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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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8/04/23 09:51

이사야 벌린(『낭만주의의 뿌리』)은, 낭만주의는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도 없고, 그 구체적 특징을 자세하게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쉽게 좌절되는 까다로운 사조이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 유산을 물려 받은 사조들 사이에 그 어떤 유사성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예컨대 파시즘과 실존주의), 두 가지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두 개의 원리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벌린은 한글판으로는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사상사/지성사적 탐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원리란 각각 "의지의 필연성"과 "사물의 구조의 부재"이다.

"의지의 필연성"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인간의 의지는 어디에나 있고 그 의지는 그 무엇도 억누를 수 없다. 물론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의 의지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특정 몇몇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통해서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빚을 수 있도록 창조할 수 있다'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구조의 부재"는 간단히 보면, '모든 사물의 구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부족한 인간들이 제멋대로 파악하려고 드는 순간 사물은 그 자체가 될 수 없게 되거나, 그 자리에 없게 되거나, 혹은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사물의 구조 자체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구속하는 힘이니 있어서도 안 된다.'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내 멋대로 정리;)

이 두 원리 사이의 결합, 그리고 이 두 원리들이 다른 어떤 사회적/국가적/문화적 상황과 맞물리느냐에 따라 수많은 변종들이 만들어졌다. 벌린이 보기에는 18~19세기의 수많은 사조들은 물론이거니와, 20세기 들어서 나타난 파시즘도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며,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이 두 원리들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인간의 의지는 필연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 보는 신비주의적 낙관주의. 다른 하나는 "인간은 의지도 있고 이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을 알 수도 없으므로, 우리들 운동의 결말은 예측할 수 없다. 그 결말은 어쩌면 우리들의 파멸일지도 모른다."고 보는 냉혹한 비관주의. (벌린에 따르면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해 왔다.)


왜 이런 포스팅을 하냐면, 며칠 전 하워드 진과 관련한 포스팅을 우연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랫만이었다. 4년 전에 그의 책 한 권을 가지고 세미나 한 이후로 그의 책을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왜냐면 성벽이 맞지를 않아서 -ㅠ- 도무지 참고 읽을 수가 없었다)... 어쨌건 그 포스팅에 링크된 유튜브 동영상을 보게 되었고(클릭), 왠지 선동되는 기운을 받아버렸다 -_-.... 쿠워워워 ^&%#$%#$#$^##@. 하워드 진의 말을 (나쁘게) 요약하자면 뭐 이렇다.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 살아주지 않아요! 세상은 물론 더럽죠!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든 좋게 바뀔 수 있어요! 우리의 의지로, 노력으로! ... 다소 신비주의적인 낙관주의랄까. 그의 낙관주의가 낭만주의의 유산에 기반해 있다는 점은, 그가 "불확실성에 대한 긍정"을 모토로 내세우기도 한다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의 낙관주의란 '근거'가 없다. 그래서 그는 "불확실성에 대한 긍정/낙관"을 내세운다. 예컨대 정부는 민중을 억누를 수 없고, 운동이 다 죽은 것 같아도 사실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가 함께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방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 정부, 의회, 더 나아가 세계 기구들은 우리를(people) 대표할 수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운동을 통해 그것들과 싸워야하고 그것들을 변혁시킬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갖가지 저항들, 그리고 절대 권력과 맞서 승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민중의 운동이 때때로 승리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쨌거나 더 나은 사회와 국가를, 더 나아가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헉 어쩐지 괜시리 힘이 된다 -_-...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다소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낙관주의가, 적어도 한국에(다른 사회권은 잘 모르니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두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한 의지와 노력, 운동의 지나친 강조는 사실 외부에 대한 노출에 너무나 취약한 것이어서, 역자의 말을 빌자면 어떻게 "지랄 발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말들은, 사실 현재의 제도랄까 습속들이랄까,에 대한 강력한 거부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거부란 사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부인(disavowal)'에 가까운 것이어서ㅡ주체에게 외상을 주는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ㅡ주체의 분열이나 심지어 '정신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는 흡사 전쟁을 상기시키는 '혁명'도 싫고, 여러 가지 '사회 운동'들의 "(푸코의 말을 빌자면) 전쟁 모형"에도 염증이 난다. 푸코에게 "전쟁 모형"이란, "한 사람이 반드시 상대방을 눌러버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가지는 "효능" 때문에, 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실상보다 "더 큰 정치적 무게"를 가진 양 착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쟁 모형"은 우리에 반대하는 '적'들이 있고, 그 적들을 파괴하고 '우리'가 승리하면 세상은 아름다워지리라는 생각들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상황이 변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전쟁 모형이 직접적으로 타자에 대한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워드 진의 말이 선동적으로 느껴지면서도 괜히 힘을 북돋아주는 이유도, 사실 명쾌하게 적을(정부/국가/의회 권력들) 설정하고 있으며 그 적을 무찌르는 것은 '우리들'이 모이는 것만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하면서도 낙관적인 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소위 '사회 운동의 대부'라는 사실이 끔찍하리만큼이나 싫다. 그의 책이 또 한 권 번역 출판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제목을 한국어로 하자면 '정부가 억압할 수 없는 힘' 정도? 아마도 내용은 '민중people'은 정부/국가가 아무리 억눌러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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