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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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7/06/0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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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특정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을 일컬을 때(자기를 그 집단에 동일시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이름’을 부여한다. 어쩌면 이 세상은 이러한 ‘이름’들의 정신없는 향연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본가, 노동자, 여성, 남성, 게이, 장애인, 성매매 여성, 학생, 공무원, 고시생 등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집합 명사’들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규정짓고 있다. 나는 물론 그러한 명사들을 대하면 질식해버릴 것 같을 때도 많으나(다음번에 이러한 점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냥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생각을 할 때도 이제 이러한 집합 명사들이 없으면 더 이상 진척해 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보일 때도 많아 아쉬운 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가 알다시피 이러한 ‘명명naming행위’, 즉 어떤 사람들을 ‘균등한’ 집단으로 묶어 버리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어떤 집단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명명 되는 경우도 있고 별 다른 문제를 양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어떤 집단들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어떤 이름을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특정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집단끼리 치열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승리한 이름이 (적어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집단을 지칭하는 데 주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명명naming의 정치는 오늘날 ‘운동movement’에서 어쩌면 가장 도도한 흐름을 차지하고 있을 ‘정체성의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운동’에 뛰어들려고 할 때, 자신을 (대신하여) 호명해줄 수 있는 어떤 명사가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집회든 세미나든 텍스트에서든 어디든 함께 모여서 ‘와!’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어딘가 유사한 사람들이 꼭 필요할 때도 있다. 그렇게 자신과 동일시 할 사람들과 집단을 찾고, 또 그 집단은 그 집단이 드러내는 어떤 정치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명명행위는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의 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명명행위에 일정한 힘을 할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명행위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이렇게 나의 글에서 ‘대표적 예’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거북함은 잠시 미루어두고) 오늘날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투박하게 사용하고 있는 ‘애자’라든지, ‘병신’등의 표현은 명명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경멸하고 경계해야할 명명행위로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들은 '저속한' 표현들을 사람들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도록, 어떤 ‘대안적’인 이름을 가져와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얼마 전에는 ‘장애우’라는 이름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들(예컨대 영어로는 handicapped, disabled people, differently-abled people 등)이 잠시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토론과 갈등 끝에,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이름은 아마도 ‘장애인’일 것이다(물론 장애우라고 표현하는 단체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면, 이러한 명명행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좋은 이름’으로 가는 어떤 도도한 흐름이다. 좀 덜 차별적으로 보이고, 좀 덜 경멸스러워 보이고,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름으로 호명하기 위해 지난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문제점 중 하나는 아마도 이러한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권'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행’처럼 비춰질 때도 많다. 최신의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예컨대 아직도 ‘장애자’나 ‘매춘 여성’등의 어휘를 사용하는) 보면, 그 사람의 ‘무식함’과 혹은 ‘센스 없음’에 대해 개탄하고 비난하는 경우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얼마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들의 일상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도, 오늘날 ‘좋은 이름’은 눈부시리만큼, 또 종종 우리의 목을 옥죄어 올라올 만큼, 넘쳐나고 또 넘쳐난다. 이러한 좋은 이름들을 보고 있으면 이제 이 세상은 꼭 아름다운 유토피아처럼 보일 때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좋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예 그 집단을 호칭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반발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병신’이라는 투박한 표현 보다는 ‘장애우’라는 표현이 더 걷잡을 수 없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갈보’나 ‘창녀’라는 표현보다는 ‘성매매 여성’이라는 표현이 어딘가 진실을 감추고 있는 불편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위 좋은 이름들이 때때로 폭력적일 수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나는 과외 학생이 “호모 새끼들 보면 다 죽여 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고는 한다. 나는 그 표현을 들으면 그 녀석과 잠시 토론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내가 가진 선생 권력과 나이 권력을 이용하여)그 녀석을 몹시 비난하기도 하나,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썩 불쾌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역겨운 ‘정치적 올바름’ 따위로 자리 잡은 듯한 “동성애자의 권리를 ‘인정’한다.”라는 닳디 닳은 표현보다 훨씬 더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몸 파는 여자들 역겹지 않아요? 어떻게 같이 사나 몰라.”라는 그 녀석의 표현은, 어쩌면 더 감춰져 있는 어떤 ‘진실’들을 겉으로 끄집어내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부쩍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직접적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떤 집담회에서 들었던 웃기지도 않은 에피소드는, 오늘날 그러한 ‘좋은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 즉 어떤 정치적인 도덕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 일부의 허망함을 잘 보여준다. ‘페미니스트’로 분명히 정체화하며 오랫동안 활동해 왔던 한 사람이, 한 ‘게이’를 보고 싶어 한다. 그 이유란 무엇이었을까. 정말 어이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대체 게이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어서, 란다. 자신이 동성애 담론을 접해보고 정치적으로/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연대하고 있지만, 대체 내 주변에 “‘그런’사람들을 본 기억이 없어서, 한번 보고 싶었다.”가 이유라고 한다. 이렇게 나는 나의 투박하고 한편으로는 ‘순진한’ 과외 학생보다, 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그 사람이 더 기만적이고 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체성의 정치학은 오늘날의 정치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 이름을 ‘선언’함으로 패러다임의 전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갈보’, ‘매매춘 여성’이라는 이름에서, ‘성매매 여성’, 혹은 ‘성판매 여성’ 등으로 전환되면서 담론들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가. 그리고 그 변화들은 매우 긍정적이지 않았던가(물론 담론들의 변화가 그러한 새로운 명명행위를 유발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순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명명행위’가 정체성의 정치학을 구성하는 어떤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가공할만한 코미디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명명행위’는 일정한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일정한 진실을 은폐한다. 그 은폐되는 진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는 ‘좋은 이름’들은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이름이 더 좋은가가 아닐 것이다. 또한 ‘나쁜 이름’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경멸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어떤 사람을 대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얼마전 이명박이 '그딴 식'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얼마든 분노하고 지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명명행위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중 하나일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10여년 전에 해프닝으로 끝났던 ‘신지식인’ 담론이 보여준 가공할 코미디를 잘 알고 있다. 또한 과거의 ‘때밀이’가 오늘날 ‘피부목욕전문관리사’가 되고, ‘보험 아저씨/아줌마’가 ‘생활설계사’가 되고, ‘마사지 걸’이 ‘건강관리사’가 되고, ‘노동자’가 ‘인적자원’이 되는 이 현실들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좋은 이름’으로의 변화는 결코 현실의 온건하고 진보적인 발전을 지시하는 것이 아닐 때가 많다. 그것은 현실을 경배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침을 뱉고 경멸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덧_ 우리는 명명행위와 정체성의 정치학이 포괄하지 못하는 수많은 '예외'들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 '예외'가 된 사람들은 역시나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예외'란 항상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잊는 순간 발생하는 폭력들은 결국 또 다른 불행한 결과를 산출해내지 않겠는가.

덧2_ 위에 이어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학이 가리고 은폐하는, '개인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언제나 주시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나(Me)"의 세계, 즉 블로그나 미니홈피등을 통해 유통되어 이제는 참을 수 없는 편두통을 유발하는 이야기들 조차도, 실제로 '나' 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아마도 '나'를 위장한 거대한 담론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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