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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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0/05/12 10:14
(특히 지난 몇 년 간 발표된) 홍상수 영화에서 모든 대사와 행동은 일종의 '수(手, move)'로 읽힌다. <하하하>도 마찬가지다. 홍상수 감독은 게임의 창조자, 중재자, 관조자, 개입자이다. 영화의 등장 인물들은 제각기의 목적과 욕망을 가지고 게임에 참여한 '말'들이며, 그들은 자신의 '수'에 따라 게임 판 위를 쉴새없이 움직인다. 홍상수 감독은 게임의 이면이나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은 채, 오로지 주어진 게임과 상황 속에서 목적과 욕망에 따라 '순간'을 살아간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속물'이며, 그들의 대사와 행동은 놀라우리만치 '상투'적이다. 그의 영화에서 흔히 지식인이나 전문가로 간주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속물성은 그들이 참가한 게임의 장에서 쉽게 비루한 맨얼굴을 드러내고야 만다. 또한 그의 영화에는 커플들(현재 커플이거나 커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줄곧 내뱉는 "사랑한다"는 고백조차도 어딘가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정말 예쁘냐'고 묻는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 분)의 애인 연주(예지원 분)에게 중식은 계속 예쁘다, 정말 예쁘다고 얘기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어떤 긴장과 상투성을 읽어낼 수 있다. '너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할 때 조차도 마찬가지다. '진정성'을 탈수기에 넣고 탈탈 짜내버린 우리 시대는, '연애'에서 유일한 진정성의 근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므로 섹스와 연애 이야기가 모든 낭만성과 진정성을 흡수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홍상수 감독은 연애 관계에서조차 진정성을 기꺼이 제거해 버린다.

우리의 탈진정성의 시대에 대적하고 대립하는 유일하는 사유가 있다면, 아마도 '실존주의'일 것이다. 그래서 이 감독에게 실존주의는 대척점에 있는 사유가 아닐까,생각해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하하>에서는 실존주의가 직접 언급된다. 중식은 시인 후배 정호에게, 너는 너무 어리다며, 너의 우울과 사유는 가짜라며, 너는 실존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물론 중식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들은 이게 모두 중식의 허세라는 사실을 잘 안다). 진정성, 낭만성은 어린 것, 가짜인 것,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그러나 <하하하>는 11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다. 물론 이전 영화들도 그랬다. 인물 관계 서사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일관되게 재미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홍상수 감독이 이 상투성을 잘 알고 있으며 재미있게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상투성과 탈진정성은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이기에 오히려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모든 창작자들이 상투성으로부터 예술의 영역을 지킬 방법을 고민하는 견결한 국경수비대라면, 홍상수 감독은 이들과는 달리 국경을 슬며시 열어둘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번 영화 <하하하>에서는 인물과 관계의 상투성이 밝은 유머로 승화된다. 홍상수 감독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그의 영화에 독창적인 방식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전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들은 한결같이 불편한 '수컷'사람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그런 불편함마저 제거해버리고 그들의 일상적이고 근본적인 찌질함을 과장해서 보여준다. 또한 인물들의 상투성도 이전 영화에 비해 훨씬 더 과장된다. 말과 행동과 '수'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웃을 수 있다. 즐겁다.

이제 홍상수 감독은 어쩌면 구름 위에 올라탄 '배추도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감독의 외모도 그렇게 변하지 않았나? ㅎㅎ). 탈진정성 시대에 게임 판 위에서 제 눈 앞 한길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배추도사는 이들이 정말 귀엽지 아니하냐며 '하하하' 웃어 제낀다. 탈진정성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어쩌면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귀여움일 것이다. 이번 씨네21은 홍상수 감독 특집이었다. 진지하게 쓴 긴 글이 많이 실렸다. 나는 이번 씨네21을 보며 정말 많이 웃었는데,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온 나도 배추도사님과 같이 구름 위에서 귀엽기 짝이 없는 필진들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홍상수 감독에게는 어쩌면 게임판 위의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악의는 없다.

물론 배추도사가 옳은(좋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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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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