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에서 헤겔로 또는 초자아를 넘어 사랑으로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① 지젝이 해석하는 라깡
민승기(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
시차(parallax)라는 간극
동일성과 차이의 ‘낯선’ 동거. 동일성으로서의 차이, 차이로서의 동일성. 동일성과 차이가 겹치는 곳. 동일성도 차이도 아닌 동일성-차이라는 괴물이 숨쉬는 공간에서 지젝은 철학사를 회집한다. 대립구조가 배제하고자했던 ‘낯선’ 괴물은 이미 구조 내부에 있는 ‘친밀한’ 이웃이었다. 낯설고도 친밀한 괴물-이웃.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이라고 답하는 오이디푸스는 이미 자신이 스핑크스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넷과 셋과 둘이 하나 속에 있는 혼합괴물. 차이는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다. 인간과 괴물을 구별하는 외재적 차이가 아닌 인간내부의 균열. 오이디푸스의 시선 이전에 이미 오이디푸스 속에서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스핑크스의 응시(gaze)가 있다. 봄과 보여짐이 ‘함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함께 있기 때문에 시선과 응시의 간극은 결코 메꾸어질 수 없다. 대립이나 모순으로 해소될 수 없는 내부적 분열. 바로 이것이 시차라는 간극이다.
차이의 철학은 시차라는 간극을 통해 동일성의 철학 한 가운데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다. 칸트의 부정판단과 무한판단의 간극은 정신분석이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죽었어’(I am dead)의 서술어를 부정하면 ‘나는 죽지 않았어’(I am not dead)라는 부정판단이 되지만 서술될 수 없음을 긍정하게 되면 무한판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죽은것도 산 것도 아니야’(I am undead) ‘나는 죽었어’라고 말하는 살아있는 나. 긍정과 부정이 시차적 간극으로 존재하는(동시에 발생하는) 공간에서 칸트는 뱀파이어가 된다. 그는 유령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판단은 결국 대립구조가 사유할 수 없는 ‘사이공간’, 대립항들의 내부적 균열을 초래하는 불가능한 공간을 불러낸다. 라깡은 이 재현불가능한 공간을 실재(Real)라 부른다.
칸트의 이율배반은 라깡의 실재를 이미 선취함으로써 정신분석의 공간을 개시한다. 대칭이나 모순과는 달리 이율배반은 모두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인과론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와 ‘자유는 인과론을 넘어선다’의 이율배반은 둘 모두를 긍정함으로써 해소된다. 자유를 예외적인 공간으로 배제할 때 인과론적인 우주는 전체를 형성할 수 있다. 예외성을 통한 전체 또는 보편성의 확립. 라깡의 남성적 우주. 반면 칸트는 ‘세계는 유한하다’와 ‘세계는 무한하다’ 모두를 부정함으로써 유한/무한이라는 대립구조로 사유될 수 없는 기원적 사이공간을 불러낸다. ‘세계는 (전체로)존재할 수 있는가?’ 전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예외적 공간이 거세될 때 또는 예외적 초월성이 전체 속으로 들어와 내부적 균열을 일으킬때 세계는 비전체(Not-All)가 된다. 라깡의 여성적 우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예외를 통해 보편을 획득하는 남성의 우주와는 달리 여성의 우주는 보편/특수의 ‘사이공간’인 특이성들(singularities)의 집합이다. 실체화할 수 없는 빈공간인 코기토(cogito) 주체를 발견한 후 서둘러 그것을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로 바꾸는 데카르트처럼 칸트 역시 비전체를 지시하는 여성적 우주 앞에서 머뭇거린다.
지젝이 보기에 헤겔은 칸트를 전복하거나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반복(또는 완성)할 뿐이다. 그러나 헤겔의 칸트에 대한 충실성은 칸트의 결핍, 즉 칸트체계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으로 지시되는(이점에서 지젝은 데리다 역시 칸트의 한계내에 있다고 말한다) ‘대립물의 일치’를 끌어낸다.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와 ‘이미 발생하고 있다’의 차이가 지젝에게 칸트와 헤겔, 데리다와 라깡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시차적 간극이 갖는 타자성을 절대화시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으로 물신화할 때 칸트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미 와있는 메시아에게 언제 올 것인가라고 묻는 질문처럼 불가능성은 절대적 타자성으로 승화된다. 타자의 절대성이 타자의 결핍을 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칸트의 예지계 역시 무한판단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상계와 예지계의 ‘사이 공간’ 다시말해 초월적 대상을 현상계의 내부적 간극으로 읽어낼 때 칸트는 헤겔과 ‘함께’ 있다. 불가능한 초월성에서 초월성의 불가능성으로, 타자의 절대성에서 타자의 결핍으로, 칸트에서 헤겔로 이동할 때 정신분석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초자아에서 사랑으로
법은 비전체이다. 그것은 이미 기원적 폭력이라는 실재를 억압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상징적 방어물이다. 데리다가 미국독립선언문에 대한 분석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법의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그래서 법 이전에 존재해야하는 ‘우리, 미국의 인민’은 단지 법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결과물일 뿐이다. 죄의식의 기원을 설명하려던 프로이트가 아들들이 이미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기원적 아버지 살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원) 팬터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살해는 규정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법의 기원, 실재로서의 폭력을 상징적 행위로 환원시키는 방어일 뿐이다.
법의 내재적 분열을 초자아 논의에 한정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초자아는 상징적 금기를 넘어서는 향유, 외재적인 법을 보충하는 비합리적이고 가혹한 명령이다. 그것은 법의 전체성을 망가뜨리는 얼룩이지만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법이기도 하다. 라깡이 칸트와 사드를 ‘함께’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식인풍습이 없어요. 어제 남아있는 마지막 놈을 처치했거든요’라고 말하는 식인종처럼 칸트의 합리적인 법을 작동시키는, 그것을 강제적 명령으로 바꾸는 외설적 행위주체는 사드적인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그러나 위반이 초래하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옭아매는 법이다. 죄를 짓지 않을수록 죄의식이 증가하듯이 다양성의 담론을 통해 초자아는 오히려 자신의 단일성을 강화한다. 법의 결핍을 보여주어야 할 향유가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형태로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초자아적인 자본이 다양한 지식의 형태로 세계를 전체화하고 있는 지금 다양성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불가능한 윤리적 행위가 요구된다. 다양한 위반은 여전히 법과 위반의 초자아적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숨기고 있는 법의 불가능성, 불가능한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지젝은 바틀비적인 제스처를 위한다. 법과 위반의 악순환으로부터의 물러남.
아감벤은 명령의 형태로 설명될 수 없는 은총, 외부도 내부도 아닌 사이 공간에서 생겨나는 주권, 법의 중지와 법제정의 동시성을 주장함으로써 초자아적인 향유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사이공간, 유대인도 비유대인도 아닌(non-non-Jew)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다시 사랑을 초자아로 설명함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다. 냉소적 거리를 통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처럼 위반적 거리에 기초한 초자아를 중지시키기위해 필요한 것은 법과의 문자적 동일시이다. 윤리적 행위는 위반의 예외적 장소를 제거함으로써 초자아의 매개없이 사랑의 법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말처럼 사랑은 예외적 지식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결핍, 지식을 비전체로 만드는 시차적 간극이다. 전체를 알지 못해 사랑하지만 전체의 지식 역시 결핍되어 있다.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만나는 곳에서 사랑이 발생한다. 유대교가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숨기고자 하는 신의 결핍을 드러낼 때 기독교는 ‘사랑’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모든 상징적 의미나 광채가 사라진 육체, 배설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예수와의 불가능한 동일시, 결핍된 신과의 만남이 사랑인 것이다.
민승기 / 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 | 출처 / 학술저널 담비(www.dambe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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