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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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7/04/13 21:45

성, 연애, 사랑의 경험 중심주의

성, 연애, 사랑은 우리들에게 지상명령처럼 자리 잡았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서 좋은 연애를 하고, 또 좋은 결혼까지 나아가라는 명령은, 별로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된 수많은 대학생들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통로처럼 보인다. 사실 누구나 연애를 하고 있으며, 누구나 사랑을 한다. 이건 사회사적으로 무엇이 중요한 가치냐, 즉 어떤 연애와 사랑을 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냐와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다. 가문 때문에 차마 맺어지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오랜 신파든, 시쳇말로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의 목에 도덕의 칼날이 떨어지던 시절의 이야기든, “즐겨라!”라는 명제 이외에 남은게 없는 엿 같은 리버럴 연애 담론이 판을 치는 오늘날의 세상이든, 언제나 성, 연애,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늘날 힘들고 앞날이 보이지 않고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회라는 벽에 부딪힌 우리들의 거의 유일한 탈출구는, ‘사적 관계’인 연애가 되었다. 때문에 대학교 3, 4학년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사람들은 별종으로 취급되거나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또 한편으로는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졸업한 후에는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이 백 만번 쯤은 쏟아질 것이다. 요즘엔 중 고등학교 때에도 연애를 하지 않으면 별종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들에게도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파트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신경증적이고 강박증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 연애, 사랑의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경험’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쿨하고 리버럴한 연애 담론이 판을 칠수록 더욱 그 경향은 강화된다. 오늘날 순진하고 성적 매력이 없음은, 또한 연애 경험이 없음은 곧 ‘능력없음’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는 성, 연애, 사랑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에 대해 더 ‘잘 안다’라고 규정된다. 그것을 많이 ‘해본’ 사람은 그것들을 잘 끌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간주되며, 또한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반면 성, 연애, 사랑의 경험에 막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사람들은, 혹은 그것들에 대해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연애 교과서>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따위의 ‘관계’에 대한 서적이 출판되고 또 잘 팔리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다 더 잘 아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은, 관계에 있어서 항상 불안한 나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경험’이라는 말을 좀 더 정교화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실상 위에서 ‘경험 중심주의’라 명명했던 것들은, ‘체험 중심주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은 성, 연애, 사랑에 대해서 수도 없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소설, 등등 수많은 문화 컨텐츠는 물론이고, 때로는 철학까지도 성, 연애, 사랑에 대해서 수도 없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연애 각본, 성 관계를 맺는 방법,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에 의해서 이미 학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성, 연애, 사랑을 다룸에 있어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체험’이지 않던가.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은유 속에서 말이다.

나는 여기서 ‘경험’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경험’은 지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경험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누적되고 새겨지는, 절대로 없어질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경험이 부정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이나 상실감은 나 역시도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렇게 ‘경험’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다만 많이 겪어본 사람이면 정말로 ‘올바르게’ 경험을 해본 것인가? 그리고 그 경험의 의미는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것이 되는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더럽고 짜증나는 온갖 것들이 널려있는데,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경험(물론 체험이라 표현하는게 맞다) 최고”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이에 관해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우리는 수많은 개 마초들의 언사에서 성, 연애, 사랑에 대한 경험 중심주의의 ‘몽매’를 볼 수 있다. 그들의 멍청한 대화들에 녹아나는 것들은, 그래서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법칙이 되어버린 것들은 그들의 ‘체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 여자의 No는 Yes다, 따위의 말들은 결국 그들 ‘나름대로’의 경험에서 수없이 증명되고 또 강화되는 것들이다. 그들에게 다른 체험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삭제되는 것은 그들이 그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필드와, 그러한 경험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들의 경험을 정당화 하는 어떤 흐름들과, 그러한 경험들이 유통되는 방식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은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경험을 둘러싸고 있지만, 경험 중심주의에서 삭제되고 있는 수많은 것들임을 알고 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어떤 체험의 ‘누적’으로 좋다/나쁘다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많이 해본 사람이 많이 알 것이라는 가설은, 어떤 면에서는 맞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이다. 많이 관계를 맺는 것도 성, 연애, 사랑 관계를 맺어나가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연애 관계 속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새롭게 쉴 새 없이 강박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관계에 있어서는 불구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만 열심히 사귀지 않으면 수치심을 느끼거나 도덕적 자책감을 느끼는 보수적이거나 혹은 순진한 성 담론과는 별로 상관없다. 그렇다고 프리 섹스주의도 아니고 플라토닉 러브도 아니고, 아가페 러브도 아니다. 다만 체험과 경험을 절대시 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일 뿐이다.

다시 말해 경험은 결코 개인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온갖 사회적 가치들에 의해 적당히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작정 긍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파트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고, 그 관계를 자기의 삶의 중심 속으로 끌어들이며, 그것들을 쉴 새 없이 평가하는 것이야 말로 성, 연애, 사랑을 대하는 우리들의 윤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항상 지금의 순간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그 사람과의 ‘고유한’ 단 하나의 경험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새로운 것이어야만 한다. 겹겹이 쌓이는 경험의 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에는 성, 연애, 사랑 관계란 너무나 복잡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다. 경험 중심주의의 몽매에서 벗어나자. 오직 새로운 것에 부딪히는 일만이, 비록 그 경험 속에서 길을 잃고 좌절하고 눈물 흘릴지라도, 그것만이 우리 앞에 남아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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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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