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0년 봄호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제목부터 김연수 작가스러운 느낌을 주는 산문이었다. 「오직 매일 쓰고, 다시 쓸 때에만 문학은 애도할 수 있다」라니. 어디에다 갖다 붙여놔도 김연수 작가가 썼겠거니 싶은 제목이다. (ㅎㅎ) 오랜만에 읽는, 참으로 올바르고 똑하니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에세이였다.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어떤 문제의식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다.

김연수 작가를 중견 소설가라고만 부르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다녔다고 했던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대로, 그가 세태 관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서적 독서에 열심인 작가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그를 단지 훌륭한 스토리텔러라고 설명하면 어딘가 아쉬움과 잉여가 남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메시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 메시지가 있다는 말은, 그가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발신되었다고 모든 독자들이 수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시지가 있고 메시지를 인식/수신한 독자들은 그것을 해석할 뿐이다. 이 메시지의 수신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평론가처럼 김연수 작가를 386세대 끝물 소설가라고 비난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애도와 타자, 타자의 이해불가능성(폭력적으로 타자를 전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1인칭의 고통(삶과 고통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독한 1인칭의 고통을 기반으로(그리고 그 고유한 고통을 제거하지 않은 채) 우리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소설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윤리학자'라고만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는 윤리학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또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얼마간 두터운 고정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윤리학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 애매성이 김연수 작가에 대한 내 좁은 이해를 조금은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약간 돌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마슈레는 철학이 문학을 전유하는 것도, 또한 문학이 철학을 전유하는 것도 반대한다. 철학이 문학을 전유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철학의 실현으로서 문학을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철학의 규제와 사법권 아래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제로 몇몇 유명한 철학가들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대중철학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물론 자신이 직접 문학을 쓰지 않더라도 철학은 문학을 전유할 수 있다. 상당한 수의 문학 비평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널린 문학 텍스트들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풍경을 선택적으로 읽어내거나, 우연한 문학적 풍경을 자신의 철학이 마침내 실현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규범적인 처방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는 달리 문학이 철학을 전유한다는 건, 이를테면 문학을 신비롭고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위의 관점이 문학의 창작이나 해석을 통해 교육하고 설득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 관점은 그런 다소 계몽주의적인 전제를 아예 포기하고 얼마간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본다. 뛰어난 문학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그 무엇이며, 철학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이미 성취하고 있는, 그래서 철학자가 오히려 배우고 겸허해져야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된다. 철학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와 문학 작품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단지 읽어낼 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 작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김연수 작가는 문학이 윤리를 삼키는 것도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싶어진다. 그래서 앞에서 어색한 단어를 조합시켰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윤리학자라고. 문학이 윤리를 삼키게 되면 윤리는 단지 당대의 문학이 발산하는 광휘 아래에만 가능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윤리는 문학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윤리는 문학으로'도'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반대로 윤리가 문학을 삼키게 되면, 이미 윤리와 진정성이 지배하던 세계를 한 차례 거쳐온 우리는 단지 신물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윤리가 문학을 삼키는 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역사적 시기에나 가능한 조합이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문학과 윤리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가는 중이다. 그건 문학적인 윤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윤리적인 문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계를 읽어낼 언어가 없기에, 단지 극단적인 언어로만 이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정치가 죽었네 문학이 죽었네 2012년엔 멸망이네 하는 종언의 서사부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접어 들었고 이 세계는 완전히 승리했다는 팡파레의 서사까지). 그 극단의 언어가 아니면 깊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종언의 서사든 팡파레의 서사든, 사실은 이전의 vocabulary로는 세계를 읽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이다. 김연수 작가는 그 세계에 적합한 어떤 조합으로 소설을 풀어낼 수 있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인 것 같다. 작품의 세부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동시대에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인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적인 윤리? 윤리적인 문학?  (0) 2010/03/10
김현, <행복한 책읽기>를 띄엄띄엄 읽다가,  (4) 2010/02/23
두 극단 사이 어디엔가  (0) 2010/01/14
담배를 처음 피운 날  (0) 2009/07/05
얼마 안 갈거야  (0) 2009/06/28
Posted by 비앙

"사물에서 온기가 빠져나간다.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낸다. 우리는 공공연한 저항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저 은밀한 저항을 극복하는 엄청난 일을 행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이 말은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것과 맞물려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우라는ㅡ조악하게 구분하자면ㅡ 주관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 있는가? 만약 아우라가 사회역사적인 조건위에서 가능하다면, '아우라의 상실'은 특정한 물적 기반이나 생산 기반, 혹은 여러 제도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조건 위에서 아우라의 상실은 불가항력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 선택지가 남는다. 아우라가 살아 있던 과거ㅡ아우라의 상실 이전ㅡ를 동경하거나, 혹은 아예 아우라라는 경험 자체를 포기하거나. 이런 세계에서 아우라의 상실을 거부하는 행위는, 어디선가 니체가 구분한 3개의 역사관 중에 '기념비적 역사관'(영화로운 과거가 현재에도 재생될 수 있다는, 혹은 재생되어야 한다는 회고적/복고적인 관점)이나 '골동품적 역사관'(과거는 단지 과거의 냄새를 풍기는 문화재와 다름 없는 그 무엇이다)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영성주의 운동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탁월한 수집가 혹은 미술관/박물관의 열정적인 관람객이 되거나.

그렇다면 우리는 아우라의 상실을 기어코 인정해야 할까? 무한한 복제가능성, 무한한 생산과 소비의 연쇄 속에서,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내"는 과정을 인내해야 할까? 상실된 아우라를 애도하고 한줌짜리 체험을 하기 위해 한가람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지에서 개최하는 12,000원짜리 전시회에 가야할까?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우라는 사회역사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혹은 주관적인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 앞서 언급한대로 사회역사적인 조건이 아우라의 상실을 결과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겐 얼마간 주관적인 조건으로 돌아와 볼 수 있다. 너무 많이 읽혀 말하기도 민망한 시지만 김춘수의 시 <꽃>은 이를 잘 예시하지 않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이런 명명(naming)작업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퇴근길에(아 5개월만 더 참으면 돼) 소가 살고 있는 외양간을 지나야 한다. 얼마 전엔 귀여운 송아지까지 낳았다. 지금까지 소 가족은 단지 껌뻑이는 그 큰 눈들이 예뻤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소 두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를 본다면 어떨까? 수컷은 얼럭소고 암컷은 누렁소다. 얼럭소는 새앙뿔이다. 새끼는 아직 엇송아지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언어가 점점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간주되는 상황에서 다채로운 명사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오죽하면 (이를테면) 300개 표현만 알면 70% 정도의 일상 회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책까지 나올 정도일까. 한국어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많은 명사가 있다. 정말 찾아보기 전엔 몰랐을 뿐이다. 명사를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는 건 아우라를 경험하고 사물에 온기를 보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아닐까 싶어진다. 사물의 빛은 사물을 지칭하는 적확한 언어를 찾을 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사회역사적인 아우라의 상실과는 관련없이 주관적으로 그러나 상호주관적으로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 흐이... 소설가들이 좀 더 분발해줬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한글 단어 모음 스크랩을 위한 뻘글이었고 그렇다면 이쯤에서 역시 ctrl + v

소를 가리키는 말


비를 가리키는 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우라(Aura)와 명사(名詞)  (0) 2010/03/09
귀책  (0) 2010/03/05
글쓰기, 호흡  (0) 2010/01/28
냉소주의, 윤리, 버틀러  (0) 2010/01/10
그게 뭐 심각한 일인가요?  (0) 2010/01/05
Posted by 비앙