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다양성과 단조로운 유사성 사이에서.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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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 2007/04/06 16:38
4학년이란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단 한번도 많은 이들이 경험했을 ‘방황’을 한 적이 없다. 휴학도 한 적이 없으며, 대학에 대한 회의감 끝에 수업에 결석하고, 친구들에게 며칠이고 아무 연락 없이 잠적을 한 적도 없다. 나 역시도 수업이 싫고 전공이 싫고 수많은 사람이 꼴 보기도 싫었지만, 나름대로 ‘적응’을 하면서 살아왔던 터였다.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수업이 아니라, 이 대학 자체가 아니라, 혹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다만 내가 몸담고 있는 그런 특수한 개별 공간과 그 안에서의 관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나의 ‘정치’. 이렇게 나에게는 대학이란 공간은 적절히 의미화 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4년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반이자 ‘지형’인 이 공간에 대해서, 다시 말해 우리들에게 대학이란 공간이 어떻게 의미화 되어 있는지 한번도 진지하게 사고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 니힐리즘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사고 틀에 갇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다른 것들에 탐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대학이라는 이 공간에서 나름대로의 경험 끝에 좌절하고 슬퍼하고 또 환희하고 만족하고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지 못했다/않았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들은 이 공간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아마도 쉽게 할 수 있는 대답들을 여러 가지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을 듣는다, 공부를 한다, 취직 준비를 한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등등의 것들. 우리들 누구나 저런 것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들은 결코 우리의 일상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대학-공간에 가면 무엇을 하게 될 거라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극히 ‘막연’하게 알고 있다. 또한 나름대로 “대학생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각자의 마음속에 내심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들과 막연한 것들에 대해서 적절히 언어화하지 않고/못하고 4년을 살아내고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렇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실재하는 이 대학-공간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한다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묘하게 모순적이고 아픈 현실에 부딪힌다. 그리고 우리 각각이 가진 대학-공간에 대한 욕망과 실제로 충족되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음을 새삼스럽지만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대학-공간은 실로 ‘기의 없는 기표’다. 그러나 선뜻 기의가 ‘없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측면이 있다. 그런 대학-공간을 수많은 이들이 욕망하고 또 거쳐 가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우리들 각각이 의미화 하는 방식이 나름대로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나름의 기의를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라는, 다시 말해 대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경우에는, 그리고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수준에서 검토를 하기 시작하면, 대학-공간이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 기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다시 말해 내 생각에 ‘대학’은 실로 ‘민족’이나 ‘국가’나 ‘가족’과 같이,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고 규율하는 어떤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 공간은 우리들의 삶의 어떤 ‘일관성’만을 보증해주는 기표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대학-공간은 4년이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할당해주고, 제도를 통해서 그것을 보증해준다. 따라서 누구나 대학-공간에 들어오면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보장된다. 이 공간에서 방황하는 것도, 열심히 하는 것도 모두 용납된다. 적절히 열려있는 것들을 둘러싼 어떤 ‘선’을 위반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대학생’이므로. 이렇게 실로 어떤 공동체는 이렇게 일관성을 보증해주는 제도를 통해서 유지가 된다. 위에서 말한 ‘민족’, ‘국가’, ‘가족’등의 어휘들이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고 있듯, 대학-공간도 우리들의 삶에 일관성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 유사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공간’들의 기의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실로 수수께끼다. 누구나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삶의 준거 틀로 삼고 지내기에, 누구나 ‘그것을 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실제로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그것들은 어떤 ‘진실된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이라는 이름과, 국가라는 이름과, 가족이라는 이름과, 대학이라는 이름은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허구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어휘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들은 말한다. 언제나 "~해야 한다."의 어미로 끝나는 "민족이란~", "대학이란~", "국민이란~". (이러한 진정성의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일단 의심해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그것들을 한편으로 편리하게 마구 ‘사용’한다. 국민이라는 정체성, 한 가족의 딸/아들/자매형제 등의 정체성, 그리고 대학생이라는 정체성.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또 한편으로 삶의 규율이 되며, 또 한편으로는 모든 생활의 토대가 된다. 또한 우리는 그것에 어떤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들은 그 윤리적 명령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미 알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도 알도록 요구한다. 그것들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로 서로가 서로를 규약하고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누구도 명령하지도 않았는데도. 너와 나의 ‘실천’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기의 없는 기표’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비극이야 말로, 그리고 이렇게 역설적으로 알지 못함이야 말로, 이 거대하면서도 허구적인 공동체를 작동하게 하는 어떤 핵심 메커니즘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대학-공간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충족될 수 없다. 이미 개념상 대학-공간은 어떠한 욕망도 충족될 수 없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알고 있는 알지 못함을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이것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작동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공간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 공동체 구성원리에서 지금 당장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써는 그 굴레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알지 못함(무지)이 그 자체로 허무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무지라는 것과, ‘기의 없는 기표’를 욕망하는 행위의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극복은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에 이 무지는 실제로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하여 좌절하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안전하게’ 우리들의 삶을 규정짓는 이 ‘기의 없는 기표’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없는 기의에서 나오는 윤리적 명령과, 우리들 스스로 그것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즉 그런 텅빈 기표들은 우리들의 실천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조직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인 즉슨,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 기표는 더 이상 우리들에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 대학-공간 내부에서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접근하고 분석하고 때로는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런 허무함이야말로 어떤 정치적 기획을 조직하고 실천할 것인가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도록 해주는 토대일 것이다.


덧_ 이 글에서는 고의적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다시 읽어보니 약간 불쾌감도 오지만, '나는'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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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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