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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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9/05/05 21:36

<우아한 세계>는 꽤나 재밌는 영화였다. 나는 조폭물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편이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변주였다고 본다. 한참 전에 봤던 조인성 주연의 <비열한 거리>가 줬던 느낌이랑 비슷했다. 조폭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남자들의 '의리', 폭력의 정당화, 사랑과 폭력의 동일시(혹은 (성)폭력 없이는 사랑도 없다는 식의 설명), 반드시 등장하는 성폭력과 성매매, 폭력과 위계질서로 웃음을 유발하는 문법 등등이 조금씩 뒤틀리고 탈환상화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송강호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아한 세계>는 조폭물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아버지'에 바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아버지를 위한 영화. 예전에 비해서는 심각하게 떨어진 아버지의 '권위'에 바치는 송가(訟歌)나 애가(哀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남성 권력은 더 이상 예전 같은 '가부장제'식의 강력한 권위와 권력이 아니라, '찌질함'으로 대표되는 동정심을 통해서 작동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송강호는 자신의 '가족'ㅡ소위 '처자식'ㅡ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려움을 참아내며(심지어 목숨까지 걸어가며!) 동분서주하는 아버지로 등장한다. 그게 어디까지나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지만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상'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잘못된' 사랑 방식이다. 딸의 선생님에게 촌지를 준답시고 자기랑 관계 있는 나이트 클럽의 200만원짜리 상품권을 주는 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호의일 것이다. 딸의 다이어리를 훔쳐 본걸로 모자라 딸이 자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쓴 걸 보고서 칼을 들고 설치는 장면도 역시 쉽게 공감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렵다. '처자식'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을 끝끝내 고수하면서(물론 송강호에 공감하는 이들은, '타고 나서 배운게 이거밖에 없으니'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과 유대의 끈을 배신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무를 다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사랑과 관심을 표현한답시고 허세를 부리며 비싼 집을 알아보고 다니는 모습에는 코웃음까지 났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극적인 '화해'를 한 뒤 아내와 딸은 아들이 유학 가 있는 외국으로 떠나고, 송강호는 이제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가 된다. 그리고 송강호는 넓은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그들이 보내온 비디오 테이프를 본다. '아버지'의 '잘못된' 사랑 방식은 여기서도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들은 가정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 행복은 어디까지나 스크린에 비친 재현,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가닿지 못한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부재한 곳에서, 송강호가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일종의 (가상) '현실' 속에서 가장 행복하다. (예상했던 바대로) 송강호는 처음엔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리면서 라면을 집어 던져 버린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리고 나서는 (역시 예상했던 바대로) 쓸쓸하게 자기가 저지른 일을 마무리(청소)한다. 아버지의 '세계'는 온갖 굴곡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기 반복적으로 순환되고 복원된다.

이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년) 기러기 아빠'에 대한 동정심 어린 관심이 크게 일었던 걸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흐름은 아니다. 허나 이러한 흐름이 아주 '그럴싸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당시 '기러기 아빠'는 무려 심각한 "사회 문제"로,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을 하나로 수렴하는 '핵심(core) 문제' 혹은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었다. 물론 그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되려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할 문제는 '기러기 아빠'가 모든 '가정 문제'에 우선하는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중하다면, 아내 폭력, 부부 성폭력, 성별 분업, U자를 그리는 여성 노동 곡선, 보육 시설 등에 대해서는 우리는 왜 그동안 그리도 말을 아꼈는가. 왜 그런 것들은 흥행하는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기러기 아빠는 당당하게 영화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는가. 정희진씨 말대로 남성의 문제는 곧 사회의 문제로 번역되기 때문은 아닐까('농촌 총각'을 위한 국가-행정적인 전폭적인 지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남성권력 편향적인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 영화도 아니고, 한국 사회 아버지들의 권위를 재기있게 뒤튼 영화도 아니란 생각이다. 위에서 말했듯, 점점 존재감 없어지는 어떤 사회적 유령을 소환하는 영화다. 그 유령에 대한 동정심 어린 애도이고, 주술이다. 오늘날 권력을 유지하고 옹호하는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등장한 '동정심'. '동정심'이라는 주술..


덧말) 강인구(송강호)의 아들이 한국에서 이들과 같이 살았다면 이 영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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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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