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이 어떤 열매, 꽃 또는 갑자기 타오르는 꽃잎을 향해 내뻗친다.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그 시도는 열매의 무르익음, 꽃의 아름다움, 꽃잎의 불타오름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지려는, 가까이 접근하려는, 불타오르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에서 그 손이 대상을 향해 충분히 움직였을 때, 또 다른 손이 열매로부터, 꽃으로부터, 꽃잎으로부터 튀어나와, 우리의 손을 맞잡기 위해 내뻗친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의 손은 열매의 닫힌 충만함 속에서, 꽃의 열린 충만함 속에서, 작열하는 손의 폭발 속에서 응결된다. 이 순간 발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알렌카 주판치치, 「구멍 뚫린 시트의 사례」(김영찬 외 역, 『성관계는 없다』, 211-2).
주판치치의 이 말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으로는...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컨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 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donner ce qu'on n'a pas,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l'aiment, 즉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l'aimé , 즉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 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55-6.
일전에 넬 4집 앨범인가 나왔을 때, <어떻게 생각해>라는 노래를 들으며 꽤나 슬퍼했던 적이 있었다. 그 가사는 이렇게 된다.
당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내 몸을 맡기고
믿음으로 무장한 관계인것처럼.
하지만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나의 마음 속에 날 가득 채우곤
마치 나는 없고 온통 당신 뿐인것 처럼.
평행.
그저 바라볼 뿐 끝내 서로 닿지는 않을
우리의 마음.
끝내 서로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참 이상한 일이죠
우린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고 있고
어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건 이름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설명해.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
열리지 않는 마음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한 주판치치와 보조비치의 언급들은, 오히려 이런 불일치와 결여야 말로 사랑의 필수 (구성)요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더 이상 이런 노래의 가사를 보면서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앙가주망'인 셈이다. 다시 말해 관계의 지속은 섣부른 '이해'와 '앎'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관계는 죽어버린다(그러고보면 내가 가장 싫어하고 상처를 많이 받는 말 중 하나는 "너는 ~이다."라는 식의 말이다. 나는 그게 아닌데... 그 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그 결여가 칼날이 되기도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잘 안다고(자식이 부모를 잘 안다고) 너무나 쉽게 착각하고 있듯. 그러면 서로에 대한 '앙가주망'은 철회된다. 그 대신 남는건 더 극심한 허무, 고통, 허울 좋은 의무들 뿐(오히려 이게 신파와 상처의 근원이겠지). 그 대신 나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구속,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의지와 참여와 책임.. 그리고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처와 결여와 공백에 나를 열어두기, 그러면 그 상처와 결여와 공백은 오히려 무한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상처없이 관계는 열릴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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