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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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07/06/25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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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아씨의 <역사적 파시즘ㅡ제국의 판타지와 젠더 정치>의 서문을 읽고 있던 도중에 이런 저런 말이 인상 깊어 옮겨둔다.

한국에서 파시즘은 집단주의의 일환으로만 논의되는 경향이 과도하다. 그러나 파시즘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집단주의적 경향 보다는 경쟁 체제, 증오심, 박탈된 자의 원한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특정한 면모와 더 관련이 있다. (…) 결국 파시즘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저항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것은 이처럼 욕망의 문제와 경쟁의 논리, 제도화의 그물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물론 이러한 '다중'의 자발적 집단화는 파시즘의 중요한 특질이기는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발적 집단화과 사회의 지배적 경향이 되는 내적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p.12)

증오 범죄라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출현한 그 시대는 파시즘의 증오의 정치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또한 이처럼 증오의 수위가 높아지는 현상이 일부 박탈된 집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집단에 편재하게 되는 것은 한 사회의 파시즘화의 뚜렷한 징후라고 나는 생각한다. 파시즘이 모순적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장이라고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역사적 파시즘 체제를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집단주의의 광기가 사회를 지배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고립감과 불행 의식에 산산이 찢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두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고립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막막함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이 집단주의로 채색된 파시즘 사회의 '내면'이다. 따라서 파시즘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집단주의의 광기, 집단화되어 있는 다중으로 드러나지만, 사실 상 그 '집단'들이란 개개의 인간들을 해소할 수 없는 '분열'과 적대감에 유폐시키는 시스템의 산물이다. (…) 이러한 고립감과 집단화는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논리로 이끌 수 있는 내적 동력이다. (p.13)

파시즘의 기본 동력은, 위에 인용한 권명아씨의 글에서 언급했던대로 자본주의적 체제ㅡ박탈된 자의 원한, 경쟁 체제 등ㅡ와 관련이 깊다. 파시즘이 '만들어진 내적 결핍'에서 유래하는 측면이 있다면, 결국 지젝의 인종주의에 대한 논의와 맞닿는 측면이 있다. 지젝에게 인종주의는 언제나 '환상'인데, 그는 이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로, 인종적 '타자'가 '우리'의 향락을 훔치려고 하며 우리의 향락을 항상 욕망한다는 환상이며, 둘째로 인종적 '타자'가 '우리'가 모르는 낯선 향락에 도달했다는 불쾌감이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환상은, '그들'만 없다면 우리 사회는 완전해지고 더 살기 좋아질 것이다, 라는 '우리들'의 내적인 믿음과 연결된다.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파편화되고 피폐해진 개인들이 분열적인 집단을 이루게 되고, 거기에 인종주의적 환상까지 맞물리고 간단한 동력이 가해지면, 결국 파시즘이 도래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본 파시즘도 이러한 인종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젝이 지적했던 대로 인종주의가 언제나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종에 관한 '사실fact'은 지젝이 말한 '환상 프레임'을 통해 구성된다. 인종주의자이자 파시즘에 매몰된 개인들은, 파시스트 정치가에 의해 잘못 인도된 불쌍한 대중들이며 또한 교육 받지 못해 '무식'한 개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교육을 못 받고 일상에 찌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때로 고도로 교육된 사람들일 수 있으며 신념과 이상으로 가득찬 열정적인 활동가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잘 교육하고 인도하면 파시즘과 인종주의는 사라질 것이라는 분석은, 역시나 이상주의적 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인종주의와 파시즘적 징후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론 주변 국가에도 퍼지고 있는 어떤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불행한' 사람들이 증가하고, 스스로를 더 이상 중산층이 아니라 하위 집단에 위치시키는 경향이 늘어났다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예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Made in China' 제품들은 대부분 경멸의 대상이다. 그들은 짝퉁을 만들어 내고, 위생 상태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식품들을 만들어 판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언제 우리를 따라잡을지 모른다는, 앞으로 10년 뒤면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이도저도 아니게 될 것이라는 신문 기사들도 사람들의 눈을 휘어 잡는다. 결국 한국인들은 불행하며,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갖지 못한(한국인이 가져야 할) 향락들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이고 '환상'적인 믿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이 일상에 만연한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경향은 결국 파시즘적 징후와 연결될 공산이 크다고 보는 것은 과장일까?

물론 이러한 징후가 과거 독일/이탈리아 등에서 볼 수 있던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파시즘으로 반드시 연결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것이 '일상적 파시즘'이 되고 '경향적 파시즘'이 되는 경우다. 사실 오늘날 일상적인 인종주의의 방식은, "저들은 우리보다 열등하고 역겨운 것들이야"라는 거친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들의 권리를 인정해. 하지만 저들이 밥먹는 꼴을 보면 짜증이나. 저들이 말하는 방식은 왜 저렇게 시끄럽기 짝이 없는지.."라는 식의 조금더 세련된, '성가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세련되고 쿨한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종주의자이며 파시스트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노골적이고 비합법적이며 국가적인 파시즘은 집단적 반발을 낳고 견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 권력 속의 파시즘은, 지적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거의 견제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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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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