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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15 도가니
  2. 2009/08/01 바더 마인호프

도가니

문학 2009/08/15 00:16

공지영 씨에 대한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불만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공개적으로(언론지면에서, 그것도 좀 의식있다는 <한겨레>에서 말이다) 공지영 씨의 소설을 씹으면서 "소녀적 감수성", "조숙한 여자아이 수준의 인식", "고집스런 어린아이의 투정", "미성숙한 자아", "신파", "감상의 과잉 분출", "자의식의 과잉" 운운하며 그녀를 폄하하던 그 비평가들의 수준은 도대체 뭐라 평해야 좋을지. 잘 나가는 작가에 대한, 그리고 '작가'라는 집단에 대해 괜한 열등감을 느끼기 쉬운 비평가들의 일상적인 질투라고 생각하기엔, 사실 너무 마초적이고 저열하기 짝이 없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뭐라 반박하자면 내가 한없이 더러워지고 꼴 사나워지는 것 같고, 내 수준도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밖에 없는 소설을 오늘 단숨에 읽었다. 신작 <도가니>. 공지영 씨의 소설이 너무 잘 읽히는게 장점이자 불만이라던 남성 작가ㅡ예전에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얼마 전에 뻘소리로 9회말 투아웃 만루 상황에서 아웃성 파울을 때려 버려서 이제는 절대 좋아할 수 없게 된ㅡ의 평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달까(물론 그 작가는 저 위에 비평가들처럼 공지영 씨를 싫어하는게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도가니>를 쓰기 위해 취재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한 포털에 연재를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글을 뱉었어야 했을 공지영 씨가 (주제 넘게도)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스스로 작가의 글에 밝히고 있듯, "나답지 않게 자주 아팠고, 초교, 재교를 보고 나서 한번씩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열에 들떠 며칠씩 누워 있어야 했"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기 때문이다(이해란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 말일 수밖에 없는지!). 소설의 내용에도 그렇다. 아니다, 와닿았다기보다는, 나도 그리된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아니, 아니,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할 언어가 없다. 이 순간, 언어가 터무니 없이 빈한해진다. 기억의 질서와 담론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 근본적으로 빛의 세계를 지향하는 언어가 밤을 만나면서 완전히 말소되는 순간, 전시(展示)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을 만나는 찰나, 더 나아가 압도적인 말과 권력의 폭력이 갑자기 체감될 때의 그 먹먹한 느낌.

'그런 것'에 대해 예민하게 감응할 수 있는 생생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말로 옮기려 드는 사람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언어가 무의식을 만들고 실재(계)를 만든다면, 필경 언어는 폭력이고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말하려면 다른 외피를 써야만 한다. 정희진 씨의 석사 논문(<성폭력을 다시 쓴다>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출간된)처럼 사회과학 논문['객관'을 위장한 건조한 기술(description)]의 형식을 갖든, 아니면 <도가니>처럼 몇 가지 충격 완화장치를 도입하든지. 하지만 어쨌든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아픈 것은 어디 가는게 아니다.

줄이면서 <도가니>에서 아쉬운 점을 굳이 찾자면, 사실 이 작품에 도입된 충격 완화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정희진 씨의 책이 정말 읽기 힘든 것에 반해(필력 있는 정희진 씨의 글인데도!) 상대적으로 easygoing하기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건 내게는 어쩜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안전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해야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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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

바더 마인호프

영화 2009/08/01 00:14

이런 정도의 역량을 갖춘 독일이 참 부럽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를 이렇게 꽁꼼땅꼼하게 기록해 낼 수 있다니. 적군파의 해체가 고작 10여년 전인 1998년에 공식 선언됐다는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다. 68의 독일판 유산이라면 유산이랄 수 있는 적군파가 98년까지 이어졌다는 일도 그렇지만, 그게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부러운 일이다. 예전에 다카우 수용소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 느낌을 받았더랬다. 악명 높은 수용소가 이렇게 잘 가꾸어지고 보존된 시설로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으니까. 물론 내부 사정이야 내가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고, 나의 철없는 부러움에 이의를 제기할 독일 사람들이 많겠지만. 

어쨌거나 한국 영화계에서 이 정도의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먹먹해진다. 불과 몇 년전의 대추리,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용산 참사, 지금도 진행 중인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는 차치하더라도,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이나 80년 광주에 대해서 <바더 마인호프> 정도의 세련미와 신중함을 가진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못할 것이다. <바더 마인호프>는 "독일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영화라고 한다. 일종의 '블록버스터'다. 자본이 투입되어도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사회가 역사를 기억하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은 아직 갈길이 먼 것 같다.

영화에 나오는 미디어들은 적군파를 내내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테러리스트'라는 언설은 정치 권력이나 발화할 수 있는 채널을 갖지 못한 이들이 투쟁을 결의하고 선포했을 때 앞으로 얼마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말이다.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들으면 중국의 제국들이 생각난다. 중국의 한족 제국들은 소위 '오랑캐' 국가와 전쟁을 일으킬 때 토(討), 벌(罰), 벌(伐), 정(征), 습(襲), 침(侵), 취(取) 등의 어휘를 동원했다. 그리고 제국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인정되는 상대에게만 전(戰)이라는 말을 썼다. 싸우긴 싸우되 벌(罰)하는 것이며, 너를 혼내고 취(取)한다는 식의 논리다. 중화 의식이란게 유구하게 있어왔으니(지아장커에게까지 이어지는!) 그리 특이하다싶은 말은 아닐지 모르겠다만, 실제 중국의 제국들은 저런 말을 사용할만한 힘을 갖고 있을 때가 많았기에 저 말들은 단지 말일 뿐 아니라 늘 '실현'되었다. 한국도 그리 다르지 않다. 성공하거나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 '저항운동'에는 마지 못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기념하지만, 그 외에는 '난(亂)'이라는 말을 동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테러리즘'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국가 권력은!

마오쩌둥, 호치민 등에 대해서 자랑스레 말할 수 있었던,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뜨거웠던' 시절을 그려낼 때엔 감독의 '위치' 선정은 특히 중요한 일이다. 보수 세력의 프로파간다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혹은 당사자들의 역겨운 회고담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바더 마인호프>는 영웅담과 '테러리즘' 사이에 영리하게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적군파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동기와 추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다루는 감독의 시선에서 그런게 느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나 봤던 유명한 장면들(네이팜 탄에 폭격 당한 베트남의 마을과 그 마을에서 뛰어 나오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길거리에서 권총으로 즉결 처형당하는 '베트콩'의 모습, 체 게바라의 모습 등)이 영상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 영화를 더욱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독이 어느 편인지는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든다.

열정과 확신이 가득 들어찬 정치적 언어를 자신의 것처럼 말하는 에슬린, 에슬린의 애인으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혐오 발화를 거침없이 내뱉는 행동파 바더, 차갑고 분석적인 말로 토론과 글 쓰는데 재능이 뛰어난 좌파 저널리스트 출신의 마인호프. 이들이 적군파를 결성하고 모든 "억압적인 세력", "경찰국가"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는 모습에 심장이 쿵쿵 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구속된 이후에 그들을 석방하기 위해 다른 조직원들이 수행하는 행동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부르는 걸 보고 있자면 양눈썹 사이에 주름[川]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하긴, 감옥의 바더는 그들이 한 행동은 자신들이 명령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1~2년 전에 봤다면 나는 아마도 에슬린에게 몰입했겠지만, 지금에서는 마인호프에게 좀 더 마음이 간다. 적군파를 결성하고 활동하면서도 자신의 두 딸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마인호프. 아이들이 고아원에 맡겨지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마인호프. 체포당할 때 "당신이 왜 여기에?"라는 질문을 던지는 경찰관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마인호프. 결국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나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런 저런 '혁명'의 대의에는 여전히 공감하지만, 그 대의가 실제로 내 눈앞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내심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바더 같은 사람과 나는 무슨 일이 되었든 절대 같이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게 가장 큰 문제는 젠더 문제라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청소년들이 꼭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의 해묵은 계몽주의자들도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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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