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저서 <대처리즘의 문화정치(원판은 Stuart Hall, The Hard Road to Renewal: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 London: Verso)>가 출간되었다기에 리뷰를 옮겨 두고 짤막한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일단 리뷰부터.
한국일보(08.02.11) 이왕구 기자(원본) [강조는 namunnib]
노동자·농민·88만원 세대는 왜 좌파를 등졌을까
좌파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중소자영업자, 노동자와 농민, 88만원 세대들…. 좌파진영에 표를 던져야 할 이들은 왜 보수정권의 등장을 염원했을까?
이명박 후보의 압승으로 귀결된 지난 대선은 좌파진영에 심각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성별, 지역, 세대를 가리지 않고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투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 노동당 정권의 경제실정을 비판하며 장기집권(1979~1990)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의 출현을 연상하게 한다. 대처의 성공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경제드라이브의 성공 때문이었을까?
최근 발간된 영국의 좌파 문화 이론가인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서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발행)는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대처리즘의 성공요인을 들여다본다.
경제정책의 성공 뿐 아니라 대중의 도덕적 복고주의를 자극함으로써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전통적 계급장벽을 뛰어넘은 이 같은 성공을 저자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대처는 탈학교화, 관용적 교육 등이 떠받들여지던 학교현장에 높은 교육수준의 회복과 권위의 수호 같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했고, 권위와 사회적 가치의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필요하다면 도덕적, 법적 무력을 정상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부과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대중들에게 전파시켰다.
좌파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헤픈 국가가 벌지도 못하는 부를 함부로 써버리고 일반인들의 자립을 해친다”는 담론으로 대항했다.
또한 복지정책의 수혜자를 사회가 주는 혜택으로 살아가며 제 몫의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자신들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치환해 인종주의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런 도덕적 리더십을 포기한 좌파정당은 정책의 유효성과는 별개로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더 타임스> <선> <이코노미스트> 같은 대중매체들의 도덕주의 전파도 대처리즘의 성공에 한몫을 했다.
그렇다면 좌파들이 대처리즘의 성공에서 배워야 할 점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계급정치에서 탈피해 문화적 주제에 주목해 대중을 블록화하는 방식으로 지지를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역자인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홀은 1980년대의 영국사회라는 특수한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분석은 시공간차이를 넘어서 문화의 정치성을 주목하게 한다”며 “진보 역시 전통적 지지자를 결집하기 보다는 이른바 전통적인 진보세력 속에 내재한 보수적 요소(인종주의, 가부장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성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정체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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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가 집권하던 1980년 이후 약 11년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왠지 귀가 솔깃해지는 분석이란 생각이다.
기사에서 기자가 말하고도 있는, 지난 대선 때 많은 이들이 "제 계급을 배반했다"는 식의 분석은 정말이지, 온당치 않다. 즉 한 유명한 '어르신'의 말마따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으로 분석하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88만원 세대, 노동자, 농민은 반드시 민노당이나 사회당에 투표를 해야 했나? 대체 무슨 근거로? 만약 그 당들에 투표를 했으면 제 '계급'에 알맞은 투표를 한 것인가? 이 두 당이 언제부터 그들을 대표했는가? 홀의 신랄한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오, 500만 실업자가 모두 민노당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대는 지금 어디있는가?"
영어 단어 <representation>은, <재현>이란 뜻과 <대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국 말로 번역했을 때 굉장히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두 말은, 실상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다. 맑스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참조하면(강조는 namunnib),
이들은[* 소농계급]은 거대한 대중을 이루는데, 그 성원들은 삶의 조건이 비슷하지만 서로간에 다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들의 생산방식은 이들을 상호교분하는 게 아니라 서로 고립되도록 만든다. [...] 이들은 따라서 의회를 통해서든 대표자 회의를 통해서든 자기 이름을 내걸고 자기 계급의 이해를 집행할 능력이 없다. 이들은 스스로 대변하지 못하며 대변되어야만 한다. 이들의 대표는 또한 이들의 주인, 이들 위에 군림하는 당국, 다른 계급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며 저 위에서 비와 햇빛을 내려주는 무한한 통치권력의 모습을 띠어야 한다.
무릎이 절로 쳐지는 구절이다. 맑스는 <재현>과 <대표> 사이의 어떤 균열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젝은 자신의 글 Against Human Rights에서 맑스의 글에서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도 대표와 재현 사이의 차이를 깊게 인식하지는 못하나, 스피박은 Can the Subaltern Speak? 에서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깊게 분석한다. 스피박의 분석을 참조하고 나의 해석을 곁들여 말하면, 누군가가(정치인이) 대통령이 된다고ㅡ즉 누군가가 국민의 투표를 통한 합의의 결과 국민들의 <대변자> 혹은 <대표자>가 되겠다고ㅡ나섰을 때, 그/녀는 이미 순수한 의미에서 <대표자>가 아니다. 이미 그/녀는 스스로를 <대표자>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재현>체계는 그 <대표자>를 둘러싼 의미화 과정을 좌우하는, 정치적 투쟁의 장소이다. 꼭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정당>은 물론 <대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대표>와 <재현>이 완전히 제도화 된 것 아니던가.
바로 이 순간 <representation>이 가진 두 뜻, 즉 <대표>와 <재현> 사이의 균열이 잘 나타난다. 스피박은 이를 "The complicity of Vertreten[대표] and Darstellen[재현], their identity-in-difference as the place of practiceㅡsince this complicity is precisely what Marxists must expose, as Marx does in The Eighteenth Brumaireㅡcan only be appreciated if they are not conflated by a sleight of word."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복잡한 문장을 대충 발로 한글로 옮겨 보면(어려워서 -_-;), "대표와 재현의 공모성complicity, 그리고 실천의 장소로서 대표와 재현의 차이-속의-동일성은, 단어의 속임수[representation의 애매모호함]에 의해 혼합되지 않아야만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맑스가 <브뤼메르 18일>에서 하고 있듯이 이 공모성은 정확히 맑시스트들이 반드시 폭로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와 <재현>은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또한 이 둘은 분명히 공모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이 공모성에 대해서 좌파는 폭로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서 스피박의 분석은 홀의 분석과 만날 수 있다. 홀이 보기에 대처와 보수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떤 <정치적 요인>이나 <정책적 요인>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문화적 요인>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화적 요인>이 진짜 어떤 문화 컨텐츠적 요인ㅡ즉 연극, 공연, 영화, 소설 등ㅡ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사에서도 "문화적 주제"니 어쩌고 하고 있지만, 이는 방송이나 신문 같은 언론 매체, 특히 어떤 이미지(재현)를 전파하는 데에 있어 '권위'가 있는 사회문화적 장치들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에 더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떻게 이 담론들이 유통되고 있는가, 누가 그 담론들을 유통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도 이해해야 한다. 즉 대처리즘의 집권은, '이미지'의 문제,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재현>의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라 보아야 한다. 대처와 보수당의 장기 집권은, 당시 영국의 현실을 둘러싼 재현 투쟁에서 노동당을 압승했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홀의 말을 좀 더 들어보면(제임스 프록터, <지금, 스튜어트 홀>의 책에서 재인용, 강조는 namunnib)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대처가 내세운] 각종 세목들을 믿으면서 대처주의에 표를 던진 것이 아니다. [...] 이데올로기로서 대처주의가 한 일은, 사람들의 공포, 불안, 정체성 상실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이다. 그것은 정치를 이미지로 생각하게끔 만든다. 대처주의는 우리의 집단적 환상,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영국, 사회적 상상력에 호소한다. 좌파가 '자신들의 정책'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대처 여사는 이러한 이슈들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물론 선거에서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난 대선 기간 동안 정말이지 아무런 특색도 없어 뵈고 존재감 없던 정동영 후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민노당 권영길,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역시 재현 투쟁에 있어서 2MB에게 밀려 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지난 선거 기간 동안 2MB이 이미지 게임(재현 투쟁)에서 승승장구 하는 동안, 좌파 진영은 어떠한 재현 투쟁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정책'을 공격하고 얼핏 정책 상의 우위에 선다고 해서, 대선을 둘러싼 재현 투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무심했달까. 혹은 너무 능력이 없었달까. 이를 '위대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이미지 선거"가 되었다고 개/한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60년 전 한국 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언제나 이미지의 문제와 재현의 문제는 선거와 그리고 대표의 문제와 함께 있었다. 그걸 캐치하지 못한 건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과오이다. 오바마와 힐러리 역시도 이 재현의 문제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고 있는가.
위에서 스피박은 <대표>와 <재현> 사이의 공모성을 폭로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폭로 만으로는 사실 부족할 것이다.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폭로> 되었는가. 그 <폭로>역시도 재현 투쟁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폭로 역시도 의미 체계(재현 체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신중하게 관찰하면서 수행해야하는 것이 앞으로의 정치적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재현 체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투쟁도 해야 할 것이고...
또한 지금까지의 과정을 쭉 지켜보건대, 2MB는 완전히 이슈 메이커로 잘 자리잡은 것 같다. 모든 의미들이 통용되는 그 장소를 2MB이 아주 적절히 선취해버린 것이다. 모든 이슈와 의제들은 2MB가 설정한대로 움직인다. 대운하, 영어 논쟁, 부동산 등등. 그런 논쟁들에서 국지적으로 승리한다고 해서, 앞으로 뭐가 잘 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재현의 주도권은 2MB이 쥐고 있는 거니까. 우왕좌왕 하다가 앞으로 5년이 파국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대처리즘의 사례에서 좀 더 배울 수 있는 것은, <포클랜드 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대처 정부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언하여 당선이 된 직후 약 2~3년 간 전혀 맥을 못췄다. 경제 성장율은 늘지 않았고, 경제 침체는 계속 이어졌다. 대처리즘이 이러한 정권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건, 다름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였다. 포클랜드라는 대서양에 있는 매우 조그마한 섬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없었지만, 대처 정부는 아르헨티나와 이 영토의 소유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에 따라 대처 정부는 정권을 궤도에 안정적으로 올려 놓을 수 있었다.
대처는 이 전쟁에 대해서 <경제적 이익>이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처는 이를 <도덕적 명분>으로 정당화 했다(제임스 프록터, <지금 스튜어트 홀>, p.190). 즉 사라져가는 영국성englishness, 갈수록 위기 의식이 감도는 경제 등으로 인한 대중들의 공포를 전쟁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이시키고, 자신의 도덕적 명분으로 이를 정당화하면서 대처리즘은 더욱 강력한 권위를 쥐고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지워져가는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것을 현재에 이룩할 수 있다며 달콤한 이데올로기적 미끼를 던짐으로써 대처리즘은 (부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는 위의 기사에도 등장하는 말인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도 맞물린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대중의 공포, 불안, 잃어버린 정체성"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소함으로써 대중을 움직이는 정치를 일컫는다(Ibid, p.191). 곧 출범할 2MB 정권은 어떨까? 경제위기 이데올로기가 한국을 휘어 잡은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실업 문제로 빈곤문제가 대두된지도 한참이나 흘렀다. 이미 한국 사회를 바라볼 때 불안감 없이 설명하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어딘가 대처리즘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횡행하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든다. 게다가 전문가주의, 추진력, 실용주의 등등으로 스스로를 재현하고 주류 언론 매체들이 그 재현을 뒷받침 하고 있는 2MB 인수위와 2MB은, 홀이 언급하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새롭지만 전형적인 판본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대운하>는 어떨까? 대처리즘의 <포클랜드 전쟁>과 어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대운하는 포클랜드 전쟁과 매우 다른 맥락에 있는 문제임엔 틀림없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대운하는 한국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방심해서는 안 된다. 대운하는 기필코 막아야 하지만, 동시에 2MB 정부의 포퓰리즘에도 대항할 방법들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그건 단지 정책 싸움이라거나 거리의 정치만으로 포괄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이미 그것은 기존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가 이데올로기적 <재현>의 문제의 주도권을 전혀 쥐지 못하면 어떻게 대운하는 막을 수 있더라도, 다른 중요한 일들을 막아 내기란 힘들 것이다..
덧1) 물론 대처리즘의 10여년 간의 성공의 원인을 '재현 투쟁'에서 승리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분명 당시의 어떤 정치경제학적 맥락이 있었을 것이고, 언제나 내재해 있던 자본주의의 위기 아닌 위기가(자본주의는 위기와 불안을 중요한 매개로 작동하므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수한 영국 내의 상황을 알아야겠지만, 지금 내가 알 방도는 없으니..
덧2) 최근 <숭례문 전소 사건>을 둘러싸고 (애도하는 것과는 별개로) 새롭게 민족주의가 시끄럽게 떠오르는 것 같다. 무언가에 의해, 무언가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너무 흉흉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 한데...
덧3)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썼던 좀 부끄러운 포스팅 2008/01/06 - [생각] - "반대 의견은 수렴하겠지만 운하는 건설한다"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있는 듯 하다... 좀 더 생각을 이어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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