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 2010/06/17 13:52
사적인 젠더 관계에는 좀더 큰 사회에서 맺어진 양성 간의 유력한 합의라는 밑바탕이 있다. 전체적으로 여성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부부는 감정 교환의 기본적인 차원에서 이미 동등해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여성 변호사가 남편만큼 많은 돈을 벌고 존경을 받으며서 일하고 있고 남편도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여성 변호사는 여전히 남편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집안일에 동등하게 참여한다는 사실에 자신이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여성 변호사의 발언권은 남들이 보기에 눈에 띄게 센 것이고, 남편의 발언권은 눈에 띄게 약하다. 시장 상황 속에서 다른 배우자를 만난다면 남편은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좀더 큰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때, 이 여성 변호사는 남편을 잘 만난 것이다.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현실에 화가 나더라도 그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그 여성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Emotional Labor)>, 이매진, p. 116의 각주에서. 강조는 내가
이 각주를 읽고 나니 일전에 여성학 협동과정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접했던 여러모로 당혹스러웠던 발언들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가 될 것 같다. 당시 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기혼' 여성학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불편하고 어색했었다. 그 태도를 요약하자면, 당신은 어떻게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런 일반적인 질문을 '기혼' 여성학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겼다. 왜냐면 대체로 '기혼' 여성학자들은 그런 질문 앞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을 얼버무리거나,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잘 모를 때 멋모르고 결혼을 했다고 말하거나, 아이 때문에 코가 꿰였다고 말하거나. 결혼 생활은 어떤 모종의 규범에 어긋난 것이므로, 감추고 '변명'해야하는, 어떤 수치였다. 물론 결혼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의 대립, 결혼의 제도성과 폭력성, 배타성 등에 대해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규범이 있다는 것도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걸 개인의 삶에 갖다 대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좀 미워하기도 했다.
사실 그걸 '공격'으로 이해했던 건,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주관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이 진짜로 인신 공격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이 위에 인용한 부분과 관련이 있는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기혼' + 여성학자라는 조합이 그만큼 예외적이고 눈에 띄는 공식이라는 것이며, 이는 비단 여성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전문적이라고 간주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해당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 말이다. 우리 사회의 부박한 성별 구조를 다시금 드러내고 증명하는.. (분절되어 따로 놀던 경험과 지식이 통합되는구나 ㅎㅎ)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구성된 세계를 창조하는, 그러니까, 불평등한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로 입힌 옷을 벗어버리고, 평등한 개인과 개인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판타지일 것이다. 여전히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판타지. 물론 판타지라고 해서 나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게 아니다. 왜냐면 판타지는 낭만의 언어이자 비판과 가능성의 언어이며, 개인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형식이자, 하나의 유기체가 대중무리가 아닌 다른 개인 유기체를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도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성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어제는 어떤 대학원생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실천>에 대해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입학하는 대학원이다. 실제 시민사회운동을 하면서, 혹은 활동가 정체성을 강하게 지향하는 이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곳이다. 활동가에게도 학위가 요구되는 사회니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학위가 계급이 되는 사회니까. 어쨌든 그 블로그를 2시간이 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왠지 좀 초조해졌다.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보다는, 불평등이란게 무엇인지 그리고 불평등이 가능한 조건부터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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