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시작된 '계급'에 대한 고민들이 흐름을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휘날리다가 결국 생각을 놓고 있었는데, 본가로 돌아와 예전에 뽑아둔 논문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리타 펠스키의 글을 발견했다. 리타 펠스키의 논문을 한 5개 정도 뽑아두었는데, 예전에 세미나 때 읽었던 『근대성과 페미니즘』에서 느껴졌던 엄청난 매력 덕분인지 이 논문들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시간도 많은데다가 시간이 잘 가질 않아서 하나만 살짜쿵 번역해 봤음. 에이포로 빽빽하게 2장 반 정도 되는 양이라 그닥 많지도 않았다(근데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쿨럭).
어쨌건 정말이지 한국에서는 '중산층'이라는 말이 오용(catachresis)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중산층이라는 말이 정말이지 도통 뭔지 모르겠다. 심지어 2mb은 실소득 8800만원에 연수입 1억 2천 이상인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규정했다나(그리고 이게 '글로벌 스탠다드'라던가)? 물론 내가 '계급', '계층', '계급 의식'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지만ㅡ이건 순전히 내 탓만은 아니고, 학내에서 이런 단어들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내게 신뢰를 주지 않았기 때문... -_- 쿨럭ㅡ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특정한 단어들에 지나치게 많은 견해들과 때로는 오해들이 쌓여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물론 어떤 점에서 보면 이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 사이에서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징적 전투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일반적 용법'이라는 식으로 이 단어를 정의 내리는게 위험할 수밖에 없는(왜냐하면 그러한 정의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지적하듯 특정한 누군가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권력 관계 네트워크 내부에서 위협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의 강력한 담론적 무기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것이기도 하고... 에라 몰라.
어떤 블로그들에서 '중산층' (내지는 '중간 계급')에 누구를 포함할 것이고, 누가 이 집단에 포함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들의 논쟁은 분명 일면 타당하지만, 너무나 국지적이란 생각이다. 예컨대 '강남' 사람들이 모든 논의의 중심이 된다든지 하는. 그것 가지고 중산층 내지는 중간 계급 운운하는 것은 약간 오버란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대다수의 담론적 논의와 투쟁들은 오직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거기에 계급적 문제나 계층적 문제가 끼어들게 되면, 이상하게 늘 강남이 언급되고는 한다. 물론 강남은 아주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논의의 중심에 있기 쉽지만, 이러한 논쟁의 구도는 언제나 협소할 뿐 아니라, 이 구도 자체가 오히려 다른 수많은 갈등들을 감추는데 사용되는 덮개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적어도 강남 대 강북의 대립 구도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그닥 아는 바도 없고 담론의 구체적 지형들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므로 그냥 의심만 할 뿐이다. (무책임 흐흐)
어쨌든 "middle class"는 흔히 번역하듯 '중산층'으로 하지 않고 '중간 계급'으로 통일했음.
Rita Felski. "Why Academics Don't Study the Lower Middle Class."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Vol. 48). 2002.
우리는 계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미국에 있는 모든이들이 중간 계급이라는 공통된 믿음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큰 소득 불균형을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투쟁에 관한 맑시스트들의 모델은 여전히 어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얻고 있지만, 사람들(people)이 어떻게 계급을 경험하며 계급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계급 정체성과 그 [정체성들의] 관계들은 그리 깔끔하게 분리될 수 없다. 품위 있는 사람들(people of modest)라는 말은 상위 중간 계급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열망을 의미한다. 부유한 전문직들은 토스카나 농부들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고결함을 느낀다. 백만장자들은 월마트(Wal-Mart)에서 쇼핑한다. 매우 가난한 잉여 인간들(poverty-stricken adjuncts) 은 교육과 학식이 넘쳐난다. 모든 사람들은 갭(Gap)에서 쇼핑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계급에 대한 기호(sign)들이 어떻게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뒤섞여 있는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자 리처드 세네트(Richard Sennett)와 조너던 콥(Jonathan Cobb)이 한 때 "계급의 숨겨진 상처(hidden injuries of class)"라고 불렀던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나처럼 영국을 떠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계급에 대한 미국의 언어는 특히 판독해 내기가 어렵다.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 연구실에 들렀던 학생이 자신은 중간 계급적 배경에서 자랐다고 언급한적이 있다. 계급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자라난 나는 그 학생의 말을 그 학생의 부모가 상류 부르주아지의 구성원이며, 그 부모의 임금 노예들이 공장 바닥에서 구르는 동안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빈둥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실 그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중간 계급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품위있는 배경에서 왔다는 점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학생이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평범함을 강조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 학생이 자신의 특권을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계급에 대한 새로운 언어들을 배워야한다고 느꼈다. 이는 단지 "휘발유(petrol)"을 "가솔린(gas)"으로, "눈깔사탕(boiled sweet)"을 "하드 캔디(hard candy)"로 기억하는 식으로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문제가 아니다. 대신,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은 단어들이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간 계급"이라는 말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은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평균적인 노동자나 그 가족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또한 그 범주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빌 게이츠(Bill Gates)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중간 계급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어느 정도 성공해 왔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부유한 사람은 그들 자신이 특별한 특권을 갖지 못했다고 믿는다. "중간 계급"은 미국의 일상에서는 이상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성공과 겸손함을, 성취와 평범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무한히 융통적이다.
나는 한 저널리스트가 하위 중간 계급에 관한 나의 책ㅡ그가 사실은 읽지 않았다고 고백했던(그는 반만 맞았다. 나는 그러한 책을 쓴 적이 없다)ㅡ에 대해서 토론하고자 전화했을 때 그러한 융통성이 존재한다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왜 하위 중간 계급은 시장 경영자 뿐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무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가 같은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점차 알게 되었다. 인터뷰어에게 지금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하위 중간 계급"이라는 말을 "근로 빈곤층(워킹 푸어; working poor)"라는 의미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나는 허를 찔렸다. 나는 노동 계급과 하위 중간 계급의 차이점을 물었다. 그는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지만, "노동 계급"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했다.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w"로 시작하는 용어("w" term)에 대한 비슷한 저항을 볼 수 있었다. 젠더와 계급문제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으며 반본질주의적인 페미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 혼종성 등의 최신 이론에 대해서는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학생들이, 가장 기본적인 계급 범주를 만나면 버둥거리고 말을 더듬는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최근에 있었던 세미나에서 노동 계급의 삶을 기술하는 19세기의 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들에 대해서 토론했다. 나의 학생들은 "노동 계급"이라는 말을 거의 발음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술은 그 두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용어에 친숙하지 않은가? 아니면 그들은 그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가득차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때때로 그들은 "노동 계급"이라는 말을 "중간 계급"이라고 단순히 바꿔놓기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었던 시기의 맥락에서는 그러한 대체 용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면 그들이 적절한 용어를 궁리하다가 마침내 "하위 계급"이라는 말에 도달하게 되는 숨돌릴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귀에는 하위 계급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만 한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질겁하게 된다.
몇몇 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미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중간 계급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동시에, 나는 학계에서 계급 분석으로 지나가는 많은 것들이 너무 진부하며 상상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문학 연구와 문화 연구 분야에서는 계급의 문제로 돌아갈 필요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최근에 인종과 젠더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계급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취급이 되더라도 오직 이름 뿐이고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취급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경제적 자원, 부의 분배, 계급 특권, 그리고 계급적 박탈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재촉당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논쟁들에서, 계급이라는 말이 자주 노동 계급을 의미하며, 그 노동 계급만이 진지하게 고려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점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한 줌의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그 누구도 중간 계급 자체에 내재해 있는 완전히 다른 경험, 태도, 그리고 경제적 자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중간 계급은 아주 모호한 방식으로 엘리티즘, 사치, 그리고 특권을 대표하는 것으로 가정될 뿐이다. 만약 미국의 미디어들이 모든 사람들이 다 중간 계급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계급적 차이를 지워버리려고 한다면, 좌익(left-wing) 학계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지의 장화에서 짓밟히고 있는 영웅적인 노동자의 이미지를 상상함으로써 계급적 차이를 과장한다. 그러한 상상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계급 차별을 어떻게 살아나가며 느끼며 숨쉬고 있는지에 대한 많은 차이들과 뉘앙스들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들을 얻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최근에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는 많은 이유로 내게 흥미를 준 주제였다. 첫째로, 이 계급은 지식인들이 혐오하기를 좋아하는 계급이며, 또한 나쁜 취향(bad taste)로부터 히틀러의 등장에 이르는 모든 것들의 책임이 있다고 책망받는 계급이다. 보수주의자로부터는 상스럽고 몰락했다며 비웃음당하고 진보주의자로부터는 완고하고 반동적이라고 공격당하면서, 하위 중간 계급은 그 어떤 올바른 것도 행할 수 없다. 나는 근대적 사유의 역사에서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강하고 지속적인 적의가 있었다는 점을 곧 알아차렸다. 그러한 적의는 쁘띠 부르주아지들이 역사의 바퀴를 되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라고 불평했던 맑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엇(Eliot), 울프(Woolf), 그리고 포스터(Foster) 같은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듯 교외에 사는 판매원들과 여점원에 대해 능글능글하게 비웃는 참고문헌에 이르기까지, 내가 대학원에 있을 때 "쁘띠 부르주아지"라는 말이 궁극적인 혹평으로 늘 사용되었던 것에 이르기까지 온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나는 궁금했다. 왜 지식인들은 그렇게까지 하위 중간 계급을 혐오하는가?
두 번째 이유는, 고백하건대 나는 하위 중간 계급 출신이라는 점이다. 대학의 교수로서 상위 중간 계급적인 라이프스타일으로 바뀌는 동안 나는 때때로 나는 이상한 행성에 착륙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중간 계급 내부에 있는 문화, 태도, 그렇다, 그리고 돈의 막대한 차이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엘리트 대학에 있는 교수진들의 계급 문화는, 내가 학생 때 있었던ㅡ때때로 별나고 괴벽스럽거나 장학금을 받는 남학생(아아, 슬프게도, 더욱 드물게는 장학금을 받는 여학생)의 자리를 남겨 두었던ㅡ캠브리지보다도 훨씬 동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아마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계급 출신을 감추거나 과거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고르게 섞이는 데 훨씬 더 능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하위 중간 계급과 상위 중간 계급 사이의 긴장, 적의, 그리고 오해들에 대해서 심사숙고하는데 관심을 점점 더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하위 중간 계급이 딱 잘라지는 범주는 아니다. 이 계급은 무엇을 포함하는가? 상점의 주인? 은행원? 회사원? 비서진? 기술자들? 교사들? 서로 다른 사람들은 사로 다르게 경계를 그리곤 한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자주 숙련되거나 반숙련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으로 정의되는 하위 중간 계급이 미국의 일상에서 가장 큰 계급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중간 계급으로 정의한다/된다. 하지만 그들은 전문 관리직이라고 자주 불리는 의사, 변호사, 상위 관리자에 비하면 더 적은 돈과 교육과 지위를 갖는다.
1960년대에 내가 영국에서 자라날 때, 이웃사촌중에 누가 하위 중간 계급인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관습적인 예의, 노력, 청결함, 그리고 괴벽스럽거나 아방가르드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심의 분위기를 풍기는 품위 있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하위 중간 계급의 문화는 과거 그것이 사용되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더 결착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하위 중간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사이에 낀(in-between) 그 자신의 지위이다. 하위 중간 계급의 구성원들은 그들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하고 일하고 있듯, 그들 자신을 노동 계급 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하지만 사회적 사다리의 높은 곳에서 하위 중간 계급이 문화와 지적 교양이 부족하다며 깔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열망은 자주 비웃음 당하곤 한다.
나는 최근에 내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하위 중간 계급에 대한 나의 논문에 대한 매력적인 응답들을 받았다. 분명히, 그 논문은 신경을 건드렸다. 하위 중간 계급적 배경 출신의 학자들은, 그들의 동료뿐 아니라 학생들까지 그들 자신들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썼다.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 그리고 비싼 레스토랑과 외국 여행에 대한 일상적인 직장에서의 대화에 낄 수 없는 자신들에 대한 부끄러움에 대해서 썼다. 그들은 그들의 어색함과 혼란에 대한 여러 감각들을 감명깊게 이야기했다. 모든 종류의 역기능에 대한 공적인 폭로를 과시하는 나라에서 최후의 금기는 자신이 충분한 돈을 갖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계급에 대한 공적 언어의 부족은, 특정한 삶과 경험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 것이다.
나는 하위 중간 계급은 결코 매력적인 정체성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인문학에서는 전복과 위반의 언어가 대유행이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경계로 밀려난 사람들과 줄을 맞추어 행진할 것을 원하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법외 추방자(outlaw)와 아웃 사이더, 그리고 억압당하는 사람들로부터 비춰지는 빛을 쬐고 싶어하는 것처럼. 하위 중간 계급은 너무 주류적이며 점잖고, 그들의 가치는 너무 세속적이다. 하위 중간 계급의 대부분은 체계를 전복하기보다는 물위로 간당간당하게 올라와 있는 그들의 머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걱정할 뿐이다. 하지만 하위 중간 계급은 평범한 개인들의 신념, 가치, 그리고 경험을 이해하는 데 아주 핵심적이다. 이 계급은 현대 미국에서 어떻게 계급이 생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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