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젝의 글을 읽으니 또 머리가 아파 온다(좋은 의미에서). <반 인권론>으로 번역된,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34호에 수록된 "Against Human Rights"라는 제목의 길지 않은 글이다. 예전에 읽었던 랑시에르의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와 한나 아렌트의 저서(<폭력의 세기On Violence>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는 듯 하다(물론 그의 목소리로 완전히 녹여내고 있지만). 지젝은 이 글에서 자신의 사유를 멋지게 이끌어 가다가, 마지막에는 글의 제목과는 상반되게도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 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 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마는 것이다"라면서 결국 '보편적 인권'에 대한 옹호로 끝을 맺고 있다. 그 사유의 과정이 참 재미있고 신선한 것들이 많은데, 오늘은 그 중에 한 장을 타이핑(-_-;)해서 옮겨 둔다. 어쩜 비슷하거나 같은 생각을 해도(사실 "내가 한 선택은 '진짜' 선택이 아니야!" 하는 주장은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다만) 이렇게 다른 표현/설명들이 가능한지-_-
선택의 비자유
이제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해보자. 다른 글에서 나는 아미시 공동체(* 미국에 이주해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의 청소년들 앞에 주어지는 사이비 선택을 거론한 바 있는데, 이들은 지극히 엄격하게 양육되다가 열일곱살이 되면 현대 자본주의문화의 모든 과잉들ㅡ질주하는 차, 분방한 성, 마약, 술 등의 소용돌이ㅡ를 겪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한두 해 지난 후 아미시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닌지 선택할 수 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젊은이들은 이런 자유방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대개의 경우 참을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절대다수가 자기 공동체의 격리된 생활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선택의 자유'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난점들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니, 아미시 아동들에게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선택으로 바뀐다.
사이비 선택의 문제를 보면,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자유주의적 태도의 한계도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이 개인적 선택의 결과 베일을 걸치는 순간 베일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니, 베일은 더이상 무슬림 공동체 소속이라는 표지가 아니라 특이한 개성의 표현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택이란 언제나 메타선택, 즉 선택이라는 양식 자체를 택하는 선택이며, 베일을 쓰지 않기로 선택하는 여성만이 실제로 선택을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세속사회에서 종교적 소속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예속적 위치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신앙은 개인적 선택으로 '관용'되지만, 그들이 자신들에게 신앙이 갖는 의미ㅡ실질적인 소속의 문제ㅡ를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순간 '근본주의'라는 비난이 가해진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 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사회 내부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갖는 물적 힘은 클린턴정부가 추진한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건강관리 개혁프로그램의 운명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악명 높은 군수산업 로비 세력의 두배 규모인) 의료계 로비세력은 국민개보험이 되면 의료 영역에서 선택의 자유가 어떻게든 위협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확신 앞에서는 아무리 '엄연한 사실'을 열거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다름아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추로, 곧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 주체'라는 개념에 입각한 '선택의 자유'인 것이다. 오늘날 '위험사회'의 시대에는 특히 그러해서, 지배이데올로기는 복지국가의 와해로 초래된 불안을 오히려 새로운 자유의 기회로 팔아먹으려고 애쓴다. 노동의 유연성이 해마다 직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평생직장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요, 스스로를 갱신하고 자기 개성의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라고 보면 되지 않는가? 표준 의료보험 및 은퇴 연금제도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추가보험을 들어야 한다면, 또 하나의 늘어난 선택의 기회로, 즉 지금 더 나은 생활을 할지 아니면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할지 택할 기회로 여기면 되지 않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곤경에 불안을 느낀다면 '2차 근대(second modernity)'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갈망하며, 안정된 낡은 형식에 매달리는 미성숙한 성향을 보인다고 진단할 것이다. 나아가 이런 곤경이 주체란 타고난 자연적인 능력들을 지닌 '심리학적'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될 때, 자동적으로 당신은 이 모든 변화가 당신 인물됨의 소산이지 시장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린 결과는 아니라고 해석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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