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독법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그가 생존하던 당시 한창 부흥해 올라오고 있던 반유대주의-나치즘에 맞서서, 자신들의 '위대한' 시조가 알고 보면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프로이트 전집, <종교의 기원>) 나치-반유대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믿음', 즉 그들(유대인)이 선택받은 '순수'하고 '고결'한 민족이라는 믿음에 더해 그들에 대한 격렬한 인종주의적 증오와 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프로이트 나름의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서 아마도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 자신들에 대해서 갖고 있었을 인종주의적 믿음, 즉 유대인들은 '알 수 없는' 그 무엇(objet a)를 갖고 있다는 신비로운 믿음을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agalma(라캉에게는 objet a 였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Agalma, 대상에게 신비롭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믿음.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자들 스스로는 유대인들의 '남다른' 쾌락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어버릴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신비화 한다. 그것이 인종주의적 증오와 폭력에 이용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들은 '우리'가 모르는 쾌락을 누리고 있다! 따라서 저들은 '우리'가 누릴 쾌락을 빼앗아 간 것이 틀림없다! 제거하라! 처단하라!
사실 이러한 구조는 "반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을 관찰했을 때, 즉 반유대주의적 관점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거쳤을 때만이 '반유대주의'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유대주의적 신념을 공유하던 유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그러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유된' 믿음에 의해서 인종주의적 편견은 유지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에 부여된 인종주의적 agalma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제거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종종 읽을 수 있는 '쿨'한 자유주의적 마이너리티 담론에 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종주의적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히려 그것의 확장에 봉사하는, 일종의 변종 기생 담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환원될 수 없는 '적대antagonism'를 드러내고 이론화 하는 것, 그것은 물론 중요한 작업이지만 그것이 '욕망'의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을 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자기 자신들에게 스스로 agalma를 만드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다. 물론 agalma를 제거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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