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2010/06/26 23:31
잊혀진 역사를 현재에 소환하는 영화적 시도는 언제나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영화의 작품성이나 완결성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 항쟁을 모티프로 한 <꽃비>는 충분히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꽃비>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현장을, 제주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교실과 학생들의 관계로 축소해 놓는다. 영화가 시작하고 곧 쫓기듯 섬을 떠나는 형석은 <일본>을, 형석이 떠난 자리에서 급장이 되기 위해 싸우는 도진과 민구는 각각 <남한>과 <북한>을,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문득 찾아와 '투표'를 제안하며 포르노와 초콜릿으로 아이들을 포섭하는 동일은 <미국>을 상징한다. 그리고 도진과 민구가 마음을 빼앗기 위해 노력하는 서연은 훨씬 더 복잡한데, 아마도 한반도(혹은 민족, 혹은 역사)를 상징할 것이다. 각각의 국가(정체)를 상징하는 인물들은 (감독이 해석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눈에 도식적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영화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체스 경기를 녹화해서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이 진부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의 디테일과 영화적인 암시와 비유들을 직시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하고, 해석해야 할 것은 해석해야 하며, 아픈 것은 부정하지 말고 제대로 아파하고, 애도해야 할 것은 끝까지 애도해야 한다. 또한 <꽃비>는 제주 4.3 항쟁이라는 사건을 단지 현대사의 한 비극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만 4.3 항쟁의 아픈 기억을 훼손하지 않고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그러나 영화는 인물간의 관계와 서사의 진행을 모두 남성 정치의 맥락으로 치환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서사는 노골적으로 젠더화된다. 다소 어설픈 남성 학원물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3 항쟁을 직접 겪어 실어증에 걸린 서연의 어머니와 서연은 영화 내내 침묵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행위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단지 남성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받을 뿐이다. 특히 서연은 중요한 순간에 하얀 옷을 입고 '청순한'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서연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대신 노래를 흥얼거린다(사이렌의 경우처럼, 여성의 노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공포 아니면 매혹, 혹은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연은 늘 도진과 민구에게 다투지 않을 것을 주문하지만, 민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도진과 동일은 서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례로 성폭행한다.
이렇게 정치적 폭력을 <성애화eroticize>해서 성폭력의 문제로 치환하는 건, 언제나 남성 정치의 몫이었다. 예컨대 탈식민시대에 제국주의에게 강탈당한 민족-국가의 영토는 '어머니 영토'로 재현되고, 소위 민족-국민의 수난은 제국주의 남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한 남성적 복수의 판본은 (상대방 남성에 대한 직접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 대한 성애화된 폭력이다. ('fucking USA' 같은 노래를 생각해보자.) <꽃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성화된 범주에 대한 남성 주체의 맹목적인 사랑은 곧 성폭력으로 연결된다. 사랑-증오-(성)폭력은 같은 스펙트럼 위에 있다.
이런 식의 비유는 남성만이 진정한 역사적/세계적 행위자라고 간주하며, 남성 범주에 대응하는 여성이라는 타자 범주를 '생산'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의미화한다(물론 이는 남성 정치의 맥락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또한 이는 남성 정치를 <성애화>하고 사적인 욕망으로 축소시키며, 이를 <낭만화>한다. 이는 실재하는 폭력을 은폐하며, 그 결과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역사와 정치를 그런 케케묵은 위험한 비유를 동원해서 기억할 것인가. 우리는 영화의 포스터에 쓰인 "너 때문에 싸우는 거야"라는 말의 무서운 폭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당신들이, 당신들의 욕망으로 싸우는 거다. "너 때문에" 싸운 거라면, '사랑'의 스펙트럼 위에서 발생한 성폭력의 원인도 "너" 때문인가? 당신들의 싸움에 타자를 동원하지 말고, 또한 폭력을 낭만화하지 말라. (그러나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처럼, 타자가 없다면 싸움이 있을수나 있을까. 입이나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민주주의자이자 문명인을 자처하는 시대에)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눈에 도식적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영화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체스 경기를 녹화해서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이 진부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의 디테일과 영화적인 암시와 비유들을 직시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하고, 해석해야 할 것은 해석해야 하며, 아픈 것은 부정하지 말고 제대로 아파하고, 애도해야 할 것은 끝까지 애도해야 한다. 또한 <꽃비>는 제주 4.3 항쟁이라는 사건을 단지 현대사의 한 비극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만 4.3 항쟁의 아픈 기억을 훼손하지 않고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그러나 영화는 인물간의 관계와 서사의 진행을 모두 남성 정치의 맥락으로 치환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서사는 노골적으로 젠더화된다. 다소 어설픈 남성 학원물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3 항쟁을 직접 겪어 실어증에 걸린 서연의 어머니와 서연은 영화 내내 침묵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행위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단지 남성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받을 뿐이다. 특히 서연은 중요한 순간에 하얀 옷을 입고 '청순한'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서연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대신 노래를 흥얼거린다(사이렌의 경우처럼, 여성의 노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공포 아니면 매혹, 혹은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연은 늘 도진과 민구에게 다투지 않을 것을 주문하지만, 민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도진과 동일은 서연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례로 성폭행한다.
이렇게 정치적 폭력을 <성애화eroticize>해서 성폭력의 문제로 치환하는 건, 언제나 남성 정치의 몫이었다. 예컨대 탈식민시대에 제국주의에게 강탈당한 민족-국가의 영토는 '어머니 영토'로 재현되고, 소위 민족-국민의 수난은 제국주의 남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한 남성적 복수의 판본은 (상대방 남성에 대한 직접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 대한 성애화된 폭력이다. ('fucking USA' 같은 노래를 생각해보자.) <꽃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성화된 범주에 대한 남성 주체의 맹목적인 사랑은 곧 성폭력으로 연결된다. 사랑-증오-(성)폭력은 같은 스펙트럼 위에 있다.
이런 식의 비유는 남성만이 진정한 역사적/세계적 행위자라고 간주하며, 남성 범주에 대응하는 여성이라는 타자 범주를 '생산'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의미화한다(물론 이는 남성 정치의 맥락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또한 이는 남성 정치를 <성애화>하고 사적인 욕망으로 축소시키며, 이를 <낭만화>한다. 이는 실재하는 폭력을 은폐하며, 그 결과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역사와 정치를 그런 케케묵은 위험한 비유를 동원해서 기억할 것인가. 우리는 영화의 포스터에 쓰인 "너 때문에 싸우는 거야"라는 말의 무서운 폭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당신들이, 당신들의 욕망으로 싸우는 거다. "너 때문에" 싸운 거라면, '사랑'의 스펙트럼 위에서 발생한 성폭력의 원인도 "너" 때문인가? 당신들의 싸움에 타자를 동원하지 말고, 또한 폭력을 낭만화하지 말라. (그러나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타자 없이는 사업이 없는 한심한 제국"처럼, 타자가 없다면 싸움이 있을수나 있을까. 입이나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민주주의자이자 문명인을 자처하는 시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