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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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7/04/04 20:16

요즘 들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상상하지 않았던 영역의 것이었겠지만ㅡ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ㅡ기왕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 ‘글쓰기’인 이상 상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삶을 택한 뒤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혹은 빛이 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일단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아니, 그보다 우선, 나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의 글이 어떤 사람에게든 읽힐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블로그도 열었고,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조금씩이나마 글들을 남기고 있고, 글 쓰는 집단에 계속해서 남아 있지 않던가.

내가 공부를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그래서 석사도 박사도 계속 하기를 원했던 것도, 게다가 대학원 진로를 지금 전공과는 다른 전공ㅡ사회학ㅡ을 하고자 한 것도, 어쩌면 진짜 누구말대로 순수한 ‘학문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단지 ‘좋은 글’을 생산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년(?)이 흐른 뒤에 내가 강사가 되거나 연구원이 되거나, 혹은 일이 ‘잘’ 풀려서 교수가 되거나ㅡ아마도 이런 직종의 일이 나의 모든 일상적인 소비를 책임질 것들이 되겠지만ㅡ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아마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적어도 ‘지식인’ 혹은 ‘엘리트’라고 칭해질 법 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에 대한 응분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위 ‘사회참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학문적 탐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역시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갖게 될 어떤 ‘상징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들이 갖게 될 나름의 어떤 열매를 나누기 위한 거의 최소한의 노력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탕이 된 연후에야 각자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최근에 관찰할 수 있는 어떤 ‘니힐리즘’의 경향이다. 이 강대한 니힐리즘은 모든 것들에 ‘상대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이해관계를 ‘개인화’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탁월한 것들과 성취하는 것들에 대해서 ‘엘리트주의’라고 혐오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가치도 모두 동등하다, 어느 것 하나 나쁜 것 없이 모두 동전의 양면이 있다고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있는 그 니힐리즘 속에서, 어떤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거나, 특정한 입장을 명백히 취한 글들이 환영받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이 쓰인 책이나 블로그 따위를 독자들이 볼 이유가 없어진다. 다만 그것은 ‘잘난 체 하는 어떤 못난 지식인의 푸념’따위로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거리를 두고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만큼 어떤 자원을 갖고 특수한 환경에 자신을 포지셔닝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고민도 ‘자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통찰력과 반성이란 것도 결국, 자신의 삶에서 한 발자국 나와서 관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특수한 행위의 발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의 보수적인 학계에 몸을 담아야 한다는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그 ‘자원’이 반드시 공부를 오래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여유’를 비교적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그것을 ‘글’의 차원에서 소통하고 나눌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에의 거리두기는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특권’일 수도 있지만, 결코 ‘특권’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니힐리즘도 사실상 직접적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던 특권화 된 ‘지식인’들이 어줍잖게 침묵하지 못하고 주절주절 나서서 떠들어 대왔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무슨 ‘학술지’나 ‘KCI’ 등지에 끊임없이 논문을 올려대고, 좀 더 유명해지면 무슨 ‘학회’의 장을 맡고 교수가 되고, 더 유명해지면 무슨 시민단체의 대표를 맡고 하는 그런 전형적인 ‘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무리 ‘젊은’ 시절에 뛰어난 사람들도, 그렇게 무언가를 하나둘 맡기 시작하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조한혜정씨(신문의 악의적 보도라고 믿고 싶지만)도 그렇고, 홍세화씨도 그렇고, 손석춘씨도 그렇고 아무튼 나름대로 존경해왔던 모든 지식인들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결국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것도, 한편으로 고등 교육을 계속 받아 ‘지식인’층으로 취급될 나에게 계속해서 self-reflect를 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글이 나르시시즘적 무한 자기도취를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 그 자체를 직관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요즘의 대중 문화적 니힐리즘의 경향에 대항해서, 특정한 삶의 양식과 담론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기 위한 방법도 결국 ‘글’이라는 수단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은, ‘글’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해야만 한다. 읽기와 쓰기는 결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영감이나 에피퍼니를 받아서 순식간에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글’로써 표현하는 어떤 천재가 아닌 이상,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읽는 행위는 나에게 어떤 지적 쾌락 뿐 아니라 영감을 주고, 쓰기는 그것을 확인하고 더 강화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쓴 글을 또 읽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순환의 과정이며, 또한 그 순환을 통해서 더욱 좋은 글을 생산할 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글의 가장 좋은 독자는 결국 내가 되고, 내가 읽을 글이 가장 좋은 필자도 또한 결국 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글을 계속 접하고, 나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것 역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것들을 통해서, 이 순환의 메커니즘은 어쩌면 계속해서 활기차게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덧) 오랜만에 희망적인 글을 써본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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