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들 / 2010/01/10 00:21
"우리가 속한 위치와 역사는 모두 다르지만, 나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갖고서 희박한 '우리'를 만들어 왔다. 만약 우리가 상실했다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하게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 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하게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 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에서
뉴스공급사들은 전 세계 어딘가에서 발생한 뉴스를 신속하고 재빠르게 타전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언론사들은 그것을 받아 보통 '국제 이슈'의 한 단면으로 다룬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서 본다. 보고 또 봐도 끝이 안나는 뉴스들.
어제 버스 안에서 멍하게 바라봤던 TV에는 ㅌㄱ 축구팀이 총격을 받아 10여명이 사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앵커가 있었다. 물론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ㅌㄱ 축구팀은 어떤 나라에 갔다가, 어떤 사람들에게 우연히 총격을 받은 것이다. 소위 "아프리카"에 있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지난 수십년간 "아프리카" 지역은 늘 총성과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다.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끝나서는 안될 노릇이다. 왜 폭력, 질병, 죽음, 빈곤이 "아프리카"에 만연한지ㅡ사실 이 말도 틀렸다. 국가도 수없이 많으며 경제 상황도 다르다. 계급별 젠더별 조건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로 '그들을' 이해한다ㅡ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으레 그러려니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 위에서 ㅌㄱ 축구팀이 당해야 했는지, 또 축구팀이 상징하는 바, 혹은 더 나아가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 어떻게 이 폭력 사태에 연관되었는지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안다고 해도 그 앎이 진실된 것인지 보장할수도 없거니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당히 여유 있는 중간 계급의 도덕주의적 감상주의 아니냐는 내면의 힐난에 침묵해 버린다. 결국엔 냉소주의와 만난다. 어딜가도 냉소 뿐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냉소주의 앞에서 좌절할 때 가장 좋은 치유책은, 버틀러의 윤리학 관련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고, 밑줄치고, paraphrase도 하고, 옮겨 적는다. 복잡한 문장과 꼬인 번역문을 읽는데도 짜증이 일기 보다는 겨울철 때이른 어둠이 어느샌가 세상을 온통 적셔 오듯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드는 걸 느낀다.
버틀러는 가장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저 위에 적어놓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 사고 방식을 깨트린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사유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버틀러의 방식은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도 윤리를 포기해 가는 마당에, 한국에 이렇게 감동을 주는 윤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정말이지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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