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의 이름은 <Peter Pan Syndrome>이다. 아마도 이 말을 들었을 때 쉬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어른 아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유예하면서 계속 아이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기의 어렸을 적의 추억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나이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책임 회피 등등의 표현이 피터팬 신드롬에 중첩된다.
피터팬 신드롬이라는 말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보면(백과사전 링크), 어떤 임상 병리학자에 의해 일종의 ‘정신병’으로 정의 내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그 ‘병’으로 정의내린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군상들을 ‘병’이라고 명명하는, 그 정신 병리학이라는 의학 담론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고픈 마음이 있다(물론 이미 연구되어 있다). 결국 피터팬 신드롬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좋은 의미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내가 굳이 이 블로그의 이름을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한 일종의 변명이자 이유를 밝히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피터팬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한다.
피터팬이 사는 곳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네버랜드Neverland>이다. 여기서 네버랜드라는 말이 단순히 피터팬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후크선장이 사는 동화속의 특정한 가상의 공간을 지칭한다고 보면 이야기는 너무나 허무해 진다. 여기서는 다만 네버랜드가 그 단어의 구성에서부터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도록 하자. 예컨대 존재하지 않는never 곳land, 혹은 (‘어른’들의 상징계에는) 존재하고 싶지 않은never 곳land, 혹은 (언제나)아니라고 말하는never 곳land, 혹은 (모든 것을)부정하는never 곳 등등. 나는 여기서 특정한 한 의미만을 네버랜드를 규정하는 데 쓰고 싶지 않다. 네버랜드에는 오히려 이 모든 의미가 다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네버랜드는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화 해보면, ‘어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특수한 공간이다. 네버랜드는 다만 어른들의 상징계에 아직 포섭되지 않은 아이들만이 ‘인식’할 수 있는 특이한 상징계이다. 어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아이들에게는 실재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실재하는 네버랜드는, 어른들의 상징 질서와는 다른(현실세계) 상징질서를 온전히 갖고 있다. 그 자체로는 열등하다, 혹은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다른’ 공간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런 가치 판단을 하고 있었다면 당신은 이미 '어른들'의 상징 질서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그이다. 우물에 독타기.)
여기서 이 말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ㅡ그러나 그의 논의를 단순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ㅡ지젝Zizek의 논의를 참고해 보자. 흔히 상징계와 실재계의 관계를 논의함에 있어, 라캉을 접한 사람들은 실재계를 상징계에 선행하며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오해하고는 한다. 그러나 오히려 지젝에게 실재계는 상징계가 구성되고 남은, 일종의 ‘잉여’(적절치 않은 듯 하지만)다. 상징계가 하나의 세계를 완전하게 구성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항상 상징 질서에 포획되지 않은 어떤 잉여들은 반드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상징계의 완전한 질서를 ‘위협’하는 적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실재계는 영원히 변화한다! (더 발전되고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자)
어른들의 상징계는 결코 네버랜드를 설명할 수 없다. 거기다 네버랜드는 어른들의 상징 질서를 적극적으로 거부never한다. 게다가 아이들이 어른들의 지배를 벗어나서 날아가서 자신들의 어드벤쳐를 창조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현실 세계를 거부never하며, 그 자체로 체제 질서의 유지에 ‘적대적’이다. (설명할 수 없고, 심지어는 인식할 수조차 없는never 공간은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이는 이미 계몽 서사와 근대적 기획들의 온갖 ‘만행’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이미 상징계와 그 속의 대타자에게 포획된 어른들은 자신들의 상징계 밖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다. 그들은 다만 네버랜드를 말하는 대상들에게 ‘어리다’, 혹은 ‘미쳤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얄팍하고 허무하며 나약한 상징체계를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블로그의 이름 <Peter Pan Syndrome>은 이러한 이유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지배적인(소위 ‘어른들’, 그리고 ‘철든다’는 것 등) 상징체계에 아무렇지도 않게 포획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때로는 소극적인 저항의 노력이며, 그렇게 마구 포획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징 질서를 단순히 부정never하는 것이 아니라 네버랜드라는 공간의 실재하는 세계처럼, 생성의 힘을 믿고 싶다는 또 다른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상징 질서를 긍정하는 피터팬과 같은 적극적인 행위성을 담지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를 긍정한다면, 네버랜드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즉자적인 공간이 되며, 그 속의 대표적인 행위자 피터팬은 사르트르식의 주체성(subjectivité)을 갖고 있는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은 ‘주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의 중심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체성은 존재들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며, 따라서 엄청난 고뇌를 제공하는 어떤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주체성을 자유, 초월의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동화 <피터팬>에서도 피터팬 그 자신은 제인의 부정에 의해 힘을 잃는 팅커벨과는 달리, 그리고 조금은 ‘어른스러운’ 제인과는 달리 자유롭고 초월적인, 주체성을 유지하는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결코 흔히 오해하기 쉬운 ‘아이 같은’ 책임감의 결여 등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피터팬은 그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피터팬을 어리석고 아이같은 혹은 책임감이 없는 것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상징 질서에 포획되어 그 안에서 마리오네트 놀음을 하고 있는 '어른'들이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보이게끔 할 정도로.
그런데 여태까지 내가 긍정해온 피터팬 신드롬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주체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하나의 ‘욕망’에 불과하다(따라서 그 주체성이란 것은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영원한 '행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시해두자). 또한 네버랜드의 실재성은 어른들의 상징체계가 엄연히 실재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부정never하고 있기에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내가 부정하고 싶은 온갖 기의들이 가득한 ‘어른들’의 상징 질서의 ‘중력’의 영향권 안에 존재해 있는 나조차도, 그런 네버랜드의 실재성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never 곳land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들어낸 그러한 네버랜드의 ‘의미’를 추구한다. 실로 모순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여기서 내가 규정하는 네버랜드의 의미가 더욱 구체화 된다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이러한 행위들ㅡ상징질서를 거부하고 이에 저항하는(특히 ‘여성적’인)ㅡ이 취하는 형식들을 ‘히스테리’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것은 대타자에게 의문을 갖는 태도이다. 지젝이 말한 “Che Vuoi?”라는 질문은 영어로 번역하자면 “What do the great Other want me to do?”이다. 이 질문은 어른들(내가 정치적으로, 심정적으로 긍정할 수 없는 것들)의 상징 질서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요구를 통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런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나와 상징 질서와의 분리와 거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도 그 상징질서 자체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다는 허망한 믿음은 가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징후적일 따름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징 질서의 실패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질문하는 주체의 주체성의 순간을 지시하는 것이다. 네버랜드는 탈주적인 ‘공간으로서의 은유’를 보증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다른 의미들도 중요하게 포함하지만, 우선 그것은 상징 질서에 포획되는 것을 거부never하는 공간land의 의미를 띄게 된다. 그렇기에 피터팬 신드롬은 피터팬 히스테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구체적인 기표만 다를 뿐, 어떤 영역에서는 같은 기의를 갖는 것이다. 네버랜드 속의 피터팬은 훌륭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피터팬은 편안치 못하다. 그는 이곳에서는 결국 히스테리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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