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좌파 저널리스트 Marco Cicala는, 내게 그가 최근에 겪은 이상한 경험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가 한 기사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을 썼을 때, 편집자는 그에게 이 용어가 진짜로 필요한지에 대해서 물었다. 즉 이 단어를 “경제”와 같은 동의어로 바꾸어 쓸 수 없냐는 것이다. 최근 20~30여 년 간 이 단어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그 무엇이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몇몇의 이른바 고전적인 맑시스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자본주의에 대해서 더 말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정치가들, 노동조합원들, 저자와 저널리스트들, 심지어는 사회과학자들로부터도 무턱대고 공격받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있었던 반세계화 운동의 격랑은 어떤가? 이것은 이 진단에 분명히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엄밀한 관찰은, 이러한 운동이 또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경제 메커니즘, 작업 조직의 형태들, 이익의 추출에 중심을 둔―으로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어떻게 굴복하고 있는지를 빠르게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통 통속적인 반미주의의 형태 속에서) 누군가가 “세계화와 그 행위자들(agents)”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적은 형체가 부여된다(객관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주요 과제가 “미 제국(the American Empire)”과의 싸움인 곳에서는, 만약 반미주의자라면 그 어떠한 동맹도 정당하다. 그래서 고삐 풀린 중국의 “공산주의적” 자본주의, 폭력적인 이슬람의 안티-모더니스트들 뿐만 아니라 벨라루스의 불쾌한 Lukaschenko 체제조차도 진보적인 반세계주의자이자 무장-한-동지(comrades-in-arms)들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썩 평판이 좋지 않은 “대안적인 근대성(modernity)”의 다른 판본을 갖는다: 즉 자본주의 그 나름으로서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의 기본적인 메커니즘과 대결하는 것 대신에, 우리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더 “진보적인” 프레임 속으로 동원하는 (조용한) 관념과 함께 제국주의자들의 “월권”에 대한 비판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개념을 비웃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류는 “후쿠야마주의자”이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가 최종적으로 발견된 공식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공식을 단지 조금 더 관용적으로라거나 하는 식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하고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자연화(naturalization)”를 승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오늘날의 세계적 자본주의가 그것의 무한한 재생산을 막을 수 있는 충분히 강력한 반대들을 포함하고 있는가?
지젝의 글은 최근에 영화 <300> 관련해서 쓴 것 이외에는 잘 보질 않았다. 예전엔 몇 개월 간 열심히 보려고 노력했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그의 글을 보자 어느 정도 반갑기는 하다. 나름대로 신선한 이야기를 계속 던지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한 번 영어 공부 삼아 번역하려고 한 시간 쯤 붙잡고 있다가 헤겔의 이성의 간계the Cunning of Reason등을 들먹거리는 지젝의 화려한 논변에 지쳐버려서 손을 놓아버렸다(트래픽 인 우먼이나 계속 봐야는데^^;). 그래서 그냥 번역한 일부분만 간단히 옮겨둠. 아, 그나저나 진짜 진정으로 정말로 참말로 헤겔을 읽어야 하나요? ;ㅁ; 그래도 내가 최근에 발견해서 종종 들어가고 있는 한 블로그에서 본 것인데, 5만원인가 하던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 생각보다 정말 재밌어서 자기 전에 읽고 잔다고 한다. 보면 한 없이 졸려져서 자기 전에 보면 좋은 책인지 뭔지는 아직 모르나(^^;)
어쨌든 나야 아직 학교에 머무르고 있으니까 그나마 '자본주의' 운운하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 '밖'은 아직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드니 말이다. 하긴 내가 들었던 그 어느 수업에서도 '자본주의' 운운했던 수업이 없었다. 정치경제학 수업을 들으면 좀 다를 일일지 모르지만.. 학내에서도 몇몇 학생운동 단위들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도 흔치 않다. 진정 자본주의의 자연화인가. 아니, 자연화라고 무턱대고 현상-기술적/관찰적으로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자연화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자연화되는 것처럼 생각될 뿐이라고 생각하는게 속 편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까운 진술일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 자본주의(여기서 사용되는 자본주의는 특정한 경제적 체제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에 봉사하는 정치적인 실천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즉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말.)에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대응하는 (다소 투박할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 비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셸던 월린은 '비전'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적인 보고"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이다(<정치와 비전>, p.51). 꼭 밀즈가 말했던 "사회학적 상상력"과 비슷하게.
오늘날 부족한 것은 후자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이외의, 혹은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정치경제학적 체계를 사고하는 것은 실상 어려운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일단 한번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상상력은 콜리지(Coleridge)가 말했던대로 "모든 것을 하나의 우아하고 지적인 전체로 형성하는" 유연한 "조형적"힘이 될 수 있다(Ibid.). 즉 우리는 우리의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혹은 우리가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체제의 질서를 볼 수 있으며, 그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원리와 가정을 총체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국지적일 수도 있고 전세계적일 수도 있다. 그러한 탐구를 기초로, 어떤 다른 정치(경제)학적 입장을 창조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월린도 지적하고 있는 바 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러한 정치적 상상력은 어떤 '음모론'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릴 수도 있다. 오늘날 세계를 총체적으로 그려보려는 하는 시도들은, 대부분 '음모론'이라고 일축되어 버리고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어떤 한 입장이 '비현실'이 되고 '음모론'이 되는 순간 그것은 즉각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열망, 과학에 대한 충동..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젝도 어디엔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허위 의식' 따위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한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월린은 상상력을 "친숙한 방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는 이론가의 수단"이라고 지칭한다. 즉 우리에게 '친숙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더 나아가 이 '친숙한' 방식을 폐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치적 상상력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상상력'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그것이 틀렸다는 점이 발견되었을 때 얼마든지 폐기하고 다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쓸데없이 주절주절 말이 길었네; 그나저나 여기 약간 번역해온 글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는 글이다. 제목이 상당히 선정적이지 않은가? 폭력이나 생태적 파국에 대한 비판들을 '검열(censorship)'이라고 부르다니-_- (물론 지젝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어떤 자본주의적 증상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게다가 무려 "대중들을 위한 아편" 운운한다. 이 할아버지 진짜 매드니스 드라이브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렇게 보면 지젝은 예나 지금이나 뭔가를 후벼파는데 '강박증'이 있지 않나 싶은 느낌이다. 그만큼 또 상당히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번역하는 건 힘들어도 꾹 참고 리딩은 한 번 더 시도해 볼만할 것 같음 ~_~
그나저나 존 벨라미 포스터의 책들을 읽어야하는데;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는 무척 재밌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