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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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9/10/14 00:17
고통은 측정할 수 없다. 숫자로도, 언어로도 그것은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고통은 볼수도, 전시할수도 없다. 고통은 그냥 고약하게 아픈 것이고, 다만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원을 많이 가졌기에, 심지어 고통을 욕망하고 탐닉할 수 있는(언제라도 빠져나갈 수 있는) 얼치기 딜레당트들이 열정적으로 '느끼고자 하는' 고통은, 엄밀히 말해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굳이 말을 찾자면 '통증'에 가깝다. 살고 있다는 구체적 느낌을 받기 위해, 자위만큼이나 무해한 자해와 폭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경우, 예컨대 잔인한 고문관의 눈을 바라보며 파국을 짐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정의와 도덕 혹은 관계의 가치를 믿는 사람은 바로 그 신학적 믿음으로 인해 곧 다가올 파국 앞에서 신체의 '통증'을 견디어 낼수도 있다.

그러나 고약하게도 우리는 고통을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왔다. 우리 시대의 사회과학적 전통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계량 가능성'에 입각해 있다. 만약 사람을 계량하고 측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에도 위계와 서열을 매길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그 전통 위에서 우리는 고통의 '계량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할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절대로 공식적인 견해로 인정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근대 체계가 마련한 사회'과학'의 뿌리를 제거하려 드는 악질 바이러스이므로. 숫자가 없는 사회과학은 아예 존립조차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점에서는 되레 자연'과학' 분야의 생리학이나 신경과학의 성과가 더 윤리적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다. 적어도 생리학과 신경과학 그 자체로는 고통의 유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을 '보편적인 것', 즉 호르몬의 분비나 뇌 구조 혹은 신경체계의 기능으로 치환해 버리는 놀라운 경향을 가졌기에 이 학문들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고통의 원인을 삭제한 채, 고통에 대해 얼마든 우생학적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리학과 신경과학의 성과는 고통받는 주체에게 역설적인 위안을 주기도 한다. 고통을 언어화하는 순간 일어나는 고통의 상징화, 내지는 고통의 계량화(와 그에 이은 비교)는 늘 절망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언어화도, 수치화도 할 수 없는 나의 절대적인 고통이, 단지 나의 내부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신호나 신체기관의 이상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것만큼 역설적인 위로가 되는 일이 또 있을까. 만성 우울증이 단지 쭈그러든 해마나 비정상적인 세로토닌 탓이라면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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