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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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10/03/27 12:22
비록 멘토링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의 문제 행동을 제거하고 건강한 발달을 촉진”(Hamilton, 1991) 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자주 장려되고 있지만, ‘멘토’의 전통적인 역할이 청소년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게 적절하거나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위기의” 청소년들을 다루는 문헌에서 묘사되듯, ‘멘토’의 역할은 청소년들을 가르치거나 사회화하며, 그들을 위한 역할 모델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탈학교(dropout)나 ‘학교를 다니는 엄마들(school-age motherhood)’로서 위기에 처해 있는 도시 청소년 여성들에 대한 이 연구는, [청소년 여성들과] ‘여성들’의 영향력 있고 건강하게 유지되는 관계는 청소년들의 지식과 경험, 감정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고 정당화하는 ‘여성들’의 능력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제안한다. 청소년 여성들의 관점을 인지하고 존중하지 않은 채 무작정 가르치려들 경우, 그녀들의 경험과 지식을 강화하기 보다는 깎아내릴 수 있다. 또한 청소년 여성들이나 여성에게 해로운 사회적 관습을 사회화하려든다면 마찬가지로 파괴적일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 문학과 신화에서 유래한 멘토링 모델은, 청소년 여성들을 위해 널리 행해지고 있는 멘토링 모델의 한계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의 조언자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오래 떠나있는 동안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보살피고 교육해야할 책임을 맡는다. 이 멘토링에 대한 묘사는 멘토와 텔레마코스 관계의 중요한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멘토의 역할은 선생님이자 아버지의 대리자이며, 그리하여 멘토 관계는 대체로 성인 남성과 청소년 남성 사이의 관계가 된다. 내 연구는 멘토와 언어학적으로 뿌리가 같은 뮤즈를 다른 은유로 보여주고자 한다. 뮤즈는 영감의 원천이었던 신화 속의 여성들이다. 뮤즈의 역할은, 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천재성이나 예술성을 알아보고 그것에 불꽃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뮤즈라는 은유는 청소년 여성들의 내면의 자원이나 가능성으로 초점을 이동한다. 이는 청소년 여성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데 치중하는 관계에서는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강점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의 약점을 가정하는 멘토링이라는 조력 모델(helping model) 대신, 이 연구는 여러 배경에서 온 청소년 여성들의 다양한 요구와 자원을 인정하는 관계적 모델(relational model)을 제안한다. 또한 이 연구는, 청소년과 성인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vulnerabilities)과 동시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가정하며, 관계 속에서 이 두 파트너 모두의 공헌을 높이 평가한다.

Amy M. Sullivan, <From Mentor to Muse : Recasting the Role of Women in Relationship with Urban Adolescent Girls>, Urban Girls : Resisting Stereotypes, Creating Identities, p. 226-7의 번역.

note 번역 중 girl과 women의 구분이 조금 불편해서, girl은 '청소년 여성'이라고 했고 women은 성인 여성 혹은 그냥 여성이라고 바꿨다. school-age motherhood는 마땅한 번역어를 찾을 수 없다. 흔히 쓰는 말은 으레 '10대 미혼모' 일텐데, 이 말은 10대라는 말도 문제지만 미혼모라는 말도 문제여서 쓰지 않았다.


이야기/이미지 산업의 맥락에서 뮤즈는 대체로 더 이상 젊다고는 하기 어려운 중년 이상 남성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재현된다. 또한 대체로 뮤즈들은 남성 예술가들의 필요에 따라 쉽게 '용도 전환'된다. 보통은 제자나 팬으로 시작해서, 영감을 제공하면서 성적 관계를 맺고, 후에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심지어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식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아주 남자 중심적인 설명이고 프레임이다. 뮤즈들이 어떤 관심과 욕망을 가지고 그런 관계에 헌신했는지, 그 관계에서 뮤즈들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전략적으로 행동했는지, 그리고 뮤즈들의 욕망은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 가능하며 또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나쁘다면 어떻게 돌파할 수 있으며 때로는 해체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뮤즈는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인물일 뿐, 현실에 존재하는 남성 예술가와 그들을 옹호하는 문화적 맥락에서는 뮤즈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옴니버스 영화 <뉴욕 스토리>에서 한 번 뒤틀린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그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즐거웠었는데, 그 영화의 문제는 그 남성 예술가가 겉으로 보기에도 좀 찌질했었다는 점이다. 뭐, 사실 대다수가 그럴 수도 있고)

이러한 뮤즈는 에이미 설리번의 논문에 오면 아주 적극적인 주체로 모습을 바꾼다. 주로 남자-남자 모델, 혹은 남자-여자 모델을 가정하는 멘토링은, 뮤즈링(?)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수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자-여자 모델도 마찬가지로 멘토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소년과 (부모이든 부모가 아니든) 성인과 맺는 관계의 특징이나 수행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뮤즈링은 하나의 규칙이나 규범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행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설리번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일반적인 교육과정(10대는 학생이자 청소년)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에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0-50대면 어떻고 동년배면 또 어떻고.

이 글을 읽으니 떠오르는 경험. 예전에 대학교 다닐 때 잠깐 멘토링을 한 적이 있다. 인근 중학생들 중 사교육을 받기 힘든 아이들 3~4명을 멘토링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2번씩 2시간, 과외 시간처럼, 그 중학교를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 멘토링을 하는 거였다. 물론 페이도 받았다. 과외랑 똑같이. 8회 40만원. 같은 돈을 받고 과외 따위를 하느니 더 여러 아이들을 만나서 멘토링을 하는데 당연히 흥미를 가질 수밖에.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국엔 상담을 조금 가미한 과외로 굴러갈 가능성이 컸다. 물론 1달에 몇 번 멘토들이 모여서 슈퍼바이저와 함께 회의를 해야했는데, 당시 내가 보기에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관심은 어떻게 '결손된'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학교 질서와 사회에 편입시킬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관제 프로그램이었으니 그럴 법도.

그런데 심지어 어떤 남자 멘토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컸다. 애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멘토링을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니들부터 가르치고 사회화해야겠다 이놈들!) 정말 그런 광경은 끔찍했고, 사실 내가 만난 아이들도 그 관계를 관(官)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과외로 인식할 뿐이었다. 게다가 3~4명이었다. 1대 1도 아니고. 결국 빛 좋은 그룹 과외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도망쳤다. 미안하고 죄책감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내 나름대로 노력을 할 수도 있었고, 또 그때가 멘토링 프로그램 초기 단계였으니 시행착오 단계로 봐도 좋았다. 다른 멘토들이 저질이든 쓰레기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나만 잘하면 되었을 것을. 그때 이 논문을 읽었다면 진짜 좋았을 것 같은데...

차라리 활동비만 실비로 받고 따로 돈을 받지 않는 관계였다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뭐, 지금 같아서는 더 잘할 자신 있다. 하하하. 후, 열린 교실 또 한 번 하고 싶네... 분명 힘들었지만 정말 기쁘게 보냈던 시간. 지금도 기억에 뿌리 박힌 경험. 그리고 그 아이들. 이야, 이젠 대학생된 애들도 많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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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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