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세대 담론'은 아마도 향후 100년간은 사라지지 않을, 아니 적어도 '재생산'이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한 영구히 반복될 담론일 것이다. '세대 담론'은 때때로 정치에 대한 공통 감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끌어 안아야 할 담론이다. 서구 역사에서 저 유명한 "신구 논쟁"에서도 고전 문화를 옹호하던 세대에 맞서 젊은 세대들은 수없이 많은 언어와 실천으로 새로운 문화적 장을 열어 제끼지 않았던가. 때로 이렇게 세대 관념은 변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비록 이전 세대를 비판하던 젊은 세대들 중, 이전 세대가 갖고 있던 각종 지식들에는 완전 무지한, 다시 말해 '함량 미달'이던 이들도 많았지만. 그리고 '세대 담론'이 사회에 존재하는 적대들과 정치들을 단지 '세대'라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적대의 전선을 무력화시키고 정치를 탈정치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온당한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세대 담론'은 때로 삶, 생애에 대한 공통 감각을 제공하기도 한다. 앞 세대의 생애를 통해, 앞 세대가 겪은 삶의 사건들을 통해 뒷 세대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들의 삶에 대해서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뒷 세대의 생애에 대한 감각과 비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특히 일종의 생애주기(life cycle)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지에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강력한 문화적 자원이 된다는 점에서 '세대 담론'이 제공하는 것들을 쉽게 무시할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세대를 믿지 않는다. 아마도 '세대 담론'의 기본 요소인 세대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클리셰를 동원하자면 한국의 '격동적인 현대 정치사'를 거쳐온 세대, 예컨대 '386세대'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세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게 나의 믿음이다. 단지 사람들이 있었고, 집단이 만들어졌고, 이념이 있었고, 사건이 일어났고, 정치가 있었고, (아마도 가장 중요할 것인데) 선택을 했고, 행동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 무게감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했었던 것이다.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보면 어떤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소설 속의 그는 결단코 '투사'였던 적이 없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서 만나 자신을 도와주며 같이 살았던 이가 그가 보기엔 갑작스럽게 분신을 했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수감이 되었고, 감옥에서 나오자 그는 갑자기 지역의 민주화 투사가 된다. 그리고는 대학에 자리를 잡고 '대학생 친구'들을 여럿 만난다. 대학생 친구들에게 영웅이었던 그는 자신의 위치를 활용하여 연애를 하고, 또 대학생 친구들에게 성폭력을 하기도 한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을 비롯한 것들과 상당히 유사하게 읽히는 이 소설에서, 나는 상당히 불쾌함과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떤 통찰이나 반성을 담고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즉, 본질적인 운동가가 있지도, 또 고유한 정치가 있지도, 이념에 완전히 봉사하는 개인들이 있지도 않았다. 단지 시대적 사건이 있었고, 그이들은 일종의 시대적 기분에 어느 정도는 젖어 있었고, 그에 따라 시대적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것에 '세대'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어디까지나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전히 허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한갖 개념일 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네 삶에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세대 담론'이 제공할 수 있는 각종 이점들이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세대를 받아들일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세대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렵기 짝이 없다. 현대사를 포함해 역사에 상당히 무지한 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세대는 나에게 아무런 영감도, 자극도, 동기도 된적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생한 이들과 어떤 공통 감각을 형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 스스로 개인적인 감각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생애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건 '세대'에 대한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어떤 삶을 거쳐간(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선배들, 혹은 스승들에게서 어떠한 감정적 정치적 링크도 느낄 수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링크들에 대개는 부정적인 입장 밖에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생애에 대한 감각은, 곧 '삶의 서사에 대한 감각'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나는 내 삶의 서사를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다. 생애 서사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내가 보고 배우고 또 내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도저히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러다 그냥 아무거나 선택한 뒤 끊임없이 단어들을 동원해가며 그 선택을 정당화하기 바쁠지 모른다. 심리학 개론에 보면 나오는 '인지 부조화'이론이 설명해 주듯이. 물론 그런 서사를 아예 제공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란한 (자기 계발) 성공담의 시대, 무한히 다양한 전문직의 만신전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서점에만 가면 성공담을 다룬 책, 또 전문직 리포트를 수없이 만날 수 있다. 누구누구의 고만고만하고 시시껄렁한 인생 성공담을 목격하고, 겉은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막상 하면 나름의 고충과 애환이 있다고 고백하는 전문직들의 삶을 읽으며, 때로는 이를 강요받기까지 하는 분위기 속에서, 삶의 서사를 그려내지 못(안)하겠다고 투덜대는 건, 전적으로 이 세계에 들러 붙지 못하고 혼자 고고한 척 구는 '재수의 밀도가 떨어지는' 일일 수 있다. 그리고 나만 이런 것도 아니다. 그렇다. 이는 어디까지나 '브로콜리 너마저'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덧) 5. 18을 맞아 맞이하는 뉴스는 풍작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5.18 행사에 참석치 않았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지만, 관계자의 말은 충격을 더한다. "작년에 가셨으니까 올해는 총리가 대신 갔다." "올해 4·19 기념식에도 가셨고, 첫해 가셨는데 매년 가서 대통령이 하실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아 젠장. 그리고 김지하 시인의 말. "황석영 나쁜 놈 아니다." "작가는 좌로 갔다 우로 갔다 할 수 있어야" 진중권을 일컬어 "진씨는 예술이나 문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치로 작가는 매일 아침마다 변해야 하는 것". 아놔 진짜 이 사람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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