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옮길 일이 있어서 옮겼던, 수전 손택의 글...
이성적으로는 카메라가 내 머리에 겨눠진 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취할 때마다 나는 불안함을 느낀다. 이것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을 도둑맞는다는 식의 잘 알려진 공포와는 다르다. 나는 사진작가가 나와 똑같은 복사본을 탄생시키기 위해 내게서 뭔가를 빼앗아 간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이 뒤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일상적으로는 나는 내 몸과 공존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 몸의 사령부는 머리이며, 세상에 대한 방향(그리고 표현)은 내 얼굴이 담당한다. 또한 내 얼굴에 자리 잡고 있는 눈은 세상을 바라보고 들여다본다. 세상이 나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나의 특권이자 아마도 직업적 편견일 것이다. 하지만 사진에 찍힐 때, 세상과 의식의 이런 외향적이고 열정적인 관계가 멈추는 듯 하다. 나는 나와 ‘마주보고’ 있는 또 다른 의식의 사령부에 복종한다. 내가 사진작가에게 협조하기로 했다면 말이다. 자세를 잡고 복종하면서 내 의식은 움직임을 부여하는 정상적 기능을 포기한다. 물론 위협당한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무기를 빼앗긴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내 의식은 침착해지려고 애쓰는 자의식의 일부로 축소된 것만 같다. 카메라의 시선에 맞춰 꼼짝 않고 있을 때 나는 내 얼굴 가면의 무게를, 내 입술이 돌출되어 있고 두껍다는 것을, 내 코가 퍼져있다는 것을, 내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뒤마의 소설에 나오는 철가면을 쓴 죄수처럼 내 눈이라는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내 얼굴 너머에 있는 나 자신을 경험한다.
사진에 찍히면서, 즉 사진을 위해 몇 시간 동안 계속 자체를 취하면서 나는 덫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한다. 누군가 나를 욕망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나도 똑같은 시선으로 화답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사진작가의 시선에 대해 상호적으로 답할 수 없다. 내 머리 뒤에 카메라를 놓고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진작가의 시선은 순수한 시선이다.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아닌 것(즉 나의 이미지)을 욕망하는 시선인 것이다.
물론 사진작가가 실제로 자신의 소재를 욕망할 수 있다. 로버트 매플소프의 사진들 중에는 욕망의 대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많다. 어떤 소재가 사진에 찍힐 가치가 있는 이유는, 사진작가가 그것에 대해 욕망이나 낭만적 집착, 탄복 등 수많은 긍정적 느낌을 갖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 소재에 고정된 작가의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반적인 시선이다. 즉 형태를 구상하는 시선인 것이다. 그 순간에 찍히는 사람이 사진작가와 똑같은 시선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시선을 받는 사람이 된다. 유순하게, 열심히, 어떻게 해야 더 매력적으로 ‘보일지’에 대한 사진작가의 지시에 따른다. 나는 전문적인 ‘보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나는 무기력하고 비전문적인 ‘보이는 사람’이다. 사진에 관한 한 영원한 처녀라 할 수 있는 나는 사진에 찍힐 때마다 똑같은 당혹감을 느낀다. 지시받았던 화장법을 잊어버리고, 사진발이 잘 받는 블라우스 색깔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리며, 얼굴의 어느 쪽이 ‘좋은’ 쪽인지도 잊어버린다. 턱이 너무 낮다. 너무 높다. 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수십 년간에 이르는 사진의 역사에 대해 훑어보고 있으며, 셀 수 없을 만큼 전문 사진작가의 사진에 찍히기도 했고, 사진 이미지가 가진 미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 대해 5년 동안 여섯 편의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카메라를 마주보았을 때 느끼는 먹먹함이 단지 경험이나 생각의 부족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음속에서는 더 깊은 완강함이 작동한다. 즉 나는 카메라를 바라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좋게 혹은 나쁘게 혹은 이러저러하게 보여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다.
불안함 없이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찍힌 사진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은 적도 거의 없다. 나 자신이 너무 강한 관찰자라서, 관찰되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일까? 가식적이거나 포즈를 취하는 것에 대해 청교도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내가 너무 도덕적 나르시시스트여서 모든 평범한 종류의 나르시시즘을 금기시하는 것인가? 아마 이 모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주로 느끼는 것은 놀라움이다. 내 의식의 90퍼센트 정도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나라고 생각하지만, 10퍼센트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 사진을 볼 때마다 보이지 않았던 그 10퍼센트에 놀란다(내가 잘 나온 사진을 볼 때 특히 그렇다).
사진은 내 의식의 위대함에 대한 일종의 비난으로 느껴진다. 아, 그래. 저기 ‘나’가 있구나.
나는 매플소프의 『어떤 사람들』에 나오는 내 사진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본다. 나는 갈망을 가진 채 내 사진을 볼 수 없으며, 저 사진에 있는 사람에 관해 환상을 가질 수 없다. 소재와 표면을 동일시하는 사진의 에로스가 정지된다. 내가 느끼는 것은 나와 저 이미지 사이의 관극이다. 나에게는 매플소프가 찍은 저 사진의 표정이 정말 ‘나의’ 시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카메라를 위해 만들어진 시선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이자 감탄해마지 않는 어느 사진작가에게 협조하려는 노력과, 나 자신의 위엄을 지키려는 노력 사이의 불안정하게 타협한 결과인 것이다(내 사진에서 나는 완고함과 좌절된 자만심, 공포, 나약함을 읽는다). 나는 매플소프가 찍은 것처럼 보인 적이 있었던가 의심한다. 혹은 다음번에 그가 내 사진을 찍을 때에도 이것과 똑같이 보일까 의심한다.
나는 사진에 찍힐 때 느끼는 기분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매플소프의 사진에서 발견하는 동시에, 이 사진은 나를 찍은 어느 사진들보다 달라 보인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최대한 그에게 협조했으며, 그는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매플소프가 사진을 찍어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주는 것과 사뭇 달랐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나를 안심시키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나를 격려하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자유를 준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집을 만들려는 충동이며, 매플소프의 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유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진지한 사람과 음란한 사람이 섞인 이 책은 사진이 가진 특유의 관심을 펼쳐 보인다. 사진작가는 “어떤 인간적인 것도 내게 낯설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매플소프는 자신의 섹시한 사진도 포함시킴으로써, 세상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지만 스스로는 사진의 소재가 되지 않겠다는 사진작가의 신과 같은 거리감, 즉 전형적인 사진작가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진은 인식론적 주장을 편다. 그것은 사진은 소재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는데, 이 진리는 사진으로 포착되지 않았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인식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진작가들은 잘 모르는 사람을 가장 잘 찍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진작가들은 잘 아는 사람을 가장 잘 찍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이 모든 주장은 소재에 대한 힘을 주장하는 것이다.
매플소프의 주장은 이보다는 더 온건하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찾지 않는다. 그의 사진들은 진리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소재를 약탈하는 사진작가가 아니다. 그는 관음증적이지도 않다. 그는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매플소프가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게임의 법칙은 소재가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과 피부의 결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검은색의 다채로움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그의 유려함과 섬세함을 보면, 확실히 그의 사진은 기록하고자 하는 충동보다는 예술이 되고자 하는 충동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매플소프라면 아마도, 자신의 사진은 스스로가 갈망한 기록이라고 말하려 할 것이다.
매플소프는 구도에 잡히는 모든 것을 찍고 싶어한다(그 소재들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전쟁 사진이나 사고 사진을 찍지 않을 것이다). 그가 찾는 것, 즉 ‘형상Form’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의 본질, 혹은 있음isness이다. 어떤 것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그 진리의 가장 강력한 버전인 것이다.
나는 매플소프에게 그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선다면 어떤 포즈를 취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에게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이 책의 제목에 내포된 이중적 의미를 시사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의 ‘어떤’이 있고, 자신있고 확신 있고 명백한 부분이 있다는 의미에서 ‘어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찾아낸, 혹은 확실성이 있다고 부추겨진, 혹은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이 위대한 사진작가의 관찰과 만남이 담긴 사진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 사진들이 매력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