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편 강둑에 서서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지고 가부장제와 백인들의 관습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대하는 자세(counterstance)는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의 결투 안으로 우리를 가둔다. 경찰과 범죄자처럼 사투를 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는 폭력의 공통 분모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하는 자세는 지배적인 문화의 관점과 신념을 반박하며, 이로 인해 반대하는 자세는 자랑스럽게 도전적인 것이 된다. 모든 반항(reaction)은, 그것이 저항하고 있는 것에 의해 한정지어지며, 또 그것에 의존한다. 반대하는 자세는 외부와 내부 모두에 있는 권위의 문제로부터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방식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새로운 의식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길 위에서, 우리는 반대편의 강둑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 사투하는 두 전투원들 사이의 분열이 어떻게든 해소될(healed)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쪽 강기슭에 한 번 그리고 다른 쪽 강기슭에 한 번 서서 큰 뱀과 독수리의 눈을 통해서 보게 될 것이다. 혹은, 아마도 우리는 지배 문화를 벗어 던지고, 그 지배 문화 모두를 잃어 버린 목적인 양 청산해버리고, 경계를 건너서 완전히 새롭고 분리된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반항(react)하지 않고 행동(act)하려고만 결심한다면 가능성은 수도 없이 많다.
아, 좋다 :). 비슷한 말로는, "적을 공략하기 보다는 낙후시켜라"라는 말이 있겠지. 조이여울씨가 한 말이던가? 물론 이런 생각과 말은, 사실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되고야 만다. (물론 안잘두아의 글과는 상관이 없지만) 어느 사범대의 남자 교수가 한국의 페미니즘은 너무 적대적이라며 좀 더 온화하고 조화 지향적인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척하지만 결국 비난하고야 말 때, 하지만 어떤 학생이 그런 발언을 비판하자 솔직히 자기는 5년 동안 여성학 책을 안봐서 잘 모르겠다고 뻔뻔하게 변명하고야 말 때, 그 남자 교수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은 그야말로 당장 태워없애 버려야하는 쓰레기가 될 것이다(귀가 썩는다;). 또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관망자의 위치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만하는(나도 이럴때가 많은데;)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때도 진정성이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치만 적어도 안잘두아의 손을 통해 나온 글이라면 신뢰할 수 있겠지.
나는 지배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 깨어질지 몰라 (주제넘게) 걱정스러워 할 때도 있다. 저렇게 하다가 무너져 버리진 않을까. 너무 힘들지 않을까. 나같이 어디에도 잘 끼지 않으며 자의식도 세고 말도 많은 회의적인 개인주의자들 때문에 힘이 더 빠져버리지는 않을까... 그런데 때로 어떤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불편해서 피하고야 말 경우도 있다. 자기는 다 안다는(Know-It-All)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볼 때, 뭐든 다 알 수 있으며 알고 있다고 여기는 '아는 주체(knowing subject)'들을 볼 때. 혹은 그 "자랑스럽게 도전적인" 표정과 태도들이 진정성으로 느껴지지 않고, 왠지 겉도는 자존심으로 보이거나 이 사람이 가진 인정 투쟁의 무기로만 되었구나 싶을 때. 그리고 그 자존심과 무기가 나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물론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그 어떤 것을, 남들 눈엔 뵈지 않는 품 안에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와 아스카가 가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잠재된, 그러나 틈만 나면 튀어 나와 자의식 강한 자기 자신마저 당혹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제발) 나를 봐 줘"라는, 그 절박한 인정에의 욕구.
이는 "우리는 깨끗한 척 해봐야 누구나 다 더러워", 라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던 누군가의 인식과 같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반/행위(re/act)하지 않는 자에게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기분이 한 없이 "더러워"진다. 설령 누구나 다 더럽다고 할지라도, 그 차이가 오십 보 백 보라고 할지라도, 그 차이에는 오십 보 만큼의 차이가 있으며 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죽어도 오십 보는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채식을 선언한 사람이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볼 때 역시 정치고 선언이고 실천이고 뭐고 다 소용없구만 하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은 물론 본인의 자유다. 비정규직과 노동 운동을 말하고 마이너리티의 권리를 말하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껌을 내미는 사람들을 냉혹하게 내치는 것을 보고 역시 너도 똑같은 놈이구만 하고 비웃는 것도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러한 관찰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차이인 오십 보가 그 사이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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