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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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10/03/30 22:43

소년을 남자로 만드는 마법의 레시피를 알려드리죠. 일단 재료를 준비하세요. 재료는 간단해요. 소년, 소녀, 로맨스, 그리고 일(꿈)입니다. 재료가 준비되면 시작은 쉬워요. 여름방학을 맞이한 소년은, 언제나 신비로운 모험(로맨스)과 소녀를 바라기 마련이거든요. 소년은 소녀를 만나면 즉각 화학작용을 시작해요. 우리가 손써볼 틈도 없어요. 

일단 화학작용이 시작했으면 500일 동안 가만히 소년을 지켜보세요. 모두 알다시피 여름방학의 시작은 달콤한 기대로 충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쓴 맛을 느끼게 되죠. 혹시 소녀와의 관계가 어려워서 소년이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면, 주위에서 기운을 북돋아주세요. 소년의 마음은 상처받기 쉽고 섬약하니까요. 설령 소년이 공격적으로 나온다고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쑥스럽고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거라네요. (註 : <소년백서>, 2010) 이게 견디기 어려우시면, 그만 두셔도, 뭐, 상관은 없다네요. 그렇게 500일을 꾹 참고 지내면, 소년의 여름방학은 끝나요.

여기까지 왔으면 거의 다 된거에요. 여름방학이 끝나면 곧 가을이거든요. 드디어 결실을 맺을 때가 된거죠. 이제 소년은 남자가 될동말동한 상태예요. 여기에, 우리는 마지막 남은 재료를 조심스럽게 추가해야돼요. 소년은 (꿈꾸던) 일을 만나야 해요. 일이 잘 풀리면, 소년은, 드디어 가을학기를 맞이하고, 비로소 남자가 될 수 있어요. (물론 이건 도박이에요. 될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고)

참, 조심해야할 점이 있어요.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소년은 또 다른 500일의 긴 여름방학을 맞이해야 해요. 그 길고 긴, 여름방학을, 또 다시 말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소년이 우울해하고 힘들어 할 때 기운을 넣어주지 않으면, 소년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가라오케에 토를 할 수도 있고, 종업원을 때릴 수도 있고, 알콜 중독이 될 수도 있고, 스토커가 될 수도 있어요. 정말 조심해야해요. 한 번 잘못되면, 소년은 영원한 소년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500일의 썸머>는 시작부터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가 아니며, 대신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라고 못박는다. 그렇다. <500일의 썸머>는 '소년'이, 어떻게, 어떤 심리적 과정과 사건을 거쳐서, 비로소 '남자'가 되는지에 대한 영화다. 마치 500일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소년'이 '남자'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10대 초반의 작은 여동생에게 인간관계 상담을 하곤 하는 소년 톰에게, 어느날 썸머는 마법처럼 다가온다. 소년 톰에게 썸머는 신비로운(그래서 불가해한) 에로스 그 자체다. 썸머는 우유부단하고 감정적으로 미숙한 톰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톰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썸머에게 빠져든다. 영화에서 썸머가 어떤 감정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어낼 수 없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이 영화가 소년인 톰의 입장에서 500일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선언했듯,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때문에 영화의 서사는, 만남에서 이별에 이르는 일반적인 로맨스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영리하게도, 날짜를 짜깁기 하는 방식으로 연애의 에피소드를 배치한다. 썸머와 함께한 500일은 혼란스럽게 재구성된다. 이를테면 톰이 썸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매혹적인 순간을 맞이한 장면 바로 뒤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썸머에게 이별 통고를 받은 후 축 늘어진 톰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톰이나 썸머에게 감정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다소 혼란스럽게 배치된 영화의 에피소드의 얼개를 맞추는 일은 보통의 멜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의 몫이다. 맞추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그건 이 영화가 의도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썸머는 카드 회사에서 직장 동료로 만난 톰과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카페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을 때 책에 대해 질문하던 남자와 결혼한다. 결혼한 썸머는 '수트'(남성 세계의 상징)를 입은 톰을 찾아와 샤프하다고 칭찬해준다. 톰은 자신의 애인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했던 썸머가 갑자기 결혼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상처받은 소년 톰은 썸머에게 이제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만, 썸머는 오히려 자기가 틀렸고 톰이 옳았다고 말해준다. 톰은 여기서 크게 깨닫는다. 톰은 이제 원하던 직장을 얻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가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여성, 어텀(가을)을 만난다. 꿈꾸던 일과 로맨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소년' 톰은 드디어 썸머(여름)에 안녕을 고하고 '남자' 톰이 된다. 날짜를 가리키는 숫자는 500에서 1로 바뀐다. (가만, 그러다 윈터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땐 '중년' 톰이 되는건가)

이 긴 500일의 과정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얼마나 몰입하는지하는 차원을 떠나서(난 나쁘게 말하는 이야기는 이제 쓰지 않기로 결심했음. 하하하하하), 영화의 만듦새가 제법 훌륭하다. 얼굴부터 아메리칸 보이스러운 배우도 영화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 정도면 훌륭한 성장드라마 아닌가? 감독의 첫 데뷔작이라는데 앞으로도 기대해볼만 한 것 같다.


덧1) 시나리오 작가는 과연 '남자'가 되었을까? 영화가 시작하면 작가의 말이 뜬다. "본 영화는 허구이므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비슷한 점이 있더라도 완전히 우연일 뿐입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Bitch." (...)

덧2) 유독 소년에게 너그러운ㅡ심지어 한국의 가부장제는 4~50대의 얼굴을 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소년인 남자들의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ㅡ한국에서는 500일 갖고도 안될지도 모른다. 이거, 마늘과 쑥만 먹으면서 1000일은 썩어야 할지도...

덧3) <언 애듀케이션>을 봐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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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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