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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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2008/01/21 00:03

지나간 시간이 그 내용과 관계없이 결국은 수치이자 죄의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나이들어 늙게 되면서 비로소 깨우쳤다. 그것의 시작은 행복하다고 느껴보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감정이 죄의식과 연결되는 것은 무언지 모를 막연한 자신의 과실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느 순간들을 그대로 헛되게 흘려보냈다는 과도하게 예민한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혹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그 소심하게 겁먹은 비굴함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으리라는 지레짐작 때문이다. 내가 늙기 전에는 그것이 단지 개인사의 불행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의 계단을 점점 더 많이 내려오면서 죄의식은 그 자체가 곧 과거의 보편적인 거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어느 순간의 빛나는 기억조차도 그것이 과거의 것이 된 이상 수치나 죄의식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으로 변해버린다. 그 수치는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고 무지와 경솔함에 대한 도덕적 수치이며 필연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해 깊은 환멸과 회의로 종결된다. 수치의 쌍둥이이자 더욱 견고하고 지속적인 형태인 죄의식은 개인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각 기관에서 효소처럼 비밀스럽게 분비되어 배출되는 일 없이 일생 동안 조금씩 쌓이는 매우 비선택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일생 동안 어떤 윤리적인 판단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죄의식,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둔할 뿐이다. 아무런 외관상의 흠 없는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영원한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는 듯 하다. [...]

[...] 죄의식이란 이렇듯 철저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자아를 위해서 발생하며, 그 자체는 숭고한 이상이나 도덕적 결벽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래서 휴머니즘이나 종교적인 헌신과도 무관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단지 사정없이 증폭될 수 있을 뿐이다.

배수아, <훌>, pp. 12-14 [강조는 namunnib]


아... 이걸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느껴야하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단련되는 느낌이다. 나는 죄의식으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래도 죄의식의 컨텐츠는 바꿔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울하지 않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 옛날엔 멋있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매우 구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배우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 역시 지금은 매우 구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느 것으로부터도 전혀 해방될 수 없을 것이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의도한다고 해서 발생할 수 있는 효과도 아닐 것이며, 책을 읽는 행위 그 자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요즘엔, 할일이 없어서 마지 못해 읽는다는 말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읽는다는 말이 차라리 와닿는다. 그렇다면 (요즘엔 몇권 읽지도 않지만) 나는 왜 책을 읽는가? 그게 참...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이지 미스테리다; 흐흐


**

그나저나 "나이들면서 깨우친다"는 말, 옛날엔 무지 불편했던 말이었는데 이제는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깨우친다는 것은, 성숙이란 말과 유사어일 수는 있어도 동일어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깨우친다는 말과 성숙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다른 말이다. "깨우치는 것"은 자아의 (때로는 급진적이지만 대개는 부분적인) 변화를 포함하며, 따라서 깨우친 이후의 자아와 이전의 자아는 전혀 같지 않다. 깨우침의 '번쩍이는 순간'이란 언젠가 반드시 있으며, 그것은 설령 타인에게는 비의적이고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적어도 깨우친 개인에게는 매우 진정성 있는 순간이다. 그 진정성을 따를 것을 선택하면, 우리는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또한 깨우치는 것은 미로에서 헤메는 것이 아니라 그 미로를 거칠게 파괴하고 새로운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는 다르게 성숙은 자아의 연속성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계속 자신을 단절시키는 자아는 성숙할 수 없다. 그리고 성숙은 연속적인 개념으로, 따라서 미래에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과거를 떠올리며 회고적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미로에 익숙해지는 것을 뜻한다. 성숙한 자는 미로에 종속되기 보다는 미로의 주인이 될 것이며, 점차 미로를 즐기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인을 우리의 미로로 초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성숙한 우리는 지나치게 독선적으로 될 수 있으며 권력 지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할 것이다. 성숙은 독이 될 수 있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성숙한 자아는 곧 썩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라면, "나이들면서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들면서 깨우치는" 삶을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나는 항상 단절적으로 나의 삶을 구성했으므로, 한번도 성숙한 적이 없었다(이건 나에게 어떤 특권이나 우월함을 부여한다기보다는, 나를 옹호하고자 함에 지나지 않음). 그래서 나는 항상 날이 서있는 편이다. 미로를 갓 파괴하고 나온 자의 손에는, 해머나 도끼같은 거친 무기가 들려있기 마련이다. 방금까지도 그런 무기를 휘둘렀기 때문에 늘 숨이 차있고 여유가 없으며 지쳐있다. 게다가 새로운 미로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늘 불안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도전정신", "패기" 따위가 아니다. 단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선택할 권리는 갖고 있지만, 어차피 우리에게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성숙한 사람들을 보면 늘 끌리면서도 어딘가 불편하다. 그 사람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은 것 같아서, 그 사람은 나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사람이 나를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늘 그 사람 앞에서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이걸 열등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가 며칠간 헤메었던 미로를 하나 갓 파괴하고 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러니까 아직은 해방의식에 젖어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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