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 2010/07/11 12:32
근대 서구의 '미적 태도'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의 과학과 미학에 그 연원을 둔다. 근대 과학의 이식론은 그때까지 사물에 부여되었던 의미들을 벗겨내고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18세기 후반의 낭만주의에서는 계몽주의의 전도가 일어난다. 대상에 미적 태도를 견지하고, 미적으로 평가하는 자세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루는 인식적 관심, 다른 하나는 선인가 악인가를 다루는 도덕적 관심, 마지막으로 쾌인가 불쾌인가 하는 취미 판단. 칸트는 세 가지 판단이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역이 분명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세 범주의 혼용 속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괄호 넣기"라는 개념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에서부터 연유한 것으로, '무관심'을 그 기본으로 한다. 즉 사물의 어떤 측면엔 관심을 잠시 꺼두고, 특정한 인식론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주관의 능동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미는 감각적 쾌적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무관심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방기하는 데서 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것은 칸트의 숭고론인데, 숭고라는 미적 판단은 감성적 유한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무한함에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숭고는 이성적 무한성을 자기와 대립하는 대상에서 찾는 '자기소외'이다. 여기서 얼핏 보기엔 불쾌한 대상에 대응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주관적 능동성이 적극적으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적 태도는 역사 속에서 구구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를 심미주의적인 태도라고 한다면, 인류학·민속학이라고 하는 쌍 개념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식민주의·제국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새디스틱한 지배로 간주되는 식민주의·제국주의는 미적 태도에서 자신의 최고조에 달한다. 타자를 오로지 미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심미주의자는 일견 반식민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주의의 실현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그 기원을 은폐하며,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괄호에 넣은 것들을 타자 그 자체나 타자에 대한 동경과 혼동한다. 파시즘 같은 경우도 일견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을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괄호를 벗기고 다시 괄호를 씌우는 비평적 과정이다. 페미니즘, 게이 이론은 통상의 남성 독자들이 괄호 속에 언제나 넣어두었던 것들, 그리고 괄호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괄호를 벗길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괄호를 벗긴다는 것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을 잠시 괄호에 넣고 다시금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럴 때에도 비판은 소거되지 않는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루는 인식적 관심, 다른 하나는 선인가 악인가를 다루는 도덕적 관심, 마지막으로 쾌인가 불쾌인가 하는 취미 판단. 칸트는 세 가지 판단이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역이 분명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세 범주의 혼용 속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괄호 넣기"라는 개념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에서부터 연유한 것으로, '무관심'을 그 기본으로 한다. 즉 사물의 어떤 측면엔 관심을 잠시 꺼두고, 특정한 인식론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주관의 능동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미는 감각적 쾌적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무관심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방기하는 데서 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것은 칸트의 숭고론인데, 숭고라는 미적 판단은 감성적 유한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무한함에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숭고는 이성적 무한성을 자기와 대립하는 대상에서 찾는 '자기소외'이다. 여기서 얼핏 보기엔 불쾌한 대상에 대응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주관적 능동성이 적극적으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적 태도는 역사 속에서 구구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를 심미주의적인 태도라고 한다면, 인류학·민속학이라고 하는 쌍 개념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식민주의·제국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새디스틱한 지배로 간주되는 식민주의·제국주의는 미적 태도에서 자신의 최고조에 달한다. 타자를 오로지 미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심미주의자는 일견 반식민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주의의 실현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그 기원을 은폐하며,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괄호에 넣은 것들을 타자 그 자체나 타자에 대한 동경과 혼동한다. 파시즘 같은 경우도 일견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을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괄호를 벗기고 다시 괄호를 씌우는 비평적 과정이다. 페미니즘, 게이 이론은 통상의 남성 독자들이 괄호 속에 언제나 넣어두었던 것들, 그리고 괄호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괄호를 벗길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괄호를 벗긴다는 것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을 잠시 괄호에 넣고 다시금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럴 때에도 비판은 소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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