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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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2007/12/16 15:52
300(300, 2007)
2007년 12월 17일 | DVD 대여

한동안 논쟁이 되었던 <300>을 또 이제야 보았다 -_-; 확실히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읽었던 지젝의 <The True Hollywood Left(링크)>라는 글에 보다 더 동의하는 편이다.

내가 봤을 때도 스파르타 군은 절대 '미국'(으로 대표되는 경제군사개발국)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300명의 스파르타군은 탈레반에 가까이 해석할 수 있으며, 페르시아군이야 말로 현재의 경제군사개발국의 이데올로기를 압축하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중언부언 말 덧붙이는 건 무의미하고, 캐즘님의 블로그에 지젝의 이 글이 번역되어 있기에 허락없이 옮겨둔다.. 출처는 http://blog.jinbo.net/chasm/?pid=44


캐즘님의 번역문 보기


영어 원문 보기



확실히 지젝의 이 글 자체도 논쟁적일 수 있다. 그의 영화 내용에 대한 분석은 나도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바 이지만, 그가 덧붙이고 있는 이러한 말들은 확실히 동의하기엔 아직 석연찮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 방임론hedonist permissivity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 좌파가 규율과 희생정신을 (재)평가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루소에서 자코뱅에 이르는 근대의 평등주의적 급진파들이 스파르타를 동경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새로운 스파르타로 상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 규율이라는 스파르타의 정신 속에는,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제거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해방의 정수(core)가 존재한다.

스파르타인들의 가혹한 군대식 규율은 아테네인들의 “자유민주주의”와 단순히 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내적인 조건이자 기반을 이룬다.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는 오직 가혹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지젝의 이러한 진단은 물론 일정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 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현대적인 질문은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영화속에서 엿볼 수 있는 성정치적 이슈나 장애학적 이슈는?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혁명적인 "핵core"에 관한 것일 테다. 물론 그것은 내용 없는 순수한 형식이며, 따라서 지젝(을 통한 라캉)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윤리'적인 것에 보다 근접한 것일 테다. 그러나 그 "핵"을 추구함에 앞서, 그 핵을 둘러싼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감춰서는 안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짧은 글에서는 지젝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있지는 않았겠지만, 과연 그 질문들에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답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과연 현대적인 자아들의 해석틀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그 혁명적인 "핵"은 어떤 주체들에게 모종의 충격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어떤 '충격'만을 주기 위한다면, 그것은 쓸모도 별로 없을 뿐더러 위험하기 짝이 없다. 주체들이 실재적이고 외상적인 '충격'을 어떻게 흡수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홀로코스트는 물론 현대 한국에서 광주나 제주 혹은 곳곳에서 있었던 집단 학살 등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충격(특히 혁명적인)에 대해 가능한 '흡수'와 '망각' 그리고 '의미화'에 대한 가장 끔찍한 판형이다. 우리는 보다 더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최근 서구의 일부 아카데믹 스타들ㅡ랑시에르, 아감벤 등ㅡ에게서 회자되고 있는 '벌거벗은 삶'이라든가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해봐야할 테지만, 여전히 나는 기본적으로는 회의적이다. 회의적이라기 보다는, 사실 그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아직 별로 쌓이지 않았다. 인용한 글에 나온 바디우의 말을 다시 인용해 와보자. “우리는 민중적 규율이 필요하다. ···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오직 규율만 가지고 있다. 권력도, 돈도, 무기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가진 것은 규율, 즉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이 규율은 이미 조직의 한 형태이다.”  물론 타당한 진단이고, 여태까지 지배적인 정치학에서 보지 못했던 (아니, 일부러 보지 않았던) 어떤 형태들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학적 관심이, 랑시에르가 말한  "인간에서 휴머니티(humanity)로, 휴머니티에서 인도주의(Humanitarian)으로의 기이한 전이"와 어떻게 분리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날카롭게 진단했던 "인권의 종말" 역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인도주의'의 새로운 아카데믹적 판본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궁지에 몰린 아카데믹 지식인들의 탈출구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위의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기 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물론 이건 다 '혐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성을 심판대에 올릴 권능도 이유도 별로 없다. 문제는 역시 그것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에도 있지만,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읽느냐"에도 역시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이 제 아무리 진정성을 갖춘다 해도 그들의 충실한 독자들이 진정성이 없으면 꽝이다. 선교를 해야하는 곳에서 교회만 세워서는 안되는 것처럼. 게다가 난 여전히 아카데믹 지식인이나 이론가들이 '혁명'을 말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위에서 나오는 '남성 아카데미 스타'들이 놓치거나 보지 않고 있는 부분도 내게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다. 또한 내게 있어서 그들은 (아직까지는) '상징자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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