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전 지구적 규모로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단 한 명이 제멋대로 굴던 구식 폭정이든, 더 고차적이고 비인격적인 소위 "역사적 강제력(forces)"이 출현할 때 사람들이 그것에 봉사하며 노예가 된 근대적 형태의 전체주의든, 사람들이 능동적인 활동가라는 사실을 묵살한 예는 수없이 많다. 깊은 의미에서 실로 비정치적인 이러한 형태의 지배의 본질은 바로 그것이 산출되고 또 그 특유의 동학(動學) 속에서 명백해진다. 이 동학이란, 바로 어제 "위대한" 것으로 여긴 모든 사태와 모든 사람들이 오늘은 망각될 수 있고, 또ㅡ그 운동이 계기로 유지되기 위해서는ㅡ망각되는 것을 말한다. [...]
그러나 국내정치는 수상한 이해관계와 더욱 수상한 이데올로기로 짜여진 거짓과 기만의 조합물이고, 외교정책은 지루한 선전과 노골적인 권력행사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는 생각과 같은 정치에 대한 편견의 기원은 지상의 모든 유기적 생물체를 파괴할 수 있는 도구의 발명보다 훨씬 더 이전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정치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편견은 적어도 정당 중심의 민주주의만큼 대략 100년 이상 오래된 것이다. 정당 중심 민주주의는 근대에서 처음으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한 것인데, 물론 국민들 스스로는 그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 그런데 오늘날 정치에 대해 그처럼 널리 퍼진 편견에 진짜로 힘ㅡ무기력으로의 회피, 행위능력을 전적으로 제거하려는 처절한 욕구ㅡ을 준것은 그 당시에는 액튼 경이 말한 것처럼,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라고 믿는 소규모 계급의 편견이자 특권이었다. 권력에 대한 이러한 경멸은 당시는 분명하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열망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했던 사람은 바로 니체였다. [...] [강조는 namunnib]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 「정치로의 초대」,『정치의 약속』, 푸른숲, pp. 137-8
(적어도) 국가적-사회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심지어 장려되기까지 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적 행위인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정치적 토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밑으로는 제대로 중언부언 말들이 이어지니 왠만하면 스킵하세요..)
2번 후보의 지지율이 너무나도 높다고, 설령 BB뭐가 터진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이미 '경제'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고, 2번 후보가 이미 어떤 '실천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높은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어놓는 것은 지나치게 쉬운 일이다. 이런 견해는 "국민"들의 '도덕성'에 대한 경멸과 의심, 또는 제도화된 정치에 대한 환멸을 기반으로 한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투표를 아예 하지 않거나, 혹은 안 봐도 고도리 같은 예상되는 결과에 씁쓸한 표정을 보내며, 자기가 지지하는 (지지율 낮은) 사람에게 빨간 도장을 꾹 찍어 투표함에 구겨 집어 넣을 것이다. 덧붙여 자신의 정치적 고상함, 우월함, 그와 동시에 2번 후보를 지지하는 '대중'들에 대한 환멸을 마음껏 주워 삼키며.
이런 상황에 대한 범여권적 반성과 통합을 촉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쉬운 견해다. 이는 제도화된 정치에 일종의 '전쟁 모형'을 도입하는 것이다. 아군과 적군. 마치 여권과 야권이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어떤 적대적 집단인 것처럼. 마치 한 번 '정권'이 '뒤바뀌면'(대체 뭐가 뒤바뀌는데..) 온 세상 천지가 뒤바뀔것 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견해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런식으로 제도화된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을 한 번 상정해 버리면, 두 집단이 어떤 지점을 공유하고 있는지, 실제로 얼마나 똑같은 정치적 기반과 편견 위에 서 있는지를 보지 못하게 된다.
혹은 아예 다른 보다 소수의 집단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대표되는)여권으로도,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야권으로도 환원되지도 않는 군소 정당 후보들에 대한 기대는, 2007년 대선 정국에서는, 물론 타당하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은 군소 정당 후보들이 얼마나 표를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내년 총선에서 이 군소 정당들이 얼마나 많은 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첫 번째에 언급한 견해보다는 보다 '정치적으로 진지한' 태도일 것이나,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여전히 표를 많이 얻는 후보들에 대한 물신적인 거부와 그와 연결되는 지지자들에 대한 경멸을 기반으로 한다.
이 보다 좀 더 '메타적'으로 접근하는 견해는, 결국 이것은 한국의 제도적 대의제 민주주의, 정당제 민주주의의 근원적 한계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authentic' 민주주의가 아니며,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를 다시금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견해는 크게 두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대중을 단지 머리 숫자만 모인 대중(mass)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의견과 행동 양식을 가진 집단(multitude)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즘은 거의 없겠지만;ㅡ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앞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소위 '철인 왕 통치'를 기대하는 견해일 것이다.
더 추가해서 이것저것 가능하고 존재하(/할 수 있)는 견해를 들자면, 뭐 이래저래 다 필요 없고 어차피 한국 정치란 더럽고 치사 빤쓰이니 관심을 갖든 말든 알아서 우리들은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고 아예 무관심뽕 해지는 견해들, 혹은 정치란 무엇일까 아예 의식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는 견해들, 또는 2번 후보가 되면 재밌겠다 하는 견해들 등등이 있을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견해들은 공통적으로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제도화된 정치에 대한 환멸과 경멸을 기반으로 한다. 설령 진지하게 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한국의 이 정치적 상황이 '진정한authentic' 정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멸들은, 아렌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 모두가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일 것이다. 오늘날 이 편견은 이상하게 흘러, 대선을 '진정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순진한 바보이거나 지나친 열정가 혹은 정치적 출세를 바라는 속물들이라고 생각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종의 정치에 대한 '편견'들을 어떻게 해서든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이러한 편견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관계되며, 우리의 현재 상황을 정치적 측면에서 충실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들)에 단지 냉소만을 보낼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정치적 상황이 어떤 모종의 '정치의 파국'으로 가리라는ㅡ정치가 없어지고 행정만 남을 것이라는 등ㅡ의 생각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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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투표를 하기는 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전망과 예측은 꾸역꾸역 집어 삼키며. 그리고나서 그 뒤에는? 아니, 지금 당장 투표 이외의 다른 그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 대답은, 2007년의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구축할 토대를 제공한, 어떤 사건들과 시대를 다시금 떠올려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어댔듯이 민주화 20주년이 되었으니 이 '민주화'가 과연 실패한 기획인가 성공한 기획인가 따위로 검토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올해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그러나 곧 공중으로 산화해 버린듯한)은 결국 일종의 '세대들의 기억'을 다시금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아픈'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하며, 그 아픔을 발딛고 서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아직 완성되지 않고 '진행중'인 민주화를 계속 끌고 가자는 것이다.
물론 이 말들을 냉소적으로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검토들은 물론 필요하다. 다만 이것들이 세대적 '우울증'이 아닌 한에서만 그렇다. 20년 전과 그 후의 맥락들은 '세대들의 기억'을 구성한다. 물론 그 당시의 아픔의 기억들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적절한 애도mourning를 거치지 못했다. 애도되지 못한 그 아픔은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우리의 곁을 유령처럼 맴돌며, 한국 현대의 특정한 정치적 자아를 결정/구성하는 우울증적melancholic 삽화로 이어진다. 물론 이렇게 우울증적 정치적 자아들은 충분히 체제 속에 자리잡지 못한 이무기-386들일 것이다. 그에 반해 이미 체제 속에 자리잡은 이들(이나 체제의 주변부 집단에 속해 있으며 이들에게 동일시 하는 이들)은 근대 부르주아와 유사한 형태의 정치적 자아를 갖고 있다. 이렇게 구성된 정치적 자아들은 2007년 현대의 정치적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에 대한 편견'의 토대일 것이다.
(끄앙... 졸리다.. 말이 중언부언 길어지는데, 이는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이 짤막한 포스팅에서 강조하고픈 것은, 지금 우리를 사로 잡고 있는 이러한 정치에 대한 편견들, 이것들은 결국 '권력'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 권력은 그 자체로 실존하는 물신적 개념도 아니고, 사회 속의 그 누군가에게 '소유'될 수 있는 대상ㅡ그렇게 규정함으로써 맹목적인 지배/피지배 구조의 상상도 가능해지고 완벽한 정치적 전복도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ㅡ도 아니다. 이 정치에 대한 편견들의 '역사성'을 분명히 지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이 정치에 대한 편견 속에서 "망각될 수 있고" "망각되는 것"들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 이다.. (그리고 그 키key는 슬라보예 지젝이나 샹탈 무페 등의 라캉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정치와 민주주의가 아니라, 아렌트가 바라보는 정치와 민주주의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과 기대감..)
아렌트는 '편견'을 '판단'과 구별하면서, 편견의 위험은 "그것이 항상 과거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편견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담긴 과거의 판단들을 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 속에 놓인 진리가 무엇이건 그것을 드러내야만 한다." 만약 그 과거의 판단들에 대한 분석이 없다면, 끝임없는 지루하고 무익한 노력들이 편견들과의 싸움에 소모되고 말 것이다. 마치 오늘날 대선을 바라보는 현대 한국인들의 '정치에 대한 편견'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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