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환 역
만일 실재의 열망이 실재의 극적인(spectacular) 효과인 그 순수한 가상(semblance) 안에서 끝나고 어떤 정확한 전도지점에서 끝난다면, “마지막 인간들”(* 뭐지?)이 지닌 “포스트모던한” 가상의 열망은 실재의 열망으로 향하는 어떤 난폭한 복귀 안에서 끝나고 극적인 실재에 해당하는 그 순수한 가상 안에서 끝난다. 여기서 “면도칼 자해자들”(이들은 면도칼이나 다른 도구로 스스로 자해하고픈 강력한 충동을 경험한다)의 출현이 우리들의 환경이 나날이 가상화(virtualization) 되고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생각해보자. 이 현상은 실재의 신체로 되돌아가는 어떤 절망적인 전략을 대변한다. 그런 한에서 그 자해는 몸에 문신을 새기는 관행과 대조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문신은 주체가 (잠재적인) 상징적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보증한다. 하지만 면도칼 자해는 정반대의 문제, 즉 현실에 대한 주장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면도칼 자해는 자살행위도 아니고 자기 소멸의 욕망을 나태내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현실에 (다시) 뿌리를 박으려는 어떤 과격한 시도이다. 또는 (똑같은 현상의 또 다른 측면이지만) 자기 자신이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때 느끼는 견디기 어려운 불안에 맞서서 우리의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굳건히 정초하려는 어떤 과격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면도칼 자해가 어떤 병리적인 현상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특정한 종류의 정상성을 되찾고 정신병에 이르는 완전한 심리적 파멸을 모면해 보려는 어떤 병리적인 시도이다.
오늘날 우리는 시장에서 해로운 속성이 제거된 온갖 상품들을 볼 수 있다. 가령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라든지, 지방을 뺀 크림이라든지, 알콜 없는 맥주 등등이 그것이다. 이런 목록은 또 계속 이어진다. 가령 가상 섹스는 어떤가? 이것은 섹스 없는 섹스에 해당한다. 아무런 사상자 없이(물론 아군 편만의 이야기지만)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콜린 파월(Colin Powell) 독트린, 이것은 교전(交戰) 없는 교전에 해당한다. 정치를 전문가에 의한 행정으로 보는 현대 정치학의 재정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재정의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에 해당한다. 이런 목록은 마침내 오늘날 자유와 관용을 내세우는 다(多)-문화주의에까지 이른다. 이 다-문화주의는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에 해당한다(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원문은 wife beating, 즉 아내 구타이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라니;;)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실체가 제거된 생산물을 낳는 이런 절차를 단순히 일반화하고 있을 뿐이다. 즉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실체가 제거된 현실이고 실재의 핵심적 저항이 죽어버린 현실이다.카페인 없는 커피는 진짜 커피가 아니면서 진짜 커피와 똑같은 맛과 향기를 내는 것처럼, 가상현실은 현실이 아니면서 현실 같이 경험된다. 그렇지만 이런 가상화의 과정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진짜(=실제의) 현실” 그 자체를 어떤 가상적 사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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