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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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7/11/01 12:48

Est-ce que vous croyez encore au progrès? 당신은 아직도 진보를 믿으세요?

<프랑스어 입문 1> 수업에 쓰이는 텍스트에서 이 예문을 보고 잠시 침울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악의가 느껴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물론 Oui! Non!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렇게 단순한 말로 대답을 시작할 수 있을까?

당연히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진보주의자 입니까? 라고 (맥락 없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물어 온다면 우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진보’라는 말에 들어있는 수없이 많은 의미들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진보’라는 말이 물신화 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게다가 저 질문들은 얼마나 악의에 가득 차 있는 말이던가? “(요즘 같은 세상에 설마) 아직도 진보를 믿으세요? (진짜 촌스럽다.. 뭘 모르는 사람이네)”

하지만 그게 ‘믿음’의 차원으로 가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즉 존재, 정체성, 아이덴티티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믿음’으로서의 진보가 되면 다른 맥락에 놓인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진보’를 믿는 편이다.

사실 ‘진보’라는 말 자체를 회의하는 것은 무지 쉽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라는 딱지, ‘좌파’라는 딱지를 부인하는 것도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다. 그저 ‘아니다’, 라고만 말하면 되니까. 그 유명한 말인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신드롬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냥 ‘나’는 그 ‘이름’이 아니라고(Am I that name?), 나는 당신이 칭하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고, 나를 그렇게 ‘꽉 막힌 본질주의자’ 따위로 보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호소하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 말들을 들어봤자 허망하기 짝이 없는 건, 다만 이러한 언사들은 아무런 저항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명’은 각 주체들을 특정 이데올로기의 주체로 생산한다. 여기서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원래 그 주체는 본질적인 어떤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지거나covered, 체현되거나embodied, 등등을 할 뿐이다. 혹은 이데올로기의 행위자―즉 대타자의 욕망을 수행하는―로 존재할 따름이다. 주체성은 그 자체로 주체의 ‘외부’와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다. 여기서 이 ‘외부’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의 한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무서운 것은, 단순히 ‘호명’을 거부한다고 하여 그 이데올로기가 붕괴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주체들의 거부까지도 자신의 계산에 넣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진정으로 완결된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항상 그 완결성에 거부하고 저항하는 objet a를 포함한다. 푸코가 권력은 항상 저항을 내포한다고 말했을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론은 푸코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위 주체들의 저항이 없다면, 권력은 존재 기반을 상실한다. 그렇기에 권력과 이데올로기는 항상 역설적인데, 그 개념들은 그 자체를 ‘완전한’ 체계인 것처럼 포장하고자 하지만 그 완전성이 ‘실제로’ 완결되는 순간 권력과 이데올로기는 붕괴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각 주체들도 그 ‘완결성’이―이데올로그들의 특성이 이것인데―실제로는 허구라는 점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인식하고 있지만, 그 ‘완결성’의 결핍을 폭로하고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히 저항한다.

앎으로서의 좌파, 행동으로서의 좌파 중에 행동으로서의 좌파가 보다 더 도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앎으로서의 좌파는 지나치게 쉽기 때문이다. 앎으로서의 좌파의 화법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나는 ~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I know ~, but ~”. 예컨대 나는 “나는 동성애 억압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들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나는 육류 섭취에 반대한다. 하지만 동물성 단백질은 꼭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백화점 쇼핑이 즐겁다.”, “나는 이성애 결혼 제도에 반대한다. 하지만 결혼 제도가 주는 특권을 포기하기는 싫다.” 등등. 몸 뚱아리는 얼마나 솔직한지!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실상 ‘앎’의 영역이 아니라 ‘행동’의 영역임을 지적한다. 이 앎으로서의 좌파는 좌파 지식/이론의 전복적인 정치적 핵심을 제거함으로서만 그 이론을 향유한다.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현금 없이 크레딧 카드로 결재하는 사람들처럼, 트랜스 지방 없는 튀김과 과자를 원하는 사람들처럼.

오늘날, 많은 이들은 거대 서사가 끝났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정치가 ‘죽은 것’은 아니다. 거대 서사가 물러난 바로 그 자리에서 개별 주체들의 ‘욕망과 위반의 정치학’이 새롭게 움트고 성장해 왔다. 이와 맞물려 거대 서사적 본질주의에 대한 신경증적 거부가 유행이 되었다. 마치 이 본질주의라는 녀석이 우리를 그동안 완전히 억압해 왔던 것처럼(신경증의 기저에는 이 억압이 깔려 있따), 우리는 늘 같은 것과 일관된 것을 거부하고 늘 ‘차이’와 ‘균열’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 욕망, 위반, 차이가 대체 어떤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실상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위반’, ‘욕망’,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거의 강박이 되었다. 이 세 가지 카테고리로 설명할 수 없는 담론은 사실 상 환영받지 못한다. 전통적인 맑시즘, 페미니즘, 그 어느 것 하나도 인정받지 못한다. 사실 그것들을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면서도, 어디서 들어본 ‘풍월’로 그것들에 냉소적인 거부를 보인다. 우리는 항상 그것들의 변형, 변종만을 요구할 뿐이다. 반대로 우리는 그러한 새로운 담론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생겨났는지, 어떠한 문제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담론들인지에 대해서는 질끈 눈감아 버리게 되었다. 실제로 그 담론들은, 그 담론들이 거부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기존의 ‘구식’ 담론들의 독해에서 나옴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 지배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초자아’라는 명명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게 그 담론들이 분석을 중단하는 지점에서 초자아가 음험하게 고개를 쳐 든다. 우리를 규제하는 것들에 대한 ‘위반’을 명령하는 ‘도착적인 초자아’. 갈수록 아브젝트(abject; 비체) 예술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초자아의 명령과 맞물려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처음에 그것들은 충분히 전복적이었다. 완결성을 위장하는 주체들이 폭력적으로 거부했던 것들―모체, 똥 등의 분비물, 피, 찢겨진 살점 등―을 상기시킴으로써 주체들의 불완전성과 결핍을 폭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위반이 흘러흘러 도착적인 초자아의 명령이 되자, 우리는 그것들에 고통스럽게 집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 도착적인 초자아의 성격은 어느 정도 자명할 것이다. 그것들은 확실히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의 핵심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착적이고 외설적인 초자아의 명령에 저항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은 ‘정통파’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다(이 포스팅의 제목도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 2장의 제목을 따온 것이다). “나는 (정통) 유물론자다”, “나는 (정통) 맑스주의자다.”, “나는 (정통) 페미니스트다.”, “나는 (정통) 평화주의자다.” 등등. 아마도 이러한 말들은 오늘날 위반과 욕망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외상적인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그 충격이 의도하는 것은, 그들이 무의식적/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대상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또 하나의 ‘본질주의’가 되었다는 그 흔한 말처럼, 상극에 있는 대상은 결국 이어진다는 그 흔한 말처럼, ‘위반’과 ‘차이’를 물신화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이름의 ‘본질주의자’다.

흔히 믿고 있듯이 ‘진정한’ 정통파ㅡ짝퉁이나 도착적인 정통파 말고ㅡ는 구식이거나 완고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건 덧씌워진 선입견에 불과하다. 정통파에도 당연히 위반과 욕망은 존재하며, 다만 그것이 중심에 드러난다거나 그것들을 자랑하고 떠벌리지 않을 따름이다. ‘사랑’은 흔히 믿듯 개인 대 개인의 이자 관계라기보다는 ‘혁명’ 속에서의 사랑, 즉 삼자 관계로 돌입했을 때 보다 사랑의 임무를 완수하지 않는가? 또한 ‘진정한’ 정통파야 말로 (흔히 믿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가장 차이에 너그러운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바디우가 ‘차이’는 실상 언제나 있었다고 이야기 할 때, 그리고 지극히 진부하고 평범한 것임을 이야기 할 때, 내가 그의 이야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늘 신중하게 검토해야 하는 그의 말이지만, 귀가 솔깃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보편성, 그가 말하는 철학, 그리고 그것들을 향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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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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