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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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9/02/23 22:48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는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하는 영화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영화 서사의 문법에서라면 분명 이들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 가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만약 영화가 한 여자를 '쟁취'하기 위한 두 남자의 '각축전'을 선택한다면 너무나 뻔한 결말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남자들 사이의 에로틱하기 짝이 없는 끈적끈적한 대결(주먹이 오가고 피와 눈물과 격정이 철철 흘러 넘치는데 어찌 에로틱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을 보여주든, '자원'을 적게 가진 남자가 결국엔 '패배'하여 저 뒤안길로 사라지고 승리한 남자는 한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든, 그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넓은 의미에서의 남성 정치, 남성 연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당연히도 이러한 방식의 서사가 우리가 보아 왔던 영화 속 연애 유형의 대다수를 차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서사의 문법은 두 남자의 선택과 갈등보다는, 한 여자의 '선택'과 '행위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서사 유형을 전도한 형태로서(어떤 이들은 지배적인 어떤 것의 단순한 전도를 기계적으로 비판하고 힐난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가장 단순한 전도야 말로 핵심적인 무언가를 건드리고 또 가능케 한다고 믿는 편이다) 이성애적 문법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의 서사는 가능할까?! 만약 '한 여자'가 "레즈비언"이라면? 혹은 남자 중 한 명이 "게이"라면? 혹은 한 남자가 "바이"라면? 충분히 더 흥미롭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서사가 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들의 문화적 지형에서, "호모섹슈얼"(아직 "바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은 점점 하나의 흐름으로서ㅡ어쩌면 단지 서사의 한 유형으로서만ㅡ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이에 대한 평가는 뒤로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영화가 흥미롭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만큼 관객수도 전위적으로 급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빈한하기 짝이 없는 문화적 지형은, 만약 주인공들의 네이션이 소위 "동남아", "라틴", "치카노", "흑인" 등등이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 인물들의 네이션이 뒤섞여 있다면, 이러한 영화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blah blah blah


...
말이 길어졌네(ㅋㅋ)

어쨌든, 이 영화, 무척이나 재밌게 보았다!는게 결론이다 ㅋㅋ

모래(신민아)와 상인(김태우)은 알콩달콩 살아가는 부부로 등장한다. 모래는 상인을 '형'으로 부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 둘은 같이 지냈고, 그러다 보니(어쩌다 보니) 둘은 결혼에 이른다. 왜 둘이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는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초반부에 둘은 분명 친밀하고 서로를 깊게 배려해 주고 신뢰하는 커플로 보인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이다. 두 사람은, (아니, 모래는) 넬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Let's not change the world, but make another one"하는 식의, 분명 70~80년대의 한국에서라면 비난받아 마땅했을 그런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래에게 상인은 세계를 순환하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다. 모래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늘 양산을 휴대하고(햇볕을 오래 쬐면 금방 피부는 물론이고 사고 전체에 '이상'이 온다. 햇볕은 다른 세계의 시선(gaze)이다) 심지어 양산만 파는 가게를 운영한다. 물론 손님은 전혀 없다.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래의 유일한 친구이자 언니(역시 상인처럼 어릴 적부터 알아온 듯 하다), 상인, 두레(주지훈), 그리고 양산을 우산으로 바꿔줄 순 없겠냐고 묻는 고등학생들 뿐이다. 양산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프랑스로 어릴적에 입양된 요리 천재 두레가 상인의 초대로 등장하게 된다. 두레와 모래는 우연히 밀폐된 공간에 갇히게 되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른하게 만드는 햇볕 때문에 모래는 섹스를 하게 된다(최고의 비주얼;;). 모래에게는 "이상한 맛"이 나는 섹스였다. 모래는 그 "이상한 맛"의 존재를, 자신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인 상인에게 '순진하게' 말해 버린다. 상인은 그 "이상한 맛"이 나는 사내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나지만(남성-상인에게도 이는 두 사람만의 세계의 붕괴를 알리는 전초였을 것이다), 덮어두기로 한다. 그 "이상한 맛"나는 사내가 자신과 친한 동생인 두레라는 것은 모르고. 결국 두레는 상인의 집에서 살게되고 이제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두레가 프랑스로 '입양되었다가' '돌아온'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은 꽤나 중요한 것 같다. 프랑스가 중요하다는게 아니라 어쨌든 두레가 전형적인 '한국 남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초반, 중반부에 걸쳐서 두레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인 상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마치 외국의 입김이 미치지 않으면 그런 관계 맺음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국 남자들에게 그런 방식의 관계는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두레는 모래와 상인의 관계에 단순히 '끼어들어' 그 관계를 분해시키지도 않고, 그 관계의 성장을 촉진시키고 자신은 사라져 버리는 비료(젠체하자면 'vanishing mediator' 정도?)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무척 흥미로웠다. 두레와 모래는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게 될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얼마간 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랑스로 입양갔던 두레의 정신은 금방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상인이 "너도 한국인은 한국인이구나"라고 말한 게 적중한 셈이다. 영화는 결말 쯤에 가서는 두레와 상인의 으르렁대는 대결 구도로 가버리고('보스의 여자'를 빼앗으려드는 2인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통속적인 조폭 영화랑 똑같지 않은가!),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끈적한 남성 연대의 재결합과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겪은 갈등 이전과 같은 식의 남성 연대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쉽기 짝이 없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동 말 동 했었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무한히 긍정할 수 있다면 모래(신민아)의 '변화(혹은 성장)'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모래의 성장 드라마라는 얘기다. 오로지 모래만을 위한 영화. 물론 그 변화(내지는 성장) 속에서 모래가 맺는 관계의 방식이 변화했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상인을 중심으로 회전하던 모래의 세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경험(진리-사건?ㅋㅋ)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적이지만, 그래서 초반부의 모래와 결말부의 모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여기서 어떻게 변했는지 말하면 진짜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패스. 무엇보다 이러한 모래의 변화는 나의 일련의 변화 과정과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ㅋㅋ 치이고 닳기만 했던 20대 초반을 정신 없이 지나 온 사람들이라면, 내가 본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구.

『이론. 이후. 삶(Life. After. Theory)』이라는 자크 데리다와 토릴 모이 등이 참여한 대담집의 제목처럼, "로맨스. 이후. 삶(Life. After. Romance)" 그렇다고 로맨스가 없는 건 아니라는 데 방점이 있다!!

어쨌거나 홍지영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대 된다. 흐흐흐. 이만한 관목을 가진 감독이라면, 충분히 기대할 만 하다.


덧) 영화 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관객들이 제법 있었음에도 한 명 빼고 모든 관객이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커플들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인터넷 평들은 온통 이들의 '불륜'에 대한 비난 일색이다. 왜 연애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서는 이토록 엄격할까. 왜 종교 재판관을 자임하려들까. 역시 한국에서는 <키친>정도도 '불가능한' 연애 서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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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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