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라캉의 테제(?) 중 하나인 "사랑은 하나의 희극적인 느낌이다"를 기억해두자.
희극 예술과 관련하여,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사물[das Ding]이 대상 층위로 강하하는 것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희극들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숭고한 대상이 결국 그것의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실추된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종류의 실추가 (웃음은 대상의 숭고한 측면을 지탱하기 위해 이전에 투여되었던 리비도적 에너지를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프로이트적 정의와 부합하게도) 우리를 웃게 할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는 훌륭한 희극이 작동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헤겔이 매우 잘 알고 있었듯이, 진정한 희극적 웃음은 조소어린 웃음이 아니며, 남의 불행에 즐거워함Schaden-freude의 웃음이 아니다. 희극에는 한갓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는 진술의 변주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참된 희극들은 외관들 배후의 나체성이나 공허함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보다는 공허함(또는 나체성)을 구성하는 데 종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희극들은 이 벌거벗음이 상이한 여러 각도에서 탐색되고, 그것을 내보이는 바로 그 과정에서 그것이 구성되는 환경들이나 상황들의 전체적 설정을 편성한다. 그러한 희극들은 사물을 옷벗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의 옷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음, 이것은 면이고 이것은 나일론이고, 여기엔 예쁜 신발이 있네ㅡ이것들을 다 한 데 모으면, 우리는 너에게 사물을 보여주게 될 거야." [하략]
알렌카 주판치치, 이성민 역, <정오의 그림자>, p. 248
오오... 음, 인식적인 '충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용한 부분은 "희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이다.
인용한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사랑-대상선택은 대개 승화sublimation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파악하면, 사랑-대상을 숭고하고sublime 고상한 위치로 격상시킴으로써, 대상에 초월적인 지위와 접근불가능성을 상상 속에서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그 대상은 "비인간적인 파트너"가 되고, '숭배'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이상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타입의 사랑-대상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승화를 거친 사랑-대상선택은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승화' 방식과 맞물린 사랑 양식을 대상에 대한 폭력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대상을 '승화'하지 않고서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승화 과정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특수한 승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이 보기에 이 특수한 승화는 "향유를 인간화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전개하는 주판치치의 모든 논의는 저기 인용한 부분에 압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승화 : 정신분석학에서 승화란, 리비도(충동의 심리적 측면)가 단지 성(性)적인 대상에게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비도의 투사 대상에 어떤 변화를 주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즉, 승화란 "사회적 평가가 참작되는 일종의 목표 수정과 대상의 변경(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이다. 우리는 리비도가 asexual하고 사회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을 향하고 있으면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그만 두고 다음에 더 얘기하고 싶지만, 그냥 한 가지만 더 언급해보자. 오늘날 사랑에 대한 표상체계를 굳이 구분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그야말로 전통을 물려받아 상징들과 기표들의 그물망 속에서 노니는 사랑에 대한 표상이고(예컨대 완전히 통속적인 이성애 연애와 결혼 등의 사회제도 장치들 속에서의 사랑), 다른 하나는 그런 것들을 싹 치워버리고 '이자-관계'(혹은 '삼자-관계' 속에서) '순수한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표상이다. (물론 각 개인들이 하고 있는 개개별의 '사랑'은 이 표상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들은 그냥 '있는' 것들이고, 단지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표상 체계가 이러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전자의 것일테고,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오는 사회생물학적 서적들의 설명은 후자에 가까운 것일테다(혹은 섞여 있다. 사실 후자의 것은 어느 표상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퇴행적 나르시시즘에 기반해 있으니). 하지만 이러한 표상체계에서 잊혀지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 사랑이란 행위 그 자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의미인지에 대한 의문들이다. 다들 알겠지만 사랑은 제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욕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랑은 그 자체로 욕망 체계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욕망을 초과하거나 혹은 심지어 욕망의 순환을 중단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주판치치의 글은 이러한 생각을 진척시키는 데 힌트를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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