악의 억압입니다. 나는 그 어떤 경계와 싸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계는 평생의 숙제이자 적입니다. 또 그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그래서 억압인 것입니다). 어떻게 싸워야할지도 몰라 발만 동동구르는 처지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억압이 거기서도, 여러분 사이에서도, 나를 억압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불행한 것은 그 억압이란 것이,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강요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저는 그들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결국 그 경계를 만든 것도, 싸우겠다고 드는 것도, 사실 저 자신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경계선을 느꼈던 것도 저 자신입니다. 그 세계는 얼마간은 사회적 진실이 만들어 냈지만, 실은 주관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왜 나는 그 경계를 유연하게 넘지 못할까요. 어떤 숲에 사는 주민들은 작물과 인명에 해를 끼치는 야생 늑대를 잡을 때,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가 풍부한 지역을 중심으로 줄을 친다고 합니다. 야생 늑대들은 그 줄을 인지한 뒤로는 그 너머로 가지 못한다죠. 그 따위 줄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지나가면 그만인데도, 그 너머에 먹을 게 있는데도, 늑대들은 결국에 굶어 죽고야 만답니다. 참으로 슬픈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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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우울, 일기
"우리가 속한 위치와 역사는 모두 다르지만, 나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갖고서 희박한 '우리'를 만들어 왔다. 만약 우리가 상실했다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하게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 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에서
 
 
뉴스공급사들은 전 세계 어딘가에서 발생한 뉴스를 신속하고 재빠르게 타전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언론사들은 그것을 받아 보통 '국제 이슈'의 한 단면으로 다룬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서 본다. 보고 또 봐도 끝이 안나는 뉴스들.
 
어제 버스 안에서 멍하게 바라봤던 TV에는 ㅌㄱ 축구팀이 총격을 받아 10여명이 사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앵커가 있었다. 물론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ㅌㄱ 축구팀은 어떤 나라에 갔다가, 어떤 사람들에게 우연히 총격을 받은 것이다. 소위 "아프리카"에 있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지난 수십년간 "아프리카" 지역은 늘 총성과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다.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끝나서는 안될 노릇이다. 왜 폭력, 질병, 죽음, 빈곤이 "아프리카"에 만연한지ㅡ사실 이 말도 틀렸다. 국가도 수없이 많으며 경제 상황도 다르다. 계급별 젠더별 조건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로 '그들을' 이해한다ㅡ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으레 그러려니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 위에서 ㅌㄱ 축구팀이 당해야 했는지, 또 축구팀이 상징하는 바, 혹은 더 나아가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 어떻게 이 폭력 사태에 연관되었는지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안다고 해도 그 앎이 진실된 것인지 보장할수도 없거니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당히 여유 있는 중간 계급의 도덕주의적 감상주의 아니냐는 내면의 힐난에 침묵해 버린다. 결국엔 냉소주의와 만난다. 어딜가도 냉소 뿐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냉소주의 앞에서 좌절할 때 가장 좋은 치유책은, 버틀러의 윤리학 관련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고, 밑줄치고, paraphrase도 하고, 옮겨 적는다. 복잡한 문장과 꼬인 번역문을 읽는데도 짜증이 일기 보다는 겨울철 때이른 어둠이 어느샌가 세상을 온통 적셔 오듯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드는 걸 느낀다.
 
버틀러는 가장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저 위에 적어놓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 사고 방식을 깨트린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사유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버틀러의 방식은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도 윤리를 포기해 가는 마당에, 한국에 이렇게 감동을 주는 윤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정말이지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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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나의 기억력은 정말이지 형편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이름이나 소설, 드라마, 영화 따위의 제목과 대사 따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구나 숫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기억하지 못한다. 생일이라든지 날짜라든지 돈의 액수라든지 전화번호라든지 하는 것들. 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 단기 기억은 그럭저럭해서 시험은 그냥저냥 봐도 정작 시험지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모두 까먹는... 뭐 그런 종류의 휘발성 메모리.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논문을 쓰며, 가끔씩은 소설을 쓰는 생활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걱정되는 건 이런 형편없는 기억력이다. 너무 까먹는게 싫어서 1년 넘도록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이나 아이디어가 나타나면 옮겨 적는게 버릇이 되었다지만, 그게 언젠가 발목을 잡아도 크게 잡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를테면 오늘 어느 시인이 쓴 블로그의 글도 그렇다. 2년 전 이맘 때 출간한 한 산문집의 어느 파트가 알고보니 어떤 칼럼니스트의 글을 '편집'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느 독자가 꼼꼼히 짚어가며 의혹을 제기했고, 그 시인은 그 본의아닌 표절을 인정하고 다음 판에는 그 파트를 제외하기로 했다. 예전에 자료조사 하면서 이게 대체 자기가 쓴 메모인지 남의 글을 옮겨 쓰는지 구분하지 않았던 탓이라 했다.
 
나도 이러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내가 좋아서 몇 번이고 암송했던 문장ㅡ그러나 물론 지금은 까먹어버린ㅡ이 어느날 갑자기 내 손에 출현해서 글로 옮겨져도 나는 그게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나도 메모와 옮겨쓰기를 구분하지 않는 탓이다. 나중에 글을 쓰다 예전에 읽었던 남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 오면서 그게 내가 해낸 생각이라고, 정말이지 훌륭하다고 자화자찬하며 무릎을 칠수도 있는 노릇이고.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문학에서도 그렇겠지만 논문을 쓰면서는 정말 최악의 일이 된다. 자칫하면 그쪽에서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표절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내 기억력이 나쁜 탓에 그걸 옹호하기 위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네 일상에서 오가는 모든 일상적인 언어는 사실 모두 표절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다. 연예인 가십, 상사나 친구의 험담, 친구와의 환담, 혹은 속담과 민담, 심지어 진지한 사랑의 고백까지도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어딘가에서 읽고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 아니던가.
 
물론 남의 것을 그대로 베껴써서 자기 것처럼 위장하고 그걸로 자기의 업적을 세운다면 그건 반칙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칙이고 경고와 주의를 주면서 다같이 고민하고 경계해야할 문제지, 오늘날의 한국은 병적인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정작용과 자기반성, 도덕적인 문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사법권 혹은 법의 이름으로 치환해서 다루는 '아메리칸'적 방식.
 
진중권의 최근작 <교수대 위의 까치>는 그의 유명세(그래서 사실 소설이든 뭐든 그걸로 돈 깨나 벌고 싶으면 일단 유명해진 다음에 출판하는게 더 쉬운 일이다), 그리고 특유의 입담과 깔끔한 문장, 또 그림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잘 나가는 편인 책이다. 그러나 그가 한겨레21에서 밝혔듯, 그 책은 사실 인터넷의 정보를 짜깁기(편집)한 것이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저자의 관점과 직관인 셈이고, 수없이 인터넷에 널린(한 표현을 빌자면 "자기 산출적 우주"로서의 인터넷) 자료들을 취합해 모종의 논리와 일관성에 따라 편집한 결과물이 바로 그 책인 셈이다. 그건 결국 뭐라 해도 표절이 아니다. 없던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로서의 저자, 결과물에 대한 무한한 권위자로서의 저자라는, 전통적인 이미지의 저자는 그에게서 한 번 더 무너지는 셈이다. 사실 이런 저자관은 진부한 것이다. 왜냐면 논문 쓰는 사람들은 사실 본질적으로 이런 저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용을 세련되게 잘 각색해서 원작이 안 보이게 만들면 훌륭한 문학가로 인정받게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서 난 언젠가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잘 빠진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다. 인용했다는 걸 떳떳히 밝히고.
 
그 시인이 지나치게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게 논문도 아니고, 그걸 통해 뭐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어디서 참고했다고 작게 명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지. 혹은 머릿말이나 저자의 말에 그냥 여러 사람의 글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지. 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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